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65
12월7일[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대림 제1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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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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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oMT7hCLk9go
[의정부교구 김현균 야고보(탄현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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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제 내가 친히 나서겠다. 내가 직접 목자가 되어 주겠다!>
한순간의 그릇된 선택으로 인해 지금 온 백성이 큰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가 저지르고 있는 각종 기행으로 인해 국격은 급격히 실추되고, 그로 인한 천문학적인 경제 손실로 나라의 근간이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기업이나 소상공인들, 자영업자들이나 서민들이 겪는 피해, 그리고 이 큰 부끄러움은 오로지 우리 국민들이 감내해야 할 몫이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쉼없이 흔들리는 이 지상 여정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든든한 보루요 마지막 희망이 되어주시는 주님께서 우리 백성들의 길잡이가 되어주시어, 조속히 상식과 기본이 통용되는 정상적 나라로 회복시켜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격 미달의 지도자들, 그래서 백성들의 기쁨이요 위로가 되기는 커녕, 고통의 근원이던 목자들이 많았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신랄한 지적을 통해 당시 사이비 목자들의 악행을 잘 엿볼 수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에제 34, 2-4)
당신 보시기에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은 거짓 목자, 사이비 지도자들의 위선과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군중은 영적 양식을 조금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삶의 중심을 잃고 방향성을 상실한 영적 빈곤의 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예언자의 경고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며 큰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이런 부적격 목자들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은 오늘날 우리 교회와 사회 안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질 부족한 목자들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양들의 현실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꽤 강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친히 나서겠다. 내가 직접 목자가 되어 내 양 떼를 찾아 보살펴주겠다. 나와 함께 일할 협력자들, 참된 목자들을 직접 선택하겠다.”
오늘 우리에게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품위있고 예의바른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이 자신의 유일한 존재 이유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풀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들로부터 애틋한 사랑을 받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혹시라도 장거리 출장이라도 가면 세상 다 끝난 것처럼 마음이 허전해지는 그런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착한 목자가 꼭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성장과 안녕과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쾌적한 성장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돈이나 명예, 인기나 허황된 꿈이 아니라 영혼 구원이 유일한 삶의 목표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이 오늘 겪고 있는 고통과 괴로움, 그들이 안고 있는 상처와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갈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이 시대 양들을 위해 틈만 나면 위로와 격려, 사랑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희망의 목자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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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5_5Miv8xO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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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의 역할은 양들의 ‘기’를 살려주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왜 뽑으셨고 어떤 역할을 하도록 파견하셨는지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신 손수 온 마을을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군중에게 당신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이들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가 꺾여 있었다.”라는 동사는 “흐립토”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는 지쳐 넘어짐을 의미합니다. 삶에 지쳐 넘어진 이들을 일으켜 세워 다시 힘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목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참 많은 목자가 존재합니다. 부모님도 자녀에게 목자고 학교 선생님도 목자이며 물론 사제들도 목자입니다. 이들의 역할이 기를 세워주는 것인데, 가끔은 이들이 양들의 기를 꺾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 자체가 기운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기운은 바로 ‘성령’을 의미하는데 그들도 그것을 받지 못하니 남에게도 줄 수 없습니다.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한 ‘3천 원짜리 김치찌개 파는 이문수 신부’의 에세이 『누구도 벼랑 끝에 서지 않도록』의 내용입니다. 이문수 신부는 낙담하고 좌절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청년들이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청년 밥상 ‘문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식주의’라는 곳에서 인용합니다.
“김치찌개 3천 원, 무한리필 공깃밥은 공짜. 개업 이후 거의 매달 적자를 내는 이 식당의 주인은 바로 저입니다. 저의 원래 직업은 ‘가톨릭 신부’인데요, 어쩌다 보니 4년째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김치찌갯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식당 사장이 되기로 한 건 고시원에서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난 청년의 안타까운 사연을 접하고 난 다음부터였습니다. 저 역시 한때 ‘배고픈 청년’이었습니다. 한 달간 세 끼를 모두 라면만 먹거나 빵 한 봉지로 끼니를 때운 적도 있었습니다. 입시도 취직도 더 힘들어진 지금의 청년들은 그때의 저보다 두세 배는 더 고단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을 테지요.
저는 누구나 언제든 와서 편안한 마음으로 배를 채울 수 있는 ‘식당’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고민만 하다가 시간이 흐르길 1년여. 후원금 3천만 원으로 밥집을 열 공간을 찾다가 지금의 이 건물을 발견했습니다. 북한산 전경이 보이는 옥상을 보자마자 청년들이 이곳에서 잠시나마 숨을 쉬고, 위로받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인력과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메뉴는 김치찌개 하나로 정하고, 가격은 대학교 학식의 평균 가격인 3천 원으로 정했습니다. 학당을 하다 보니 신부로서 일만 할 때와 다르게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오픈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영하 10도 이하의 혹한이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식당을 찾았습니다. 얼른 팔팔 끓는 찌개를 대접해 몸을 녹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급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이가 저를 수줍게 불렀습니다. 그러고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더군요.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가 말씀하셨죠. ‘제가 식당에 관해 설명했더니 아이가 1년 넘게 모은 저금통을 기부하고 싶다고 해서요.’
