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누가복음15:1-10
남미 콜롬비아의 대통령후보자였던 여성정치인 베탕쿠르는 납치된 지 6년 만에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되었습니다. 그녀는 콜롬비아 부통령 유세도중 콜롬비아 공산주의자들에게 납치되어 동물보다 더 심한 취급을 받으며 목에 쇠사슬을 감고 나무에 묶여 있어야 했습니다. 길에서 잠을 자며 지옥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베탕쿠르는 정부군의 치밀한 작전계획에 의해 총알 한 발 발사하지 않고 22분만에 극적으로 구출되었습니다. cnn에 의하면 정부군이 공산주의자로 가장하여 헬기를 타고 적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콜롬비아 공산주의 최고지도자 알폰소 카노가 인질들을 데려오라고 하였다고 거짓말을 하고 인질들을 수갑에 채워 헬기에 태워서 유유히 탈출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은 베탕쿠르 조차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구출작전인지 몰랐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서야 그녀는 자신이 구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때 얼마나 기뻐 뛰었던지 헬기가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구출 작전은 대담하고 완벽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구출되었을 때 가장 기뻐한 사람은 누구보다도 그녀의 부모님 이였습니다. 딸이 살아서 돌아올 확률은 거이 0%였는데 살아서 돌아온 딸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가 넘쳤습니다. 부모의 기쁨과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렇듯 마귀에게 납치되었던 우리들을 찾고 찾아서 마침내 찾으셨을 때 이렇게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는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착한 목자의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과 열심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한가지 비유로 설명해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던지 3가지 비유로 거듭거듭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말씀통하여 영혼들을 찾기 위해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심정을 깊이 알아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낼 때까지 찾아서 성경학교로 초대하는 착한 목자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절을 보시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자 당시 말씀을 들으러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세리들은 당시 세무공무원으로서 정한 세금보다 더 부과하여 착복하던 부도덕하고 야비한 사람들이였습니다. 죄인들은 당시 창녀들과 그런 업종에 관련된 건달들이였습니다. 그들은 머리를 깍두기모양으로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였고 팔과 다리에는 문신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을 영접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되어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귀하게 여겨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이런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 잘 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이런 죄인을 싫어하신다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자신들도 이런 죄인을 싫어한다며 세리와 죄인들과는 아예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죄인을 가까이하고 함께 식사까지 하시는 예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판단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너무 사랑하시고 죄인을 너무 찾으신다는 것을 가르켜 주시기 위해 3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첫 번째 비유는 착한 목자의 비유입니다. 어떤 목자에게 양이 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마리를 잃었습니다. 아마 그 양은 평소에 목자의 음성을 듣기 싫어하는 문제 많은 양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 양은 호기심이 아주 많고 자유분방했습니다. 또 반발심이 많아서 청개구리처럼 하라고 하면 안하고 하지 말라면 하였습니다. 그 양은 늘 산너머 저곳에는 자유와 기쁨과 행복을 주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동경했습니다. “아 저너머 세상에는 재밋는 일이 많이 많이 있을꺼야! 노래방도 있겠지, 시원한 생맥주!” 그러다 어느 날 목자가 다른 일을 하는 것을 틈타서 용기를 내어 결단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목자의 간섭을 받지 않아서 날아갈 듯한 기분 이였습니다. “얏호 오 자유 오 자유 나는 자유하리라, 쯧쯧 저 교회에 남아있는 친구들이 불쌍하고 가련하군” 세상이 온통 자기 것 인양 자유롭게 느껴졌습니다. 목자 밑에 있는 양들이 한없이 가련해 보였습니다. 그 양은 의기양양하게 점점 먼 곳으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양은 눈이 어두워 앞을 잘 보지 못합니다. 또한 방향감각이 없고 분별력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호신용 무기, 즉 이빨이나 사나운 뿔이 없기 때문에 이리 같은 맹수가 나타나면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양에게는 목자의 사랑과 보호와 인도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양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목자 없이도 혼자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길을 잃은 이 양은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돌에 부딪혀 머리에 상처가 나고 가시에 찔려 발에서 피가 났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프고 마실 물이 없어 목이 말랐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양이 갑자기 무서워졌습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목자의 품에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 양은 목자에게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너무 멀리 길을 나와서 돌아갈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애절하게 울뿐이였습니다. “너무 멀리왔나요. 주님께 돌아가기엔” “음메...음메” 어째 양소리가 아니고 염소 소리만 같습니다.
