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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후 1998 년에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특사로 석방됐습니다 나 가기가 두려웠습니다 감옥에 수감된 것이 1970년 이었는데 28년을 옥살이 한 것이었습니다. 몸은 많이 쇠약해지고 모든 것이 약해 졌습니다 아가씨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제일 궁굼했습니다 출소 할때에 고향의 죤 목사님이 특사 명단을 보고 오셨습니다 반갑게 손을 잡고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서툰 한국말로 투푸를 못사와서 미안해요 했습니다 죤 목사님도 핸섬하고 발랄하던 청년에서 초로의 노인이 돼 가고 있었습니다 죤 목사님은 자신은 가까운 기일안에 한국목사님에게 교회를 인도하고 미국으로 가서 국제적인 선교 단체에서 일 할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강선생님 고향의 모든 시련은 이제 다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의 첫 말은 막내여동생 우순이가 미국에서 시민권을 받아서 미국에 정착했고 그 고향 청년은 지금 미국에서 목사로 시무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막내 여동생 에리자벳은 남편과 함께 흑인 아이를 하나를 한국에서 입양하여 키웠는데 그 흑인 양아들도 목사가 됐다고 했습니다. 그 동안 미국에서 동생으로 온 편지는 종종 읽었지만 흑인 아이 입양 건은 처음듣는 소식이었습니다. 죤 목사와 같이 한남동 집으로 제일 먼저 갔습니다 한남동 집은 번듯한 2층 주택으로 다시 지어졌고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가씨의 소식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다시 전에 일했던 고성 황태 해장국집을 찾았습니다 고성 황태 해장국집은 그대로였습니다 현대식으로 잘 지었다는 것 외는 간판도 그이름 그대로고 정씨 아들이 식당을 물려받아 그대로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초로의 노인이 된 정씨 아들은 저를 보고 반갑게 손을 잡고 특사 명단에서 보았다면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차려주는 황태 해장국을 먹으면서 혹시 제 한남동 집에 대해 아느냐고 하니 정씨 아들은 그 유명한 집을 왜 모르겠냐고 하더니 그집 마담이 자궁암 수술을 하고 치매가 되어서 요양원에 간지 오래됐고 그 집은 팔려서 새로지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담의 검둥이 아들은 어려서 미국에 입양시켰다고 했습니다. 곱게 생긴 여자였는데 인생은 기구했던 것 같다고 동정어린 눈빛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어느 요양원인지는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돈은 많았으니 좋은 곳에 갔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참.. 하면서 거기 요정에서 새끼 마담하던 여자가 하는 룸싸롱이 있는데 거길 가 보라고 했습니다 그 룸싸롱은 마담은 나이가 많아서 나오지 않고 일하는 아가씨들에게 물어 보면 마담 전화 번호를 알 수 있을거라고 했습니다. 죤 목사님은 무려 10억여원이 저금된 통장과 도장을 저에게 주고 헤어졌습니다 내 몫을 전부 다 고향 교회에 기부하라고 했는데 우순이가 그러지 않고 앞날을 위하여 그렇게 한 것 같았습니다 통장의 이름은 제 이름이 아니었고 죤 목사님 귀화한 이름 목요한 이었습니다 그 동안 금융 실명제로 부득이 이름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죤 목사님은 헤어지면서 제 손을 잡고 당신의 아버지에 의한 원죄는 당신의 동생 에리자벳이 다 갚았습니다 괴로워 하지 마세요 인간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했습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는 크고 작음 없이 다 같습니다 했습니다. 인간의 죄는 예수님이 다 가지고 가셨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도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목사들이 늘 하는 소리로만 들렸습니다
28년전 3억원이 이자가 복리로 붙어서 10억여원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한푼도 건드리지 않고 전달해 준 죤 목사님께 감사한 마음 뿐 이었습니다 정씨 아들이 알려준 룸싸롱을 찾은 것은 그날 저녁 어스름할 때 였습니다. 그 칼멘 룸싸롱은 크라운 호텔 뒷동네에 있었습니다 칼멘 룸싸롱에서 아가씨들을 만나 마담의 전화 번호를 물으니 웬 머리를 짧게 깍은 허름한 늙은이가 마담 전화 번호를 알려고 하나 싶어서 꼬치 꼬치 이유를 물었습니다 저는 아가씨들에게 마담과 같은 고향으로 먼 친척 오빠 된다고 거짓말을 했고 이름이 강만석이라고 했습니다. 아가씨들이 마담에게 전화를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한참을 전화로 무어라고 지꺼리더니 아가씨들은 혹시 마담언니 일했던 요정의 마담 엄마하고 아시는 사이냐고 묻는데요 해서 그렇다고 했더니 전화를 바꾸어 주었습니다. 