엉겁결에 받아 들었는데 세상에, 나중에 세어보니 10만 원을 훨씬 넘는 금액이었습니다. 열 살짜리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돈이었을까요. 누군가를 위한 돼지 저금통에 차곡차곡 모아놓은 그 정성과 선량함이 저를 더 열심히 일하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50대 여성이 어둑해진 저녁에 식당에 들어와서 김치찌개에 밥 한 그릇을 비웠습니다. 그러고는 계산을 하겠다면 카운터 앞에 섰습니다. 돈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손님이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여기 계신 손님들 것까지 다 계산해 주세요, 신부님.’
손님은 그렇게 모두의 밥값을 계산하고 가셨습니다. 각자 계산할 때가 되어서야 청년들은 비로소 누군가 밥값을 대신 내주고 갔다는 이야길 듣게 되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 자신에게 벌어지다니 너무나 놀랍다고들 했습니다. 그러고는 덧붙였죠. ‘저도 기회가 되면 다른 사람을 꼭 도울께요.’ 아마 그 손님께서 가장 듣고 싶으셨던 말이 아닐까요.
최근에는 김치찌개 식당을 운영하는 식당 지기로 사는 삶을 크게 변화시킨 계기도 있었습니다. 식당을 이대로 유지할 것인가, 더 많은 사람을 위해 버겁더라도 점포를 늘릴 것인가 고민하던 시점에 ‘유퀴즈’ 섭외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방송에는 게스트 몇 명 중 하나로 짧게 나갈 테지만, 식당이 분점을 내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렵게 녹화를 마치고 4월 21일에 본방송이 나갔습니다. 놀라운 일은 그다음 날부터 일어났습니다. 후원 문의로 전화가 불이 났고, 가게에는 손님들이 줄을 섰지요. 모두 파김치가 되어 뻗어 있는데 한 직원이 저를 다급히 부르더군요. ‘신부님…. 이것 좀 보셔야겠는데요.’
제 눈앞에 놓은 것은 유재석 씨가 아무 말도 없이 5천만 원의 후원금을 입금하신 통장 내역이었습니다. ‘아무리 유재석 씨라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큰돈을 주시죠?’ 유재석 씨의 기부가 기뻤던 이유는 액수 때문이 아닙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에게 자부심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치지 않을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신 것이죠. 저는 그런 마음들이 모여서 우리 식당이 유지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돈보다는 마음들이 모여서 말이지요.”
유재석 씨나 이문수 신부님이나 모두 같이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기를 살려줄 수 있을까?’입니다. 이런 분들이 오히려 기를 받는 것 같습니다. 참 목자들입니다.
저에게 참 목자는 유학할 때의 논문지도 교수님이었습니다. 제가 로마라는 곳에 다시 가게 되었을 때 저는 한 목자만을 생각하였습니다. 바로 ‘죠르지오 마짠티’라는 교수입니다. 제가 석사 때 성경을 공부할 때는 기가 많이 꺾여 있었습니다. 그때 지도교수님은 기를 많이 꺾으시는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논문을 열심히 써가면 그냥 쓰레기라고 하시며 몇 장을 다 읽어보지도 않고 커다랗게 빨간 볼펜으로 엑스를 그리고 툭 집어 던졌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다시 돌아가기 두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교의 신학 교수였던 마짠티 교수님은 기가 넘쳤습니다. 찢어진 옷을 입고 허름한 옷을 입었지만,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은 제가 석사 때 성서 교수와 다른 사람 논문 심사 때 논쟁이 벌어졌는데, 마짠티 교수는 신약에 “새로운 계약”이란 말이 희랍어로 그대로 나온다고 했고 성서 교수는 그런 말은 안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남들이 보면 옆집 할아버지 같은 저희 교수님이 희랍어 성경을 가져오라고 해서 그 말을 찾아내 증명해 보이니 성서 교수는 오히려 창피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제관에 가난한 사람들을 들여 함께 살고 학교에 와서는 주류 세력들에 주눅 들지 않고 그렇게 싸우시고 학생들에게는 걱정하지 말라며 당신이 밤을 새우시며 우리 논문을 고쳐주셨습니다. 학생들은 그분의 편이었고 학교의 높으신 분들은 이분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습니다. 한국 학생들은 그 신부님을 매우 좋아했는데 언어가 딸리는 우리 마음을 아시고 손수 다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무작정 엑스를 하고 화를 내던 성서 교수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러니 저도 사제가 되어 다시 유학을 나갈 때는 성서를 포기하고 교의 신학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다른 학교로도 갈 수 있었지만 저는 그 교수님께 배우고 싶었습니다. 로마라는 두려운 곳에서 저에게 기운을 불어넣을 참 목자라고 여겼기 때문이고 덕분에 저는 기죽지 않고 5년 동안 그분과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분처럼 못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왜 어떤 목자는 기가 살았고, 어떤 목자는 기가 꺾여 있을까요? 삼구 때문입니다. 죄는 성령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습니다. 따라서 육체와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본인 자신이 기가 꺾여 있어서 남에게 기를 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자꾸 양들의 기를 살리려고 하면 나에게 나가는 것이 나를 채우게 되어있습니다. 양들에 대한 사랑이 목자의 기까지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주 주어라.” 그러나 오히려 거저 주기 때문에 거저 받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흩어진 양들의 기를 살리는 참 목자로 파견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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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엘파소에 갔다가 ‘Carlsbad(칼즈배드)’엘 다녀왔습니다. 칼즈배드는 지하 깊은 곳에 있는 동굴입니다. 1시간 정도 내려가면 넓고 큰 동굴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밝은 곳에 있다가 동굴 입구로 들어가면 시야가 어두워지면서 발아래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10분 정도 내려가면서 점차 눈이 익숙해졌고, 편하게 동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동굴에서는 지상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만나게 됩니다. 오랜 시간 쌓이고 쌓인 석순과 종유석은 빛을 만나면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어떤 모습은 마치 성모님 같았습니다. 어떤 모습은 마치 사자의 입 같았습니다. 어떤 모습은 마치 고래 같았습니다. 어떤 모습은 마치 장군 같았습니다. 먼 길임에도 기꺼이 운전하고, 간식도 챙겨주고, 설명까지 해 준 후배 신부님이 있어서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오고 가며 왕복 5시간 동안 우리는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후배 신부님도 청소년국에 있었고, 저도 청소년국에 있었습니다. 교구장님께서 열정적으로 추진하는 세계 청년대회 이야기도 나누었고, 청소년 사목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내년쯤에 서로 1주일씩 바꾸어서 지내자고도 하였습니다.