한편 목자는 양한마리를 잃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4절을 보면 예수님은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 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하십니다. 참된 목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 배울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한 양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는 남아 있는 아흔 아홉 마리에 비해 숫적으로 1%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그까짓 한 마리 정도야 뭐! 나에게 아흔아홉 마리나 있어!. 그놈은 목자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나갔으니 실컷 고생하다가 이리를 만나 죽겠지”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목자가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교회학교에는 그런 교사가 없겠지만 다른 교회에는 그런 교사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착한 목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을 들에 두고 무조건 찾아 나셨습니다. 목자는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유익한가? 저렇게 하는 것이 더 유익한가? 실리를 따지며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목자에게는 이 양은 1%가 아니라 전부였습니다. 목자는 한 마리를 100마리처럼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 목자의 마음은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자식이 3명 -4명이라도 하나하나를 귀하게 여깁니다. 하나를 잃었다고 1/3로 치지 않습니다. 어찌하든지 잃은 자식을 찾고자 혈안이 됩니다.
우리교회학교 선생님들, 속회인도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마음으로 양들을 귀하고 소중하게 대하시고 찾아낼 때까지 찾아다니시기를 바랍니다. 귀하게 여겨주면 반드시 양은 목자에게 소속되게 됩니다. 어떤 교회 교사들은 양이 교회를 안나오던 나오던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교회에는 양은 우리에 남아있는데 교사가 늦게 오거나 집을 나가 방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한양 한양을 귀히 여기는 선생님, 인도자들이 되어 길잃은 양들을 잘 찾아다니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는 찾아내기까지 찾는 열심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을 찾되 찾아내기까지 찾습니다. 한두번만 찾는 것이 아니라 착한 목자는 양을 찾되 찾아낼 때까지 찾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을 찾기 힘들다고 중도에서 포기하거나 내 일이 바쁘다고 양을 내쳐두지 않습니다. 목자는 어떻게서든 찾습니다. 양의 이름을 부르며 양이 갈만한 곳은 다 찾아가 봅니다. 친구집까지 찾아가보고 도서관도 가서 찾아옵니다. 목자는 한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물을 건너고 산을 넘고 귀중한 시간과 물질과 모든 진심을 다 쏟습니다. 그만큼 그 양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양을 귀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찾도록 찾습니다. 천하게 여기면 말도 “엔간히 안 듣는 놈! 안오면 말지” 합니다. 찾아내기까지 찾는 목자의 심정!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열심입니다.
우리 교회학교 선생님과 인도자들은 이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찾아내기가지 찾아다니는 열심있는 목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목자의 기쁨입니다. 5,6절을 보면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목자는 잃은 양을 애타게 찾다가 마침내 벼랑에 걸려서 떨어지기 일보직전에 있는 양을 발견했습니다. 목자는 너무 기뻐서 그 양을 향해 팔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그 양을 품에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목자는 마음의 기쁨을 도저히 혼자 간직하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목자는 즉시 잔치를 준비하여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였습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잔치비용은 양한마리 사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목자의 기쁨은 돈으로 계산될 수 없는 것이였습니다. 이러한 목자의 기쁨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잃은 양을 애타게 찾는 목자의 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상의 비유에서 잃은 양은 죄인들을 가리키고 목자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그 품을 떠나 길을 잃은 양과 같이 되었습니다. 길을 잃은 우리 인간은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과 같이 쉼이 없이 유리방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사 선지자들을 통해 애타게 인생을 찾으셨습니다. 마침내는 예수님은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셨습니다.
7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죄인하나가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는가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셨으나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마음을 열지 않고 불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예수님은 잃은 드라크마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8,9절을 보면“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한 드라크마는 한 데나리온과 같이 일군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약 14만원쯤 됩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여인은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습니다. 여인은 그 하나를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찾고 또 찾았습니다. 찾을 때까지 찾았습니다. 마침내 그 여인은 돈을 찾은 후 너무 기뻐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찾은 돈보다 더 많은 비용을 들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여인이 잃은 드라크마를 왜 그렇게 부지런히 찾는 것입니까? 이는 자신의 귀중한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것을 아낍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이 당신의 소유이기 때문에 너무나 귀히 여기고 아끼십니다.
카지노에서 돈을 잃은 사람들은 돈을 찾고자 제정신이 아닙니다. 본전만이라도 찾으면 그만두겠다고 합니다. 주식투자하여 돈을 잃은 사람들은 정신이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들은 잃은 돈만 찾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10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예수님은 계속해서 죄인 한 사람의 회개가 하나님께 얼마나큰 기쁨이 되는 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만 회개해도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이상에서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배웠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이 무엇인가도 배웠습니다. 우리가 이번 성경학교와 중고청 수련회를 앞두고 잃어버린 영혼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선한 목자 하나님처럼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기를 바랍니다. 또한 착한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양들에게서 가장 큰 보람과 기쁨을 얻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