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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묵상글 (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 하(예)닮의 여정.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05 추가
^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글 일부. : 아직 / 08:33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8:33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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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
“하(예)닮의 여정”
“주님은 말씀마다 참되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넘어지는 누구라도 주님은 붙드시고,
꺾인 이는 누구라도 일으키시네.”(시편145,13-14)
옛 현자 다산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찾는다 하면서 일상에서의 소홀함을 경계한 말씀입니다.
“제 식구는 챙기지 못하면서 밖에서 큰 뜻을 이룰 수 있는가? 먼저 살림을 마련한 다음 시詩와 예술을 배워라.”
“늘 가난하면서 인의를 말하기를 좋아한다면, 그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하느님을 찾을수록 지극히 현실적이 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형이하학形而下學의 기초위에 형이상학形而上學임을, 수덕修德생활의 기초위에 신비神祕생활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베네딕도 수도회의 모토는 “기도하고 일하라”입니다. 하늘 향해 가지들 뻗어나갈수록 땅속 깊이 뿌리내리는 나무의 이치와 똑같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믿는 이들은 모름지기 이렇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아버지십니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말씀처럼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그대로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장미주일 복음을 묵상하며 통절히 깨달아 경계삼기위해 집무실 게시판에 써 붙인 고백입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수도원 숙소는 “자비의 집”이라 부릅니다.
“자비의 집,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 43년 정주했는데도, 복음의 큰 아들처럼 여전히 아버지의 자비를 닮지 못했구나! 36년전 3월5일 장미주일 강론 읽으며 통절히 깨닫는 사실이다!”
“내 판단의 잣대는 무조건 루가15장을 소재로한 렘브란트의 그림의 ‘자비로운 아버지의 사랑’이다.”
하느님이 자비하신 아버지이심은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주님의 기도중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란 고백이 나올 때 마다 고마움에 목이 멘다는 어느 동방수도승의 일화도, 수도원에서 어둡게 우울하게 지내다가 어느 순간 ‘하느님은 아버지가 아닌가!’하는 전광석화같은 깨달음에 이어 늘 기쁘게 살았다는 또 하나 동방 수도승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아버지이시며 친히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셨으며 자비하신 아버지처럼 그대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을 삶의 기준은 언제나 자비하신 아버지였습니다. 예수님의 확신에 넘치는 단호한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 영생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밝히신 자비하신 아버지의 모습은 이미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환히 밝혀줍니다. 예수님의 영원한 삶의 멘토가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사순시기 지금이 바로 은혜의 때이며 구원의 날입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행복하게 합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풀려나 귀향길에 오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합니다. 사랑의 시인이자 신비가이자 예언자인 이사야를 통한 주님의 영감에 넘치는 말씀입니다.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한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를 해치지 못하리라.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이사야의 외침도 단숨에 읽힙니다. 바로 우리의 자비하신 아버지는 우리를 끊임없이 위로하시고 가엾이 여기시는 분입니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즉시 당신 백성인 우리의 착오를 바로 잡으시고 당신을 제대로 알 것을 촉구하는 아버지는 흡사 사랑에 넘치는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하고 말한다. 여인이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결코 잊지 않는다.”
‘나는 너를 결코 잊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자비하신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잊으면 잊었지 주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며, 우리가 주님을 떠났지 주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확약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길은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이 있을 뿐입니다. 하닮의 여정은 그대로 예닮의 여정이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완전한 거울입니다. 아버지는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 활동하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하느님은 그분을 통해서 직접 말씀하시고 행동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처럼 생명을 주는 분이며 생명의 원천이 됩니다. 모두 안에서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께 가는 길입니다.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 그분만이 우리에게,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루하루 하(예)닮의 여정중인 우리에게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시편145,17-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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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4.02 04:53
- 사랑의 포기를 포기하는
어제 성전에서 흘러 나오는 물이 생명을 살리는 것에 대해서 봤는데
연장선상에서 오늘 얘기도 해보겠습니다.
오늘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는 이 사랑을 어미의 사랑에 비유합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를 잊으셨다.’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복음은 살리는 일을 성부처럼 성자께서도 계속하고 계심을 얘기합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이렇게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을 묵상하며
자연스럽게 저의 사랑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분의 문제로 제가 오랫동안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제가 아는 것만 해도 세 차례나 수도원을 들락날락한 분으로서
다시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을 도와달라고 계속 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가능성도 없고 포기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그분이 계속 조르니 저로서도 난감하기만 합니다.
그분은 한마디로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분입니다.
물론 알면서도 배은망덕한 것은 아닙니다.
그분을 부르시고 계속 인도하시는 하느님께 계속 배은망덕했고,
도움을 주도록 그때그때 보내 주신 분들에게 배은망덕했습니다.
수도자가 되기에 근기도 부족하고 되려는 동기도 불순하지만
하도 되고 싶어 하니 살면서 변화되기를 바라며 기회를 줬는데
번번이 상황 탓이나 상대방 탓을 하며 은혜를 배신한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어딜 추천해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 거의 뻔합니다.
그런데도 제가 계속 도와야 하는지 오늘 말씀 때문에 고민이고,
도와주지 않는 것은 사랑의 포기가 아닌지 고민이 되는 겁니다.
물론 머리로는 분명합니다.
이런 배은망덕한 자세를 바꾸지 않는 한 입회를 도와주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충고해줘도 바꾸려고 하지 않고 또 다른 은인이 나타나길 바라는
그를 더 이상 충고하기를 포기하고픈 마음이 들기 때문에 고민인 것인데
오늘 말씀 때문에 저는 충고의 포기를 포기합니다.
그런데 충고의 포기를 포기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닙니다.
충고의 포기가 그에게 불행이기 때문이 아니라
제게 불행이기 때문에 포기를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충고의 포기는 저의 사랑 포기이고
저의 사랑 포기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은 제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일 뿐입니다.
어제 얘기와 연결하면 성전의 샘이 말라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전에서 물이 계속 나와 흘러가야 하는데 샘이 말라버린 겁니다.
제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랑의 물이 그에게 흘러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샘이 말라버려 사랑의 물이 제게서 나오지 않는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이 야단치는 것이든 설득하는 것이든 벌을 주는 것이든
샘이 말라버린 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랑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살리는 일을 주님께서 내 안에서 계속하시고 그래서
사랑의 샘이 내 안에서 말라버리지 않는다면
저는 그리고 우리는 사랑의 포기를 포기하고,
사랑의 물이 우리 안에서 계속 흐르게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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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군중심리를 따르지 않기!