종유석이 자라는 데는 몇만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2000년이 지났습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후배 신부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교우들은 신부님의 그런 모습을 저에게 하나하나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 어린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주일에 30명 미사참례 하는 작은 공동체이지만 주님께서는 신부님과 공동체의 모습을 칭찬하시리라 믿습니다.
한 자매님은 ‘풍성한 열매’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쉬는 교우 댁을 방문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형제님은 ‘나 이제 성당에 나가지 않으니, 앞으로 오지 마세요.’라고 하는가 하면, 어떤 시어머니는 ‘내가 개신교회에 나가니 우리 아들과 며느리는 앞으로 성당에 가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오지 마세요.’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방문하기 전에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주보를 전해 드릴 때 주보에 전화번호와 좋은 글을 써서 함께 넣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화를 내던 형제님도 많이 누그러지셨고, 개신교회에 다니던 할머니도 웃어주었다고 합니다. 기도와 전교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그 자매님의 말씀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크고 화려한 성당만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제와 주교, 수도자들만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따뜻한 미소로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는 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지치고 힘든 이웃에게 작지만,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는 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쌀쌀맞게 대하는 쉬는 교우들에게 주보를 전해주고, 다시 한번 찾아가는 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원망할 일이 있어도, 화나는 일이 있어도 주님 때문에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으로 감싸주는 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영성체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은 제때 열매를 맺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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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35-10,1.6-8: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36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더러운 영에 잡힌 데다 율법의 짐까지 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엾이 여기셨다. 그들을 성령의 보호 아래로 데려갈 목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선물의 열매는 풍성히 준비되어 있는데 아직 아무도 그것을 거두지 않았다. 성령의 선물은 모든 사람이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줄지 않는다. 주님은 하느님께서 수확하는 일꾼들을 넉넉히 보내시어 성령의 선물이 준비하고 있는 것을 거두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신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것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고, 일꾼이 적다는 것은 교사들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바로 일꾼들, 제자들을 뽑으시고 그들을 파견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비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선택하셨다. 네 명은 어부고, 두 명은 세리이며, 한 명은 배반자였다. 그들에게 권한을 주셨다. 제자들은 이제 주님께서 주신 권한으로 자신의 약함과 주님의 권능을 드러낸다.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열두 번째 사도에게까지 주어졌다. 그가 비록 주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겼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복음이 우선은 유다인들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회개하기를 거부하자 사도들은 다른 민족들을 부르러 돌아섰다. 유대인들에게 본보기로 일어난 일이 다른 민족들에게 더 큰 은총이 내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유대인 중에도 회개한 이가 있었고, 다른 민족도 부름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한다. 자신의 임무를 꺼리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지니고 계신 모든 권능이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아담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과 닮았던 이들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습과 닮게 되었다. 그래서 세속중심이었던 그들이 하늘 중심의 삶이 되었다. 하늘 중심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권능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저 사용한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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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가엾은 마음’을 지니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9,35)라고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그런 존재입니다. 외면하거나 잊을 수 없으며,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아주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 대림 시기는 우리 모두를 고쳐 주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셔서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이사 30,19)라는 말씀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하십니다(마태 10,6 참조).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말씀 전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10,5). 예수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이나 사마리아인들보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먼저 선택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들이 ‘다른 민족들’과 ‘사마리아인들’보다 하느님의 구원에서 멀리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아주 익숙하면서도 그분께 가는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 ‘가엾은 마음’을 지니신 예수님께서는 이들까지도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에서 소외되지 않습니다. 그분께 단 한 순간도 잊힌 적이 없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십시오.
