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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살아있으니 '動詞'
북유럽 정원 견학에서 돌아와 보름 만에 맞이한 나의 정원은 예측대로였다. 갈대와 딜이 폭발적으로 성장해 어른 키를 훌쩍 넘겼고, 여기에 잡초까지 뒤엉켜 완전한 무질서 세상이 돼 있었다. 다음 날 앞치마 끈을 단단히 조여 매고 각종 정원 연장을 활용해 자르고 정리하느라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됐다.
정원은 하루라도 돌보지 않으면 티가 난다. 식물 돌보는 일은 당연히 잘 키우겠다는 것이 목표지만 통제의 의미도 크다. 씨를 맺느라 누렇게 변해가는 식물의 꽃대를 잘라 한 번 더 꽃을 볼 수 있게 하는 ‘데드 헤딩’과 웃자란 조팝, 꽃댕강나무 등 관목을 잘라주는 일이 반복된다. 꽃 대신 이삭을 맺는 사초는 여름엔 아예 싹둑 잘라준다. 높은 습도에 공기가 잘 통하지 못하면 검게 썩어가기 때문이다.
1707년엔 위대한 생물과학자 둘이 탄생했다. 스웨덴의 린네(1707~1778)와 프랑스의 뷔퐁(1707~1788)이다. 지금은 뷔퐁의 존재가 미약해지고 린네의 명성이 더 크지만, 생존 당시는 린네가 뷔퐁에게 필적할 수준이 아니었다. 뷔퐁은 린네의 유전적 생명체 분류 방법을 비판하고 무시했다. 자연을 보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뷔퐁은 자연은 어떤 잣대로도 분명하게 규정될 수 없다고 봤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Every Living Thing)’을 쓴 제이슨 로버츠는 “린네는 세상을 명사로 봤고, 뷔퐁은 동사로 봤다”고도 했다.
뷔퐁은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되는 드라마틱한 조합체이지, 고정화된 독립체가 아니다’라고 규정했다. 뷔퐁은 프랑스 과학을 최고 수준에 이르게 했지만, 사후엔 린네를 따르는 과학자들의 승리로 그의 이론은 퇴색했다. 하지만 1860년대 영국의 찰스 다윈은 뷔퐁의 이론을 ‘진화론’으로 발전시켜 그가 옳았음을 뒷받침했다.
과학적으로 옳고 그름은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매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정원을 보면서 종종 뷔퐁을 지지하게 된다. “그래, 세상은 동사다. 올해 다르고 내년 다르고. 여름 지나면 풀들도 세력이 꺾이듯, 모든 고통도 결국 지나간다.” < ‘조선일보(2024. 7.22.) [一事一言]’에서>
* 출처: 한국문인협회 상주지부
https://naver.me/5jjfOhCa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 백작
프랑스의 수학자·박물학자·철학자
뷔퐁 백작 조르주루이 르클레르(Georges-Louis Leclerc, Comte de Buffon [ʒɔʁʒ lwi ləklɛʁ kɔ̃t də byfɔ̃][*], 1707년 9월 7일 ~ 1788년 4월 16일)은 프랑스의 수학자·박물학자·철학자·진화론의 선구자이다. 어린시절에는 아버지의 강요로 법학을 공부했지만, 후에 식물학,수학,천문학 등도 배우게 된다. 그는 꾸준히 연구를 하며, 수학 및 과학논문을 발표했다. 수학 분야에서는 Franc-Carreau게임이나 뷔퐁의 바늘 문제 같은 것등을 해결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과를 인정받아 왕립아카데미에서 일반회원이 되어 활동하게 된다. 그 후 그의 연구방향은 동식물과 지구의 진화등으로 바뀐다. 그는 파리 왕립식물원의 원장이 되어 그 자리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1749년부터 1804년에 걸쳐 모두 44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박물지(Histoire Naturelle)>를 썼다. 18세기 후반 과학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후대 연구자들에게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그가 연구한 내용은 신학을 과학연구 밖으로 배척시키게 했다. 후에 다윈이 진화론을 주장할 때 사용한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였다.
