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일대사인연은 배울 수 없다 答 李參政
承에 過夏後에 方可復出이라하니 甚陿病僧意로다. 若更熱荒하여 馳求不歇則 不相當也리라. 前日에 見公의 歡喜之甚인데 以故로 不敢說破이니 恐傷言語니라. 今歡喜既定이어 方敢指出하노라. 此事는 極不容易하니 須生慚愧하여야 始得이라. 往往 利根上智者 得之하되 不費力일새 遂生容易心하여 便不修行하니라. 多被目前境界에 奪將去하여 作主宰不得하다 日久月深하여 迷而不返이어 道力이 不能勝業力이라. 魔得其便하여 定為魔所攝持하고 臨命終時에 亦不得力하니 千萬記取어다.
편지에서 그대가 “여름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다시 바깥에 나올 수 있었다”고 하시니, 저의 마음이 매우 즐겁기만 합니다. 만약 다시 바깥으로 들뜨고 바쁘게 법을 구하러 다니면서 그 마음을 쉬지 않았다면 이는 마땅히 해야 할 노릇이 아닙니다. 전날 그대가 매우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이 때문에 감히 설파하지를 않았습니다. 이는 그대의 기쁜 마음을 상하게 할까 걱정했던 것입니다.
지금 그대의 기쁨이 가라앉았기에 비로소 몇 마디 말을 할까 합니다. 이 공부는 정말 쉽지를 않으니, 모름지기 자기의 잘못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이따금 훌륭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힘들이지 않고 깨달음을 얻기에, 마침내 공부하기 쉽다는 마음을 내어 수행을 하지 않습니다.
대개 눈앞의 경계에 휘둘려서 살다가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미혹을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도의 힘이 업의 힘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마구니들이 그 틈을 타서 반드시 주인 노릇을 하게 되고, 목숨을 마칠 때에도 또한 업을 바꿀 힘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셔야 합니다.
前日之語에 理則頓悟라 乘悟併銷이나 事非頓除기에 因次第盡이라 하니 行住坐臥에 切不可忘了하라. 其餘古人의 種種差別言句도 皆不可以為實이라. 然이나 亦不可以為虛니라. 久久純熟하면 自然 默默 契自本心矣라. 不必別求殊勝奇特也니라. 昔에 水潦和尚이 於採藤處에 問馬祖하되 如何是祖師西來意오하니 祖는 云에 近前來하라 向你道하리라. 水潦纔近前커늘 馬祖 欄胸一蹋에 蹋倒라가 水潦가 不覺起來하여 拍手치고 呵呵大 笑니라.
전날에 “이치는 돈오로서 깨달으면 모든 의심이 녹아지나, 事는 단숨에 제거되는 것이 아니기에 점차 없어진다”라고 한 말을 오고 가며 앉고 눕는 삶 속에서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머지 옛 어른들의 갖가지 서로 다른 말들도 모두 진실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또한 허망한 것으로 여겨서도 안됩니다. 공부가 오래 익다 보면 자연스레 말이 없이 자기의 본 마음에 꼭 들어맞을 것입니다. 달리 뛰어나고 기특한 일을 구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전에 수료(水療, 마조의 제자) 화상이 참깨 잎을 따는 곳에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어떤 것입니까”라고 마조 스님(709~788, 남악회양의 제자)에게 물으니, 마조 스님은 “앞에 가까이 오너라. 너에게 말해 주겠다”라고 했습니다. 수료 화상이 가까이 오자 마조 스님은 멱살을 움켜잡고 한번 발로 걷어 수료 화상을 넘어뜨리니, 수료 화상이 넘어졌다가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 손뼉치고 하하! 하고 크게 웃었습니다.
祖가 曰에 汝가 見箇甚麼道理기에 便笑오하니 水潦는 曰 百千法門과 無量妙義를 今日 於一毛頭上에 盡底識得根源去라. 馬祖 便不管他니라. 雪峯이 知皷山 緣熟하고 一日 忽然驀胸擒住曰에 是甚麼오하니 皷山이 釋然了悟하되 了心便亡하고 唯微笑로 舉手搖曳而已니라. 雪峯 曰에 子作道理耶아하니 皷山이 復搖手曰에 和尚이시여 何道理之有리오하니 雪峯이 便休去니라.
그러자 마조 스님이 “네가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그리 웃느냐”고 묻자, 수료 화상은 “온갖 법문과 헤아릴 수 없는 오묘한 이치를 오늘 한 터럭 끝에 그 근원을 다 알아 버렸습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마조 스님은 그의 공부를 인가하고 더 이상 그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설봉(덕산의 제자) 선사는 고산(868~944, 설봉의 제자)스님의 인연이 익은 걸 알고 하루는 갑자기 느닷없이 멱살을 움켜잡고 “이것이 무엇인고”라고 하자, 고산 스님이 확 깨달았으나 알았다는 마음조차 잊고 오직 빙그레 웃으며 손만 흔들었습니다. 설봉 선사가 “네가 도리를 말하느냐”고 묻자, 고산 스님이 다시 손을 흔들면서 “화상이시여, 제가 무슨 도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설봉 선사는 그의 공부를 인가하고 그대로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출처: 禪 스승의 편지, 대혜 종고 『서장』, 원순 옮김
첫댓글 도의 힘이 업의 힘을 이길 수 없다고 하시네요.
