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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민 시인
본명 박옥순. 1974년 충북 청원 출생.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2001년 < 경향신문> 신촌문예로 시 당선. 2011년 <한국일보> 신촌문예로 동화 당선.시집 <생일 꽃바구니>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동화집 <할머니는 축구 선수> . 동국대, 숭실사이버대 등에 출강.'시합' 동인
거머리와 함께 여행하는 법 6
ㅡ풍경의 그늘
휘 민
불 꺼진 브라운관에 얼굴 하나 떠오른다
리모컨을 손에 든 채 살짝 입꼬리를 올려본다
언제쯤 버릴 수 있을까
폐허 속에서도 웃음을 연습하는
이 지독한 습관의 잔상을
남편은 회사에 출근하고 아이들은 유치원에 등원하고
나는 어두운 거실에 남아 텔레비전을 본다
방송 3사의 아침 드라마를 순례하고
케이블 채널 들락거리며 한물간 막장 드라마를 다시 본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홈드라마의 문법에 코웃음이 나지만
점심때까지는 이 안락한 소파를 지켜낼 것이다
이 먼 길을 오려고 예감도 없이 털레털레 걸어왔던가
비전 없는 환상을 좇으며, 리모컨이 가리키는 대로,
플러스와 마이너스 기호 사이에서 종종걸음을 쳤던가
광고주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는
스티브 잡스도 부럽지 않았던 내가,
잡지 매대에서 내가 쓴 칼럼들을 뒤적일 때는
퓰리처상 수상자도 부럽지 않았던 내가,
차라리 저 무료한 시곗바늘이 자정을 가리키면 좋겠어, 아니 시계 따위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버리면 좋겠어, 비가 내렸으면 좋겠어, 이 게으른 소파 위로, 밥그릇에 말라붙은 점액질의 통증 위로, 시원한 소나기 한바탕 쏟아졌으면 좋겠어, 그래서 내 몸속, 내 모든 신경세포들과 이백여섯 개의 뼛속까지 흠뻑 적셨으면 좋겠어,
나는 이제 진실이 궁금하지 않다
오늘도 유폐당한 기억은 브라운관에서 굴절되고
텅 빈 머릿속에선 쉴 새 없이 사이렌이 울어댄다
모든 것을 정지시켜버리는 이 슬픈 진공관
아무리 초점을 맞춰도 매직아이는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사람도 관계도 사라지고 풍경의 이미지만 남을 것이다
사진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웃고 있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을 때에만 아름답던 음소거의 풍경
온종일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막다른 계절의 골목에서
모두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플라스틱 해바라기들
저 흔들리지 않는 풍경 위에 나의 별이 찾아오기까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날들을 견뎌야 할까
—《현대시학》2014년 9월호
레고랜드의 상속자들 / 휘 민
그의 삶은 한바탕 질펀한 놀이였다
아홉 자식을 두었지만
쥐새끼도 모르게 한 동네 아낙과
배를 맞추어 성이 다른 아들을 낳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아들은 배 다른 형제들과
아롱이다롱이 뒤섞여 잘 자랐다
누구도 그 아들의 혈통을 의심하지 않았다
마을 뒷산의 조릿대들만 근질근질한 입을 단속하느라
북서풍이 불 때마다 생목이 말랐다
그 아들이 자라 그와 담벼락 하나 사이에 두고
가계를 세우고 아들을 낳았다
허리 힘 좋은 적자를 두었기에 그는
사흘이 멀다고 뒤주 바닥이 긁혀도