목재의 인장강도에 관한 실험
뷔퐁은 오랫동안 목재의 인장강도에 관한 실험들을 진행하였다. 작은 목재와 큰 목재같의 성질들을 비교하는 실험 같은 것들을 수행 했다. 수천 개의 결함이 없는 작은 목재의 성질들을 탐구한 끝에, 작은 목재의 성질을 추론하는 것을 밝혀내고, 건축구조물을 이루는 목재에 관한 실험들을 진행했다.
Franc-Carreau게임
Franc-Carreau는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뷔퐁이 과학아카데미 이전에 1733년에 계산한 게임이다. 여기에 이 문제에 대한 1733년 아카데미에서의 회상록이 있다. 똑같은 네모난 타일이 차있는 방에서 금화 또는 은화를 던진다고 해보자. 얼마나 많은 동전들이 그 조각 중 하나에 떨어질 것인가? 타일이 정사각형이라고 가정해 보자. 정사각형 안에 그 동전의 반지름 만큼 경계에서 떨어진 곳에 선을 긋자. 항상 동전의 중심이 선을 그어서 만들어진 정사각형 안이나 경계에 떨어진다면 그 동전은 타일 한 개 위에 있을 것이고, 동전의 중심이 그 밖에 있다면, 타일 한 개 위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전이 타일 한 개에 떨어질 확률은 두 개의 정사각형의 넓이의 차에 떨어질 확률이랑 반대이다. 동전이 둥글지 않고 정사각형이라면 위치에 따라 조건이 달라지므로 좀 더 어려운 문제가 될 것이다. 평행한 타일이 있는데 바늘을 던지는 문제로 바꾼다면 뷔퐁의 바늘문제로 귀결된다. [4]
뷔퐁의 바늘 문제
뷔퐁의 바늘 문제는 1733년(18세기)에 자연학자이자 수학자인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에 의해 처음 제안된 것으로, 바닥에 간격이 일정한 평행한 선들이 있다고 하고, 여기서 길이가 주어진 바늘을 떨어뜨렸을 때, 평행선 위에 바늘을 겹칠 확률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묻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기하학적인 확률문제로 적분을 이용해 얻을 수 있다. 이 문제는 1777년에 뷔퐁 자신에 의해 풀렸다. 뷔퐁의 바늘 문제는 바늘이 선들간의 간격보다 크지 않을 경우 파이값을 예측하는 몬테카를로 방법으로 응용될 수 있다.
뷔퐁의 바늘문제가 이용되는 예
뷔퐁의 바늘 문제의 응용은 자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Bath University의 Centre for Mathematical Biology에서, 개미 집단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서 뷔퐁의 바늘 문제가 사용된 경우를 찾았다. 연구원들은 개미들이 개미둑의 크기를 알아보려 할 때, 둑을 두 번 오르내리면서 두 번째 경로가 첫 번째 경로와 얼마나 겹치는지를 세어 그 크기를 추정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밝혔다.
일반적으로 개미들은 보통 50에서 100마리 정도로 무리를 이룬다. 이러한 개미 집단이 선호하는 개미집의 크기는 주로 그들 집단의 규모에 의해 결정된다. 개미들은 원래 살고 있던 개미집이 파괴되면 그들의 새 집이 될 수 있는 곳을 알아보러 떠난 '스카우트 개미'가 알맞은 장소를 찾아 돌아올 때까지 지낼 적당한 공간을 찾아야 한다. 개미가 그들 집단의 크기를 고려한 특정한 크기의 집을 선호한다는 관찰로부터, 연구원들은 이 스카우트 개미들이 넓이를 측정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어낼 수 있었다.