“모두 고쳐 주셨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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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나를’ 찾으려고 오신 ‘목자’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9,35-10,1)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6-8)
1) 12월 7일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은 ‘참 목자’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대림 시기는 ‘잃은 양’인 나를 찾아서 오시는 ‘목자’이신 예수님을 잘 맞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시기이고, 예수님에게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나는 예수님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러니 나는 ‘잃은 양’이 아니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성모님처럼 진실하고 충실하게 늘 주님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 한가운데에서 살다가 본의 아니게 여러 가지 세속 생활에 바빠서 신앙생활이 느슨해지고, 또는 눈을 어지럽히고 마음을 빼앗아가는 것들에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눈을 팔고, 병에 걸리는 등의 사정 때문에 영혼의 일은 뒤로 미루고 몸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려면 온 마음과 온 삶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몸만 함께 있고 마음은 다른 곳에 있다면, 그것은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대림’이라는 말 때문에,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대림 시기는 나는 가만히 있고,떠나 계셨던 주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시기가 아닙니다. 주님은 나를 찾아다니시고, 또 나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님에게로 돌아가려고 ‘나도’ 노력하는 시기가 곧 대림 시기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찾으시고, 나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바로 잃은 양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옳습니다. 위선자들처럼 “나는 잃은 양이 아니다.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교만이고, 그 교만 자체가 곧 ‘잃은 양’이라는 표시가 됩니다.
자기 스스로 ‘회개할 필요가 없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목자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고, 그것은 목자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일이 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거부하는 일이 됩니다. <큰 죄를 지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즉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못 받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1요한 1,8-10)>
3)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사정을 모르는 채로 세상에 오셨다가 인간들의 모습을 보고 나서 비로소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부터 인간들을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에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인류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인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목자 없는 양들처럼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의 문’으로 데리고 가시는 ‘목자’이신 분이고, 데리고 가신 다음에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이신 분입니다. 우리 쪽에서 할 일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가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의 5절에 있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라는 말씀은, 이방인들에게는 ‘나중에’ 가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가라고 하신 것은,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부터, 또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부터 인도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선교활동을 할 때에도, 식구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자기 식구들은 내버려 둔 채로 다른 집에 가서 선교활동을 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비웃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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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대하 사도요한 신부님]
날씨가 추워지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가 봅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무엇을 할까, 어떤 일이 있을까? 벌써부터 생각하시고, 계획을 짜시는 분도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의 탄생을 맞이하여 주님께 드릴 선물도 한번 생각해 보시는 것도 어떨까요?
오늘 주님께서 좋아하실 선물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 하십니다. 우리 주위를 한번 잘 둘러 보시면 목자없이 길 잃고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들이 참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 군중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군중들을 보시고, 참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하느님의 품으로, 하느님의 다스림 안으로 보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당신 혼자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도와줄 협조자가 필요했고, 사도를 뽑았습니다. 그래도 추수할 일꾼들이 많이 필요했기에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바로 추수할 일꾼, 주님의 일을 도와줄 협조자가 여러분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지금 청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길 잃은 당신의 자식들을 찾아가 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길 잃은 자식들이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가정의 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몇 년이 지났지만, 미사 참례하지 않고, 주님의 몸을 영하지 않는 그 사람이 지금 길 잃은 양일 수 있습니다. 그에게 다가가 주님과 함께 살아보자고 청하는 것도 주님의 일을 대신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내 옆에 있는 친구나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고, 남에게 피해만 주고, 자기 입을 더렵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지금 길 잃은 양 일 수 있습니다. 그에게 다가가 같이 성당에 한번 가보자고, 성당에 있는 십자가를 한번 보자고 권해보는 것도 주님의 일을 대신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내 자신일 수 있습니다. 성당에는 나오지만, 근성으로 미사를 드리고,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가정 안에서 믿음을 저버리고, 신자라고 하지만 기도도 제대로 하지 않는 내 자신이 길 잃은 양일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통회하고, 고해 성사를 본 다음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일을 대신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언제나 세상의 유혹에 놓여 있기에 방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자신부터 본래의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나와 같이 길 잃은 사람을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것. 그것이 추수할 일꾼, 주님의 일꾼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각박하고, 삭막한 일도 많습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젊고 유능한 청년 사업가가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길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벽돌 한 장이 날아와서 그의 고급 승용차를 때렸습니다. 화가 난 그는 차에서 내려 벽돌을 던진 한 소년의 멱살을 잡고 말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짓이냐? 변상을 받아야겠으니 너희 부모님께 가자" 그러자 소년이 울먹이며 말했습니다."제가 벽돌을 던지지 않았다면 아무도 차를 세우지 않았을 거예요. 저기 제 형이 휠체어에서 굴러 떨어졌는데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랬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청년 사업가는 목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아무 말 없이 소년의 형을 휠체어에 올려주었습니다.