명주저고리 차려 입고 장 구경만 다녔다
장죽에 연초를 갈아 끼우며
야금야금 적자의 등골을 빼먹었다
가끔씩 아들네 집 방바닥의 온기가 궁금해지면
고샅에 나가 먼발치서 뒷집 처마에 걸리는
저녁연기를 장죽으로 빨아들였다
그러다가 풍 맞은 여편네가 삐뚤어진 입으로
시커멓게 멍든 문장을 각혈처럼 쏟아내는 날이면
자식이 고구마 줄기처럼 매달린 적자를
툇마루 밑에 꿇어앉히고 사정없이 장죽을 휘둘렀다
그가 적자의 못 박힌 등을 두드릴 때면
진양조로 흐르던 그 집의 비장한 가락이
예고도 없이 중중모리 휘몰이로 몰아쳐갔다
그런 날이면 닭장에서 까닭 없이 병아리가 죽어나가고
암탉들은 더 이상 알을 품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망령 든 세월
그가 장죽으로 기울어진 서까래들의 음률을 조율할 때마다
울안의 과실나무들이 하나 둘 쓰러져가고
늙은 감나무는 드물게 맺힌 열매마저 토해버렸다
마른버짐 번진 복숭아나무는 진딧물들의 좋은 안식처가 되었지만
바닥에 떨어진 감나무의 노란 배꼽들은
탯자리를 잃어버린 채 단단히 박힌 돌부리 사이를 뒹굴었다
늦가을 저녁을 잠시나마 풍요로 감싸던 우물가의 호두나무마저 베어졌을 때
그 집은 호두나무집이라는, 단단한, 생의, 마지막, 껍질,
마저, 벗어던져야 했다
그가 죽었다
노름과 취기와 노망으로 탕진한 한 세월이 꼬꾸라졌다
자신의 기둥 말고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은 아버지가 갔다
밀려오는 문상객들로 그의 집 처마가 사나흘 들썩거렸으나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짝짝 붙는 그날의 운수를 신통해하며
아버지의 마지막 온기가 서려 있는 사랑채에서
벙글어지는 입꼬리를 단속하며
화투패를 돌리느라 분주했을 따름이다
* 본래 레고(LEGODT)는 ‘재미있게 놀다’라는 뜻의 덴마크어다. 이를 줄여 레고(LEGO)라 부른다. 라틴어로는 ‘나는 모른다’ 혹은 ‘나는 조립한다’라는 의미가 있다.
—《포지션》2015년 여름호
몰골법 / 휘 민
만약 점자로 서로를 읽어야 한다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서 쩔쩔 매다가
밤새도록 사랑의 무늬만 더듬다가 아침을 맞을지 몰라
옛날 중국 사람들은 코끼리 뼈를 보고
코끼리의 모습을 상상했다지
그들에게는 뼈대라도 있었지만
서로에 대한 인상만 남아 있는 우리는
오늘 밤 또 어떤 자세로 잠들어야 할까
누군가에겐 촉으로 다가오는
윤곽을 그릴 수 없는 언어
어제는 기억이었다가 오늘은 망각이 되는
요철(凹凸)만 있는 침묵의 진경
껍데기를 벗은 몰골의 나와 당신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없는
관계는 영원히 연습만 있는 어떤 시도들
수없이 자리를 바꾸다가
어느 순간 골똘해지는
그러나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검게 구멍 뚫린 얼굴들
—《문학과 창작》2015년 겨울호
습관의 기술 / 휘 민
어둠이 바늘땀 성긴 겹옷 하나 벗어 놓으면
잠은 구겨진 모서리를 껴안고
의식의 바깥을 더듬어간다
이불 속에서 스치는 두 개의 체온
아이의 입가에 흘러내린 따뜻한 침은 내게 말한다
행복,
믿지 않으면 사라져버리는 불완전한 주문
가족,
서로 다른 종(種)들이 신들의 계보를 훔쳐서 만든
텅 빈 기억의 교차로
기이하고 낯선 언어들, 나와는 다른 세계에 속한 품 넓은 소파와도 같은
그 시간을 나는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있다
현관문에 매달린 파우치에 우유가 도착한다
오토바이 소리가 여명을 끌고 사라진다
파우치에 남은 떨림을 심장 끝에 모으며
나는 오늘도 거울 뒤편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시와 사람》2015년 겨울호
눈동자의 안부를 묻다 / 휘 민
오징어를 손질할 때 가장 힘든 것은