스카우트 개미들의 수색은 집이 될 수 있을 만한 둑을 둘러다니면서 탐사해 경로를 남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 다음 개미는 다시 돌아와 첫 번째 경로와 반복해서 교차하는 새로운 경로를 따라 둑을 걷는다. 첫 번째 경로를 걸을 때 개미들은 자신 스스로 나중에 두 번째 경로를 걸을 때 이 첫 번째 경로와 겹칠 때마다 그 사실을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화학 물질을 분배한다. 연구원들은 이 스카우트 개미가 경로가 겹치는 횟수를 계산하고 이로부터 집의 넓이를 추정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미들은 둑의 크기를 꽤 직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 만약 두 번째 경로가 계속해서 첫 번째 경로와 교차했다면, 넓이는 작을 것이다. 반대로 그들이 두 번째로 둑을 가로지를 때 교차하는 부분이 적었다면 그 만큼 더 넓을 것이다. 이렇게 대강 둑이 크다 작다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지만 사실 스카우트 개미는 뷔퐁의 바늘 문제의 변수를 사용한다. 개미들이 측정한 넓이는 무작위로 평면 위에 흩어진 선들이 서로 교차된 횟수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다. 이는 뷔퐁 문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뷔퐁 문제에서 두 선 사이의 거리가 더 멀다면 그 만큼 교차할 확률이 적어진다. 즉, 선들 사이의 거리가 바늘의 길이보다 길어지면, 아무리 큰 각이 생기더라도 항상 교차할 수 없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개미들의 아이디어는 평행한 선들의 간격을 넓혔을 때, 흩어진 선들 사이의 면적이 증가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을 연구한 뷔퐁 문제와 관련이 있다.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개미들은 그들의 새로운 집이 될 둑의 크기를 뷔퐁의 바늘 문제를 이용해 측정할 수 있는 것이다.
진화론
뷔퐁은 생명이 어떻게 자연적으로 발생하는가에 대한 근거를 찾다가 1748년 존 니덤의 현미경을 이용한 동식물의 자연생식을 관찰함을 통해 종 이론이 자신의 확고한 이론이 되었다.
진화론에 대한 전반적인 기여
뷔퐁은 식량의 공급보다 생물이 좀 더 빨리 증가하여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경쟁을 한다고 하였다. 그는 단일 종 사이에 형이 다른 변종이 있고, 일부 동물들은 멸종했거나, 어떤 동물들은 일종의 진화적 변화를 겪어 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제시하였다. 또한, 그는 아주 상이한 동물 사이의 구조적 유사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관찰한 끝에 진화 생물학에서 과거 화석간의 관련성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는 진화 문제의 해결에 실험적 접근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뷔퐁의 진화론
고대생물의 뼈 화석에 대한 해석
19세기 말, 고대 생물의 뼈 화석(맘모스,공룡)의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 지고 있었다. 뷔퐁은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생명의 창조에 개입한 것은 열이고, 지구가 과거에 더 따뜻했기 때문에 생물의 창조가 더 쉬웠다고 주장했다.
동식물의 지리적 분포를 통하여
어떤 섬에서 제한된 동식물 상이 존재하며 섬에 따라 서로 다른 종이 존재한다. 이 사실은 우연히 일정한 섬에 종이 퍼졌고 그곳에서 격리되어 진화 과정을 밟았다는 가정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점에서 뷔퐁은 지역에 따른 종의 고르지 못한 분포에 주목했다. 종의 고르지 못한 분포란 말은 어떤 종은 특정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뷔퐁은 지역에 따라 유사하지만 다른 종의 분포도 발견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석하여 하나님이 한 곳에서 종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몇 개의 창조 장소가 있으며 그 장소에서 환경에 따라 종에 변이가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비교지질학
뷔퐁은 최초로 환경이 비슷한 다른 지역에서도 서로 다른 개체들의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그리고 이 내용은 뷔퐁의 법칙이라 불린다.그는 북아메리카에 사는 많은 포유류들을 유라시아 대륙에서도 발견하였고, 그는 그들이 현재보다 기후가 따뜻했었던 알래스카를 넘어 서식지를 옮겼을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뷔퐁은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가 비슷한 열대 환경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메리카에 사는 대부분의 포유류들이 아프리카의 포유류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모든 생물들은 고세계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는 서로 다른 대지가 인접해있을 때 포유류들은 살기에 적합한 지역을 찾아 이동을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바다가 두 대지와 서로 다른 동물군들을 분리한다.(다른 차이점들은 기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뷔퐁은 생각하였다.) 뷔퐁은 또한 생명의 역사를 재구조시키기 위해 화석을 이용하였다.
