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6일(주)
* 시작 기도
주님...
간밤에 잘 자게 하시고 새로운 하루, 주일 아침을 주셨나이다.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이 날에 먼저 나의 온 몸과 마음을 주의 보혈로 정결하게 씻어 주셔서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을 빚으사 주의 영 성령으로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말씀 앞에 설 때에 나의 죄와 비참함이 드러나게 하시어 나의 실존을 보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말씀으로 교제와 사귐이 넘치기를 원합니다.
이 종을 붙드사 약할 때 오히려 주님으로 인하여 강함 되게 하소서.
주와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시 6:1-10
제목 : 사망과 스올에서 새 생명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
1.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3.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8.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
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10.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 나의 묵상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 심판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크기에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의 호소와 함께 사죄의 은총을 구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지 자신의 뼈가 떨리며 영혼까지도 떨리는 상태로써 그 진노가 언제까지인지 묻는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다윗 앞에서 침묵하고 계시며 그런 하나님께 침묵을 그치고 자신에게 돌아와 자기 영혼을 건지며 당신의 사랑으로 구원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다윗은 심지어 사망과 음부의 고통을 겪으면서 이런 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주를 기억하거나 감사할 수 없다고 호소한다.
그런 엄청나고도 큰 고통으로 인하여 침상을 띄우고 요를 적실 정도로 눈물이 바다를 이루고 있다.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와 함께 고통을 견딜 수 없는 근심으로 인하여 눈이 짓물렀으며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들로 인하여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한 지경에 처해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흑암 중에도 항상 다윗과 함께 한다.
비록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다윗을 멀리 떠나지 않으시고 그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계신다.
그리고 다윗을 대적하는 원수들을 물리치시며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여 심히 떨면서 물러나게 하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이다.
다윗이 지은 큰 죄는 아마도 밧세바와 동침한 사건과 함께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장에서 죽인 일일 것이다.
그는 그 일로 인하여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고통을 겪는다.
도무지 자기 힘으로 견딜 수 없는 너무나 큰 고통이다.
자신의 죄얼도 너무 크지만 그 죄에 대한 대가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기에 과연 이 고통이 언제까지냐고 하나님께 묻는다.
이사야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시고 첫 번째 사명을 주신다.
그 사명이란 이런 것이다.
(사 6:9-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백성들로 하여금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보아도 알지 못하게,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라고 하실 때 이사야는 하나님께 이 일을 어느 때까지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신다.
(사 6:11-12)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 6:10절에서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라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마 13:15절에서 이렇게 표현하신다.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은 헬라어로 ‘파퀴노’라고 하는데 이는 마음이 살이 찐 상태를 의미한다.
마음이 살이 찔 경우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자기주장의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 없이 죄를 먹고 마시며 살게 된다.
그래서 그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되 성읍이 황폐하고 집에는 사람들이 없고 토지는 거친 박토가 되어 완전히 멸망 직전까지 가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의 살찐 마음이 가난하게 된다.
이는 더 이상 하나님 외에는 소망이 없는 상태로써 그제야 비로소 두 손 들고 하나님께로 나아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게 된다.
물론 이는 진멸과 같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과 같은 그런 상황을 맛볼 때 그들의 마음이 가난해 지기 때문에 거의 죽음에 가까운 상황에까지 몰고 가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절에서 다윗은 사망과 스올, 즉 음부와 같은 경험을 하면서 사망이나 스올에서는 주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감사하지도 못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금 거의 사망이나 지옥의 경험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날마다 밤이면 눈물로 요를 적시고 침상을 띄우며 그 눈물로 인하여 눈이 짓물러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어둠, 아니 흑암의 나날을 지내고 있음을 호소하고 있다.
다윗에게 있어서 사망과 음부의 상황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밧세바와 동침하여 낳은 아들이 죽어가는 그 일주일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그에게 무덤의 시간이요 가장 칠흑 같이 어두운 흑암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다윗은 아들이 낫기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금식하고 땅에 엎드려 기도하기를, 무려 일주일 밤낮을 하였다.
아파서 방에 누워 죽어가고 있는 아들과 금식하며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다윗은 지금 같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아이가 결국 일주일 만에 죽었다.
아마도 그 아픔은 일주일동안 금식하고 땅에 엎드려 석고대죄하는 그 아픔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의 반응을 보라.
