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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회 어린이 동산 수상작
우리는 지구로 간다 - 심강우
다시 살아난 지구
“정말 초록색이네!”
지구를 찍은 사진이었다. 위성관제센터에서 몰래 빼 온 것이라고 했다. 아빠는 사진을 눈높이의 허공에 입체영상으로 띄웠다. 그리고 조금 전 말한 그곳을 수십 배로 확대했다. 엄마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이걸 빼내는 데 한 달이나 걸렸어.”
아빠가 했던 말을 또 했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였다.
엄마가 센서를 건드리자 주먹만 해졌던 초록색 점이 원래의 크기로 돌아갔다.
“설마… 상추씨만 한 저게 숲이라고? 뭔가 잘못됐을 거야. 촬영할 때 흔들렸을 수도 있잖아. 아니, 빛의 산란으로 인한 현상이 아닐까?”
“지구와의 거리를 생각하면 상추씨만 한 게 정상이야.”
“근데 빛의 산란이 뭐예요?”
내가 물었다.
“빛의 산란이란 말이지…….”
엄마가 뜸을 들이자 아빠가 나섰다.
“빛의 산란이란… 그러니까 빛이 먼지나 질소 같은 작은 입자들에 부딪혀 흩어지는 현상이란다. 그럴 겨우 원래의 색깔을 잃어버리게 되지. 하지만 이건 그게 아냐.”
그러면서 아빠가 데이터파일에서 끄집어낸 건 100장의 사진이었다.
“일 년 간격으로 찍은 거야.”
“그럼 100년 동안 찍은 거예요?”
“그렇지! 100년이 자나는 동안 그곳이 어떻게 변하는지 잘 보렴.”
아빠가 손을 움직이자 100년 동안의 영상기록이 순서대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회색과 주황색으로 뒤덮인 지구의 모습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회색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곳, 주황색은 사막 지대라고 아빠가 말했다.
“아, 저기!”
내가 지구의 한 지점을 가리키자 아빠가 영상흐름의 속도를 늦췄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의 사진이었다.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연둣빛이 눈에 띄게 짙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2171년, 그러니까 작년에 찍은 사진에서는 선명한 초록색으로 변해 있었다. 확실히 빛의 산란 때문에 생긴 현상은 아니었다.
“뉴질랜드라 불렸던 나라에 딸린 섬이지, 주변의 연회색은 조금씩 녹고 있는 태평양이라는 바다야. 보다시피 숲이 생긴 곳은 그리 넓지는 않아. 물론 이 곳 화성의 주거지역보다는 넓지만.”
아빠 옆에서 엄마는 깍지 낀 손으로 목덜미를 감싸고 있었다. 긴장할 때면 나오는 엄마의 버릇이었다.
“어쨌거나 분석자료에 따르면 환경오염과 핵전쟁으로 파괴되었던 지구가 소생하고 있어. 저 숲이 증거야. 다시 말해 인간이 살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는 뜻이지.”
우리는 동시에 반디 누나를 쳐다보았다. 누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우리 세 사람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누나가 휴머노이드라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아빠가 누나를 향해 엄지를 세웠다.
“반디 말이 맞다. 지구는 그동안 죽음의 행성으로 알려져 왔지. 그러나 이 자료는 그것을 부정하고 있어. 지구는 더 이상 죽음의 행성이 아니야, 문제는…….”
아빠가 말끝을 흐렸다. 사진을 뚫어지게 보던 아빠는 뭘 좀 찾을 게 있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문제? 무슨 문제? 아, 답답해. 왜 말을 하다 말지? 나는 반디 누나에게 아빠가 끝맺지 않은 말이 무엇인지 물었다. 누나는 아빠 일을 돕는 연구보조원이었다. 반디 누나가 머뭇거리자 엄마가 반디, 하고 불렀다. 엄마도 궁금한 눈치였다. 반디 누나가 빙긋 웃었다. 그리곤 무릎을 굽혀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라고 해서 아빠 생각을 다 읽은 순 없어. 안 그러니?”