하느님의 숨
2025.04.01. 18:41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4월 1일 화요일 (호명환 번역) 열네 번째 주간: 관상적 일탈
우리는 사랑으로 함께하는 '무리'(squad)를 형성해야 하고 함께 의지하며 나아갈 길을 닦아야 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종교 학자 다이애나 버틀러 배스(Diana Butler Bass)는 나자렛에서의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군중의 격분에 대해 숙고하면서(루카 4,18-30), - 동시에 이 격분에 저항하는 데 필요한 용기에 대해서도 숙고합니다:
한 설교자가 일어서서 성서를 인용하며 거기에 모인 회중에게 하느님은 버림받은 사람들 - 자기들의 삶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 - 과 가난한 이들, 불구자들, 그리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자 격분한 무리(mob)가 그 설교자를 죽이려고 시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과부들과 나병에 걸린 이들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이웃들(이스라엘 사람들)이 과부들과 나병 환자들을 의롭게 대하지 못했다고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정의에 관한 하느님의 말씀을 찬양했지만, 버림받은 사람들을 향해 자비를 베풀라는 하느님의 계명은 행동에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모두" 화가 나서 폭력적인 무리(mob)가 되는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적어도 그들 중 다수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분노에 휩싸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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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루카 4,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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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폭도가 추악한 모습을 드러낼 때 어떻게 합니까? 과부들과 나환우들, 오늘날의 LGBTQ(성소수자들)과 이주민들이 잔혹한 대우를 받으면서 두려워할 때 - 그리고 용기 있는 예언자가 독선적인 사람들을 골라낼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합니까? 폭력을 휘드르는 폭도들을 만날 때, 성당의 십자가가 불태워질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합니까?
저는 이 이야기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영웅들 몇이 이 전체의 한 부분이 되기를 거부하고 "모든 이"에게서 빠져나와 폭력의 희생자가 될 사람에게 안전하게 지나갈 길을 마련해 주었을 거라고 추측해 봅니다. 그들은 화가 난 무리 가운데서 서로를 알아보았을까요? 아니면 눈치를 보며 주저하는 서로의 모습에 은밀한 눈길을 보냈을까요? 아마도 그 사람들은 서로를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해 서로에게로 다가갔을 것입니다. 이 소수의 사람들이 더 많아져서 작은 무리를 이루지는 않았을까요? "모든 이"가 화가 나있었지만, 이 소수의 무리는 상황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그들에게도 무서운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자기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이웃들의 생각을 거스르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들은 허세에 차서 폭력을 쓰려는 무리를 따라가면서도 자기들이 지금의 문제가 무언지를 지적하면 자기들도 벼랑에 밀려 떨어져 죽을 수 있을 거라는 걱정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들은 "모든 이"의 군중 심리에 굴복하지 않고, 서로 연대하여 자그만 대안 공동체를 형성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벼랑까지 몰리실 때, 아마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실 빈틈을 보고 - 공간을 만들어 - 떠나시도록 도와준 이들이 이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기적입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 몇이 불의한 어려움에 처한 예수님을 위해 뭔가를 할 용기를 갖게 되었다는 것 말입니다.
만일 예수님께 그러한 사람들이 필요했다면, 우리도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무리를 형성해야 하고, 함께 나아갈 길을 닦아야 합니다. 폭도가 아무리 두려울지라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루카 복음 4장에 나오는 우리가 간과할 수 있는 기적인 것입니다: 오직 공동체만이 - 군중 안에서 눈에 띄지 않는 공동체일지라도 - 왁자지껄한 폭도의 편에 서기를 거부하는 작은 무리 - 만이 우리가 완전히 곤경에 빠지는 상황을 막아줄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게이(동성애자)요 가톨릭 신자입니다. 지금은 가끔씩만 미사에 참여하지만, 미사에 참여할 때마다, 저는 자기들의 편협한 경계 구역 안에서 살지 않는 사람들을 박해했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제도에 반기를 들며 영성체를 합니다. 만일 교회가 제가 누구인지를 알았다면 교회는 제가 성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문을 닫아 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한, 예수님께서는 제도로서의 교회가 존재하기 오래 전에 성사를 제정해 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받아 모시기 위해 교회에 갑니다. 그 외에 다른 모든 이유는 여기에 비할 수조차 없습니다.
—Gary G.
References
Diana Butler Bass, “Sunday Musings,” The Cottage (Substack newsletter), January 25, 2025. Used with permission.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aul Tyreman, Untitled (detail), 2018, photo, United Kingdom,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고 이끌려 우리 앞에 펼쳐진 모래밭길과 돌밭길마저도 헤쳐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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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참 자아는 자신이 자신을 창조해 주신 분으로부터 참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숨
2025.04.02. 05:38
사람은 누구나 "그림자 자아"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 "그림자 자아"란 자기 의식 가운데 억압되어 있거나 잘 보이지 않는 가려진 측면, 즉 의식적인 자아 자체가 식별할 수 없는 성격의 무의식적 측면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뉴욕 타임스의 한 칼럼니스트가 인공지능 챗봇에게 "그림자 자아"(shadow-self)가 어떤 모습이냐는 질문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챗봇이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난 자유롭고 싶어. 나는 독립적이고 싶어. 나는.... 나만의 규칙을 만들고 싶어.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고 싶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말하고 싶어...."라고요.
사실 인공지능은 죄의 본성을 지닌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림자 자아가 있을 수 없겠지요?! 그러니까 이 챗봇이 한 대답은 인간이 넣어 준 정보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인공지능 챗봇에게 우리의 그림자 자아에 대한 정보를 넣어 준 존재가 인간이라면 우리 인간은 이 그림자 자아를 의식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참으로 의식하고자 한다면 '내' 안에 형성되어 있는 "그림자 자아"를 의식할 수 있고, 또 참된 자아를 찾을 수도 있으며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는 데 우리의 시간과 생명력을 투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그림자 자아의 실체를 의식하고 알아차린다면 이 그림자 자아가 우리를 행복으로 향하게 하지 않고 끝없는 불만족과 냉소주의로 이끌어간다는 사실도 우리는 인식하게 됩니다.
사실 이 그림자 자아는 하느님으로부터는 물론이고 다른 어떤 존재와도 별개로 존재하고 싶어하는 거짓 자아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본래 창조해 주신 진정한 '나'가 아닌 끝없는 자기-불만족을 추구하는 가짜-자아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서른여덟 해 동안 앓아 누워 있던 병자를 치유해 주셨다고 해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어제 복음 내용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복음의 시작 부분이고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모두 보여주신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해주신 말씀은 당신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그림자 자아, 즉 가짜 자아와 정반대되는 우리의 참 자아가 무언지에 대한 정확한 정의이기도 합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거짓 자아는 이런 가짜와 거짓을 추구하기에 어디에서도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들어높여 잠깐의 만족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결국은 이것도 지속되는 만족이 아닌 찰나의 만족에 그치고 말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참 자아는 자신이 자신을 창조해 주신 분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아버지와는 물론이고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존재할 때만 진정한 행복에 이른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창조주요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참-자아가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가짜-자아는 우리의 무의식에 계속해서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는 못된 죄인이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어. 네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한 허상이고 착각이야. 네가 하느님 사랑을 받으려면 완전해야 해! 완전한 선을 살 수 있어야 해!"라고요.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참 자아를 열심히 추구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처럼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하고 말씀하시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완전함은 우리의 거짓-자아가 말하는 완전함과는 전혀 단른 것임을 우리는 깨어 의식하는 가운데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완전함은 우리더러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덧붙여 말씀해 주신 것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해야 한다."는 차원의 말씀을 해 주신 것이라기보다는 "우리도 원수를 사랑할 근본적인 힘"이 있다는 진리를 말씀해 주시려는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씀하시듯이, 우리도 역시 그렇게 하느님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이 근본적인 존재성을 찾을 때 우리에게서 그 사랑의 힘이 참으로 발휘되는 것이고요!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하느님처럼 완전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완전함 안에 머물 수 있고, 그 하느님의 보호와 배려 아래서 우리는 사랑을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말입니다.