눈동자를 처리하는 일
통째로 넣어 끓일 수도 없고
대가리만 잘라낼 수도 없지
내장 다 발라지고 등짝에 붙은
힘줄마저 뜯겨나가도
이것만은 내줄 수 없다는 듯
버티고 있는 눈알 두 개
바다를 품었던 구슬이 참 맑네
따순 밥 얼른 해줄 테니 먹고 가라며
링거줄 매달린 환자복을 팔뚝까지 걷어 올리던
어제 저녁 엄마의 눈동자처럼
지금쯤 엄마는 가마솥 아궁이에 불을 지피셨을까
일곱 자식들의 또록또록한 눈망울 떠올리며
배내똥내 풍기는 따순 밥을 소복소복 푸고 계실까
국도 끓이지 못했는데
초인종이 울리네
나는 두리번거릴 새도 없이
물컹거리는 검은 구슬 두 개를
꿀꺽,
비린내를 느낄 새도 없이
갑자기 저녁의 목이 불룩해지네
—《딩아돌하》2016년 여름호
리듬의 탄생 / 휘 민
친구의 생일날 초대받지 못한 아이가
키 작은 회양목 사이에
리본 달린 선물상자를 숨기듯
아침밥을 먹다가 씹는 것을
잊어버린 아이가 자신의
눈동자 속에 노란 쌀눈을 감추듯
답안지를 걷어간 뒤에야
근의 공식을 기억해낸 아이는
마흔이 넘어서도
수학시험 보는 꿈을 꾸고
눈 감으면 영영 어둠일까 봐
치매에 걸린 노모는
달그락 달그락
끓고 있는
양은냄비 곁을 떠나지 못한다
⸻계간 《불교문예》 2018년 여름호
직소퍼즐을 맞추며 / 휘 민
일곱 개의 목뼈로 당신을 생각하는 밤이에요
손바닥과 맞닿은 코끝에서 새어 나온 작은 빛줄기가
허공에서 춤사위를 시작하고 있네요
당신은 어둠을 싫어했지요
그래서 빛을 파종하듯 밤하늘에
고독을 심어 놓았는지 몰라요
끓어오르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어둠 속에 환한 구멍을 뚫어 놓았는지 몰라요
별빛은 허공을 건너가는 어둠의 속도
춤을 추듯 흔들리는 당신의 붓질이
밤이 숨겨 놓은 빛깔들을 긁어내고 있어요
오늘 밤 나는 당신이 우주의 리듬을 발견하던
그 순간을 훔쳐보는 한 마리의 까마귀죠
낮 동안 오베르의 밀밭 사이를 서성이다가
당신의 그림자 뒤에서 불타오르는 삼나무 가지에
앉아 밤이 지나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어요
비애와 함께 우주를 건너가는 별빛의 노래
마침내 당신의 피부가 되어 버린
화란풍의 불란서 사투리를 듣고 싶어요
캔버스에서 뭉개진 거친 붓끝을 닮은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세요
빈센트,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변죽부터 울리며 천천히 다가갈까요 아니면
꿈틀거리는 별들의 심장으로 곧장 내달릴까요
때 / 휘 민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덜컹거리는
바퀴의 율동이 갑자기 바뀌는 때가 있지
꾸벅꾸벅 졸고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크게 고개를 떨구는 때
마주 보고 있는 레일이 서로에게
한 번씩 기울어지며 균형을 맞추는
앞으로 달려가기 위해 허공에
망치질을 하며 기울어짐을
연습하는 순간
눈을 감은 채 몸의 감각으로만
그림자의 높이를 가늠해 보는
살짝, 들추어진
고독의 한때
⸻시집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2018년 10월)
라운드업 레디* / 휘 민
내 몸속에 비료 먹은 개구리가 살아요
내 몸속에 다리 세 개 달린 방울뱀이 살아요
내 몸속에 입이 엉덩이보다 큰 원숭이가 살아요
내 몸속 개구리와 뱀과 원숭이는 호기심이 많아서
초대받지 않은 식탁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조리대 사이를 기어 다니며 방울소리를 내고
내가 먹으려는 바나나 껍질을 먼저 벗기기도 해요
그들과 함께 사는 일은 좀 성가신 일이지만
가끔은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해요
나는 콘샐러드를 벅다가도 입안에서 터지는 옥수수 알갱이가
