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6년 10월 300병상 규모로 문을 연 안산 한도병원은 개원 10년 만에 400병상 규모의 신축병원을 인근에 세울 정도로 소위 ‘잘 나가는’ 병원이었다. 하지만 지난 9일 안산 한도병원은 문을 닫았다.
지난 2월 결성된 노동조합이 파업에 돌입한 지 불과 보름도 지나지 않았지만 병원 측은 폐업이라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다.
견실한 병원, 왜 폐업했나
병원측은 일부 언론보도에서 “장기간 노조의 점거농성과 파업이 이어지면서 병원의 신뢰도가 추락, 200여명의 입원환자들이 모두 병원을 옮기는 등 더 이상 병원 운영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폐업 배경을 밝혔다.
하지만 파업에 동참한 직원은 전체 200여명 가운데 19명에 불과하고 파업 역시 지난달 26일 자정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을 되짚어보면 의아스러운 대목이 많다. 보건의료노조 유미라 경기지역부본부장의 설명을 들어보자.
“보건의료노조는 관례상 파업을 앞두고 ‘환자이송 공문’을 사측에 보냅니다. 파업으로 인해 진료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도록 협조를 요청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한도병원에서 파업에 참가한 간호사는 단 1명입니다. 1명의 간호사가 진료에서 빠졌다고 진료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아요. 그러나 사측은 환자들에게 ‘파업 때문에 진료를 볼 수 없다’며 환자들에게 ‘강제퇴원 명령’을 내렸어요. 특히 초기에는 병원수익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은 장기입원환자와 의료보호 환자들에게 집중됐지만 결국 모든 환자에게 퇴원을 요구했습니다.”
때문에 노조는 파업 사흘만에 병원 사측에 정상진료를 촉구하고 나서기도 했다. 파업 중인 노조가 영업을 주장하는 아이러니한 사태가 벌어진 것. 현행 법 상 병원의 폐업신고는 환자가 1명도 없을 때만 가능하다. 노조에 따르면 병원 측은 중환자들이 퇴원을 거부하자 아예 회진조차 돌지 않았다.
더구나 한도병원은 신축병원을 세울 정도로 건실한 재무재표를 가지고 있다. 노조가 회계법인에 경영분석을 의뢰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 3년간 당기순이익만 44억5천만원으로, 연평균 14억8천만원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담당공인회계사는 “사업주의 인출금(3년 간 18억원)만 줄이고 차입자금만 성실하게 운영한다면 병원의 경영성과와 재무구조는 더욱 견실해질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유미라 부본부장은 “병원 사측은 ‘노조가 있으면 폐업하겠다’고 직원들에게 수차례 언급한 바 있다”며 “명백한 위장폐업”이라고 말했다.
23살 의무기록사, 지혜 씨의 파업동참 이유
폐업 다음날인 지난 10일 한도병원에서 만난 앳된 얼굴의 도지혜 씨는 이제 23살의 의무기록사이다. 한도병원에는 지난해 9월 입사했다. 이전에는 개인병원에서 접수를 담당했다고 한다.
도지혜 씨는 처음에 파업에는 참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입사한 지 다섯 달 밖에 되지 않은 신참이 무슨 파업이냐’는 주변의 시선도 따가웠고 ‘노조에 가입했어도 뒤에만 있어라’는 부모님의 신신당부도 가슴에 세기고 있었다.
하지만 도지혜 씨는 “이 병원에 오래 다닐 생각을 하니까 파업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앞으로 몇 년 간은 더 일해야겠는데 지금처럼 부당하게 대우받으면서 다닐 생각하니깐 너무 끔찍하더라고요.”
노조에 따르면 한도병원 영양과 직원들은 하루 13시간을 일하지만 휴게시간은 식사시간을 포함해 고작 20분에 불과하다. 휴일은 한달에 4번이다. 한달에 100시간 넘게 연장근로를 하지만 연장근로수당이나 휴일수당은 단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물리치료실 직원들은 연차휴가 계산법을 몰랐다고 한다. 근속년수와 상관없이 1년에 딱 하루였기 때문이다. 또, 간호사들은 한 달에 보름 가까이 야간근무로 배치되기 일쑤이고 심지어 임산부조차 똑같이 야간근무를 해왔다. 관리과 직원들은 24시간 근무를 한달에 10일 이상 해왔지만 이에 따른 연장·야간·휴일근로수당은 받은 적이 없다. 모두 근로기준법 위반이다.