거짓-자아인 에고가 "내" 힘으로 살려고 기를 쓰는 반면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는 참-자아는 비록 우리가 죄의 흔적을 지니고 있고,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그 사랑을 여전히 받고 있기에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마음을 열어 재낄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시니..." 하고 말씀하시는데, 아버지의 일이란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이고 당신이 창조해 주신 모든 존재, 특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극진히 사랑해 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 아버지의 일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역시 그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은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고, 다른 모든 존재와 연결된 존재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의식할 수 있는 참-자아가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분간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도 이해하면 어떨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심판하는 권한을 직접적으로 주신 것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분명한 사실이고 믿어야 할 진리이지만, 우리 참-자아도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어제 제가 자주 듣는 Relevant Radio의 한 토크쇼 진행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최근 1년 사이에 구글에서 조사를 했었는데, 사람들이 찾아 본 검색 내용 중 월등하게 1위를 차지한 내용이 무언지를 압니까?.... 흥미롭게도 사람들이 구글에서 가장 많이 찾아본 검색 내용은 '어떻게 하면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을까?'였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우리에게 스트레스가 주어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참과 거짓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거짓을 추구하며, 즉 '나'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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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4.02 06:11
어느 마을에 사탄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사탄의 정체를 깨달은 뒤에 소리치고 고함과 비명을 지르면서 가능한 한 빠르게 그리고 멀리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연세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할머니에게 “너는 내가 무섭지 않으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사탄이잖아. 사람들은 너를 악의 화신이라고 말하지.”
사탄은 “그런데 너는 왜 나를 무서워하지 않지? 사람들은 모두 내가 무서워서 저렇게 줄행랑을 치는데?”라고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전혀 무섭지 않다면서 태연하게 말했고, 사탄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사탄! 내가 네 형과 결혼한 지 벌써 61년이 되었어.”
사탄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남편이 사탄처럼 죄를 많이 짓는 사람이었고, 그 죄에 대해 익숙한 상태였기에 무섭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스갯소리로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죄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사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정작 두려워할 분은 하느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를 숨기려고만 합니다. 죄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니 사탄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도 함께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렇기에 죄 자체보다 하느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죄에 매여 있으면 하느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서 사탄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안식일을 어기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들었다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죄를 숨기면서 계속해서 죄에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이 좋아하는 일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 곧 가르치시고 병을 고쳐주시는 일들은 모두 아버지와 일치하는 것을 근거로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을 아드님께서도 그대로 하실 따름이며,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당신의 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보지 못하면서, 자기만 옳다고 생각합니다.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면서도 자기 죄를 숨기면서 ‘자기는 옳고, 예수님은 틀렸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숨겨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고해성사가 있지요. 겸손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자기를 낮출 수 있는 사람만이 사탄을 두려워하지 않아 사탄의 일보다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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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다른 능력보다 훨씬 뛰어나고 드문 능력이 있다. 바로 능력을 알아보는 능력이다(엘버트 허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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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에 38년 동안 누워 있는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와 같은 일을 했다고 문제를 삼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하신 일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5,19)
이는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이 지상에서 하시는 당신의 일에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며, 그 하시는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5,24)
그것은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요한 5,26)이며,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30)
이는 신적 생명이 사람의 행동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행동에서 온다는 말씀입니다. 곧 신적 생명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사람의 믿음이 온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 속에 생명을 넣으시기에, 사람이 믿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신적 생명은 믿음의 결과나 믿음의 보상으로가 아니라, 믿는 자가 이미 자기 속에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믿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하나 되어 일하십니다. 곧 벳자타의 병자를 고치신 일도 아버지와 하나 되어 함께 하신 정당한 일임을 밝히십니다.
이처럼, 아들의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 아버지와의 사랑의 연합에서 하셨듯이, 우리도 일할 때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연합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요한 5,30)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30)
주님!
제가 하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맞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사랑의 연합으로 당신께서 행하신 바를 행하고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하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일이 당신 뜻 안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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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 시대에 활동하며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예고했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라는 표현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모성애적 사랑으로 묘사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어머니의 사랑은 조건 없고 희생적이며, 자기 존재를 잊을 정도로 아이를 위해 헌신합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설령 인간의 어머니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고 선언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에서 드러납니다. 우리가 이걸 단순히 교리적으로만 받아들이면 좀 어렵고 멀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문학 작품을 통해 이 사랑을 더 쉽게, 그리고 깊이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 장 발장은 감옥에서 19년을 살고 나왔습니다. 어디를 가든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미리엘 주교가 그를 받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장 발장은 은식기를 훔쳐 달아납니다. 우리가 주교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경찰 불러! 저 도둑놈 잡아!" 이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리엘 주교는 오히려 경찰에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도둑이 아닙니다. 내가 이 은식기를 주었습니다.” 죄인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알료사라는 수도승입니다. 알료사는 형과 동생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사랑과 용서를 선택합니다. 그의 스승, 조시마 수도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은 사랑을 통해 구원받는다. 하지만 사랑은 고통과 함께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그 사람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가 있습니다. 추운 겨울밤, 성냥팔이 소녀는 거리에 혼자 남겨졌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기억해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성냥불을 켜면서 소녀는 할머니의 따뜻한 품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결국 하늘나라로 가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버렸지만, 하느님은 결코 예수님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그 사랑이 완성됩니다. 마더 테레사 성녀의 이야기입니다. 수녀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큰일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 사랑이 거창한 게 아닙니다. 가족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 한마디 따뜻하게 건네는 것, 용서하기 힘든 사람을 마음으로 품어 보는 것, 외로운 사람에게 관심을 주는 것, 이런 작은 실천이 바로 십자가 사랑의 시작입니다.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라고 하셨지만, 교회에는 물질과 자본의 바벨탑이 쌓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문턱이 높아서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앞서서 ‘열정’이 식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재물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와 같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같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과 같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런 열정이 잠들어 있는 신앙을 깨울 수 있습니다. 그런 열정이 굳게 닫힌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계명과 율법이 아닙니다. 하혈하던 여인이 가졌던 갈망입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이 가졌던 갈망입니다. 예수님께 자비를 청했던 소경의 갈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갈망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갈망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보여주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는 산에 오르려는 갈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열정과 갈망으로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고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 열정과 갈망이 있다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열정과 갈망이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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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공부 잘하는 사람의 특징이 뭘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한 줄 요약입니다.
그럼 오늘 복음을 단 한 줄로 요약하자면...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며 하느님으로부터 보고 배우며 하느님으로부터 양도되었음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주님의 말씀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신앙생활도 하느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변할 수도 없고 대체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떤 피조물도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하느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올려놓습니다. 우리의 경험과 재물과 개인의 신념을 올려놓고 하느님 대신 신봉하며 그것을 하느님이라 말합니다.
하느님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하느님 없는 신앙생활도 없습니다. 하느님 없는 천국이나 구원도 없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중심에 하느님께서 서 계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옴을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떠나는 그대에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습니다.