어쩌면 개구리의 눈동자일지도 모른다는 탱글탱글한 몽상을 즐겨요
순두부 속에 갈라진 뱀의 혓바닥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고
두개골이 열린 채 골수를 파먹히고 있는 원숭이의 긴 꼬리가 손끝에서 만져지기도 해요
그러나 내 몸속에서 와글거리는 개구리와 뱀과 달리 나는
너무나, 정말이지 너무나도, 식물적이어서 내가
개구리 쓸개를 삼킨 뱀의 위장을 씹어 먹고 있는 원숭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하지요
그런데 콩고기를 씹을 때마다 구운 뱀 껍질 냄새가 나는 건 왜일까요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내 안의 욕심 많은 동물들은
왜 자꾸 초록 잎사귀들을 시뻘건 창자 속으로 끌어갈까요
나는 채식주의자인데 웬일인지 점점 포악해지고 있어요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많은데 아직 더 잃어야 할까요
개정판 식물도감을 뒤적여 봤지만 오늘도 라운드업 레디는 멀기만 해요
이 행성의 씨앗들은 날마다 자살을 파종하고 있거든요
그래도 나는 꽃술을 흔드는 바람처럼 다가올 천국을 기록해야 해요
동굴의 깊은 어둠 속에서 신의 음성을 듣고 있는 엘리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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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운드업(Roundup)은 몬산토가 생산하는 강력한 제초제. 라운드업 레디(Roundup Ready)는 라운드업 제초제에 저항력을 가질 수 있도록 설계된 유전자 변형 콩⸱옥수수의 상표.
⸺계간 《문학청춘》 2019년 봄호
발굴지에서 / 휘 민
어쩌다가 당신은 내 이름을 잊어버리고
어쩌다가 당신은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목소리마저 잃어버린 당신이
눈꺼풀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나를 보는가
잠깐씩 눈을 감았다가도
불화하는 심장의 고동에 놀라
쉼 없이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는 하루살이의 잠
당신의 마음 한 기슭에서 허물어졌을 비늘들이
새하얀 그늘 되어 내 발밑에 내려앉네
어쩌다가 당신은 이 땅에 뿌리내렸을까
가을 찬 서리에 실어증을 앓는 감국
어쩌자고 당신은 이곳에 누워 있나
어깨에 고인 어둠을 털어내듯 툭툭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꽃기린의 마른기침들
어쩌자고 당신은
저 하늘의 별들에게 세 들려 하나
온종일 당신의 이름을 곱씹어보았지만
꽃말은 떠오르지 않네
당신의 손끝에서 저무는 계절만
발굴지의 어둠 위로 하얗게
하얗게 부서져 내리고 있네
⸺격월간 《현대시학》 2019년 3, 4월호
역류성식도염 / 휘 민
돌아왔군요 당신,
주름진 그늘을 걸쳐 입고서
이제 나의 상태는 잠시 아픔 모드로 전환해 둡니다
내가 떠날 때는 당신도 그러시면 좋겠습니다
너무 긴 아픔은 말고 봄 햇살에
아른거리는 아지랑이 같은 통증이기를
이제 막 꽃대를 밀어올리기 시작한
산수유나무의 옆구리에 돋아난 간지럼이기를
보고 있나요 당신,
예고 없이 찾아온 당신처럼 비가 내려요
3월의 트리 공장에도 비가 내리네요
목덜미를 움츠린 채 비를 맞는 트리들은 표정이 없어요
날개 하나를 잃어버린 잿빛 천사의 뿔나팔 소리만
우산도 없이 걷고 있는 이들의 옷깃을 파고드네요
나는 부르튼 입술을 오므려 어떤 모음을 만들고 있어요
거대한 주름상자 속을 걷고 있어요
바람 한 번 지나고 나면 모든 소리가
계면조로 바뀌는 기이한 풀무 속을 지나고 있어요
눈동자가 사라진 회색 눈사람이
잠시 모자를 벗어 인사를 건네는 봄밤이에요
메리 크리스마스!