그 후로도 그 사업가는 차를 수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상처 난 차를 볼 때마다 그를 향해 도움을 청해오는 사람을 외면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위의 얘기는 각박한 세상을 대변해 주는 이야기이며, 우리에게 무언가 느끼게 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자신은 지금 어떠합니까?
주님으로부터 벽돌을 맞기 전에 나의 이웃을 먼저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도와주고 치유해 주어야할 사람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나에게 무슨 힘이 있느냐고 말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자그마한 나의 관심이, 자그마한 나의 손길이 큰일을 이루시는 주님께서 분명히 도와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일을 도와줄 일꾼들을 찾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분의 힘이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목마름을 달래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아픔을 낫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이 다 이루지 못한 일을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때입니다.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 주어라. 나병 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 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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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열두 사도의 선발과 파견, 그리고 그들을 위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소개하기에 앞서 예수님의 복음 선포 활동을 요약하면서 스승이자 치유자로서 예수님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고 부르시어 그들에게 권한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권한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아픈 이를 고쳐 주며 죽은 이를 다시 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권한을 받고 파견되어 ‘사도’로서 수행해야 하는 복음 선포 활동은마태오 복음 9장 35절에 묘사된 예수님의 활동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과 사도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파견된 이’, 곧 예수님에게서 권한을 받아 그분을 대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도가 수행하는 권한은 ‘파견한 이’와 ‘파견된 이’의 정체성을 밝히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파견된 이의 존재 이유와 역할은 파견한 이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 줄 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제자들의 파견은 복음 선포로 하늘 나라를 세상 속에서 구현하고 하느님의 신적 현존을 확장하는 방법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사도로 살아가려는 우리에게 무엇을,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 답은 분명하고도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것을 그대로 하면 됩니다. 우리의 사도적 활동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표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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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9장이 끝나는 부분과 10장이 시작되는 부분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구조입니다. 그러다보니 원래는 각각의 독립된 단락이 지닌 두 가지 메시지가 하나로 이어져 새로운 의미가 드러나게 됩니다. 즉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라’는 메시지에 주님께서 열 두 제자를 직접 파견하시는 내용이 연결되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다른 이들이 참여하기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말고 너희가 직접 가라’는 새로운 메시지가 드러나는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 눈 여겨 볼 점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신 일과 똑 같은 일을 제자들에게 ‘소명’으로 맡기셨다는 것인데, 병자들의 치유와 구마 그리고 복음 선포가 그것이지요. 예수님을 스승이자 주님으로 섬기고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이 세상의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아 완수해야 한다는 의무와 책임이 따르기 때문일 겁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힘들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군중들을 구원의 길, 참된 기쁨의 길인 하느님 나라로 한 명이라도 더 인도하려면 스승이신 예수님을 닮은 착한 목자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니,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이 그런 목자가 되어주기를 바라셨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제자들이, 또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그런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 방법으로 우리가 두 가지를 느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책임감’이고 다른 하나는 ‘측은지심’입니다. 첫째, ‘책임감’이라는 관점에서, 나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웃 형제 자매 중 한 사람이 유혹에 빠져 길을 잃고 엉뚱한 곳을 헤매면 그것을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일’로 여기며 무관심하게 대하지 말고 ‘나의 일’로 여기며 주님과 함께 그를 찾아 나서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가 죄를 지어 길을 잃은 건 내 탓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세상에서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우리는 알게 모르게,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서로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고받기에 내 책임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구원’은 나 혼자만 지옥에서 벗어나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그분과 함께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측은지심’이라는 관점에서, 죄를 지어 하느님 사랑에서 멀어진 이들을, 그래서 하루 하루를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 사는 그들을 가엾이 여기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같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한 가족’,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자식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이 모두 소중한 존재이니, 또한 ‘아픈 손가락’일수록 더 큰 관심과 사랑을 주는 게 부모 마음이니, 내가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로 사랑하는 만큼,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내 형제를 안쓰럽게 여기며 그들이 다시 아버지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래서 아버지께서 잃었던 아들을 되찾는 큰 기쁨을 누리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구원의 잔치가 벌어지는 기쁜 자리에서 혼자 분노와 억울함으로 씩씩댔던 불쌍한 ‘큰 아들’처럼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주위를 둘러봅시다. 고된 세파에 시달리느라 기가 꺾여 있는 이웃이 없는지, 부족함과 약함 때문에 죄를 지어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형제가 없는지… 그리고 그런 이웃과 형제를 찾아가 함께 있어주고 위로해주며 힘을 줍시다. 주님께서 나에게 거저 그렇게 해주셨으니 나도 그들에게 거저 그렇게 해 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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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가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님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면서 모든 부분에서 넉넉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7~80년대를 석기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현재 엄청난 발전을 일구었습니다. 하지만 행복도는 어떨까요?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2018년부터 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보며 우리의 행복을 반추하게 됩니다.