2. 아빠의 비밀
아빠가 맡은 임무는 화성의 지질과 대기를 조사하는 일이다. 지구에서 화성으로 이주해 온 인류의 소망은 우주복을 벗고 외출하는 것이었다. 인류가 지표면에서 깊숙이 들어간 골짜기에 터를 잡고 산 지 100년이 흘러싿. 모든 사람들이 돔이라는 집에서 살았는데 방호막이 돔 하나하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운석을 막기 위해서였다. 돔의 도양은 언젠가 아빠의 연구자료집에서 본 이글루와 비슷했다. 아주 오래 전 지구의 북극 툰드라지대에서 살았다는 에스키모의 집 이글루.
그동안 아빠와 같은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화성의 대기에서 산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꽤 높아졌다. 어떤 환경에서도 살 수 있는 슈퍼이끼를 개발해 퍼뜨린 덕분이다. 과학자들은 극지방의 얼음층을 이용해 인공호수와 개울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아직도 우주복 없이는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간다.
“박사님은 지도부에서 맡긴 임무를 수행하는 틈틈이 지구의 생태를 꾸준히 관찰해 왔어. 그리고 그 과정을 분석하고 정리했지. 그러나 지도부에서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공개할 순 없었던 거야.”
“이해가 안 돼. 지도부에서는 왜 그걸 금지하는 거지? 화성주민들에겐 기쁜 소식이 될 것 같은데…… 누나 생각엔 그 이유가 뭘 것 같아?”
“그건…….”
반디 누나는 아빠가 들어간 방을 쳐다보았다. 망설이는 눈치였다. 로봇들에겐 함부로 전파해서는 안 되는 정보가 있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업데잍 되는 그것을 ‘금지조항’이라고 했다. 지도부에서 만든 금지조항을 외부로 유출할 경우 모든 기억을 삭제당하거나 심하면 폐기처분되었다.
“미루어 생각하는 걸 추론이라고 한단다. 반디는 알려진 사실이나 증명이 가능한 공식은 제시할 수 있지만 추론은 할 수 없어. 상상하는 건 힘들다는 말이지.”
엄마의 말에 나는 고개를 꺄웃했다. 반디 누나와 우주의 미래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도 그랬지만 반디 누나도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뭐 그런 말을 시작으로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줄줄 늘어놓았었다. 엄마는 아빠가 지도부 몰래 누나의 지능과 감성을 업그레이드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긴 나도 아빠가 작업하는 걸 우연히 봐서 안 거지만.
“답답한데 우리 바람 쐬러 갈까?”
반디 누나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좋아. 나는 선선히 따라나섰다. 반디 누나는 내가 엄마 아빠 다음으로 좋아하는 존재다. 누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전지하게 들어준다. 그리고 누나는 절대 나를 속이지 않는다.
3. 푸른 별의 과거
누나와 나는 전망대로 올라갔다. 전망대는 아무나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하지만 유명한 과학자를 아빠로 둔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올라갈 수 있다. 출입구의 인식기 앞에 서자 삐,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전망대는 절벽 꼭대기에 있다. 절벽 아래에서 꼭대기까지 2500미터인데 승강기를 타면 20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나는 전망대의 난간에 기대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름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
반디 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망대 역시 티타늄합금보다 단단한 방호막이 둘러싸고 있다. 돔을 둘러싼 것과 다른 점은 이것은 유리처럼 투명하다는 것이다. 내 눈길은 높이가 25킬로미터나 되는 올림푸스 화산으로 향했다. 태양계에서 가장 높다고 알려진 그 화산도 저 아래의 드넓은 평원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전망대 아래에 펼쳐진 평원은 이름과는 달리 평평한 데가 한 군데도 없었다.
“저기 움푹 파인 것들을 뭐라고 했지? 들었는데 잊어 버렸어.”
“아, 크레이터! 운석이 떨어져서 생긴 구멍이지.”
