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男尊女卑 사상의 胎動
고려 시대에는 물론 조선 초기만 해도 여성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는 상대적으로 높았다.
시집(媤家, 남편의 집) 가는 것이 아니라 장가(丈家, 여자의 집)가는 전통적 결혼제도와 가족제도, 균등한 상속제도도 유지되면서 남성들이 오히려 처가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주자성리학을 국학으로 받아들인 정부의 강력한 정책으로 종법제도가 뿌리내리면서 점차 남성 씨족 중심의 정치, 경제, 문화 구조가 정착되면서 여성들의 지위는 낮아지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병자호란이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엣 피신해 있는 동안 수많은 조선의 여인들이 정조를 잃지 않기 위해 자결하였다. 수많은 여인들이 포로로 잡혀 만주로, 몽골로 끌려가 첩으로, 노예로 끔찍한 삶을 살아가야 했다.
소수의 여인들이 도망치거나 몸값을 지불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還鄕女들도 있었지만, 고향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그들을 기다린 것은 극한적인 냉대와 멸시와 차별뿐이었다.
점령군인 淸軍이 명의 저항 도시 양주에서 저지른 양주 주민의 학살을 기록한 『揚州十日記』에서 청군이 자주 말한 기록이 있다. “우리가 고려(조선)를 정복했을 때는 수만 명의 여자를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그 중 단 한 명도 정조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 중국 같은 대국 여자들은 어찌 이리 수치심을 모르는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수많은 조선의 여인들은 강에 몸을 던지고 불속에 뛰어들고 절벽에 뛰어내리고 단검으로 자결하면서 정절을 지켰다. 그러나 조선의 남자들은 이 여인들을 속박하고 천시하고 버렸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국가의 위기를 맞아 목숨을 버리고 의리를 지키는 남성들이 백에 한둘도 없었던 사실에 비해 여성들이 오히려 진정한 節義를 보였다.
한국 영화 「逆鱗」에서 한 하녀가 자신이 모시는 젊은 아씨를 불길에서 구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장면이 나온다. 그 이유는 외간 남자가 자신의 아씨를 만졌다는 것인데 따라서 살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여성들에게는 이렇듯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조선의 남성들은 자신들의 성적 문란과 사회에 대한 무책임과 국가의 존망에 무기력했던 치부를 주자성리학의 어느 책 장, 어느 行間에 감추려고 했는가?
근본적인 문제는 조선 여성들의 貞操라기 보다 조선 남성들의 正義의 부재였다.
‘節義’라는 명분으로 ‘사대부의 가풍’을 지키기 위해, 나라를 지키지 못한 자신들의 책임은 모두 묻어둔 채 외적에게 겁탈당한 여성들에겐 가혹한 책임을 물었다.
이 때의 주자성리학 宗法 개념과 節義 개념은 조선 여성들의 급격한 지위 추락과 남존여비 사상의 심화시켰다.
남존여비 시상의 근저에는 비겁한 조선 남성들의 자기보호 본능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