여기에 지난 2월 병원측은 전 직원에게 사직서를 쓰게 하고 호봉제에서 연봉제로 전환했다. 또한 400%의 상여금은 절반수준으로 뚝 떨어졌으며, 6년만 임금인상이 됐지만 인상된 10만원조차 식비명목으로 회수해갔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직원들은 결국 '노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탈퇴서 안쓰면 노조원으로 간주, 걸러내겠다"
노조를 결성한 이후, 병원 사측은 김선화 지부장을 비롯한 3명에게 해고를 통보하는 등 노조에 대해 심한 적대감을 보여왔다. 병원 로비에 설치된 파업농성장에서는 구사대와 노조원 간의 수차례 물리적 충돌이 발생, 조합원 중 1명이 실신하여 인근의 고대 안산병원으로 후송되기도 했다.
또한 병원측은 한도병원뿐만 아니라 별개의 법인소유로 되어있는 신축병원(대아 한도병원)의 전 직원들에게 노조 탈퇴서를 나눠주며 "탈퇴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노조원으로 간주하고 걸러내겠다"고 말하는 등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으로 노조를 아연실색케 만들었다.
폐업 신고가 접수된 지난 10일에는 보건의료노조 나영명 조직실장은 "한도병원과 같이 노조가 결성됐다는 이유로 병원이 하루아침에 폐업한 사례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며 "사태가 이처럼 심각해진 원인은 사용자의 노조혐오증"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보건의료노조 차원에서 위장폐업에 맞선 장기적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로 해결방안에 대한 대한 답변을 대신했다. 대화와 교섭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말이다.
도지혜 씨는 끝으로 이렇게 말했다.
"친구하고 통화 중에 '파업 중'이라고 하니, '니가 무슨 현대자동차 조합원인 줄 아냐, 병원에서 무슨 파업이냐'고 핀잔을 주더라고요. 사람들은 잘 모를꺼에요. 2000년대 병원에서 일하지만 근무조건은 70년대보다도 못하다는 사실을 말이죠. 오죽하면 저희 부모님들께서 '노조가 꼭 있어야된다'고 저에게 권했겠어요."
한도병원 폐업으로 의료공백 우려
안산시, 병상 턱 없이 부족해
안산시의 병상은 수요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다. 올해 안산시 병상수요는 4천938석이지만 공급은 2천748석에 불과, 절반에 가까운 2190석이 부족한 형편이다.
이는 경기도가 제4기(2007년~2010년) 지역보건의료계획 수립을 위해 병상수요를 추계한 결과에 따른 것으로 안산시는 용인시(5천959석)에 이어 경기도 내에서 두 번째로 병상 수급 불균형이 크다.
경기도는 이같은 병상 수급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중소병원의 병상가동율 높이고 지역별 병상자원을 균등하게 배분한다고 밝혔으나 안산시는 한도병원의 폐업신고를 받아들여 오히려 역행하고 있다는 비난에 휩싸였다.
안산시 관계자는 "폐업 신고 접수 뒤 수차례 병원을 방문, 환자가 모두 퇴원한 것을 확인한 뒤 폐업 처리했다"며 "400병상 규모의 대아한도병원이 지난해 10월 선부동에 개원해 병원 폐업으로 인한 큰 의료공백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보건의료노조는 "병상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판에 시가 지나치게 안일하게 반응하고 있다"며 "안산시를 상대로 이번 폐업으로 인한 의료공백 사태에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강한 어조로 비난했다.
지난 10일에도 한도병원에는 폐업 결정을 모른 채 상당수의 환자들이 헛걸음을 해야했다. 조성애(53세) 씨도 다리를 다쳐 병원을 찾았다가 발길을 돌렸다. 조 씨는 "몸도 불편한 데 병원이 문을 닫았다고 하니 당황스럽다"면서 "노조 파업 때문이라 해도 병원의 처사가 지나치다"며 혀를 찼다.
한도병원 조합원들은 찾아오는 환자들을 대아 한도병원으로 안내하며 애를 태웠다. 같은 사용자가 운영하는 병원이지만 한도병원 조합원들은 "그저 환자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라며 인근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병원으로 안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반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