트레이터라고 하는 그 구멍은 어마어마하게 깊고 넓었다. 저런 구멍을 낼 정도의 운석이 이곳에 떨어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문득 아빠가 보여준 사진이 생각났다.
“근데 누나, 어떻게 초록색 평원이 있을 수 있어?”
“…지구를 말하는 거니?”
“그래 맞아, 지구!”
“수십 억 인류가 살던 지구의 육지엔 사막지대를 빼곤 식물이 가득했었나 봐. 풍부한 산소 덕분이었지. 그 많은 사람들이 우주복 없이 자유로이 다녔다고 해.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니? 식물은 대부분 초록색이야. 물론 바다에도 식물이 있었어. 그런데 그곳은 푸른색을 띠고 있었대. 지구를 초록별 또는 푸른 별이라고 한 이유를 알겠지? 육지보다 훨씬 넓은 바다엔 인간을 합친 것보다도 많은 물고기들이 살았어.”
초록생명의 세계
수십 억 인류보다 많은 물고기들이 사는 바다?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 대신 상추나 시금치로 뒤덮인 행성이 그러겠다. 어쨌든 붉은 먼지로 뒤덮인 화성보다는 백배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처럼 아름다웠던 행성이 저렇게 된 건 알고 보면…….”
반디 누나도 아빠처럼 말끝을 흐렸다. 누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뒷말을 기다렸지만 누나는 지구 쪽으로 눈길을 준 채 말이 없었다. 이것도 금지조항인가?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금지조항이라면 어떤 방법을 써도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엔 내가 먼저 말을 돌렸다.
“상추와 시금치가 그렇게 많았어? 그렇다면 푸른 별이 아니라 상추와 시금치별이네 뭐.”
“뭐? 상추와 시금치 별?”
누나는 그제야 얼굴을 펴고 웃었다.
“그래, 상추와 시금치도 식물이긴 해.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가 돔 안에서 키우는 상추나 시금치보다 훨씬 큰 것들이야. 가령 나무 같은 것! 하긴 이렇게 말해도 넌 이해하지 못하겠지? 잠깐, 나한테 자료가 있어. 몇 가지만 보여줄게.”
반디 누나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누나가 건넨 스마트안경을 쓰자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누나 말대로 온통 초록색이었다.
“초록 생명이 번성하던 시절의 지구야, 저기,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것들 보이지? 그게 나무라는 거야. 그 아래에 우거진 건 풀이라는 거고.”
그 중 한 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아, 그건 광장에 있는 건데…… 그것이 나무였어? 그럼 지구의 저것들도… 설마…저것들도 홀로그램이야?”
그랬다. 그건 모든 돔과 연결된 광장의 그것과 똑같았다. 광장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그것은 10키터가 넘었다. 물론 그것은 홀로그램이다. 반디 누나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니지.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건 진짜 살아 숨 쉬는 은행나무야. 인간이 살기 훨씬 전부터 지구에 살았다지 아마. 광장에 있는 그것보다 훨씬 큰 것도 있어.”
금지조항
지구의 나무를 모방한 것이었구나.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가볍게 머리를 흔든 뒤 스마트안경이 보여주는 영상에 집중했다. 은행나무 말고도 수많은 나무들이 있었다. 숲, 하고 발음해 보았다. 아빠가 가르쳐 준 단어였다. 숲을 이룬 나무들은 알록달록 꽃을 피우고 있었다. 꽃의 색깔이 그토록 많은 줄 몰랐다. 게다가 나무들은 꽃만큼이나 다양한 열매를 맺고 있었다. 모양이 다른 열매를 열까지 세다가 그만뒀다. 이곳 돔 농장에서 생산하는 열매는 모두 다섯 가지였다. 방울토마토와 멜론 딸기 포도 귤인데 얼마 전 네트워크프로그램에 나온 한 식물학자는 머지않아 새로운 열매를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근데 저건 뭐야. 절벽 위에서 바다를 향해 날아가는 것들!”
“새, 날개 힘으로 공중을 나는 동물이야. 방금 본 그 새 이름이… 아, 여기에 있네. 몸 전체가 갈색이지? 그 새 이름은 쇠부리슴새야. 이름이 이상하지?”