지상에 떨어진 별들이 빗물에 섞여
하수구로 흘러가고 있네요
자신의 이름을 울대에 새긴 비둘기 한 마리
젖은 날개를 펴고 있어요
잘 가요, 당신은 이런 일에 익숙하지요
⸺계간 《모:든시》 2019년 여름호
부정맥 / 휘 민
심장을 안고 돌아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기어이 따져볼 이야기가 남았다는 듯
결이 다른 말들이 어둠 속에서 튀어오른다
비주룩이 열린 창틈으로 풀벌레 소리가 건너온다
곁에 두고도 마음이 알아채지 못한 기척들을 향해
슬그머니 귀가 먼저 열린다
혈관은 응어리진 기억이 돌아다니는 상처의 회로
아군의 패배를 타전하는 전장의 통신병일까
누군가 엇박자의 리듬을 내 몸에 전송하고 있다
푸가와 스타카토를 오가는 마음의 고동
눈썹을 내려놓고 구불거리는 소리의 길을 따라가지만
나는 번번이 전생의 문턱에서 기억을 놓친다
거칠어지는 들숨과 날숨 사이로
내가 읽지 못하는 우주의 문자인 듯
무심히 시절 하나 흘려보낸다
오늘밤 또 당신이 나를 다녀간다
⸻시 전문 계간 《딩아돌하》 2019년 겨울호
신분당선 / 휘민
급행열차를 탄다
기관사가 없어도 문이 열리고 닫힌다
맨 앞 칸으로 가면
어둠 속을 질주하는 불빛을 볼 수 있다
내시경 카메라가 식도를 훑고 지나가는 것 같다
객실 안은 마스크 쓴 사람들로 가득하다
새로운 풍경이다
어떤 단어에 신이 붙는 것은
새롭다는 뜻일까 다르다는 뜻일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운 좋게 몇 개의 역을 지나쳤지만
미래는 가까워지지 않는다
내가 비건이 되면 세상에 단 두 마리뿐인
북부흰코뿔소가 멸종하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늦게 도착하는 사람
걱정하는 마음이 생기고 나면
이미 그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누군가 기침을 한다
마스크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본다
이 장면에도 신이 존재할까
신동탄까지 내려갔지만
그곳은 동탄이 아니었다
믿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환승역이 보이지 않는다
미래는 이미 지나갔는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
마스크는 불안의 안쪽일까 바깥쪽일까
⸻월간 《시인동네》 2020년 3월호
클레이를 활용한 퍼포먼스 미술치료 / 휘민
날마다 같은 음절이 반복된다
내뱉을수록 무거워지는 돌림노래 같은 우울이
그을음을 날리며 목젖에 달라붙는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 나는 어느새 발이
푹푹 빠지는 뻘밭 속을 허우적거리고
입을 쩍 벌린 채 죽은 멸치 떼가
때 이른 진눈깨비 되어 해안으로 몰려온다
당신은 해감이 안 된 어둠을
눈먼 손길로 더듬거리는 사람
나는 껍데기로 남은 사랑을 깍지 낀
손바닥의 형식으로 기억하는 사람
당신이 떠나던 날 썰물 속에 마음을 놓아버려 나는 온전히 젖지도 가라앉지도 못하는데 불안은 왜 밤의 한가운데로 흐르고 나는 같은 색깔의 벽만 바라보고 있을까
밀물이 들자 몸이 빠져나간 자리에
짠 그늘이 한 겹 더 내려앉는다
색깔이 다른 멍을 물어둔 작은 숨구멍들 속으로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하얀 소금을 뿌려대고
통점에 비상등이 켜져도 나는 여전히 캄캄하다
⸻계간 《불교와문학》 2020년 여름호
이코노미클래스증후군 / 휘 민
당신은 아가미 없는 물고기의 얼굴을 하고 있다