비교 해부학적 증거를 통하여
상동기관
진화의 연구에서는 비교 해부학적 증거가 중요하다. 척추동물 사이에는 서로 전혀 다른 생활을 하는 것들 끼리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인간의 손팔, 새의 날개, 고래 지느러미 같은 것들은 해부학적으로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다른 역할을 하도록 특화 되어 있다. 이런 기관들을 상동기관이라 한다. 뷔퐁은 개의 다리 뼈와 물개의 지느러미 모양의 발의 뼈 같은 상동기관을 제시하였다. 이것을 제시함으로써 그는 동물 중에서 서로 상관된 것이 같은 조상에서 유래했음을 주장했다. 또한, 진화의 결론은 흔적 기관(어떤 종에서는 불필요하게 되었으나 다른 종에서는 아직 사용되는 것, 인체 표면의 털, 뱀에 남아 있는 불필요한 사지의 잔존물)의 존재를 증거로 내세울 때 힘을 얻는다. 여기서 그는 돼지 발가락과 같은 흔적기관을 제시하였다. 이는 지적인 창조주가 생물체들을 개별적으로 설계했다는 주장을 반박하게 된다. 그는 돼지가 독창적이고 특별하고 완벽한 계획으로 형성된 모습으로 창조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돼지에게는 확실하게 쓸모없는 부분들 즉, 어떤 식으로도 활용할 수가 없는 부분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자연은 피조물을 창조할 때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것이 딱히 정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한편, 다윈의 진화론은 목적도 방향도 없는 길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라면, 뷔퐁의 진화론이 진화가 하나님이 창조한 완전한 것에서부터 퇴화되는 과정을 밟았다고 주장한 점이 특징적이다. 예를 들어, 그는 인간과 원숭이의 공통점을 알았으나 원숭이에서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 원숭이는 아담의 퇴화한 후손이라고 본것이다. 그는 유색 인종을 백색 인종에 비해 열등하다고 한 점에서 편견이 있었다. 이러한 뷔퐁의 견해는 1753년에 출간한 자연사 4권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가 일단 식물과 동물의 가족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당나귀가 말 가족의 일원일 수 있다. 하나가 다른 하나와 공동조상에서 퇴보되어 다르게 되었을 뿐이라면, 원숭이는 인간의 가족으로 퇴보한 사람일 뿐이다. 따라서 당나귀와 말이 그렇듯이 원숭이와 사람에게도 공동 조상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여지는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든 가족은 단일한 선조로부터 태어났음이 분명할 텐데, 단일한 선조는 세대를 거듭한 후에 어떤 경우에는 높은 자손이 되었고, 다른 경우에는 낮은 자손이 되었다.
한계
뷔퐁은 다윈이 진화론에 포함시킨 거의 모든 중요한 요소를 얻어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확고하고 엄밀하게 정리하지 않고 산만한 양식으로 기술했다. 또한, 다윈이 제시한 진화의 증거, 진화의 메커니즘, 그리고 진화의 경로와 같은 구체성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진화론을 함에 있어 그는 많은 오류를 범했다. 진화를 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진화의 증거이다. 이 증거는 고생물학, 발생학, 지리학적 분포, 비교 해부학 등에서 나온다. 진화 연구 방법으로 보았을 때, 고생물학에서 중요한 것은 화석(화석은 멸종된 또는 오래전에 살았던 동식물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이며, 화석을 통해 원시형과 현대형과의 연결 고리를 알아낼 수 있다)에 관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뷔퐁은서로 다른 종류의 화석이 다른 기간에 나타난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당시 화석에 큰 의미를 찾지 못했다. 또한, 뷔퐁은 발생학적 증거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다
뷔퐁 이후 진화론
조르주 퀴비에
프랑스가 혁명 이후 공화국이 되었을 때 퀴비에는 시골에 살면서 박물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수백 가지의 종을 규명하는 기술하는 데에 린네의 방식을 뒤따랐다. 후에 퀴비에는 비교해부학 교수의 조교로 자연사 박물관 직원이 되었고, [비교해부학 강의]를 출판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동물의 서로 다른 부위들이 함께 맞물려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주장하였다. 이는 화석의 잔해를 설명하고 분류하려는 데 높은 가치를 지닌다. 그는 비교연구를 통해 동물들은 한 개의 집단이 아니라 크게 4개의 집단으로 나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화석 잔해물 연구를 하면서 멸정한 종들을 재구성했고, 고생물학을 만들어냈다. 서로 다른 지층에서 발견된 화석의 형태를 비교해 지질학적,연대기적으로 나열하는 과정을 통해 많은 종들이 멸종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였으며, 노아의 홍수 같은 대 격변이 몇 번씩이나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고정된 종에 대한 그의 생각은 프랑스의 진화 연구를 후퇴시켰다.