“공중을 나는 생명체가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아, 근데 누나, 이런 걸 보여줘도 돼? 금지조항에 들어 있지 않아?”
누나가 히죽 웃더니 내 머리를 손으로 헝클었다.
“물론 금지조항에 있는 내용이야. 인간을 비난하는 말은 해서도 안 되고 또 그런 말에 동의해서도 안 된다. 그게 첫째 조항이야. 둘째 조항은 지구와 관련된 것은 허가 없이 저장하거나 전파해서는 안 된다. 근데 박사님이 내 프로그램에 들어 이쓴 둘째 조항을 수정하셨어. 지구와 관련된 것은 반드시 박사님의 지시를 따르도록 말이지. 그리고 가족 간에는 자유롭게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조항도 넣으셨어.”
“가족의 수는 몇으로 설정되었어?”
“그야 당연히 넷이지. 왜 그래?”
아빠도 반디 누나를 가족으로 인정하고 있었어. 나는 가슴이 뿌듯해졌다.
“첫째 조항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박사님은 그것만큼은 예외가 없다고 하셨어.”
“그렇다면 아까 지구가 망가진 이유를 말하려다 그만 둔 이유는 뭐야?”
따지고 드는 내가 귀여운지 반디 누나는 내 볼을 쥐었다 놓았다.
“가족끼리 의견을 나누는 건 자유지만 방금 전에 내가 말했었지. 지구와 관련된 것은 박사님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고. 지구가 망가진 이유와 지도부에서 발표를 금지하는 이유, 그 두 가지 사항은 박사님이 나중에 직접 설명하겠다고 하셨어. 그릇된 소문은 혼란으로 이어진다며, 이제 내가 말하지 않은 이유를 알겠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건 됐고, 그럼 누나! 이번엔….”
바다에 대해 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바다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반디 누나가 내 눈에서 안경을 벗겨 갔다. 어리둥절해 하는 내게 누누가 눈치를 주었다.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던 휴머노이드 하나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거기서 뭐하고 있지?”
휴머노이드가 나와 반디 누나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얘가 올림푸스화산이 곧 폭발할 것 같다고 해서 그렇지 않다고 설명하는 중이야.”
반디 누나의 말에 경비휴머노이드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는 시늉을 했다.
위험한 계획
지구로 가자는 아빠의 말이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엄마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담담한 표정이었다. 뒤이어 아빠는 우리 가족을 포함해 모두 다섯 가족이 갈 거라고 했다. 그리고 모두가 오래전부터 뜻을 함께 해 온 사람들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새로운 세계로 가자는 사람답지 않게 아빠는 어딘가 자신이 없는 표정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화성을 탈출하느냐인데….”
엄마가 말했다. 맙소사, 아빠가 말한 문제가 그거였어? 나는 버릇처럼 반디 누나를 쳐다보았다. 반디 누나가 내 어깨를 두 손으로 감쌌다.
“계획은 세워 놓았는데… 너무 위험하다는 게 문제야.”
아빠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생각해도 그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보고만 있을 지도부가 아니었다. 무작정 출발했다간 100미터도 못 가 격추될 게 뻔했다. 레이저포는 떨어지는 운석을 파괴하는 데만 쓰이는 게 아니었다. 몇 년 전 허가 없이 이륙했던 일인용 드론이 격추된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있고부터 누구도 선뜻 우주공간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10분! 10분만 레이더를 피하면 되는데….”
아빠가 엄마를 보며 말했다.
“수신 장치를 그거나 고장을 내려면 보안센터에 들어 가야 하는데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엄마의 말에 아빠가 손으로 턱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채결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었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해요.”
반디 누나였다. 턱을 문지르던 아빠의 손이 멎었다.
“반디, 이건 평소 네가 하던 일과는 차원이 다른, 아주 위험한 일이야.”
엄마가 나무라듯 말했다. 반디 누나가 네 잘 알아요. 하며 아빠를 쳐다보았다.
