‘부자도시’ 美뉴욕, 90년 만의 노숙자 최다… “값싼 집 부족 탓”
3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도심 한복판 보도에서 노숙자가 담요를 덮은 채 앉아 있다(위쪽 사진). 같은 날 뉴욕 지하철 역사 구석에서 끼니를 때우는 노숙자. 최근 미국 북동부를 강타한 한파에 뉴욕시는 노숙자 보호를 위한 ‘코드 블루’를 발령해 쉼터 또는 지하철 역사 등에서 누구나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했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3일(현지 시간) 오전 미국 뉴욕 맨해튼. 북극발(發) 한파가 몰아쳤지만 대로변에 있던 노숙자는 가벼운 천으로 몸을 둘둘 만 채 앉아 있었다. 그는 가상의 타인과 대화하듯 쉬지 않고 말을 하다 찬 바람이 불자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같은 시간 57번가 인근 지하철역에서 다른 노숙자가 벽에 기대 대성통곡했다. 사람들은 익숙한 듯 그를 지나쳐 갔다. 그랜드센트럴역에서도 추위를 피해 한구석에서 힘겹게 음식을 먹는 노숙자가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시민 린다 씨(34)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노숙자가 눈에 띄게 늘었다. 도와주고 싶다가도 최근 사건 사고가 많아 겁도 난다”고 말했다.
이튿날 뉴햄프셔주 체감온도가 영하 78도까지 떨어지고 뉴욕에서 오후 4시 이후 기온이 0도 이하로 떨어지자 노숙자 보호를 위한 ‘코드 블루’가 발령됐다. 코드 블루가 발령되면 뉴욕시 노숙자 쉼터 등은 조건 없이 노숙자를 받아들여야 한다.》
노숙자 급증, 대공황 이후 최악
뉴욕은 1930년대 이후 90년 만에 최악의 노숙자 위기를 맞고 있다. 매일 밤 노숙자 쉼터를 찾는 사람은 지난해 11월 6만1000명을 넘었고 이 중 2만1000여 명이 어린이였다. 노숙자 구호단체 ‘노숙자를 위한 연대’에 따르면 쉼터 이용자 수는 최근 10년 동안 37% 늘었고, 부양할 가족이 없는 성인 노숙자는 117%나 늘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지하철 역사와 은행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운영 지점에도 노숙자가 늘어났다. 지난달 체이스은행은 “부랑자가 증가하고, 범죄 우려가 높아졌다”며 24시간 운영하던 ATM 지점을 오후 10시까지만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일부 ATM 지점은 오후 5시에 문을 닫기도 한다.
최근 뉴욕경찰은 트위터를 통해 맨해튼 40번가 체이스은행 ATM 지점에서 누군가 여성 얼굴에 커피를 뿌렸다고 밝혔다. 에릭 애덤스 뉴욕 시장은 “ATM에 돈을 뽑으러 갔다가 노상방뇨나 소리 지르는 사람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며 “뉴욕시 ATM 지점이 문을 닫고 사람들이 떠나는 일이 없도록 노숙자 문제 해결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정신질환이 있는 노숙자가 범죄율을 높인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지난해 1월 중국계 여성 미셸 얼리사 고(40)는 뉴욕 타임스스퀘어역 플랫폼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다 정신질환을 앓던 60대 노숙인이 뒤에서 밀어 선로에 떨어져 숨졌다. 한 교민은 “그 사건 이후 지하철 승강장에서 누가 밀까 봐 기둥 뒤에 서 있곤 한다”며 “정신질환자, 약물중독자가 적지 않아 갑작스러운 사건이 벌어질까 두렵다”고 말했다.
노숙자 위기는 뉴욕뿐 아니라 로스앤젤레스(LA) 시애틀 같은 다른 대도시에서도 겪고 있다. 지난해 취임한 캐런 배스 로스앤젤레스 시장은 노숙자 문제로 비상사태를 선언하기도 했다. 로스앤젤레스는 지난해 노숙자 수가 6만5000여 명으로 뉴욕을 제치고 미국 노숙자 수 1위 도시가 됐다.
집값 폭등에 살 집이 없다
노숙자와 범죄율 증가로 대표적 민주당 강세 지역인 뉴욕주에서는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뉴욕시 교외 연방하원 지역구 롱아일랜드를 공화당에 빼앗겼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롱아일랜드 주민들은 범죄와 노숙자 증가가 교외로 확산될까 두려워 단호한 대처를 요구하며 공화당에 표를 던졌다”고 분석했다.