부유한 나라의 국민은 삶의 만족도가 높았지만, 삶의 의미를 적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가난한 나라의 국민은 삶의 의미를 아주 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행복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만족도는 성공 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는 제대로 산다는 감각입니다. 따라서 삶의 의미를 더 크게 느끼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의미를 찾는 데 종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절대자를 통한 굳은 믿음 안에서 의미를 찾고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유한 나라의 사람은 종교가 그들에게 큰 의미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행동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어 줍니다. 주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삶의 만족도를 높이려고 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삶의 만족도만을 위했다면 부귀영화에만 집중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사람들에게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라고 말 대신 ‘사랑’만을 말씀하셨고 당신 스스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삶의 의미만을 향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 혼자 모두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이 일꾼들은 받는 자가 아닌 ‘거저 주는 자’였습니다. 그 일꾼은 특별한 사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주의가 만연한 이 세상 안에서, 우리가 모두 주님의 일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그래서 모든 이가 물질적인 삶의 만족도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를 느끼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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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님과 나>
마태오 9,35─10,1.5ㄱ.6-8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열 두 사도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님과 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마태 10,1)
나를 믿으시는
님께서
나를 바라시는
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님께서
님 닮게
나를 빚으시어
님께서 몸소
계시고픈 때에
님께서 몸소
머무시고픈 곳에
님께서 몸소
만나시고픈 이에게
님 닮은 나를
보내시니
오로지 님 계시듯
그리 나 있기를
이리 나 있음이
오로지 님 계심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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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일을 줄이면 줄어들고 일을 늘리면 늘어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줄이고 또 어떤 일을 늘려야 하는가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주님의 일을 늘리고 내 일을 줄여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주님의 일은 줄이고 내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잘 챙기는 사람은 내 일에도 충실하게 되지만 내 일에 매이면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 9,37)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돌봐줘야 할 사람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는 말씀입니다. 더더욱 잘 돌볼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 없으니 가슴 아픈 일입니다. 주님의 일꾼은 바로 우리 자신이고, 일꾼의 역할을 잘하려면 그만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졌을 때 꼭 내 것으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혹 그 역할을 할 수 없다면 그런 일꾼을 보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를 권합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탈랜트는 다양하고 소중합니다. 탈랜트는 묵히지 않고 삶의 자리에서 마음껏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관리자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으로 잠시 무상으로 사용하다가 떠나야 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맙고 행복한 일인지요! 관리를 잘해야 하는 것은 자명합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 심판자로 다시 오실 것인데, 그때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일깨울 협력자를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할 일을 다른 이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내가 일꾼이 되어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하시며 걱정하시는 주님의 근심을 덜어드려야 합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매 순간 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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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말씀 전례>는 ‘자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이사 30,19)고 합니다. <화답송>에서 시편작가도 “주님은 마음이 부서지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시네.”(시 147,3)라고 노래합니다. <복음>에서는 ‘선한 목자’가 지닌 자비의 마음, 곧 “가엾은 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마태 9,36)
사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이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온갖 고통과 질병과 가난과 근심에 시달리는 이들에 우리는 둘러싸여 있습니다. 또한 일자리를 못 얻어 거리에서 기가 꺾여 방황하는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가 꺾여 사는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있는 이들에 둘러싸여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곁에 있는 형제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또 보지 않으려 하는 걸까?
그것은 ‘가엾이 여기고 소중히 여기는 선한 목자의 마음’을 지니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곧 타인의 처지에 마음 아파하지 않음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처지를 보고 슬퍼지는 자신의 마음에 충실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같이 지니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를 우리는 “하느님의 연민”, 곧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제1독서>와 <화답송>에서 보여주듯이,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는 마음’입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태중의 아기와 분리되지 않는 어머니의 마음’을 말합니다. 엄마의 숨으로 두 몸이 함께 숨 쉬는 것을 말합니다. 곧 타인을 자신의 일부로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일부’로 여기십니다. 그러니 지체가 아프면 온몸이 함께 아프게 됩니다. 우리도 그분의 이 마음을 품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립 2,5)
그러니 우리는 그 마음을 ‘이미’ 우리 가슴에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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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주님!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 마음에 심으소서.