“좋아, 무슨 방법인지 어디 한번 들어 볼까?”
그러자 반디 누나는 말을ㄴ 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상한 건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누나와 나를 번갈아 보던 아빠가 웬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우야,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니?”
아빠의 입에서 나온 말이 누나 때문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믿는 도끼에 발을 찍힌다. 내 머릿속에 반짝 떠오른 말이었다. 도끼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그 말의 뜻은 알고 있었다. 믿는 사람에게 배신당할 때 쓰는 말이라고. 지구에 살았던 한국인들의 속담이라고 아빠가 말해주었었다. 비록 화성으로 이주해 살지만 우리 가족이 한국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며 아빠는 틈만 나면 한국의 문화와 풍습을 들려주곤 했다. 나는 아빠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금은 미안했는지 반디 누나가 방으로 들어가는 나를 따라왔다.
“형우야, 누나가 너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누나가 그렇게 말하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나를 방으로 들어가게 해 놓고선 그런 말이 나와?”
나는 보란 듯이 입을 비쭉거렸다.
“형우야, 나중에…….”
누나의 말을 듣지 않고 방문을 닥고 들어갔다.
우주선 기지
반디 누나가 나를 데려간 곳은 크고 작은 우주선들이 모여 있는 기지였다. 처음 가 보는 곳이었다.
“네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말들이 많아서 그랬어. 네게 일일이 설명하다 보면 이야기가 자꾸 끊길 것 같아서 말이지….”
누나는 아무튼 미안하게 됐다며 탈출할 때 타고 갈 우주선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제야 기분이 조금 풀렸다. 기지를 책임지고 있는 관리센터 소장은 아빠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누나가 나를 데리고 이곳에 온 이유를 모르는 소장은 바보같이 웃기만 했다.
“내 우주복의 장갑보다도 작었던 꼬맹이가 벌써 이만큼이나 컸어?”
소장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소장은 반디 누나가 내민 출입허가증도 건성으로 보았다.
“형우가 우주선을 보고 싶다고? 그래, 이번 기회에 마음껏 보렴. 네 아빠랑 화성의 위험 포보스와 데이모스의 지질을 조사하러 여러 번 함께 갔었단다. 저기 보이는 저게 그때 네 아빠랑 타고 갔떤 우주선이지.”
소장은 날씬하게 생긴 우주선 하나를 가리키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것은 누나가 보여 준 제비라는 새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누나가 나를 데려간 곳은 3인용 제비 우저선이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큰 셔틀우주선이었다. 우주선에 올라 여기저기를 들러보고 있는데 누나가 불렀다. 누나는 나를 여거 개의 문이 줄지어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문마다 투명한 창이 달려 있었다. 누나가 문 하나를 열었다. 헬멧과 우주복이 걸려 있었다.
“이게 뭐야?”
누나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그림으로 많이 봤지? 형우가 입을 우주복이야. 이건 우주선 밖에서 입는 선외우주복이지. 우주선 밖으로 나가거나 별을 탐사할 때는 반드시 이것을 입어야 한단다. 물론 우주선 안에서 입는 선내우주복은 이보다 훨씬 가볍고 간단해.”
“우주여행? 내가 우주여행을 간다고?”
내 말에 누나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래, 언젠가 갈 때도 있지 않겠지?”
누나가 내게 우주선 안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느낌이 안 좋아서 싫다고 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누나는 나를 데리고 다시 관리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이상한 게 눈에 띄었다. 누나의 허리에 달려 있는 타원형의 기기였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푸른빛을 내고 있었다.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들이 죄다 테이블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소장은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기까지 했다. 문득 아빠 연구실에서 보았던 기계 부속품들이 생각났다. 감지기로도 잡을 수 없는 특수한 전자파를 발생시켜 생물의 활동시간을 조정하는 기기를 만든다고 했다. 야채 생산을 늘리는 게 주목적이라던 그 기기와 어딘가 닮은 데가 있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기기를 살폈다.