장 밥티스트 라마르크
라마르크는 뷔퐁의 애제자로 파리의 자연사박물관에 일했다. 그는 평생 동안 개체가 형질을 획득하고, 그것이 다음 세대로 전달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진화의 방식에 대한 모델을 개발했다. 퀴비에와는 달리 라마르크는 멸종이 되는 종은 없고 다른 형태로 발전되었을 뿐임을 주장했다. 예를 들어 기린이 나무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나뭇잎을 따먹기 위해 목을 늘림으로써 평생에 걸쳐 점점 더 길어지게 되었고, 그 기린이 자손을 낳으면, 그 자손들은 부모들이 나뭇잎을 따 먹으려고 시도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긴 목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하였다.[5]
지질학
지구의 나이
뷔퐁은 지구가 태양과 혜성과의 충돌 결과로 태양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생각했다. 이 추론을 통해 지구는 태초에 용융상태였으며 생명이 탄생할 수 있을 때까지 지구가 냉각해 왔다고 주장했다. 이 가설을 통해 그는 냉각에 걸리는 시간이 기존의 신학자들이 추론했던 창조로부터 시간이 6000년 보다 훨씬 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작 뉴턴은 그가 1687년에 출판한 <프린키피아>에서 지구와 똑같은 크기의 쇳덩이를 뜨겁게 달구면 많은 시간(6천 년)이 지나도 거의 식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5만 년 이상이 흐른 뒤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주장하였고 열의 지속기간이 지름에 비해 크지 않을 거라는 예측을 내놓았다. 여기서 힌트를 얻은 뷔퐁은 크기가 다른 철구슬을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가열한 후 손이 데지 안을 정도까지 식는 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하는 실험을 고안했다. 그런 후 그는 지구와 크기가 비슷한 공이 식는 데 걸리는 시간을 외삽으로 얻어냈다. 그는 지구의 나이가 최소한 7만 5천 년은 되어야 한다는 계산 결과를 얻어 냈다. 비록 그 과정은 부정확했지만, 성경 구절에 구애받지 않고 실제 측정치를 외삽하여 지구의 나이를 측정해 성경학자들이 추정한 나이보다 열 배는 더 많은 결과를 얻었던, 즉 열 배는 더 정확했던 매우 과학적인 시도였다(현재 최고 측정치는 45억 년).
뷔퐁 후 지구의 나이에 대한 생각들(푸리에의 해석)
장 바티스트 조제프 푸리에
'열 흐름'을 서술할 수 있는 수식을 개발한 푸리에는 뷔퐁보다 더 나아갈 수 있었다. 그는 이런 수식들을 사용해 지구가 식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 냈고, 뷔퐁이 지나쳤던 요소를 지적했다. 뷔퐁은 지구의 단단한 껍질은 그 속의 융해된 물질들을 둘러싸고 있어 단열작용을 하는 담요처럼 열의 흐름을 가로막아 지구의 표면은 식었지만 그 속은 녹아있는 상태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그는 1820년 지구의 나이를 계산할 수 있는 수식을 적어두었지만 그 종이를 없앴다. 푸리에의 수식에 따라 계산하면 지구의 나이는 1억년이 된다. 뷔퐁의 측정치보다 1천배나 길지만, 현대의 측정치보다 50배 짧다.