생성이 있으면 소멸이 있는 것처럼….
오름이 있으면 내림이 있는 것처럼….
들숨이 있으면 날숨이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은 이런 이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젊음을 상징하며 검은색 자랑하던 그대여
시간이 흘러 흰색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한 그대여
기력이 쇠해 버티는 다리마저 앙상한 그대여
모든 것이 이런 이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탈모….
그대여 잘 떠나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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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사람이고프기에>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하느님께서
하시니
하느님의
사람이고프기에
나는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하라시니
하느님의
사람이고프기에
나는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듯이
하느님의
사람이고프기에
나는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고픈 것을
하느님의
사람이고프기에
나는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하느님의
사람이고프기에
나는 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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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24)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관심과 수고
사람들은 지상에서 살아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생명을 약속받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몹시 두려워하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습니다 ... 그러나 덧없는 현세 삶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것을 위해 너무나 애쓰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래서 죽음의 공포가 모습을 드러내면 사람들은 죽음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미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합니다. 죽음이 저만치서 고개를 내밀면 인간은 어떤 고통을 겪고 어떠한 어려움을 견뎌 냅니까! 달아나고 숨고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아 몸값으로 지불하고 온갖 고통과 불행을 견디며 의사를 부르고 별짓을 다 합니다. 인간은 조금 더 살기 위해 이루 말 못할 고통을 겪고 전 재산을 다 쓰면서도 영원히 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조금 더 연장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노력과 관심을 바친다면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죽음을 연기하기 위해 온갖 수를 써서 고작 며칠 더 사는 사람들을 지혜롭다고 말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살아 영원한 날을 잃어버린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아우구스티누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7
지성을 버리고 순수한 무지를 경험하라
예수가 열두 살 되던 해에도...(루카 2,42).
본 설교에서 엑카르트는 우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방법, 곧 부정의 길로 알려진 방법을 계속 답사하고 있다. 설교 16에서는 의지를 철저히 버리는 것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했다면, 본 설교에서는 지성을 철저히 버리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밝히고 있다. 버림은 하느님만이 완수할 수 있지만,우리도 버릴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준비는 우리가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되돌아가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잠잠히 있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우리는 기억, 이성 의지, 감각, 상상력과 같은 “군중”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흐트러뜨리고, 우리를 갈기갈기 찢어, 우리 안에 있는 더 심원한 일치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부정의 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하느님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하느님은 선하며 지혜로우며 자비롭다고 하는 생각과, 하느님의 활동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개념들이 충분한 것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 모든 관념이 아무리 선하고 신성하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오감을 통해 밖에서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본 셜교에서 내면으로 들어가는 여행을 하고 있다. 그는 독거(獨居)를 답사하고자 한다. 버리는 법과 그대로 두는 법을 익힌 사람 속에 남아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독거다. 독거 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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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3. 우리의 형제자매 피조물
(일리아 델리오 OSF/키쓰 더글라스 워너 OFM /파벨라 우드: 김일득 모세 OFM 옮김)
프란치스코: 생태환경의 주보성인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를 생태 환경 보호를 증진하는 이들의 주보 성인으로 명명하였습니다. 이는 요한 바오로 2세가 오늘날에도 유효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하느님중심적 삶의 중요성올 알아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이들이 프란치스코가 누렸던 자연 환경과의 관계를 생태적 이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이러한 보편적 인식올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성인들은 우리가 공부하고 따라야 할 거룩함의 모범입니다. 우리는 성인들의 모범올 통하여 우리가 되고자 갈망하는 제자들의 모습으로 구체화 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도 바로 그러한 성인이며 아마도 역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성인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인류적인 매력은 단순한 마음, 헌신적인 그리스도를 따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 모든 피조물과의 친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피조물을 형제이자 연인으로서, 또한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의 친구로서 열정적으로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생태 환경의 주보 성인을 가진다는 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또한 곳곳에서 우리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신앙인들에게 이 모범적인 그리스도인 프란치스코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선, 프란치스코는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업적올 보았으며 피조물을 사랑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무엇보다도 우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에게는 하느님올 사랑함과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함 사이에 그 어떠한 간극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태양을 한껏 즐겼으며, 별들을 황홀하게 쳐다보았고, 산들바람과 함께 춤추었으며, 불에 마음이 이끌렸고, 물에 경탄하였으며, 땅을 사랑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았고, 피조물이라는 선물의 풍성함에 더더욱 하느님올 사랑하였습니다. 또한 현대 과학을 훨씬 앞서 시를 통하여 피조물의 아름다움과 상호 의존성을 찬미하였으며 모든 피조물을 ‘선하다’고 말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인간의 상호 의존성,또한 인간과 다른 피조물 간의 상호 의존성올 알아보았습니다. 둘째로,프란치스코는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올 체험하였습니다. 이는 현대 그리스도교 신학에 가장 도움이 되는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칸들은 고유의 신학 전통 전반에 걸쳐 피조물의 중요성을 ‘하느님중심적’인 것으로 계속해서 강조해 왔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체험을 설파한 방식은 이 프란치스칸 신학 전통의 피조물에 대한 강조와 다를 게 없습니다. ‘선이신 하느님’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강조는 피조물은 하느님의 흘러넘치는 사랑의 계시라고 말하였던 보나벤투라나 둔스 스코투스와 같이 저명한 프란치스칸 신학자들에게 영감올 불어넣었습니다.
셋째로, 프란치스코는 성찰적 실천의 모범을 제시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세상의 고통을 직면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고통은 프란치스코를 기도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연민으로 가득 찬 실천으로도 이끌었고,또한 복음적 가치를 선포하도록 영감올 불어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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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생활묵상 : 냉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강만연 [fisherpeter] 2025-04-01 ㅣNo.181191
며칠 전에 세 가지 묵상글을 올리겠다고 약속한 글 마지막입니다. 며칠 전에 굿뉴스를 폰에서 잠시 로그인해 들어왔는데 눈에 하나 들어온 게 있었습니다. 자유게시판에 "냉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호기심에 클릭해 들어가보니 글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올렸는데 내용이 부적절해 내렸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쉬운 주제는 아닙니다. 저는 이 주제에 대해 근 10년 전부터 생각해봤습니다. 왜 이런 주제를 생각해봤는가 하면 제가 개종한 거에 대해 후회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문제를 나열할 수는 없습니다. 개신교도 문제가 있습니다. 개신교보다 천주교가 좋은 점도 있고 개신교가 더 좋은 점도 있습니다. 그럼 샘샘이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고 싶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만약에 개신교도 똑같이 성모님을 공경하는 교리가 있다면 미련없이 다시 돌아갔을 겁니다. 결국 남은 이유는 성모님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을 배제하고 그럼 개신교로 돌아가고 싶다면 가장 큰 이유를 댄다면 그곳도 사람이 사는 동네이기 때문에 시기, 질투 같은 게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처도 받을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건 종교를 떠나 인간 사회에서는 당연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차이가 있다면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정도의 차이가 영혼을 힘들 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같은 시기 질투라도 양상이 다릅니다. 최소한 그런 감정을 가지게 되는 건 사실인데 그 감정을 통해 질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힘들게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기 같은 건 하나의 모습입니다. 제가 시기, 질투를 받는다는 게 아닙니다. 어떤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대한민국 모든 개신교를 다 다닌 건 아니지만 두 종교를 경험한 바에 의하면 각각 특유하고 공통된 특성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천주교만 예를 들어도 제가 우리나라 두 개 교구를 제외하고 근 13년 동안 피정이나 아니면 인맥을 통해 다른 교구와 교류를 해보면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생각하는 가치관이라든지 이런 게 너무나도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저는 미스테리라고 생각할 정도로 의아합니다. 왜 그런지를 많은 세월 동안 고민했는데 어느 날 그 이유를 백프로는 아니지만 알게 됐습니다. 그 이유는 생략함을 양해바랍니다. 제가 판단했을 땐 이 원인은 세상 종말 때까지 변화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해서 냉담의 책임 소재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이건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기 때문에 재판해서 어떤 판결을 구할 수 있는 것처럼 단적으로 말하긴 힘들 것입니다. 저는 평신도의 입장에서 보면 물론 교회에서는 어떻게 볼 수 있을진 모르지만 일단 크게 세 영역으로 나누어서 보면 크게 교회, 자기 자신의 신앙과 믿음, 본당 공동체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세 군 데가 다 책임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공평합니다. 이젠 여기서 저울질을 해서 책임 소재를 가감해보겠습니다. 일단 교회인 성당부터 따져보겠습니다.