업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들의 습관들이 모여서 된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매일 수행하는 습관이 중요하다고 이해합니다.
조곤조곤 다지고 다지는 가르침으로 제자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대혜종고스님의 보현행 실천이 돋보입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도의 업이 업의 힘을 이길 수 없다고 한 것은 엉터리 도는 업을 못 이긴다는 뜻일 겁니다.
그니까 보통 한 경계 얻은 분들은 거기 취해 더이상의 경계를 나아가지를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제가 늘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공부하다 보면 제일 먼저 오는 경계가 기쁨입니다.
모르던 걸 알게 되니, 비유하면 깜깜한 동굴 속에 갇혀 우왕좌왕하다가 갑자기 바깥에서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을 봤을 때와 비슷하다 할까요.
꼼짝없이 죽을 줄만 알았는데 바깥의 빛을 본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빛을 봤으면 거기로 가야지요!
그럼에도 그냥 빛의 기쁨에 젖어 긴장이 풀려 거기만 빠진단 말입니다.
그런 도는 업을 이길 수가 없다, 이거지요.
부처님 가르침은 진정 생사를 넘는 가르침입니다.
공부를 바르게 하면 반드시 업의 힘을 넘을 수 있다고 저는 믿어요!
전날에 “이치는 돈오로서 깨달으면 모든 의심이 녹아지나, 事는 단숨에 제거되는 것이 아니기에 점차 없어진다”라고 한 말을 오고 가며 앉고 눕는 삶 속에서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머지 옛 어른들의 갖가지 서로 다른 말들도 모두 진실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 이 말씀은 누구냐 그 유명한 말인데 출처가 기억 안 나네요.
요즘 술을 많이 먹어(누구처럼) 뇌가 텅비게 된 걸 절실히 느낍니다.
결국 돈오점수인 셈이지요.
그런데요, 올바르게 한 경계 깨치면, 이런 말이 사실 필요가 없답니다.
정말로 깨치게 되면, 내가 깨친 게 별 거 아닌 걸 너무도 잘 안답니다.
반면 제대로 못 깨치면 자기가 깨친 게 대단한 줄 알아요.
그래서 정말 깨친 분은 가지 말래도 점수의 길을 갑니다. 해야할 일이 너무도 많거든요?
그런데 엉터리로 깨친 분은 안 가요!
제가 늘 말씀드리지요?
정말 깨친 분은 보현행이 자연스레 나온다고요!
그래서 보현행이 없는 분들은 사실 깨친 게 아니다, 라고요.
주위에 한번 보세요.
보현행이 저절로 나오시는 소위 유명 수행자들이, 과연 몇 분이나 계시는지.
그런데 사실 주변에 보현행 나오시는 분들 보면, 흉내가 많습니다.
참으로 진리의 자리를 보시고, 그 진리의 경계에서 나오는 보현행을 하시는 분은,
제가 보기에는,
애석하지만 아니 계세요.
보현행 자체를 모르시거나,
아니면 보현행을 해야한다는 압박감인지는 모르나,
박성배교수님 말씀 빌리면, 몸의 행원이 아니라 몸짓의 행원이 많지요.
애석한 일입니다.
@普賢. 돈오점수와 보현행원!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업의 힘.
몸짓의 행원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조주선사,
덕산,
설봉 선사들 일화를
읽어본적 있었습니다.
선문답~
보현행을 잘 하진
못하지만 스님들
대할기회가 될땐
꼭 듣고 보고 배운게 있어 잣대를 대고 보게됩니다.
자칭,타칭 깨쳤다
아라한 이다.라고 하는분도 보현행과는 거리가 멀기만하고
쓰는 말씀은 거칠기 짝이없고~
중생은 수행자.혹 깨친분들의 엉뚱하다 싶은 행동을 중생눈높이로 평가 하지말라고 하고.
본인 말이 거슬리면
도량에 오지말고
법문 듣지 말라고 하대요.
해서 보.현.행.원에 대해 질문도 하고
답을 들어보니
화두깨치면 자비는 저절로 나온다고
하시대요.
깨치는 과정엔 아무것도 신경쓰지말고 오직 화두 놓치지 않고
몰입만 하라고~
그 스님을 인간이 아니고 하늘이 내려준 신적인 존재로 추앙하는 신도들 대부분은
기본인 눈인사도 안하더군요~~^^
ㅎㅎㅎㅎ
화두 들고 있어서
묵언하는 사람들이라
표정 변화가 없다네요~~
재밌는 그룹들 이었어요.
희한한 경험 한번 했었습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