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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영화 ‘ET’ 개봉
영화 ‘ET’의 한 장면. 엘리엇 역의
헨리 토마스(왼쪽)와 ET
미국 영화계의 귀재로 일컫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 ‘ET’가
1982년 12월 4일 미 전역에서 개봉됐다.
‘The Extra Terrestrial’의 약칭인 ET는
외계인이란 뜻이다.
한 외계인과 지구어린이와의 흐뭇한
우정을 그린 ET는 개봉 1개월 만에
흥행수입 1억 달러를 넘어섰고, 3개월
만에 2억9천만 달러를 벌어들여
‘스타워즈’의 기록을 깨고 흥행사상
최고의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모든 영화인들의 꿈
아카데미상(1983년)은 마하트마 간디의
생애를 그린 영국영화 ‘간디’가 휩쓸어
ET는 4개 부문만 수상하는 분루를
삼켜야 했다.
ET는 난쟁이(1m 10cm)에 부엉이 눈을한
괴상한 몰골의 외계인이 UFO를 타고
지구에 와 낙오됐으나 한 소년의 도움으로
다시 자기의 별로 돌아간다는 줄거리로,
둘 사이에 싹튼 뜨거운 우정이 현대문명에
찌든 관중들에게 감동의 심금을 울렸다는
평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1984년 5월에 개봉돼
ET붐을 일으켰다. 1994년에 미국의
대중연예지 ‘엔터테인먼트 위클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ET는 미국인 2억9천6백만여
명이 극장이나 홈비디오를 통해 본 것으로
나타나 할리우드 영화사상 미국 관객이
가장 많이 본 영화로 기록됐다. 2위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년) 3위는
‘101마리의 달마시안’(1961년)이 차지했다.
▶2008년세종증권 매각 비리, 노건평씨 구속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66)씨가 지난 2006년 농협의 세종증권 인수에 개입하고 금품을 받은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수재)로 2008년 12월 4일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됐다.
노씨는 지난 2006년 2월 세종증권 대주주인 세종캐피탈의 홍기옥(59·구속) 사장으로부터 농협의 세종증권 인수를 성사시켜 준 대가로 정화삼(61·구속)씨 형제를 통해 29억6300만원이 예치된 통장과 도장을 받은 혐의를 받았다.
지난 1일 검찰 조사를 받고 귀가하면서 “돈 받은 적이 없다” 고 당당하게 밝혔던 노씨는 이날 서울구치소로 이송되기에 앞서 “혐의를 부분적으로 인정하지만 전부 인정하지는 못하겠다” 며 “국민들에게 죄송하다” 고 말했다.
검찰은 농협의 세종증권 인수비리에 대한 공개 수사에 착수한 지 보름 만에 전직 대통령의 형을 구속하게 됐다.
▶2002년국내 2위 광고회사 LG애드
외국회사에 매각
▶1999년‘유럽최고 신랑감’ 필립
벨기에 왕세자 결혼
벨기에 왕세자 필립(39)이 4일 열세살 연하인 전직 언어교정사 마틸드 두데켐 다코즈(26) 양과 유럽 왕실의 20세기 마지막 결혼식을 올렸다. 프랑수아-자비에 드 도네아 브뤼셀 시장은 “두 사람은 벨기에의 미래와 왕실의 살아있는 상징”이라며 성혼을 선포했다. 필립은 유럽의 다른 왕자들과는 달리 스캔들을 뿌리지 않아 ‘당대 유럽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혀왔다. 그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과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수학했고, 벨기에 공군의 전투기 비행사로도 활약했다.
▶1999년요르단 후세인국왕 방한
▶1999년남대문시장내 대도마켓 건물
화재로 인근 5개건물과 내부 1천평 전소,
23억원 피해
▶1998년나이키 허큘리스 지대공
미사일, 인천상공서 오발 사고
▶1997년초대 통일원 장관 이용희 박사 별세
▶1996년한국-칠레, 통신협력협정 체결
▶1996년미국 화성탐사선 패스파인더호 발사
미국의 화성탐사선 패스파인더호가 1996년 12월 4일 새벽 화성으로 발사되었고 이후 7개월 만에 1억9천1백만km 거리의 화성에 도착, 광할한 아레스 밸리스 평원에 연착륙했다. 패스파인더는 무인우주선으로는 사상 처음 직경 1m 가량의 풍선 24개에 의존해 착륙했다. 탐사선은 모선 ‘프로브’와 탐사로봇 ‘소저너’로 나뉘어 있다. 프로브는 착륙지점에 정착해 소저너를 풀어준 뒤 대기를 분석, 자료들을 지구에 전송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흑인노예 폐지론자 소저너 트루소의 이름을 딴 소저너는 지질 탐사활동을 벌였다.