“누나… 그거 혹시… 아빠가 만든 전자파출력기 아냐?”
누나는 대답 대신 모니터에 손을 대고 움직였다. 복잡한 도표와 숫자가 떠올랐다. 누나는 방금 떠오른 네모난 창에 명령어를 써 넣었다.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기지를 지키고 있던 휴머노이드들이 하나 둘 막사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모니터로 마지막 뉴머노이드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누나는 버튼을 눌러 막사 문을 잠궜다. 누나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약속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형우야 너 먼저 가. 난 뒷정리를 하고 갈게.”
반디 누나의 희망
약속한 시간음 눠고 뒷정리는 또 뭐람. 누나의 속셈이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누나는 복잡한 기계장치를 장난감 다루듯 했다. 누나의 손이 거쳐간 몇몇 기계장치에서 푸른 불빛이 꺼지고 빨간 불빛이 켜졌다. 평소와 달리 누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일을 끝낸 누나는 나를 출입구 쪽으로 데려갔다.
“내 말대로 해. 저 길로 곧장 가면 셔틀우주선이 있는 곳이야. 아까 봐서 알지? 거기로 가. 조금 있으면 아빠가 오실 거야. 알겠지?”
“같이… 안 가?”
“응… 진짜 중요한 일이 하나 남았어. 먼저 가 있어. 후딱 해치우고 갈게.”
그러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누나가 내 손을 잡았다.
“형우야!”
누나의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왠지 가슴이 울렁거리고 코끝이 시렸다. 누나가 가만히 나를 안았다.
“… 내가 딱 한 번 인간이 되었으면…하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말이지.”
누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희망을 품어 보고 싶었단다. 입력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뭔가를 전망하는 게 아니라 순전히 내 마음으로, 그러니까 내 의지로 피워내는 그런 희망!”
누나는 내 어깨를 잡은 채 한동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또 하나… 눈물이란 걸 한 번 흘려보고 싶었어. 언젠가 형우가 울 때 따라 울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지. 그때 얼마나 속상했는지 아니?”
누나가 두 손으로 내 어깨를 잡고 토닥였다. 그리고 살며시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누나가 시킨 대로 셔틀우주선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누나가 보이지 않았다. 몇 발짝 왔던 길로 돌아가 주위를 살폈다. 그때 누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뜻밖에도 거긴 돔 밖이었다. 우주선 기지 뒤편의 언덕이었다. 이상하게 생긴 기계와 안테나들, 그리고 눈에 익은 레이더들이 운석처럼 삐죽하게 솟아 있었따. 누나가 나를 봤는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몇 가지 동작을 해 보였다. 따라갈테니 얼른 가라는 신호였다. 저기에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걸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나가 다시 손짓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아, 반디 누나!
셔틀우주선의 출입문이 닫히고 있었다. 다섯 가족이 탑승한 실내는 무척 답답해 보였다. 모두 세어보니 열세 명이었다. 정희가 나를 보더니 생긋 웃었다. 늘 깍쟁이처럼 굴더니 오늘은 웬일로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하긴 지구까지 같이 가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지만 웃지는 않았다. 출발 시간이 다가왔다. 왠지 허전했다. 찬찬히 둘러보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아빠!”
나는 급하게 아빠를 불렀다. 아빠가 돌아보았다.
“반디 누나가 없어요. 아직 타지 않았나 봐요. 문을 닫으면 안 되요.”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모두의 눈길이 내게로 향했다.
“나중에 설명해 줄게.”
아빠가 굳은 얼굴로 자리를 가리키며 손짓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누나가 아직 타지 않았다니까요.”
엔진이 점화되었는지 우주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울먹이면서 다시 아빠를 불렀지만 아빠는 못 들은 척 하던 일을 계속했다. 얼마가 내 손을 잡고 자리고 이끌었다.
“어머, 저기… 반디 언니 아냐?”