제 손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게 하시고, 제 말이 꺼져가는 불씨를 끄지 않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있는 그들을 더 이상은 못 본 척 무시하고,
모르는 척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기 꺾인 이들의 바람막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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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위로자이며 스승이요 치유자이신 연민의 하느님-
"주님을 기다리는 이는 모두 행복하여라!"(이사 30,18)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하느님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본질은 변함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너희 시온 백성아,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참으로 가까이 계시어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의 부르심에 응답하시는 위로자 하느님이심을 천명하십니다. 이어 위로자이자 동시에 스승이신 주님이심을 밝히십니다.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그리고 너희가 오른쪽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 때, 뒤에서 ‘이것이 바른 길이니 이리로 가거라.’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스승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셔도 우리 마음의 귀가 닫혀 있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많이 스승이신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을까 생각하면 순전히 우리 책임임을 통감합니다. 침묵중에 깨어 경청하는 자세가 얼마나 본질적 영적자세인지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 삶의 모두가 하느님의 은혜임을, 하느님은 우리를 보살피시는 분이자 치유하시는 분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분께서 너희가 밭에 뿌린 씨앗을 위하여 비를 내리시니, 밭에서 나는 곡식이 여물고 기름지리라. 그날에 너희의 가축은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고, 밭일을 하는 소와 나귀는, 삽과 거름으로 까불러, 간을 맞춘 사료를 먹으리라...또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하리라.”
얼마나 부지런히 우리를 살리시고 치유해주시는 치유자 하느님이신지 감동적으로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말해 언제나 우리를 위로하시고 가르치시고 살게 하시고 치유하시는 연민의 하느님이라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대림시기는 오시는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이런 하느님을 체험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새로 임명된 교황청의 설교가 파솔리니 신부의 대림 첫 강론은 주제는 “하느님의 새로움의 기적에 우리 마음을 열라(Open our hearts to wonder of God’s newness)”였습니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가르치시고 살리시고 치유하시는 연민의 하느님의 늘 새로운 기적에 활짝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이사야서의 예언이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실현됩니다.
주님은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시며 전방위적으로 활약하십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인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수확할 밭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 청하라 하시고 당신 친히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그들을 당신 능력으로 충전시킨후 파견하십니다. 예나 이제나 주님의 위로와 치유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허약하고 병든 사람들입니다.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1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2.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며, 3.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4.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져 받았느니 거져 주어라.”
당대의 예수님 열두제자들은 물론 오늘 믿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사명입니다. 예나 이제나 똑같은 인간들의 불행한 현실입니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 문제투성이, 무지의 인간에 대한 답은 주님과의 일치뿐이 없습니다. 주님을 떠남으로 자초한 온갖 죄와 병이요 불행에 비극입니다. 참으로 주님과의 일치로 영혼의 치유와 건강이 절박한 시절입니다.
제 아무리 첨단 문명의 인공지능 시대라 하지만 인간의 가련하고 불쌍하고 병든 무지의 현실을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아니 인간의 정신력은 영성은 날로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고갈되는 지구의 자원과 더불어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탐욕과 야만의 총체적 위기시대입니다. 언제나 인간이 문제입니다. 해방 80년이 되가는데 우리의 정치현실은 좌우의 극단적 대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인간성의, 영성의 진보가 참 미미해보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답은 단 하나, 주님을 철저히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암브로시오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성인은 340년경 현재 독일의 트리어에서 태어났으며,그의 아버지는 갈리아 지방 로마 제국 출신 장관이었습니다. 성 예로니모, 성 아우구스티노, 성 대 교황 그레고리오 더불어 서방의 사대교부에 속합니다.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암브로시오 이름뜻은 ‘불멸’을 뜻합니다. 태어날 때 꿀벌들이 날아와 그의 입술을 지식의 단물로 축였다고 전해오며 이런 은총으로 후세에 뛰어난 설교자로 추앙받게 됩니다. 374년 11월30일 세례를 받고 일주일후 주교로 임명되며 오래지 않아 당대의 유명한 설교가가 됩니다.
“나눔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의 실천”이라는 신념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사회선교에도 충실했으며 서방교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성직자가 됩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들 매일같이 그의 들으려고 찾아왔으며, 그는 겸손한 태도로 열심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증언입니다.
“그는 방문자들과 함께 있지 않을 때에는(아주 짧은 시간뿐이었습니다), 꼭 필요한 요기로 몸을 돌보거나 독서로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그가 책을 읽을 때에도 눈은 책갈피를 더듬어 나가고 마음은 터득한 바를 되씹고 있었지만, 목소리와 혀는 쉬고 있었습니다.
가끔 저희가 그를 찾아갔는데 누구든지 들어가지 못하게 금하는 법도 없었고, 또 누가 찾아왔다고 자기에게 알리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소리없이 책을 묵독하고 있음을 보았고, 그럴 때면 저희도 하릴없이 소리 내지 않고 한참동안 말없이 그냥 앉아 있다가 가만히 자리를 뜨곤 하였습니다. 그처럼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사람에게 누가 번거로움을 끼칠 엄두가 나겠습니까?