▶ 1989년 오늘,
민정당 '정호용의원', '5공청산의 완전종결' 전제로 의원직 사퇴표명.
야당, 논의가치 없다고 일축.
육군본부 ‘작전상황일지’ 단독 입수
5월21일 ‘특전사령관 외 2명’ 기록
전두환 동행 여부 등 진상규명 필요
정호용 “광주서 보안사령관 만난 일 없다”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오른쪽)이 1980년 5월27일 시민군이 진압된 뒤 전남도청을 방문하자 장형태 당시 전남지사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1980년 5·18민주화운동 때 광주 전남도청 앞 금남로 일대에서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있던 5월21일 정호용(88) 당시 특전사령관이 헬기를 타고 광주를 찾은 사실이 군 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이는 ‘도청 앞 집단발포가 있을 때 서울에 있었다’고 한 정씨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광주에 파견된 3·7·11공수부대의 수장이었던 정씨가 5월21일 광주에 있었다는 군 기록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육군본부 작전교육참모부의 ‘작전상황일지’에는 1980년 5월21일 특전사령관 외 2명이 광주에 가기 위해 헬기를 이용했다고 기록돼 있다.31일 본지가 단독으로 입수한 육군본부 작전교육참모부의 ‘작전상황일지’를 보면, 80년 5월21일 ‘항공기 지원’ 내역에 한문으로 “특전사령관 외 2명”이 오전 8시부터 10시20분까지 기동용 헬기인 UH-1H(기록은 UH-1로 돼 있음)를 이용했다고 기록돼 있다. 행선지는 광주다. 이 문서엔 가스살포용 500MD 헬기 5대가 광주에 파견됐던 사실도 함께 담겨 있다.
80년 5·18 당시 공수부대 특전사 등 계엄군들이 광주시민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이 기록은 정씨의 주장과 배치된다. 그는 1988년 (5월호) 인터뷰에서 “사태가 악화되자 (5월21일 서울에 있는데) 발포 여부를 묻는 급전이 날아와서 나는 지휘계통에 서 있지 않았지만, 절대 발포 불가 명령을 내렸다”고 밝혔다. 도청 앞 집단발포는 전두환 전 대통령도 부인하고 있다. 도청 앞 집단발포는 ‘자위권을 보유하고 있다’고 천명하기 전에 신군부 핵심 세력이 시민들을 살해하도록 한 직접증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데도 39년이 지나도록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정씨가 5월21일 광주에 있었다는 사실은 5·18 당시 광주에서 주한미군 501여단 방첩 정보요원으로 활동한 김용장씨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김씨는 지난 14일 (JTBC) 인터뷰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5월21일 광주비행장에서 정호용 특전사령관, 505보안부대 이재우 대령 등과 회의를 했고, 헬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간 직후 발포·사살 행위가 이뤄졌다”고 증언한 바 있다.
육군본부 작전교육참모부의 ‘작전상황일지’ 5월20~21일 상황일지.이런 상황에서 군 공식 문서를 통해 당시 특전사령관이던 정씨가 광주에 있었다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집단발포는 비공식 지휘계통에 따라 이뤄졌을 가능성에 더욱 무게가 실린다. 앞서 집단발포의 단서가 될 증거와 정황은 잇따라 밝혀졌다.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는 80년 5월21일과 27일 광주시민을 상대로 육군의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조사 결과를 지난해 2월 발표했다. 5·18 연구자 이재의 박사는 “헬기에서 지상의 시위대를 향해 사격한 것은 군인들이 위험에 처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위수단으로 발포했다는 주장이 거짓임을 드러내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때문에 당시 보안사령관-특전사령관-공수여단장으로 이어지는 비공식 지휘라인을 밝히는 게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특전사령관과 동행한 2명 가운데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포함됐는지 여부도 5·18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보안사령부가 신군부의 집권 과정을 기록한 엔 1980년 5월21일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서울 국방부 회의에 참석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지만, 회의 시간은 명기돼 있지 않다.이에 대해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은 이날 와 한 전화통화에서 “(5·18 당시 서울과 광주를) 왔다 갔다 했다. (5월21일 헬기를 타고 광주에 갔는지는)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그때(88년 5월 인터뷰) 이야기한 게 다 사실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난 ‘광주사태’ 때 광주에서 보안사령관을 만난 일이 없다”고 반박했다. ‘5월21일 집단발포 책임’과 관련해 그는 “모르겠다. 나는 그냥 우리 부대를 거기(광주)다가 배속시켜준 것밖에 없다. 광주에서 일어난 사항은 전부 광주 사단장하고 그 후에 (전투)교육사령관하고 그 사람들이 한 것”이라고 말했다.
