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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원문보기 글쓴이: 양떼목장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
덕혜옹주딸 마사에(정혜)
소 다케유키는 사미시라 환상속의 아내를 그리워하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시를 남긴다.
결혼사진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이야기. (사미시라 - 환상 속의 아내를 그리워하는 노래)
사미시라
덕혜옹주의 남편 -소 다케유키의 시-
1908년 대마도 번주 집안인 소가문의 37대 당주 백작 1931년 소 다케유키 - 도쿄대문학부 영문과 졸업 1931년 덕혜옹주- 여자 가쿠슈인 본과 졸업 1931년 5월 8일 소 가문의 도쿄 저택에서 일본식 혼례 1932년 장녀 마사에(正惠) 출생 1955년 딸 마사에가 결혼하여 분가하자 아내와 이혼 소 다케유키 다른 일본 여자와 재혼 장남 출생 1956년 장녀 마사에는 산에서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 마사에의 장례식은 작은 항아리에 한 알의 진주를 넣고 그것을 상자에 담아 치렀다고 한다 1985년 소 다케유키 사망 **수필집에서 1931년부터 25년 동안은 그는 단 한줄 **딸 마사에는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고 어머니를 굉장히 싫어했답니다. 소 다케유키가 직접 그린 딸 마사에의 초상화 1912년 5월 28일 오후 7시 30분, 아기의 울음소리가 덕수궁이 떠내려 갈 듯 울렸다. 옹주의 돌 모습
어릴적 모습
▲ 유치원 시절의 덕혜옹주 (하단 오른쪽 두번째) 1912년 당시 환갑이 넘은 고종과 궁녀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고종의 고명딸. 고종은 환갑의 나이에 본 아이이고, 장성한 왕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옹주를 금이요, 옥이요 하면서 귀애했습니다 옹주와 옹주 또래의 사대부집 딸아이들이 재미나게 뛰 어 놀도록 배려해 주었어요. 기록에 의하면 후궁들은 총애도에 따라서 월급을 받았다고 하는데 후궁들 중에서는 복녕당 양씨가 가장 많은 월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옹주를 사랑했는지 하루는 유모가 젖을 먹여야 한다며 고종 품에 있는 옹주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가려 하자 고종이 유 모를 막으며 "과인이 보는 앞에서 옹주의 젖을 먹이도록 하라. 옹주가 건강하게 젖을 잘 빠는지 보고싶구나."라고 하여 유모를 당 황하게 했지만 고종은 옹주가 건강하게 젖을 잘 빠는 것을 보자 몹시 흐뭇해 했다고 하네요. 아버지 고종과 오빠들(영친왕.순종. 의친왕)과 찍은 가족사진 게다가 옹주와 함께 대전에서 잠들며 자장가를 불러준다든지, 옹주가 밥을 먹으면 항상 자신의 수라 옆에 옹주의 상을 따로 받아 같이 먹는다는지 하는 행동은 궁중 사람들의 마음까지 따스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는 딸 덕혜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는데요. 고종의 사랑을 받는 덕혜였으나 옹주의 궁궐 안의 생활은 평탄 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이미 고종은 영친왕 이은의 아내로 일본여자 마사코를 며느리로 맞이한 전례가 있어 이번에는 그리 하지 않으리라 마음 단단히 먹고, 옹주의 배필로 민씨 총각으로 점지하고 몰래 일을 수행하려 했지만 이를 알아챈 일본이 재빨리 대마도주와 강제 혼인을 시켜버렸습니다. 13살의 나이로 영친왕 이은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고, 그 곳에서 옹주는 조국을 잃어버린 왕녀라는 비아냥을 받으며 학습을 했죠. 그리고 그녀는 1931년 5월 8일 대마도주인 종무지와 강제 혼인을 하여 비극 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1923년 덕혜옹주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서거하시고, 아버지 고종황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붕어를 맞이 했다. 그러나 그 당시 발표에서, 친일파 및 일본사람들은 '뇌진탕'으로 급사했다고 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가장 가까이에서 고종황제의 독살을 지켜본 사람이 덕혜옹주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죽을 때까지 믿고 있었다고 한다.
▲ 일본 학습원 유학시절의 덕혜옹주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후 덕혜옹주는 하루 하루를 외롭게 지낸다. '이제 내 곁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쓸쓸해... 무서워... 어마마마... 아바마마... 보고싶어요...' 결국 덕혜옹주는 강제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덕혜옹주의 파란만장한 삶의 막이 본격적으로 오른다.
▲ 일본으로 유학가서 입학하고있는 덕혜옹주. (높은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일본에서의 덕혜옹주의 학교생활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심지어 어느 한 일본 학생이 자리로 돌아가는 덕혜옹주의 발을 걸어 넘어 뜨리며, '어머! 조선의 공주는 내게 절도 하네~' 라고 놀리며 치욕을 주곤했다고 전해진다.
▲ 수업중인 덕혜옹주
나는 조선의 공주인데, 왜 일본 공주에게 절을 해야 하는가?' 소 다케유키家 모두는 일본황실이 보이는 쪽에서 엎드려 절을 했으나,
▲영친왕, 순종,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가족사진)
38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덕혜옹주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너무도 쓸쓸한 환국길이었다. 아이고... 가엾은 옹주님...'이라며 눈물을 흘렸으나, 덕혜옹주는 자신의 유모였던 변상궁을 끝내 알아보지 못했다. ▲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덕혜옹주
▲ 입국하는 덕혜옹주
낙선재로 향하는 덕혜옹주
너무도 심각하게 정신질환(우울증)을 겪고 있은 탓에 투신 자살 소동이나 손목을 긋고 생을 마감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등 힘든 나날을 보내던중 1962년 1월, 옹주는 결국 그렇게도 오고싶어 했던 고국으로 돌아올수 있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1961년 11일, 미국을 방문하던 도중 일본에 들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이방자 여사와 만난 자리에서 덕혜 옹주의 얘기를 듣고 무릎을 치며 “그런 분이 있었냐”고 말했고 그 뒤, 박정희 정권에서 제창한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으로 구황족에 포함된 그녀는 1962년 1월26일 오후 12시35분 김포공항을 통해 고국에 돌아 오게 됐던 비화가 있었지요..
덕혜옹주의 회갑. 안경 쓰신 분이 이방자 여사
▲ 덕혜옹주의 회갑연. (왼쪽 두번째)(첫번째는 변상궁 유모)
1983년 어느 정신이 맑았던날,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라는 낙서를 남기고, 이후 덕혜옹주는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6년후, 파란만장하고 슬픈 삶을 뒤로한체 덕혜옹주를 간병했던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는 병상의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노년의 덕혜옹주는 정신이 맑게 돌아온 어느날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런 낙서를 남기기도 했다 "나는 이구 씨가 보고 싶다" -훙서 (왕이나 귀족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말) 한 회은황태손 이구, 이은 황태자의 아들 덕수궁의 꽃으로 불리던 황녀가 세상을 떠나고,
▲ 덕혜옹주의 묘 유해는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에 묻혔습니다.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년 5월 25일 ~ 1989년 4월 21일)는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과 귀인 양씨의 황녀이다. 덕혜라는 호를 하사받기 전까지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고, 1962년에 ‘이덕혜’로 대한민국의 국적을 취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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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비운의 덕혜옹주의 삶 그리고 ....
국력이 약한 것을 탓해야 하나?
나쁜 저 일본 것들을 욕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