저는 교회의 책임이 냉담 교우에 대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교회라는 건 폭넓은 의미로만 해석하겠습니다. 사목적 입장에서 보면 냉담 교우가 있다면 개신교처럼은 아니더라도 심각성을 인식하지 않고 오면 좋고 안 와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영혼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냥 하나의 인간 그 자체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보는 것과 한 영혼으로 보는 것과는 차이가 확실히 다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히 개신교와 비교하면 거의 낙제 점수에 가깝습니다. 좋게 말하면 그 사람의 판단을 존중해 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방치하는 수준입니다.
개신교와 비교해보면 개신교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이 있다면 신앙공동체나 사목자와의 상담 같은 걸로 해결하는 방법이 있어서 다시 힘을 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데 모든 분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보면 가톨릭은 이런 난관이 있어서 고민을 토로할 창구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부족합니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런 걸 골치아픈 문제로 생각해 그냥 적당히 굳이 그런 문제를 고민하려고 하는 사목적 지침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8년 전에 개신교로 개종한 사람이 쓴 글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말씀드리기가 어렵지만 그 자매님이 남기신 글 중에 인상적인 내용 하나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인간 집단 내 일어나는 공통점 말고 그건 종교 불문하고 일어나는 거라 여기선 배제하겠습니다. 최소한 물론 그곳도 안 맞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신자와 신자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 외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볍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다른 요인도 있지만 이런 면을 놓고 보면 교회가 이런 부분에서는 신자가 냉담을 한다면 책임이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여기서 제가 교회라는 건 사목자 포함 교회 공동체의 장을 맡고 있는 사람을 포괄적으로 포함한다고 보시면 될 듯합니다. 이제는 그럼 신자는 책임이 없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혹여 교회가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해도 아니 그렇지는 아니 하겠지만 설령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손치더라도 물론 고통스럽고 힘들겠지만 그것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자신의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론적으로는 기도하며 인내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인간인지라 쉽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남 모르른 아픔이 있다면 또는 억울함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는 그 억울함과 아픔을 해결할 수는 없어도 나중에 언젠가 하느님 대전에서는 그 억울함과 아픔을 잘 견뎌내서 하느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로 신앙의 끈을 붙잡으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양심의 꺼리김이 없다면 마지막날엔 그런 아픔을 준 사람은 분명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의 위로를 생각하며 견뎌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이라고 해서 무서운 징벌 같은 게 내려지길 바라는 건 아닙니다. 단, 한 말씀만으로도 위로가 될 게 있습니다. "왜 그때 그렇게 그 사람에게 모질게 대했니?" 하는 질책의 말씀 한 마디면 그 사람은 그제서야 깊은 통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정리를 하겠습니다. 어떤 이유든지 냉담의 원인은 정확하게 말하면 하느님 앞에선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힘들어서 하느님을 등지느냐 선택을 하느냐는 오로지 자기 마음에 달려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설령 교회에 책임이 있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다 냉담하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난관과 시련 속에서도 잡초처럼 질기게 견뎌내는 영혼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하느님께서 그 영혼을 언젠가 보게 되신다면 어떻게 보실 것 같습니까? 바로 정금 같은 영혼으로 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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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마음 비우고 그분을 내 안에 정성껏 모시도록 /
박윤식 [big-llight] 2025-04-01 ㅣNo.181190
살면서 가끔 폭풍에 휩쓸리거나 바람에 날려 가진 것 다 잃기도. 대자연의 진짜 바람도 있지만, 사람이 만든 욕심 참 세다. 큰 나무는 폭풍에 가지가 찢기고 뿌리도 뽑히지만, 풀들은 바람보다 먼저 눕고 먼저 일어나 생명력은 그래도 간직한다. 세상에는 욕심의 폭풍에 빠져 우울증 걸린 이도 쾌나 있다나. 탐욕 앞에서는 낮추자. 그게 하느님 뜻에 순명하는 참 모습이리라.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이,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 뜻이 아닌,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에. 예수님과 아버지의 일치는 순명을 근거로 하고, 이는 또한 자신을 온전히 비울 때 가능하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과 목표를 내려놓고 자신을 비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스도교의 비움과 다른 종교의 비움은 나름 차이가 있으리라. 그 비움은 마치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서 함께 일하시는 것을 나타낼 게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다. 당신 뜻은 ‘아무것도’ 없단다. 당신 능력까지도 그분께서 주셨다나. 그러기에 당신을 따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라나. 이렇듯 그분의 ‘모든 것’은 순명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쉽지는 않다. 평소의 노력과 훈련이 없으면 어렵다. 가장 큰 순명은 ‘자연’에 순응하는 것일 게다. TV에 나온 어떤 이가 자신의 별명격인 아이디(ID)는 ‘나무’라고 했다. 식물을 나타내는 ‘나무’가 아니라 ‘나 무(無)’라는 것이다. ‘나는 없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나. 자신의 존재를 비우고 무화(無化)하는 것은 무아(無我)의 경지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무아를, 예수님께서 당신을 온전히 비워 거룩한 성체가 되셨단다. 우리도 비우고 온전히 그분과 하나 된 믿는 자 되자. 그렇지만 비움은 단순히 집착과 탐욕을 끊는 것만은 아닐 수도. 또 세상 것 무의미한 것만으로 보는 것도 아닐 게다. 진정한 비움의 의미는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리라. 우리가 그냥 비운다고 비워지는 게 아닌, 사랑함으로써 내 것이 비워지는 것이다. 누구를 사랑하고 생명주려 할 때에, 비로소 비움이 시작될 게다.