▶1984년쿠웨이트기 공중피납,
테헤란공항 착륙
▶1983년베네수엘라 총선 야당 승리,
루신치 대통령 당선
▶1982년제9회 아시안게임 폐막,
한국 금 28개로 3위
▶1982년영화 ‘ET’ 개봉
미국 영화 ‘E T’ 개봉 / 미국에서 제작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공상과학영화/ 초능력을 가진 외계인이 지구에 홀로 남아 지구 소년과 함께 위기를 극복하며 동료들에 구출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미국 영화계의 귀재로 일컫는 스티븐 스필버그(Spielberg, Steven)가 감독한 영화 ‘ET’가 1982년 12월 4일 미 전역에서 개봉됐다. ‘The Extra Terrestrial’의 약칭인 ET는 외계인이란 뜻이다.
한 외계인과 지구어린이와의 흐뭇한 우정을 그린 ET는 개봉 1개월 만에 흥행수입 1억 달러를 넘어섰고, 3개월 만에 2억9천만 달러를 벌어들여 ‘스타워즈’의 기록을 깨고 흥행사상 최고의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모든 영화인들의 꿈 아카데미상(1983년)은 마하트마 간디의 생애를 그린 영국영화 ‘간디’가 휩쓸어 ET는 4개 부문만 수상하는 분루를 삼켜야 했다.
ET는 난쟁이(1m 10cm)에 부엉이 눈을 한 괴상한 몰골의 외계인이 UFO를 타고 지구에 와 낙오됐으나 한 소년의 도움으로 다시 자기의 별로 돌아간다는 줄거리로, 둘 사이에 싹튼 뜨거운 우정이 현대문명에 찌든 관중들에게 감동의 심금을 울렸다는 평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1984년 5월에 개봉돼 ET붐을 일으켰다. 1994년에 미국의 대중연예지 ‘엔터테인먼트 위클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ET는 미국인 2억9천6백만여 명이 극장이나 홈비디오를 통해 본 것으로 나타나 할리우드 영화사상 미국 관객이 가장 많이 본 영화로 기록됐다. 2위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년) 3위는 ‘101마리의 달마시안’(1961년)이 차지했다.
▶1981년소련, 극동전역(戰域)
핵제한협정에 중국 참여 촉구
▶1980년일본내 반(反)한단체.
김대중 재판항의 빙자로
주(駐)요코하마 한국총영사관 난입
▶ 1980년 오늘,
영국 '록 밴드 레드 제플린' 해체
▶1979년김재규 등 8명 첫 공개재판
1979년 10월 유신체제 말기 정치세력간의 갈등으로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김재규가 직속부하인 박선호, 박홍주 등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는 사건(10.26사태)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1979년 12월 4일 계엄보통군법회의 첫 공개재판을 받았다. 이후 12월 18일 결심공판이 오전10시 육군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서 재판장 김영선 중장, 법무사 황종태 대령 심리로 열렸다. 재판 결과, 육군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김재규, 김계원, 박홍주, 박선호에게 사형이 선고됐으며, 김계원을 제외한 나머지 전원에게 사형이 집행됐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주범으로
군사법정에서 첫 공판을 받고 있는
김재규(가운데) 전 중앙정보부장
▶1977년당대 최고 남자 고전 무용수
에글레프스키 사망
▶ 1975년 독일 철학사상가 한나 아렌트 사망
아렌트 [Arendt,Hanna,1906.10.14~1975.12.4]
1975년 12월4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뉴욕에서 작고했다. 향년 69.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혁명론’ 따위의 저작으로 20세기 정치철학의 아름다운 성채를 구축한 유대인 여성 학자다. 독일 하노버에서 태어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자란 그녀는 마르부르크대학에 진학해 마르틴 하이데거 밑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유부남이었던 하이데거와 열일곱 살 아래인 아렌트의 관계는 사제 사이를 넘어 연인 사이로 발전했는데, 뒷날 하이데거는 아렌트가 없었다면 ‘존재와 시간’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까지 회고했다. ‘존재와 시간’ 초판에 붙어있던 유대인 스승 에드문트 후설에 대한 헌사를 나치 집권 뒤 슬그머니 지워버린 하이데거로서는 대단한 애정 고백이었다.