바닥이 보이지 않아 나는 숨 쉴 곳이 필요한데
계속 다른 질문들을 보여준다
나의 얼굴 속에는 또 다른 얼굴들이 있지만
당신은 언제나 나의 왼쪽에 있다
당신은 할 말을 참지 못하고
나는 할 말을 삼키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길들인다는 건 퇴로가 막히는 슬픔 같아서
막다른 골목에서도 우리는
서로에게 등을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가 당신은 사과를 건네지만 나는 사과를 사등분해야 할지 돌려 깎아야 할지 망설인다
당신은 애플망고 씨앗을 젖은 솜에 싸서 한 달 정도 묻어두면 싹을 틔울 수 있다고 말한다
잠시 다정해진 당신이 우적우적 사과를 씹는다
나는 사과 씨를 도려내다가
별들이 모두 사라진 밤하늘을 떠올린다
당신과 나 사이에 사과 맛이 나는
별 모양 파이가 가득 찬다
돌고래를 닮은 비행기가 아가미도 없이 구름 위를 날아간다
항공편이 바뀌면 비행의 방식도 달라질까
우리는 목베개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이코노미클래스 사람들
이따금 탈수 방지를 위해 생수를 나눠 마신다
먹먹해지는 귀를 습관처럼 후비며
표정 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무거워지는 눈꺼풀 위에 또 한 겹
시차 없는 연민을 당겨 덮으며
⸻계간 《시와 사람》 2020년 봄호
타투이스트 / 휘 민
잘린 손가락을 화분에 묻고 물을 준다
지문이 풀려나간 자리에 물기가 닿으면
저녁은 어떤 기분이 될까
실핏줄을 타고 오르는 푸른 기억들의 맥놀이
소용돌이치는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날개를 파닥이며 젖은 마음들이 날아온다
나는 골똘하게 손끝을 구부려 물음표를 만들어본다
영원히 잠들지 않을 검은 질문들의 잔등을 긁어본다
그러나 살갗이라는 말 속에는 얼마나 깊은 우물이 출렁거리고 있는 것일까 눈을 감지 않고서는 당신의 안쪽을 들여다볼 수 없다 내가 먼저 어두워지기 전에는 속내를 감춘 말들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강아지가 화분 받침에 고인 물을
혓바닥으로 핥아댄다
분홍은 감정을 쉽게 들키는 색
첫 생리를 시작한 강아지를 안심시키려
창문 쪽으로 목을 빼고 있는
꽃기린을 욕실로 데려간다
새벽 다섯 시
배앓이를 하던 강아지가 양변기 옆에서 발견된다
침이 흥건한 발바닥이 발갛게 부어올라 있다
나는 화분에 묻어둔 손가락을 꺼낸다
제 이름을 어떻게 짓나 궁금했는지
잘려나간 마디 하나가
불쑥,
닫혀 있는 문 하나를 밀어 올린다
⸺계간 《시와 함께》 2020년 여름호
겨울 다음에 오는 것
⸻전학생
휘 민
얼굴로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너는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입과 코를 가리고 목요일마다 학교에 갔지만
해를 넘기고도 너는 혼자다
어제는 크라운을 뒤집어쓴 어금니가 빠졌다
마지막 남은 젖니였다
뿌리 내리지 못한 시간들이
일련번호도 없이 같은 제목의 일기가 되어간다
앞니 사이에서 뜯겨나간 손톱들이
머리카락과 뒤엉킨 채 수챗구멍에 처박힌다
이 세계를 인정하면
조각난 시간들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 손톱을 물고 사라진 시궁쥐는
지금 어느 강 어귀에서 젖은 그림자를 찾고 있을까
욕실 칸막이 안쪽에 비밀이 쌓인다
거울을 보지 않는 날들이 길어지고 있다
⸺격월간 《현대시학》 2021년 5-6월호