데버 페짓 뉴욕대 교수
하지만 전문가들은 실제 노숙자 중 정신질환자 비중은 높지 않으며 노숙자 급증의 본질은 저렴한 주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데버라 패짓 뉴욕대 사회복지대 교수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편견과 달리 노숙자 중 심각한 정신분열증이나 조울증을 앓는 비중은 30% 정도”라며 “주로 ‘보호소-감옥-병원-거리’라는 슬픈 순환에 빠진 만성적 노숙자에게서 자주 발견된다”고 말했다. 이어 “소수가 저지른 폭력 사건으로 노숙자에 대한 매우 적대적이고 부정적인 반응이 생긴 것”이라면서 “노숙자가 폭력 피해자가 되는 사례가 더 많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2021년 맨해튼 기준 1인당 소득이 19만5543달러(약 2억5000만 원·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 집계)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에서 노숙자가 급증한 이유는 무엇일까.
패짓 교수는 “부유함이 노숙자 급증과 연관돼 있다”고 지적했다. 1980년대 연방정부의 공공주택 건설이 줄고 대신 고급주택 위주로 개발되다 보니 저소득층이 살 곳을 잃었다는 얘기다. 특히 뉴욕 중상층 소득이 급증하자 집값이 치솟아 뉴욕 시민 7만여 명이 쉼터를 전전하게 됐고 3400여 명이 길거리에 나앉게 됐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이전까지 10년 이상 저금리는 부동산 폭등으로 이어졌고 자산이 없는 저소득층은 계속해서 외곽으로 내몰렸다. 맨해튼 아파트 월세 중간값은 약 4000달러(503만 원)다.
뉴욕타임스(NYT)는 집값 하락과 치안 공백 우려 때문에 공공임대주택 건설이 어려운 점도 만성적 저가주택 부족을 야기한다고 지적했다. 미 중상층이 단독주택 거주를 선호하는 것도 요인으로 꼽힌다. 캘리포니아주는 극저소득층 100명당 저가주택은 23채에 불과하다.
저소득층을 위한 값싼 주택이 부족한 터에 코로나19로 식당 호텔 백화점이 잇달아 문을 닫으면서 저소득층 일자리가 사라진 것도 타격이 컸다.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난 가족 단위 노숙자가 늘어난 것이다. 노숙자를 위한 연대 측은 “가족 단위 노숙자가 많아진 가장 큰 이유는 저가주택 부족”이라며 “여기에 심각한 과밀 주거 등 해로운 주거 환경, 가정폭력, 실업 등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노숙자 25% 줄이겠다지만…
미국 노숙자 위기는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같은 대도시에서 최근 미 중서부 도시로 확산되고 있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일상이 되자 중서부나 남부같이 상대적으로 집값이 저렴한 곳으로 이주가 활발해지면서 집값이 올랐기 때문이다.
미 전역이 노숙자 문제로 몸살을 앓자 지난해 12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연방정부 차원 노숙자 대책을 발표했다. 저소득층을 위한 아파트 같은 저가주택을 확대하는 주거지원 프로그램에 예산 87억3200만 달러(약 11조 원)를 투입해 2025년까지 노숙자 25%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뉴욕시는 심각한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는 노숙자를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도록 했다. 또 지난해 12월에는 향후 10년 동안 저가주택 50만 채를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같은 정책은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반론이 적지 않다. 사회복지사 혼자서 심각한 정신질환 노숙자를 병원에 강제로 입원시키기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또 저가주택 단지 건설은 치안 우려와 집값 하락을 이유로 지역 주민이 반발할 확률이 높다. 이 때문에 고급 아파트와 시장가격 이하 저가주택을 섞는 ‘믹스트유스(mixed-use)’ 빌딩 건설이 늘고 있지만 가격이 비싸 극빈층은 이용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크리스틴 퀸 노숙자 구호 활동가는 미 CBS방송 인터뷰에서 “카지노를 비롯해 대형 부동산 개발을 할 때 저가주택을 반드시 포함하도록 해야 한다”며 “대형 프로젝트를 활용해야 빠르게 저가주택을 늘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현수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