곧 칼멘 룸싸롱 마담과 전화를 통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칼멘 룸싸롱 마담에게 전에 같이 일하셨던 마담 박영선을 모셨던 사람인데 이름이 강만석이라고 했습니다 마담은 반가운 목소리로 잘 압니다 마담 언니가 백번도 더 이야기를해서 아주 머리속에 암기하고 있습니다 하면서 아가씨의 근황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마담은 아가씨는 5년전에 자궁암 수술을 하고 몸이 약해서 요정을 팔고 아파트를 사서 살다가 치매가 심해져서 가장 시설이 좋고 깨끗하다는 새로 생긴 충주 치매 요양병원에 자기가 입원 시켰다고 했습니다 아가씨의 요양비는 아가씨 집을 판돈을 전부다 요양병원에 기탁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가씨의 검둥이 아들 샘은 어느 한국여자가 입양해서 미국으로 데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생긴건 한국여잔데 국적은 미국이라고 했고 이름이 영화배우 이름 같아서 기억나는데 에리자벳이라고 했던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순간 아 - 하는 짧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랬구나 하면서 논구렁에서 첫 울음을 울면서 천하게 태어난 우순이가 우순이가 하고 더이상 눈물이 앞을 가려서 생각을 진행 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학까지 나오고 국민학교만 나온 동네 청년과 결혼하면서 예수님의 뜻이라고 한 우순이가 또 나의 죄를 씻으려고 아가씨의 검둥이 아들까지 .. 이게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 우순아 우순아 하고 동생 이름을 부르니 눈에서 진한 눈물이 흘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아버지의 죄를 씻는다고 하면서 실은 제 자신의 연정 때문에 아가씨에게 집착하여 죄를 씻는다는 명분으로 제 짝사랑 애정행각을 한 셈이었습니다. 검둥이를 잔인하게 죽인 것도 강간이라는 행위에 대한 증오가 아니고 내 사랑, 내 우상, 나의 신(神) 을 파괴한 것에 대한 증오였습니다 죽은 검둥이 시체에 칼질을 열번이상 더 한 것은 제 자신에 감추어진 잔인성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태양을 보기가 두려웠습니다. 저 또한 큰 죄인이었습니다.
곧바로 충주 노인 병원을 찾았습니다. 위치도 좋고 깨끗하고 호텔 수준의 시설이었습니다. 박영선을 찾았습니다 휠체어에 앉은 아가씨는 전혀 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저를 보고는 샘이 많이 컸네 했습니다 이 늙은이를 보고 샘이라니.... 검둥이 아들 샘 말입니다 다시한번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저는 돈을 찾아서 충주호변의 별장촌에 아담하고 깨끗한 이 집을 샀습니다 그리고 충주 노인병원에 가서 퇴원 수속을 밟고 아가씨가 기탁한 돈 2억을 병원장에게 나중에 또 입원 할 지도 모르니 그대로 유보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터 지금까지 3년간 이렇게 아가씨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혼자 사는 거 보다는 낫잖습니까 ? 허허허허 그런데 제가 간이 아주 나빠서 건강이 얼마나 버틸지 걱정입니다 그냥 이렇게 살다가 가는거지요 뭐 더 살아봐야 뭐 있겠습니까 ? 아버지 만날 희망도... 이미 죽었을테니... 아버지 만나면 행패좀 부려 볼려고 별렀는데... 그 것도 끝났구요... 밑에 여동생 북에 남았다는 여동생도 이제는 포기했구요 미국간 막내 여동생 우순이는 가능하면 그대로 두고 내 소식을 전하지 않는게 도움 될 것 같습니다 가장 비천하게 태어나서 아버지의 죄와 저의 죄를 모두 끌어 안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여동생... 그대로 편하게 살도록 두는 것이.. 제가 마지막 남은 여동생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고향에 죤 목사님은 일년 전에 한국 목사님에게 교회를 인계하고 미국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그래서 가끔 오시던 죤 목사님과 가족의 발길도 끊어졌지요 제가 먼저 가고 나면 아가씨는 충주 노인병원에 다시 입원 하면 되구요.... 살아 있는 동안 아가씨를 매일 보다가 가고 싶습니다 이야기를 끝낸 강씨 어르신은 속이 시원하다고 하면서 밤도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라고 했습니다. 나는 강씨 어르신에게 아가씨와 사진 한장 찍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잘 찍어 달라고 해서 공사현장 사진을 찍기위한 나의 애장품 캐논 카메라로 후랫쉬 터트리면서 둘이 정답게 앉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강씨 어르신은 둘이서 사진은 생전 처음 찍는거라면서 좋아 했습니다 자고 가라는 강씨 어르신의 권유를 뿌리치고 자리를 일어서니 시간이 벌써 새벽 4시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