비 올 확률 / 휘민
수은주가 체온까지 올라도
적란운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여도
일영에는 비가 내립니다
오후 세 시가 되자 하늘에서 물이 쏟아지고
아이들이 앞다투어 그 속으로 뛰어듭니다
빨강 파랑 노랑 연두
줄지어 펼쳐진 우산들이
알사탕 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이곳에선 모두 젖습니다
어린 순서대로 젖습니다
웃음이 맑은 아이들의 얼굴이 젖고
사진을 찍는 부모들의 발등이 젖습니다
카페에 앉아 있는 나도 젖습니다
우산도 없이 소나기를 맞습니다
아이들은 돌아갔는데 일어나지 못합니다
유리창 너머로 다시 햇살이 일렁이는데
바닥까지 젖은 마음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계간 《열린시학》 2022년 가을호
라이브 플러킹 / 휘민
한밤중 인적 없는 빗속을 달리다가
무언가와 부딪쳤다
에어백이 터졌고 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문을 열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여기 사람 있어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룸미러에 피 한 방울 흘리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짐승이 스쳤다
어느새 빗줄기는 잦아들었지만
와이퍼는 최고 속도로 사고를 지우고 있었다
그날의 악몽 이후 같은 꿈이 반복되었다
미러 속에 갇힌 생
눈을 뜨면 더 독한 지옥일까 봐
눈을 감은 채 밤새도록 머리카락을 뽑았다
귀울음이 되어 달라붙는 불길한 기척들
그날처럼 ⸺에어백이 터지고, 와이퍼가 끽끽거리고, 무언가
뒤뚱거리고, 잉잉거리며 ⸺내 잠속을 찾아오는 짐승들
누군가 내 목을 비틀기 전에 내가 나를 죽일 수 있을까
마침내 죽음은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죽음을 연기하기 위해
심장을 속이는 법을 배워야 할 시간
새의 깃털을 덮고 잠이 들었다
이번 생은 누가 꾸고 있는 악몽일까
* 라이브 플러킹(Live Plucking) : 살아있는 동물의 가죽과 털을 마취 없이 마구잡이로 뜯어내는 것
―계간 《시와 편견》 2023년 여름
무심천 / 휘민
온종일 천변을 서성이다가
저물녘 물속에서 어둑한
돌 하나 꺼내 든다
언젠가 놓아준 자라를 닮았다
그사이 너는 단단해지고
내 등은 뾰족해졌구나
어제는 자주 가던 식당을 지나치다가
[폐업 개인 사정]을 보았다
더 이상, 이라는 말, 고통의 임계점에서, 등줄기에 솟아난, 철조망 같은,
마스크 속에서 한 시대가 지워져도
세상의 슬픔은 모두 개인 사정
간절히 손을 내밀어도
번번이 놓쳐 버리는 믿음이 있다
누구일까
젖은 나무토막 같은 생을
또다시 물가에 풀어 놓은 이는
개흙을 삼킨 울음이 물수제비뜨듯 고요한 수면을 건너간다
빈주먹을 움켜쥔 하루가 긴 목을 빼들고 내 곁을 지나간다
그날처럼 나는
하심에 닿지 못하고
어둑해진 마음 기슭에는
그림자 지운 별 하나 귀갑처럼 돋아나고
—시집 『중력을 달래는 사람』 2023.11
손쓸 수 없는 아름다움 / 휘 민
장마로 흙탕물에 휩쓸렸던 백합들이
쓰레기가 뒤엉킨 덤불 속에서
시든 꽃술을 흔들고 있었다
개는 킁킁거리며 제 목줄을 잡아당기고
나는 무너진 화단 앞을 한참 동안 서성였다
(그사이 늙은 개를 태운 유모차가 지나갔다
플래시를 깜박이며 자전거 몇 대가 지나갔다)
어둠 속에서
진흙을 뒤집어쓴 꽃의 얼굴로
슬픔이 내게 물었다
너는 취하지 않고 살 수 있나?