과학철학사적 의의
뷔퐁의 지구 나이 측정 실험은 성경 구절과는 상관없이 실제 측정치를 가정하여 지구의 나이를 측정하는 매우 과학적인 시도임은 틀림없다. 현재 측정치인 45억년에 미치지 못한 결과였지만, 성경에서 추정한 값의 10배나 되는 값이었다. 이는 이후 18세기 후반으로 넘어가 신학과 과학의 직접적인 갈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제가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한 가설적 선언으로 태양과 혜성의 충돌로부터 지구가 탄생했다는 어떤 근거도 없다.
일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뷔퐁은 젊었을 때까지만 해도 보통의 학습 능력을 갖춘 범인이었다. 모든 것을 이해하거나 한 번 얻은 지식을 생각해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성격도 게을렀다. 그러나 그는 호화로운 생활에 빠져들지 않고 쾌락의 유혹에서 빨리 벗어나 학문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시간을 귀중한 재산이라 생각했는데, 이에 따라 생겨난 일화가 있다.
시간을 한정된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뷔퐁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기 일쑤였다. 그는 이러한 나쁜 습관을 없애고 아침 일찍 일어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지만 좀처럼 아침에 눈이 떠지지 않았다. 그래서 하인 조제프(Joseph)에게 도움을 청해 아침 6시 전에 깨워주면 그 때마다 크라운 은화를 하나씩 상으로 주기로 약속했다. 이러한 노력도 처음엔 소용없었다. 조제프가 깨워도 조금만 더 자게 내버려두라고 하거나 단잠을 방해했다고 화를 내면서 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잠에서 깬 다음엔 약속 시간에 깨워주지 않은 것에 대해 화를 내곤 했다. 이러한 주인의 태도에 화가 난 조제프는 어떻게든 은화를 얻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곤 아무리 주인이 우는 소리를 하고, 해고하겠다는 협박을 해도 억지로 정각에 주인을 깨운 뒤 침대에서 끌어내다시피 했다. 어느 날 아침에 뷔퐁이 평소와는 달리 떼를 쓰면서 애를 먹이자 화가 치민 조제프는 대야에 차가운 물을 떠다 잠옷을 입고 있는 뷔퐁의 등에 부었다. 그 효과는 즉각 드러났다. 결국 이와 같은 노력으로 뷔퐁은 간신히 늦잠 자는 습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 후 40년에 걸쳐 뷔퐁은 아침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공부하고, 저녁에 다시 5시부터 9시까지 책상에 앉아 연구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매일 시간을 정해 학문에 열중하는 사이 이것이 습관이 되어 몸에 밴 것이다. 그의 상당한 연구 업적도 이러한 튼튼한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6]
뷔퐁의 글쓰기 능력
뷔퐁의 글쓰기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이 능력은 그가 1753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들어가는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저술한 박물지도 다른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되 있었다. 그가 쓴 글들은 문학적으로 세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만큼 그의 글쓰기 능력은 뛰어났지만, 해가 되기도 했다. 후에 프랑스의 수학자 장 르 롱 달랑베르는 그를 "뛰어난 아첨꾼"으로 불렀다.
뷔퐁에 대한 평가
뷔퐁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전통을 지키는 마지막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뷔퐁은 생식기관을 기준으로 한 린네의 분류 체계를 거부하고 하나의 특징을 잣대로 삼는 것은 인위적인 방법이라고 비웃었다. 그는 자연철학자가 할 일은 자연을 설명하는 것이지 질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또한, 새로운 과학 기술 역시 거부했다. 막강한 권세와 오만한 뷔퐁이 다른 신진 과학자들의 앞길을 막자, 뷔퐁이 죽은 뒤 박물학을 문학적이고 사적인 취미 활동으로 끌어내리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특히 18세기 말은 전통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양한 의견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분위기가 성행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뷔퐁을 전통을 지키는 마지막 세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