정희가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정희처럼 창문에 바짝 붙어 밖을 보았다. 정희가 손가락으로 언덕 위를 가리켰다. 아,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반디 누나였다. 누나는 레이더의 제어기 옆에 서 있었다. 아까 보았던 흰 색 유니폼 그대로였다. 밖은 산소도 없는데다 영하 80도였다. 인간이라면 우주복 없이는 단 한 순간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누나가 로봇이라는 게 tlf실감 났다. 딱 한가지 방법이 있긴 해요. 누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누나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목이 잠겨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누나, 내 입에서 간신히 새어나온 말이었다. 우주선이 화성의 중력을 벗어나기 직전 모니터를 보던 엄마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우리가 출발했던 곳에서 작은 불빛이 반짝하더니 사그라지고 있었다. 반디가 우리를 위해 희생한 거라고 아빠가 말했다. 우리가 화성을 탈출할 시간을 벌어준 거라고 엄마가 덧붙였다.
“반디 몸에 있는 접속단자에 데이터의 수신제어장치를 연결한 거란다. 보안센터에 바깥 정보를 거짓으로 보내기 위해서지. 반디가 10분 남짓한 시간을 잘 버텨 준 덕분에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어.”
“아까 본 그 불빛은요?”
옆에 있던 정희가 물었다.
“뒤늦게 눈치 챈 보안센터에서 레이저포를 발사한 거야.”
정희 아빠가 말했다. 정희 엄마가 정희 아빠의 팔등을 꼬집었다. 정희 아빠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정희가 보는 게 창피했지만 흐르는 눈물은 도저히 참을수 없었다. 정희가 손수건을 건냈다.
밝혀진 비밀
화성을 떠난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우주선에 탄 모든 사람들이 중앙관제실에 모였다. 우주선 운행은 휴머노이드 셋이 맡고 있었다. 겉으로 봐선 전혀 로봇 같지가 않은 그들을 보는 게 괴로웠다. 반디 누나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내 편이 되어 주었던 반디 누나. 누나는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 준 훌륭한 선생님이었고 함께 놀아준 착한 친구였으며 고민을 들어주고 도움말을 준 믿음직한 선배였다.
선장님이 지구의 이모저모를 찍은 영상을 보여주었다. 처음 보는 광경인지 정희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눈은 스크린에 가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반디 누나에게 가 있었다. 상영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손을 들었다. 선장님이 아빠에게 답변을 부탁했다. 아빠가 나보다 세 살 많은 형을 가리켰다. 첫 번째 질문자로 나선 그 형은 꽤 흥분한 표정으로 세 개의 질문을 거푸 던졌다.
첫째, 지구는 왜 파괴되었나요?
둘째, 지도부에선 왜 화성주민들에게 지구의 모습을 공개하지 않나요?
셋째, 지도부에선 왜 우리가 지구로 가는 걸 막지요?
다들 같은 생각이었는지 질문을 한 형에게 박수를 보냈다. 아빠는 잠시 생각하더니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첫 번째 질문의 답: 환경오염이 심해지자 식량이 부족해졌고 식량 때문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핵폭탄 사용은 지구를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행성으로 만들었다.
두 번째 질문의 답: 지구에 쏠리는 관심을 막기 위해서지.
세 번째 질문의 답: 지도부에선 환경오염을 예방하기 위해 그리고 끔찍한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간단히 말해 단단하게 다져놓은 권력을 잃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모두가 지구로 가버리면 권력이 무슨 소용 있겠나.
첫 번째 질문의 답은 그런대로 이해가 됐지만 나머지는 생각할수록 아리송하기만 했다.
에이, 그것도 몰라?