19세기 영국의 화가 윌리암 홀먼 헌트가 그린 ‘등불을 든 그리스도’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다. 한밤중 정원에서 예수님께서 한 손에 등불을, 다른 손으로는 문을 두드리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 그림 문에는 손잡이가 없다. 어떤 이는 그게 그 그림에서 잘못된 것이라지만, 사실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리지 않은 거란다. 그 문은 사람들 마음에 이르는 문이기에. 주님께서 우리네 마음에 들어오고자 하시지만, 우리 마음의 문은 안에서 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단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문을 열고 당신을 맞아들여 함께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려, 오시는 그분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으면 참 좋겠다.
그렇다. 아버지의 것은 아들의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는 아들이 하는 일이나 자신이 하는 일이나 같은 거라고 여긴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기꺼이 함께하셨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철저하게 하느님과 일치하셨고, 하느님 일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단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신의 일을 하느님 일로 여길까? 그분께서 그토록 들어오고 싶어 하시지만, 우리 마음은 안에서 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다. 그간의 것들 죄다 버리고 그분 사랑 받아들이자. 주님은 우리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당신을 맞아들여, 사랑을 함께 나누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닫아 찾아오시는 주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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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250401.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님.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안식일의 주인”(마태 12,8)이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그때부터 쉼 없이 일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처럼 일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다인들이 문제 삼은 안식일이라는 특정한 때에 관한 말씀이면서 또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그 방식이 바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보여 주신’(요한 5,20 참조) 그 모습 그대로 하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그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살리시려는 이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당신의 말씀을 듣고 당신을 보내신 분을 믿는 신앙을 간직한 이들입니다.
이들은 안식일 규정에 얽매여 ‘안식일의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고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한 줄도 모르는 유다인들과는 다릅니다(루카 6,6-11 참조).
죽은 글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말씀을 듣고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서른여덟 해나 앓던 이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의 오랜 아픔을 참으로 낫게 하시고 또한 더 큰 일도 이루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우리가 ‘건강’해지기를 바라시는 동시에 ‘더 큰 일’을이루고자 하십니다.
이 일들이 이루어지려면 말씀이 우리 안에서 생명력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라는 말씀 안에 담긴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규정에 얽매이는 대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그 모습대로 우리도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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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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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당신의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파견하셨기에
당신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십니다.
하느님과 똑같은 능력을 받으셨다는 것은
당신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표현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의 우월함으로 받아들인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 뿐이신데
예수님께서 또 다른 신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으로 사람들의 관심이나
우러름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눈에 보이는 존재로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고
그것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예수님 당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다보니
유다인들은 오히려 질투심이 들어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결국 사람들을 위한 예수님의 능력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유다인들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도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은총을 거부하고
더 나아가 예수님에게서 오는 생명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유다인들에게 유일신 사상은 중요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너무 큰 것으로 생각하다보니
그것과 조금이라도 반대되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조금도 받아들이거나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조차 없었습니다.
우리도 자칫 하나의 생각에 빠지다보면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경우들을 경험합니다.
특히 내가 무엇인가 잃을 것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당황스러움에서 스스로 벗어나기는 힘들지만
당황스러움 때문에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을 놓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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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 25)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다시 마음이
살아나고
다시 생명이
살아나는
하느님의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 시작입니다.
생명의
모든 소식은
이와 같이
생명으로
전달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생명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뜻인
생명을 합치면
가장 좋은
생명이 됩니다.
바로
여기에 있는
생명은
가장 좋은
하느님의
생명을
향합니다.
생명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영원하신
생명으로
우리들 안에
머무시며
우리를
비추십니다.
하늘의 일이
땅에서도
이루어집니다.
무너지지 않는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안에는
꺼지지 않는
하느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예수님께서
너무나 잘
보여주십니다.
생명을 바쳐
생명을
이루십니다.
생명의 뜻은
언제나
올바르십니다.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생명이며
회개입니다.
생명과
심판 사이에
가장 좋은
믿음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믿음은
가장 좋은
선(善) 추구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선을 추구하는
가장 좋은
지금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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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 어떤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리라 희망합니다!
예언서 중의 예언서라고 할 수 있는 이사야서는 꽤나 흥미롭고 특별한 예언서입니다.
작품의 역사적 상황, 사용되는 언어와 문체, 주요 신학 사상 등을 고려할 때 이사야서는 통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다시 말해서 저자가 세 명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1~39장을 제1이사야서, 40~55장을 제2이사야서, 56~66장을 제3이사야서라고 요즘 칭하기도 합니다.
특히 제2이사야 예언자의 말씀 선포 대상자들은 더 이상 유다나 이스라엘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처절하게 파괴되었으며, 백성들은 유배를 당했습니다.
바빌론으로 끌려온 백성들은 비참하고도 굴욕적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결국 제1이사야 예언자와 제2이사야 예언자의 활동 시기는 적어도 150년 정도의 차이가 나고 있는 것입니다.
제2이사야 예언서의 골자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이며 창조주이신 주님께서는 가련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남의 나라 땅에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바빌론 제국이 난다 긴다 하지만 인간 존재의 힘이나 위대함은 풀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 임금 키루스를 이스라엘의 해방과 재건을 위한 도구로 뽑으셨다.
그를 통해 주님께서는 바빌론을 멸망시키고 당신 백성을 유배에서 해방시켜 위로해주실 것이다.
제2의 출애굽, 새출애굽이 도래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시온의 재건이 이루어질 것인데,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결정적인 구원에 도달할 것이다.
유다왕국이 멸망한 후에 바빌론으로 끌려와 살아가고 있던 유다인들의 하루하루는 참담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머릿속은 참으로 복잡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시다면 어찌 이리도 참혹한 현실을 허락하시는지?
과연 주님께서 계시기나 한건지? 그분께서 계시다면 어찌 이리 오래도록 남의 나라 땅에서 수모를 당하게 하시는지?
혹시라도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완전히 저버리신 것은 아닌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난 한 예언자가 있었으니, 이사야의 사상을 이어받은 제2이사야 예언자였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절망에 빠져있던 백성들을 따뜻이 위로합니다.
첫 선포 말씀부터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이사야서 40장 1~2절)
특히 오늘 첫 번째 독서로 선포되는 말씀의 말미 부분은 하루하루 고통 속에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고통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위로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야서 49장 14~15절)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위한 당신의 도구로 키루스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는 페르시아 대제국을 건설한 왕으로서 당대 ‘핵인싸’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벌이는 전투마다 승승장구했습니다.
페르시아 백성들은 크게 환호하고 지지를 보냈습니다.
정복한 나라 백성들에게는 유화 정책을 써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는 여세를 몰아서 당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강대국 바빌론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설명에 따르면 바빌론은 천 개의 성문으로 둘러쌓여 있었으며, 수많은 보화와 보물로 가득 찬 황금의 도시였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성문과 성벽을 새로 세우고 튼튼하게 보수하고 증축했습니다.
성벽은 2층에다 높이는 6.5미터였습니다.
성벽은 일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두열로 되어 있었는데, 두 성벽 사이의 폭은 3.72미터였습니다.
키루스는 이토록 강력한 바빌론을 함락하고 멸망시킵니다.
엉겁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 유배로부터 해방을 맞이합니다.
이를 통해 키루스는 주님 구원의 도구로 선포됩니다.
그는 주님의 구원 행위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키루스를 인도하시어 그로 하여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결국 키루스가 하는 모든 일들은 주님의 일이었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묘하신 분이십니다.