하이델베르크와 프라이부르크에서 공부를 계속해 카를 야스퍼스의 지도로 학위논문을 쓴 아렌트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서 파리를 거쳐 뉴욕으로 망명했고, 그 뒤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가르쳤다. 20세기 정치이론에 대한 아렌트의 가장 큰 기여는 전체주의 연구에 있다.
‘전체주의의 기원’(1951)으로 한 획을 그은 아렌트의 전체주의 연구는 그가 뉴요커 특파원 자격으로 나치 친위대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하고 쓴 기사들을 모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진부성에 대한 보고’에서 더욱 벼려졌다.
그 재판에서 아렌트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인간 도살자로서의 아이히만 이미지와 나치라는 기계의 톱니바퀴에 불과한 실제의 무구한 개인으로서의 아이히만 이미지 사이의 간극이었다. 아렌트는 이 재판을 통해서 나치의 인종학살이 가장 진부하면서도 가장 체계적인, 효율추구적이며 관료주의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자신의 확신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아렌트의 이 재판 참관기를 일관하는 ‘악의 진부성’이라는 개념은 그 뒤 전체주의와 폭력을 연구하는 이론가들에게 익숙한 용어가 되었다.
▶1974년네덜란드 전세기 DC-8기
스리랑카 콜롬보 부근서 추락, 191명 사망
▶1973년남북조절위 제1차 부위원장회의 개최
▶1970년남산 제2호터널 개통
▶1969년제주도서 당나라 때 엽전 2만개 발굴
▶1966년조나단 레소토국 수상 내한,
국교수립에 합의
▶1964년본에서 한-독 경제협정 체결
▶1961년근로기준법 개정
(해고의 예고, 퇴직금제 신설)
▶1959년대법원, 박태선 장로
원심 1년 파기하고, 징역 1년6개월 언도
▶1958년영국 로이드 외상,
유럽에 군비관리지대 설치를 제안
▶1958년일본-소련 무역의정서 조인
▶1954년유엔총회,
원자력 평화이용결의안 채택
▶1950년유엔군 평양 철수
▶ 1948년 중국 장야(江亞)호 폭발·침몰 사고
1948년 12월 4일 중국에서 일어난 장야(江亞)호 참사는 역대 두 번째로 많은 사상자를 낸 해양사고다. 정원이 2,250명이었으나. 당시 중국 국공 내전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약 4,600여명이 탑승했다고 알려져 있다. 배는 상하이 북쪽 80㎞ 떨어진 황푸(黃浦)강 하구에서 폭발과 함께 침몰해 3,90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승객 2,750~3,920명이 숨진 것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700~1,000명의 승객이 다른 선박에 의해 구조됐다. 사고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설치해놓은 기뢰에 부딪혀 폭발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47년불가리아, 터키로부터 독립
▶1945년초파리 실험으로 염색체
유전설을 확립한 미국의 유전학자 모건 사망
▶1922년조선사 편찬위원회 설치
일제의 조선 강제병합 12년째. 조선총독부는 훈령(訓令) 제64호로 1922년 12월4일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 본격적인 한국사 왜곡에 착수했다. 박은식의 '한국통사(1915)'가 국내에 유입되면서 고취된 민족의식과 3.1운동으로 폭발하기 시작한 항일독립운동의 기운을 희석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왜곡된 역사를 토대로 부정적인 역사인식을 주입함으로써 조선인의 민족혼을 순치시켰다. 또 역사왜곡을 위해 분서(焚書)도 서슴지 않았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전국에 있는 한국사 관련 서적색출에 나서 이미 ‘단군조선’ 관련 고사서 등 20여만권을 수거, 불태운 바 있었다.