반디 누나라면 내 볼을 살짝 꼬집으며 보충설명을 해주었을 것이다. 권력의 뜻음 힘이니까… 그러니까 화성의 지도부는 힘을 잃는 게 두려웠던 거야.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 그래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왜 자기들만 힘을 가지려고 하지? 그런 의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식이라면 반디 누나가 말했던 짐승의 세계와 다를 게 없다. 반디 누나는 말했다. 아주 오래전 지구에는 정글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 사는 짐승들은 오직 힘에 의지해 살아갔다고. 그러니까 그곳에서는 힘없는 짐승은 지배당하거나 잡아먹힐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 현상르 한국인들은 정글의 법칙이라고 했단다. 반디 누나 말대로라면 지구에 살았던 사람들 역시 정글의 법칙을 따른 게 분명했다. 그렇게 해서 망한 걸 알면서4h 화성의 지도부는 따라한다는 거 아냐. 아무튼 어른들이란,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더 이상 그 문제를 생각지 않기로 했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화성을 떠난 지 꼭 80일이 되는 날, 우주선 안이 시끄러워졌다. 다들 긴장한 표정으로 스크린 앞에 모엿다. 사진에서 봤던 지구가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초록색 점은 아빠 말대로 나무가 우거진 숲이었다. 새도 있겠지? 날개를 푸덕이며 날아오르는 새를 그려 보았다.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목덜미를 스치는 기분이었다.
‘반디 누나가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또 그생각이었다. 내 마음을 알았을까. 아빠가 누나 이름이 써진 저장장치를 건냈다. 내가 멀뚱히 보고 있자 아빠가 씩 웃으며 뚜껑을 열었다. 뭐예요? 나는 눈으로 물었다.
“반디의 설계도와 빈디의 기억을 복사한 것들.”
그러면서 아빠는 지구에서 자리를 잡는 대로 반디 누나를 새로 만들어 주겠다고 햇다. 정말 그럴 수 있느냐고 묻자 아빠는 스크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들, 저기 있는 저 나무를 걸고 맹세할게.”
언젠가 반디 누나와 함게 보았던 은행나무였다. 불현 듯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새로 만들어진 누나는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 화성에서의 거억만 가지 누나는 완전한 누나가 아니라는 생각.
“누나는 홀르그램처럼 되고 말 거예요.”
내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왔다.
아빠의 눈이 동그래졌다.
“반디 누나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니?”
“만나고 싶긴 하지만….”
“그런데?”
“함께 한 기억이 없는 누나는 내가 알고 잇는 누나가 아니에요.”
“함께 한 기억이 없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니? 형우야, 너도 알다시피 반디 누난 로봇이야. 어차피 인간이…”
내가 도리질하자 아빠는 입을 다물고 내 표정을 살폈다.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지구의 숲을 바라보았다. 은행나무를 떠올렸다.
“나무에겐 더위나 추위에 대한 기억이 있다고 반디 누나가 말했어요. 그 기억이 나이테로 자란대요. 나이테가 많아진다는 건 기억이 많아진다는 뜻이에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아빠 눈을 쳐다보았다. 아빠도 가만히 내 눈을 바라보았다.
“강제로 나이테를 주거나 빼앗을 순 없어요. 나이테를 볼 수 있다는 건 나무가 죽었다는 뜻이에요.”
아빠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알겠다. 그러니까 네 말은 새로 만든 휴머노이드, 아니 반디에게 과거의 기억을 집어넣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반디는 될 수 없단 말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성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고 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누나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가까이서 지켜보던 엄마가 다가와 나를 안아주었다. 언젠가 반디 누나도 이렇게 안아 준 적이 있었다. 몰래 가져간 천체망원경으로 지구를 관찰하다 들켜 지도부 사람에게 벌을 받았을 때였다.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반디 누나는 내 귀에 대고 그렇게 속삭였다. 이상한 건 누나의 그 말을 듣고나니 정말로 기분이 괜찮아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엄마 품에서 빠져나와 다시 스크린 앞에 섰다. 우주선이 착륙할 빈터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들이 빈터를 에어싸고 있었다. 그런데 사진으로 봤던 나무들과는 많이 달랐다. 빼뚜름히 굽었거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이는 가녀린 나무들이 적지 않았다. 우주선 안이 조용해졌다. 영희가 겁먹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웃어 주었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누나가 말했던 희망이란 게 이런 걸까? 얼핏 그런 생각이 스쳤다.
첫댓글 아, 반디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