그 순간 나는 입술을 깨물었고
군락을 이룬 멸치들이 소나기처럼 몰려왔다
가만히 손을 뻗어 사선으로 기울어지는
미끄러운 슬픔의 뼈대를 더듬어 보았다
(그사이 백합들은 제 목을 비틀어 마지막 향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내가 오랫동안 응시했던
빈 페이지의 적요를 넘기려는 듯
개의 목줄이 다시 팽팽해졌다
어느새 흰빛은 사라지고
손바닥엔 물비린내만 남았다
삭朔
—시절인연
휘 민
유리잔 속에 담긴
수많은 탄식과 비명
어떤 목소리는
깨진 유리잔의 공명이 되고
어떤 목소리는
유리잔이 깨지는 순간 움츠러드는
고통의 맥놀이로 마음에 새겨진다
내일을 먼저 보고 온 자의
불안일까
어제를 잊으려는 자의
고투일까
아홉 번의 겨울을 함께 살고도
데면데면하던 우리는
제 가슴을 치며 실컷 울고 나서야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다
지켜보는 달빛이 없어
울기 좋은 밤이다
첼로 / 휘 민
방 안 깊숙이 달빛이 걸어 들어와 있었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굳어 있던 몸에서 새살이 돋아나고
하품을 하며 깨어난 당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우는 내가 있었다
누가 나의 잠 귀퉁이를 흔들어 당신에게 데려갔을까
암실 속으로 들어와 닻을 내린 한 줄기 빛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나는 한밤중에
무릎을 껴안고 중력을 달래는 사람이 된다
짐승 같은 잠 속에 빠져
두 눈을 잃어버린 당신은 달의 뒤편에서
사나운 어둠을 길들이고 있는 사람
홀로 노를 저어 망망대해를 건너가려는 사람
활이 지나간 자리였을까
달빛에 베인 상처였을까
나는 한동안 당신을 생각하느라 어두워진 갈비뼈를 더듬는다
울림통이 된 몸에서 더 이상 어둠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가만가만 창 가로 다가가 커튼 자락을 여민다
그러나 살갗을 파고드는 먹물처럼
그림자를 지워도 사라지지 않을 마음의 얼룩
온종일 달아올랐던 바닥이 식는지
비틀린 관절을 꺾으며 집이 우는 소리를 낸다
—시집 『중력을 달래는 사람』 2023.11
친밀하게 위대하게 / 휘 민
우리는 매일 이곳에서
한 번씩 알몸으로 만난다
아침이 빨리 오는 순서대로
어쩌면 현실과 환상의 통로일지 모르지
나는 거품을 온몸에 문지르며
유리문 뒤에 있는 다른 세계를 본다
젖어 있다
그곳에도 아침이 오고
우리는 샤워를 하고
아침이 빨리 오는 순서대로
먼지가 되어간다
궁금한 게 많다는 건 남은 생이 더 길다는 의미일까
불현듯 이런 생각을 하는데
부스 밖에서 간주처럼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
걸려 있다
끈적거리는 액체가 목구멍을 막아
헛기침을 해도 어둠을 뱉어낼 수 없다
현실이 던진 미끼를 그림자가 먹고 그림자가 현실을 집어삼키고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후 나는 무력하구나
안간힘을 쓰지만 슬픔과 거리를 둘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오늘 아침 김 서린 샤워부스에서
본 것은
나였을까 나의 그림자였을까
인과관계는 분명하지 않지만
어제보다 오늘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자명해 보이고
둥지 모양으로 뒤엉킨 배수구의 머리카락들이
“굿모닝 베트남!”을 외치던 애드리언의 목소리로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를 건넬 것 같은
오늘 아침
—계간 《시와함께》 2024 겨울호
기도하는 마음 / 휘 민
기도를 할 때면 손이 두 개인 걸 안다
기도하는 순간 맞닿은
손바닥의 온기에 나는 안도한다
서로 마주보고 있지만
결이 다른 두 개의 의지
때론 서로를 속이고 배반하기도 하지만
힘이 들 땐 깍지를 껴
두 손을 맞잡기라도 해야 한다
한 손에는 심장을
다른 한 손에는 기원을 올려놓는다
천칭은 자주 기원 쪽으로 기울지만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그 순간 바닥에 닿은 나의 이마는
더 높은 질서를 향해 귀를 기울인다
기도는 내 신념의 무게를 확인하는 과정
열 개의 지문이 간절하게 심장의 온기를 붙든다
고요를 갈망하는 마음들이 쌓여 종교가 되듯
나는 가장 낮은 자세로 나를 안아 준다
―계간 《시결》 2025년 가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