제 고민을 그에게 털어놓기로 하자면 그가 무척 한가했어야 하는데 그가 그런 여유가 있는 경우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백성 가운데서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그의 말씀을 주일마다 들을 뿐이었습니다.”<고백록, 성염역주,203-204쪽)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내용이라 자주 인용하는 부분입니다. 그와 황제와의 대립시 승리일화도 유명합니다. 390년 테살로니카 주민들의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한 책임을 물어 테오드시우스 1세 황제에게 회개를 명했고, 그가 주교에게 항복해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받았을 때 성찬례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후 보편적인 교회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보다 더 빛나게 됩니다. 이를 상징하는 듯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4권’은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책 제목에 최초로 표지 사진은 황제가 아닌 ‘성 암브로시오' 사진이 나옵니다. 397년 4월4일 향년 57세로 선종할 때 성인의 임종어도 감동적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어찌 이리 많이 남았다는 말인가! 오, 주여! 어서 빨리 오소서! 지체하시지 마시고 저를 거절하지 마옵소서.”
얼마나 고단한 분투의 노력을 다한 삶이었는지 마음에 와 닿습니다. 저는 이룬 일도 없이 부끄럽게 성인보다 무려 18년을 살고 있다는 자각이 더욱 분발하게 합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을 닮아 우리 모두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는" 무욕의 초연한 사랑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은 제때에 열매를 맺으리라."(시편1,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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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가 할 일은 없을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주님께서 오셨는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없는가?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든 생각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데 우리가 할 일이 없겠습니까? 대림절이라고 하는데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습니까?
오셔도 무관심하고 환영하지 않는 사람도 많으니 기다리기라도 하고 환영까지 하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좀 더 사랑한다면, 주님 사랑을 본받아 이웃 사랑을 한다면 주님처럼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구나!” 하며 안타까운 마음도 들고 뭔가 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어야겠지요.
오늘 주님께서 수확할 것이 많다고 하시는데 씨 뿌리는 것까지는 우리가 해야 하겠습니다.
그다음은 우리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주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시기 말입니다.
“그분께서 너희가 밭에 뿌린 씨앗을 위하여 비를 내리시니 밭에서 나는 곡식이 여물고 기름지리라.”
그런데 주님께서는 씨앗이 싹을 틔우고, 싹이 자라고 여물게 하실 뿐 아니라 뿌릴 씨까지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달린 것은 할 마음뿐이고 씨를 뿌리는 수고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마음 곧 사랑입니다.
그런데 마음뿐, 사랑뿐이라 하여 과소평가해선 안 되지요. 이 사랑이 제일 중요하고 대단한 것이고, 어느 정도 중요하고 대단하냐 하면 다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중요하고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하나의 사랑을 의심 없이 꽉 붙들고
멈춤 없이 그러니까 끝까지 계속 실천하면 됩니다.
그리고 성무일도 월요일 아침기도의 마침 기도처럼
하루를 시작하고 마치면 되겠습니다.
“주님, 간구하오니 저희가 할 일을 알려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어, 저희 모든 일을 당신으로 말미암아 시작하고 끝마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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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ㄷ)
<가엾은 마음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 9,27-31)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는 말씀'과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꺽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ㄴ-38)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같은 일이 '사도들에게' 주어졌고, 지금 여기에 있는 '또 다른 사도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셨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가엾은 마음(측은지심)이 되어, 받은 은총을 너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거져 받은 것이 많다고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되돌아 올 것을 바라지 않고 기쁘게 잘 나눕니다. 반면 하느님께서 거져 주신 은총이 아니라, 내가 노력해서 얻은 은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칠죄종(七罪種)의 하나인 '인색함'을 드러냅니다. 그렇게 끝까지 놓지 않다가 이 세상을 떠나간 사람들의 모습은 보기에도 안 좋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암브로시오 성인'은 마니교 이단에 빠져 있었던 아우구스티노를 회개로 이끄신 분으로서, 예로니모 성인과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대 그레고리오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학자요 성인'으로 칭송받고 있는 분이십니다.
'가엾은 마음'이 되어봅시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는 '또 다른 사도들'이 되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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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 36)
가엾은
마음을 통해
우리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없음을 깨닫게됩니다.
연민의 마음은
언제나
다른 시각으로
사람과 세상을
껴안게합니다.
우리를 향한
눈물겨운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을 다시
깨우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아픔에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 번도 뜨겁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불쌍하고 가엾은
우리들 실체입니다.
사랑의 본분은
진실된 마음입니다.
사랑의 진실된
사명에 충실한
대림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연민에서
사랑의 본분을
다시 발견하는
소중한 생명의
대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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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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