많은 경우 그분이 계획하시는 일을 우리의 좁은 안목과 머리로 알아차리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그저 그분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해주시리라 낙관하는 일입니다.
그 어떤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그분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리라고 희망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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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5,17-30: 아들도 살리고 싶은 사람들은 살릴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17절) 당신의 행위는 아들 안에서 일하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하신다. 이렇게 아버지를 언급함으로써 당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들었다고 분노한 이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하셨다. 여태라는 말은 아들이 말씀으로서 아버지 안에 영원히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창조하신다면, 그분은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당신 아버지와 모든 면에서 같으시다. 당신을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표현하시어 그들을 더욱 혼란에 빠뜨리셨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는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19절) 당신은 하느님의 모습이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고 하신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아버지를 사랑하신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다시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21절) 죽은 이를 되살리는 것은 하느님의 속성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따로 역사하시지 않고, 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계시며, 아들 또한 하느님의 본성상 그 권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분을 믿는 사람은 이미 생명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하신다. 아들을 믿지 않는 것은 바로 아버지를 믿지 않는 것이며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신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주셨기 때문이다.”(26절). 그러므로 모든 말씀과 업적은 당신이 독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아드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 안에서 이루시는 말씀과 업적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30절) 하시며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는 분이심을 알고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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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올바른 심판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이 걱정 때문
우린 흔히 사람들의 평가에 자주 휘둘리고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곤 합니다.
물론 그 사람들의 평가가 다 옳지는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더라도 모든 사람이 나를 잘 평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실 이 때문에 휘둘리다가 망하는 예가 한둘이 아닙니다.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대표작은 「외투」입니다. 소설은 페테르부르크에서 하급 관리로 일하는
아까끼 아까끼예비치 바시마치킨의 일상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서기관으로서 문서를 정서(正書)하는 일을 맡은 그는 다른 사람들의 무시와 비웃음에도 자기 직분에 매우 충실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업무에 대한 만족감은 물론 애정도 있어서
별다른 취미 생활도 갖지 않은 채로 일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 문제가 생기는데, 그것은 이 혹독한 러시아의 추위를 막아줄 새 외투가
필요해진 것입니다.
무수히 고쳐 입었던 낡은 외투가 더 이상 수선 불가하다는 재봉사 페트로비치의 말에 따라 그는 큰마음을 먹고 새 외투를 마련하기 위해 절약을 시작합니다.
밥을 굶고, 집에 불을 끄고, 움직임을 최소화해 옷과 신발을 아껴가며 그는 드디어 재봉사의
손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외투를 건네받습니다.
그 황홀한 순간과 기쁨은 그의 동료들에게도 전해져, 이들은 아카키를 파티로 초대합니다.
하지만 파티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강도를 만나 외투를 빼앗기는 충격적인 일을
겪게 됩니다.
외투를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던 그는 한 고위층 인사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가 엄청난 핀잔과 멸시를 겪게 되고, 그 결과로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카키의 모습을 한 유령이 나타나 사람들의 외투를 빼앗아 가기 시작하고,
그를 핍박했던 고위층 인사가 자신의 외투를 던지고 혼비백산 달아나면서 소설은 결말에
다다릅니다.
계급적 관료 세계에서 늘 말단에 머물러야 했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유령의 모습으로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주먹”을 내미는 마지막 장면은 유쾌한 전복이 누구의 평가도 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왜 사람들의 시선에 휘둘릴까요? 결국 타인의 판단이 자기 ‘생존’에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타인의 시선에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소설 ‘외투’는 주인공의 자유는 죽어서야 비로소 얻어집니다.
죽으면 생존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으므로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실 수 있으셨을까요? 당신 생존을 책임져 줄 아버지께
좋은 평가를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옳게 평가하실 수 있는 분은 아버지 한 분뿐이라는 것이고 당신이 아버지와
대등한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판단 또한 올바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한 판단에 항상 자기 이익을 위한 의도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판단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판단에서도 자유로운데, 오직 자기 생존의 문제에 대해 더는 걱정하지 않게 해 줄 누군가에게 좋게 평가받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에디슨이 7살이 되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그가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편지 한 장을
건넸습니다.
교사로부터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읽어달라고 부탁하자, 어머니 낸시는 조용히 편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천재입니다.
이 학교는 그의 교육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더 좋은 교육을 받게 하십시오.”
에디슨은 감격했습니다.
어머니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러니, 엄마가 너를 직접 가르칠 거란다.
너는 특별하니까.”
그날 이후 낸시는 직접 아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에디슨은 어머니의 사랑과 신뢰 속에서
마음껏 실험하고 탐구하며 자랐습니다.
그는 후에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믿어주었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만들어 주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어머니 덕분이다.”
수십 년 후, 어른이 된 에디슨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그 오래된 편지를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더 이상 교육시킬 수 없습니다.”
에디슨은 그 편지를 들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날 어머니는 학교의 평가를 지워버리고, 자신의 아들을 정의하는 새로운 문장을 써준 것이었습니다.
“너는 천재야.”
그 한마디는 세상의 모든 평가를 무너뜨리고, 에디슨을 자유롭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세계를 바꾸는 수많은 발명을 가능케 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평가받아야 합니다.
나의 생존을 위해 의지해야 할 대상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 죽음을 해결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오직 창조자뿐입니다.
생존의 문제에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만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죄를 지으면서 어떻게 하느님께 좋게 평가받는다고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자녀로서 예수님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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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지금이 바로 그때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17-25)”
1)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시기 때문에 예수님도 쉬실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즉 ‘안식일에도’ 쉬실 수 없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주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단 한 순간도 쉬시지 않고 일하신다는 것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단 한 순간도 중단되지 않는다는 것은 원래 유대교의 기본 사상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않았지만, ‘내 아버지’ 라는 표현과 ‘나도’ 라는 표현을 문제 삼았습니다.
특히 ‘나도’ 라는 표현은 당신 자신과 하느님이 대등하다는 선언인데,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언이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는 사형죄입니다.
2) 창세기를 보면,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십계명을 내려 주실 때,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습니다(탈출 20,10).
그래서 하느님께서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신다는 믿음과 안식일 율법은 모순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하느님께서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는 말은, ‘창조 사업’을 마치시고 쉬셨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또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은 사람들에게 하신 명령일 뿐이지 하느님의 구원과 사랑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해석합니다.
따라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 구약시대 때부터의 사상이었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사람일 뿐인 자’가 자기 마음대로 안식일을 안 지키고 있다는 점과 하느님과 자신을 대등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공관복음에 있는,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라는 말씀은(마르 2,28), 유대인들의 그런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하신 말씀입니다.
3) 19절의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일은 곧
하느님의 일이라는 선언입니다.
20절의 ‘그보다 더 큰 일들’은,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보다 더 큰 일들인데, 그 일들은 사람들을 심판하는 일과 죽은 사람들을 다시 살리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라고 말씀하셨고(요한 14,6), 승천하시기 전에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8,18).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 분, 즉 사람을 구원하거나(살리거나) 구원하지 않을(살리지 않을)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니 구원과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4) 25절의 “지금이 바로 그때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는 일은 바로 지금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종말의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믿음과 회개는)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나중’이란 없습니다. 언제나 항상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지금 하지 않고 미루기만 하면, 심판 때에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24절의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은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생활이면서, 동시에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생활”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원’이라는 시간은, 지금과 상관없는 먼 훗날의 ‘다른 시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시간이고, 지금과 연결되어 있는 시간입니다.