▶1922년일진회장 이용구,
한일합방 상주문-청원서 제출
▶1922년프랑스 배우 제라르 필리프 출생
▶1920년독일 스파르쿠스단 독일통일사회당 결성
▶1916년영국 로이드 조지 전시내각 성립
▶1908년만국해군회의 런던에서 개최
▶1904년일진회, 진보회와 통합
▶1899년독립신문 4년 만에 폐간
독립신문 창간호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이며 한국역사상 최초로 인쇄된 한글 전용신문이었던 ‘독립신문’이 창간 4년만인 1899년 12월 4일 폐간됐다. 독립신문은 한글전용으로 민중을 위해 알기 쉬운 신문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한국 신문사상 획기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 한국사회의 발전과 민중의 계몽을 위해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 한 시대의 기념비적인 신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독립신문은 정부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과 개화파가 합작하여 1896년 4월 7일 창간, 처음에는 가로 22cm, 세로 33cm의 국배판 정도 크기로 4면이 발행됐다. 1면 머리에는 ‘논설’을 싣고, 이어서 ‘관보’, ‘외국통신’, ‘잡보’의 순으로 1면에서 2면으로 넘어가면서 기사를 배치한 뒤에 3면에는 광고를 실었다. 광고는 영문과 한글 2종류였다. 4면은 영문판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로 편집됐다. 그러나 이듬해인 1897년 1월부터는 한글판과 영문판을 분리하여 두개의 신문으로 발행했다.
독립신문은 19세기 말 한국사회의 시대상을 담아내고 민중계몽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민간신문이었으나 정부의 탄압과 수구세력의 미움을 사게 되고 핵심인물이 바뀌는 등 혼란을 겪었다. 결국 이날 정부가 서재필에게 4천원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독립신문의 판권과 인쇄시설을 매수했고 이날부터 독립신문은 더 이상 발행되지 않았다. 언론계는 1957년 독립신문 창간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의 탄생을 기념하고 신문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로 삼고 있다.
▶1897년그리스-터키 콘스탄티노플 평화조약 체결
▶1892년스페인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출생
▶1890년독일 세균학자 베어링 혈청요법 발명
▶1884년갑신정변 발발
갑신정변의 4주역.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왼쪽부터)
▶1875년독일 시인 릴케 출생
독일의 시인. 프라하에서 출생했다. 각지를 유랑하고, 한때는 조각가인 로댕의 비서를 지냈다. 초기에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만년에는 두드러질 정도로 명상적ㆍ신비적으로 되었다. 섬세한 감수성으로 근대 사회의 모순을 깊이 번뇌, 고독ㆍ불안ㆍ죽음ㆍ사랑ㆍ초월자 등의 문제에 관하여 깊이 있는 감정으로 많은 시를 지었다. 실존주의적 사상의 시적 대표자로 인정된다. 그는 또한 언어의 거장으로서 시어를 섬세하고 자유롭게 세련시켰다.
▶1871년독일 금본위제 채택
▶1795년영국 역사학자 토마스 칼라일 출생
▶1792년루이16세 재판 개정
▶1679년영국의 철학자, 정치 이론가 토마스 홉스 사망
▶1649년스코틀랜드 시인 윌리엄 드러먼드 사망
▶1563년트리엔트 공의회 폐막
1517년 마틴 루터가 가톨릭의 부패상을 고발하는 95개 조항을 발표하면서 촉발된 종교개혁이 들불처럼 유럽전역으로 번져가자 해법을 찾기 위해 트리엔트공의회가 소집됐다. 공의회(公議會)는 교회의 교의나 규칙 등 중요 사항을 논의하기 위해 교황이 소집하는 가톨릭 최고회의로, 트리엔트는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 이름이다. 1545년부터 18년 동안의 논의 끝에 절대적인 교황권을 재확인하고, 루터의 교리를 오류로 판정함으로써 분열됐던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신·구교간의 분열은 더욱 심화돼 서방 기독교 세계의 절반이 로마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결과를 낳았다.
▶897년신라, 진성여왕 사망
신라의 제51대 왕(재위 887∼897)으로 성은 김(金)이고, 휘는 만(曼) 또는 원(垣)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경문왕과 문의왕후 김씨의 딸이자 헌강왕과 정강왕의 여동생이다. 정강왕이 후사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문란한 행실과 실정으로 국가재정을 위태롭게 하고 민심을 동요시켰으며 이로 인해 전국적인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최치원의 사사위표에는 진성여왕이 사심이 없고 욕심이 적으며, 몸에 병이 많아 한가함을 좋아하고, 말해야 할 때가 된 뒤에야 말을 하고, 한번 뜻한 바는 빼앗지 못하는 굳은 의지를 지닌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행디의행복블러그,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