(삼하 12: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죽기 전 아플 때보다 더 크게 괴로워하고 통곡을 해도 모자랄 판에 전혀 그와는 반대의 반응을 보이니까 그의 신하들이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그래서 신하들이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더니 다윗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삼하 12:22-23)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다윗의 이런 반응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100%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며 또한 그의 신앙고백인 것이다.
오늘 본문은 사망과 스올의 상황 곧 어느 누구도 주를 기억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할 것 같은 상황에서 밤이면 밤마다 눈물로 지새우며 침상을 띄우고 요를 적시는 다윗은 완전한 사망의 자리에 들어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육신적 감정적 비통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나 이제는 더 이상 육신적이고 감정적인 표현이 아니라 신앙으로 이를 수용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새 생명을 주신다.
가장 칠흑 같은 어둠이 지날 때 소망의 빛인 아침이 밝아오는 것처럼 다윗에게도 심판 후에 소망의 빛으로 참 평강을 주시는데 밧세바 사이에 두 번째 아들을 주시면서 그 아들의 이름을 샬롬, 곧 솔로몬이라 하였으며, 특별히 하나님께서 별명을 지어 주셨는데 ‘여디디야’ 곧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이름을 주신다.
(삼하 12:24-25)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는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아마도 밧세바 사건이 있은지 한참 후에 다윗의 대적들이 이 일로 인하여 다윗을 공격한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심판하셨을 때 그 심판을 수용하고 넉넉히 이겨낸 다윗은 이제 더 이상 그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들을 향하여 호령한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셨기에 너희 원수 대적들은 다 나를 떠나라(8절).
하나님께서는 결국 다윗의 모든 원수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셔서 물리치셨고 두렵고 떨림으로 그것도 갑자기 부끄러움을 당하여 도망가게 하신 것이다.
(9-10)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뒤에 주시는 것은 그 무엇이든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것이 바로 솔로몬, 즉 샬롬인 평화이다.
(사 32:17)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나 역시 주님께로부터 공의의 심판을 받았다.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행하던 지난날의 모든 정욕과 탐심을 주께서 공의의 심판으로 치셨기에 나는 아무 것도 내 맘대로 할 수가 없다.
이제 주님의 뜻인 영생을 위하여 그저 복음을 전하는 것만이 나의 일이며 그것이 곧 주의 일임을 믿는다.
나의 영달과 이 땅에서 영화를 누리고자 한다면 나는 또다시 그런 공의의 심판 아래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 자리는 사망과 음부와 같은 고통의 자리이다.
그 시간은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시간이요 주께서 정하시는 시간이다.
그렇기에 내 맘대로 내 뜻대로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그런 시간과 자리에서 살아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옳다고 인정하며 주의 말씀으로 그 무덤 안에 들어가서 잠잠히 머무르며 주님과 교제를 통하여 성소를 짓는 일밖에 없다.
그럴 때 주님께서 주님의 시간에 새 생명으로 일으켜 주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샬롬, 곧 평화이다.
그 평화 안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 함께 오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의 기쁨이다.
그때 누리는 평화와 기쁨이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며 이 땅에서 맛보고 누리는 영생인 것이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묵상 후 기도
주님...
다윗을 심판하신 하나님께서는 날 대신하여 또한 예수님을 십자가로 심판하셨나이다.
그 심판은 나를 직접 심판하시는 것보다 100배, 1,000배보다 더 큰 심판이었나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날마다 죄를 먹고 마시며 날뛰었나이다.
그런 나는 완전히 멸망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셨나이다.
물론 그 은혜는 단순한 은혜가 아니라 사망과 음부와 같은 고통 속에서 완악하여 마음이 살찐 나를 심판하시는 공의의 은혜였나이다.
주님...
이제 주님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안에 머무르나이다.
이 종을 날마다 주의 은혜와 긍휼로 덮어 주시사 그 안에 거하게 하소서.
그 안에서 주의 은혜의 이슬을 먹고 살게 하소서.
그것이 바로 주님의 보혈임을 믿사오니 주의 보혈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하나이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주님과 뛰어놀게 하시고 주님을 즐기는 자 되게 하소서.
오늘은 주일, 포항주향교회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성도들 각자가 있는 자리에서 주님을 예배하였듯, 이제 공동체로 모인 자리에서 더 깊이 주님을 만나는 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