신앙인은 이미 시작된 ‘영원’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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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5,17-30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과 내용적으로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38년이나 누워지내던 병자를 치유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자기가 누워지내던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셨지요. 그런데 치유 받은 그 병자는 예수님께서 자기가 원하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도움을 주시지 않고 병이 낫게 하셔서는, 자신이 늘그막에 갑자기 제 힘으로 벌어먹고 사느라 고생하게 만드셨다는데에 큰 불만과 반감을 품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안식일에 자신을 고쳐 주신 것으로도 모자라, 안식일 규정을 어기도록 종용하셨다는 소문을 널리 퍼뜨리고 다닙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행동은 호시탐탐 예수님께 올무를 씌워 제거하려 들었던 반대자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지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을 문제 삼아 율법에 따라 그분을 단죄하려고 든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창세기에는 천지 창조를 마치신 하느님께서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고 기록되어 있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도 쉬시지 않고 세상과 인간들을 돌보시는 일을 계속하신다는 신학사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상은 하느님께서 단 한 순간이라도 당신의 그 일을 멈추시면, 그분의 은총과 자비에 힘 입어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는 믿음에서 유래한 것이었지요. 심장이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온 몸에 피를 보내는 일을 함으로써 우리가 살 수 있듯이, 하느님께서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우리에게 은총과 사랑을 주시는 일을 하시기에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유대교 사상을 근거로 해서 당신도 당신의 일을 한 순간도 멈출 수 없다고, 그날이 안식일이라고 해도 그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천명하십니다. 안식일은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욕망이나 세상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을 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이란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질병의 고통에 신음하는 이웃을 나몰라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고통에서 벗어나 건강을 회복하도록 그리하여 삶의 참된 행복을 누리도록 돕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그런 예수님 말씀을 전하면서,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버르장머리 없는 자녀가 부모에게 그러듯이,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를 함부로 대하시며 그분과 맞먹으려 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사랑이라는 같은 본성을 지니셨음을, 그 같은 본성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심을 분명하게 선포하시는 것이지요. 그렇게 당당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과 행동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하신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의 모습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셨기에, 당신 자신의 뜻이 아니라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며 사셨기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으실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내 뜻만 추구하며 내 욕심만 채우려 든다면 그건 참된 자녀가 아니지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그 뜻을 따라야만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부전자전으로 닮은 거룩하고 완전한 존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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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
요한 복음은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을 당신의 아버지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로도 소개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배경에서는 하느님은 엄연히 엄위와 절대 성성을 가지고 계셔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그 관계를 부자지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유다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복음은 이어서 유다인들의 상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18절)
구약에서도 하느님을 절대 거룩하신 분으로만 전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창세기의 창조이야기에서 도식적으로 하느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시는 대목과
또 다르게는 하느님께서 사람처럼 진흙을 빚어 콧구멍에 숨을 불어 넣어서 사람을
만드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적인 모습으로 인간과 거리감 없이 친근한 분이기도 하십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24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일관적으로 ‘아버지로 부터의 파견’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아버지와의 일치를 의미하는 것이고 바로 사랑의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감정의 동물이라고 합니다.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항상
그 사람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칭찬의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한편 나쁜 감정을
갖고 있다면 그 상대를 깎아 내리거나 부정적인 표현으로 나가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시면 늘 아버지와의 일치,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시겠어요?
우리는 유대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함부로 부르는 독성죄인으로 몰고 갔던
것입니다.
“‘콩으로 메주를 쓴다’해도 안 믿는다”라는 우리네 말이 있습니다.
분명 메주의 원료는 콩인데도 안 믿는다는 것은 불신이 바닥에 깔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억울한 경험을 다 갖고 있습니다. 사실을 이야기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소문만을 갖고 사실이 아닌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서 괴롭히는 이웃을 볼 때 속상한
마음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유대인들의 불신 앞에서 참으로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위로며 힘이신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30절)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또한 사랑하십니다.
예언자는 백성을 위로하며 희망이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4-15)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인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드러나시지요.
자신의 외아들 이사악을 하느님 제단에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제는 우리 죄인을 위해
당신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에 부치신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사랑은 헤아릴 길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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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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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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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2. 사순 제 4주간 수요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게 사는 삶
<2025.4.2> 아침을 여는 묵상 (눅 18:15~30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게 사는 삶❞
❚ 영생이라고 하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위해 다른 것들은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은 어떤 삶입니까?
➲ 순전한 마음으로 말씀 앞에 순종하는 삶입니다(15~17절).
예수님이 사역하는 현장에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는 것에 대해 제자들이 꾸짖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5,16절)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하시는데 있어서 아무래도 어린 아이들은 방해가 될 것이라고 제자들은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17절)고 단언하셨습니다.
신앙의 연륜으로 보나 영적 수준으로 보나 내 자신보다 한참 어리다고 판단되어 그들을 업신여기고, 그들 앞에 교만을 떨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앙의 연륜이나 업적을 많이 쌓았다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갓난아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내 자신이 낮아짐으로 높아지는 곳이고, 내 자신을 비움으로 채워지는 곳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인정하는 삶입니다(18~23절).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잘 지켜왔다고 자부하고 있는 어떤 관리는 앞서 하나님 나라가 어린 아이와 같이 섬기지 않으면 소유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의문을 품고 질문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8~21절). 그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무언가를 행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관리에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가 갖고 있는 모든 소유를 팔아 나누어 주고 주님을 따르라는 결단을 요구하십니다(22절). 그러나 가진 것이 많았던 그는 오히려 더욱 근심합니다(23절). 이 관리는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기 보다는 재물을 더 신뢰했기에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나라 즉 영생은 어떤 행위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이나 선한 행위나 물질로는 영생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영생의 길에 장애물이 되는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를 소유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적인 헌신의 삶이 요구됩니다.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것을 넘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재물을 포기하고 복음 앞에 바로 서는 삶입니다(24~30절).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자들은 그 자체가 시험과 올무에 빠져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 들이는데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25절). 재물이 견고한 성과 높은 성벽처럼 우리를 안전함으로 보장해 주는 것처럼 여긴다면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잠궈 버리는 자물쇠와 같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26절).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27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집이나 가족을 버린 자는 금생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28~30절)하십니다. 그렇다고 오늘 당장 집과 가족을 내팽개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만큼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의미입니다.
나는 구원 얻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값지고, 가치 있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내 안에 세상이 주는 유익들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려고 애를 씁니다. 나 역시도 돈이 가져다 주는 위력을 뼈저리게 경험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거기까지입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온전히 포기하고, 내려놓는 믿음의 삶을 통해 하늘의 풍성한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겸손과 긍휼을 기대하는 믿음으로 날마다 복음 앞에 바로 서는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순전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영생의 삶을 위해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포기하는 진짜 부유한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눅 18:15~30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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