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계 밖 낯선 행성’연상케 하는 아이슬란드 라우가베구르 트레일
아이슬란드의 동북쪽 내륙지방인 하이랜드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600~700m 고원지대이다.
고원지대라고는 하지만 이미 3,000m 이상의 트레일을 거쳐 오며 익숙해진 트레커에게는 차라리 아늑하고 편안한 구릉지대로만 느껴진다.
그래도 고산만 없을 뿐이지 대부분의 땅이 풀 한 포기조차 자랄 수 없는 암석 지대로 수세기 동안 사람이 접근하지 못했던 거친 지역이다.
이곳의 첫 인상은 마치 태양계 밖의 이름 모를 낯선 행성에 불시착한 느낌이었다.
머무는 내내 태양은 잘 보이지 않았고 산들은 어둡고 무거운 색과 빛을 간직한 채 낮게 웅크린 미지의 생명체처럼 거친 숨을 쉬고 있었다.
검게 빛나는 용암, 웅장한 만년설 빙하, 부글부글 끓는 온천, 에메랄드빛 호수, 협곡이 하나로 어우러져 빚어진 기묘한 모습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신비한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분명 여기는 내가 모르는 어떤 행성이거나, 만약 여기가 지구라면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태초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왔을 것이리라.
눈이 많이 오는 겨울에는 도로가 폐쇄되고 여름철인 6~9월에만 길이 열린다.
이곳 하이랜드에서도 속살을 제대로 즐기려면 란드만나라우가르Landmannalaugar에서 소르스뫼르크Thordmork까지 55km에 이르는 라우가베구르Laugavegur 트레일을 걸어 봐야 한다.
땅, 사람 그리고 온천수라는 의미가 합쳐진 란드만나라우가르! 여기에서 시작되는 라우가베구르 트레일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트레일 중의 하나이지만 변화무쌍한 날씨로 인해 트레일 진행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란드만나라우가르~흐라픈틴뉘스케르 약 12km
레이캬비크에서 내리던 비는 새벽에 다행히 그쳤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라우가베구르 트레일의 들머리인 란드만나라우가르로 4시간 가까이 이동하는 동안 비가 계속 내린다.
트레일 시작부터 비와 함께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겠지만 나는 유독 비를 좋아하지 않는다.
비가 내리니 온도까지 뚝 떨어질텐데….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버스 기사가 밤에는 영하로 내려간다고 하니 더욱 걱정이 커진다.
창밖으로 보이는 아이슬란드는 황금빛이 스며든 녹색이다. 산
이라곤 찾아보기 어렵고 황량한 들판만 계속된다.
트레일 들머리인 란드만나라우가르에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울긋불긋 텐트들이 눈에 많이 띈다.
세찬 비바람 속에서도 수영복을 입고 나무데크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초록 골짜기 사이로 흐르는 온천수에 몸을 담그러 가는 이들이다.
해외 트레킹에서는 트레킹 중간에 온천이나 수영, 카약 등을 한가로이 즐기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온천이 날 유혹한다.
그러나 오늘 숙영지인 흐라픈틴뉘스케르Hrafntinnusker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해서 한눈 팔 여유가 없다.
하늘에서 분무기로 뿌리는 듯한 안개비가 세찬 비로 변해 주륵주륵 내리니 더욱 쌀쌀해진다.
아이슬란드의 여름은 사계절을 동시에 즐길 수 있기도 하지만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비해 철저한 준비 또한 필요하다.
뜨거운 온천의 유혹을 뿌리치고 오버트라우저에 다운재킷까지 입고 완전무장한 채 거친 비바람 속을 걷기 시작한다. 출발할 때는 비가 왔는데 진눈깨비로 변하더니 제법 굵은 눈발이 되어 날린다.
한순간 여름에서 겨울로 두 계절을 뛰어넘는다. 뺨에 부딪치는 바람은 더욱 차가워지고 잠시라도 쉬게 되면 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다. 화산암인 란드만나라우가르 언덕을 오르는 길은 숨이 가빠진다.
호흡을 고르고 언덕 위에 오르니 이곳저곳 지열지대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계곡물이 차가운 대기와 만나 하얀 연기가 되어 하늘로 치솟는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진기한 풍경이다.
길을 걷던 트레커들이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으며 뜨거운 지열에 몸을 데운다.
이곳이 브레니스테인살다Brennisteinsalda 산. 현재까지도 온천활동이 있는 활화산으로 1961년에 소규모 분출을 했다고 한다.
유황냄새가 진동하는 트레일은 꽤 길게 지속된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데, 대신 화려한 황금 초록의 이끼와 검은 흑요석의 어우러짐이 신비롭기 그지없다.
어느 누구의 예술 작품이 이렇게 멋질 수 있을까?
몸이 더워지기 시작하니 눈보라 속에서 다운을 벗고 걸어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황금빛 초록으로 빛나는 산들이 끝나는 지점에서 만년설로 남아 있는 빙하지대가 시작된다.
변화무쌍한 이런 장관에 지루할 틈이 없다.
수많은 트레커들의 발 도장이 빙하에 남아 있다. 눈 위에 조심스레 발을 놓아 본다.
습기를 머금은 눈이라 다행히 미끄럽지는 않다. 사각사각 소리가 경쾌하다.
빙하지대가 끝나니 저 멀리 희미하게 흐라픈틴뉘스케르산장이 눈에 들어온다.
산장이 보이니 발길이 더욱 가벼워진다. 산장에 도착해서 텐트를 쳐야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할 수 있다.
그런데 아침부터 세차게 몰아치던 비바람이 여전히 거세다.
눈발까지 굵어지니 거센 바람에 맞서 텐트를 칠 마음이 갑자기 사라진다.
옷도 젖고 몸도 너무 차가워서 따뜻한 산장에서 편안하게 누워 쉬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해진다.
산장에 예약은 하지 않았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서인지 다행히 침대는 여유가 많았다.
침대를 배정받고 주방으로 내려가니 한켠에 포트에서 물이 펄펄 끓고 있다.
뜨거운 커피 한 잔으로 몸을 데우고 달콤한 휴식을 취하니 세상의 모든 행복을 다 가진 사람이 된다.
모든 피로가 ‘눈 녹 듯 사라진다’고 해야겠으나 만년설이 있는 이곳에선 눈 녹 듯이란 말은 피해야겠지?
저녁때가 되어서 산장 밖으로 나가니 파란 하늘빛이 구름과 어울리고 보이지 않았던 햇빛이 그 사이로 흘러나온다.
모처럼 맑고 푸른 하늘빛과 구름이 오후 내내 추위와 비바람에 맞서며 걸었던 나를 위로해 준다.
내일은 꽤 긴 거리를 걸어야 해서 조금 신경이 쓰인다.
내일은 비가 오지 않는다는 일기예보가 맞길 바라면서 잠을 청한다.
밤사이 쌩쌩 부는 바람이 걱정되어 자다 깨다를 수차례.
산장 밖으로 나가니 숨 막히는 새벽의 고요 속에서 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무
척이나 눈이 그립기는 했지만 매서운 바람과 함께 펑펑 내리고 있으니 오늘 걸어야 할 28km의 트레일을 어떻게 헤쳐 갈지 걱정이 된다.
흐라픈틴뉘스케르~알프다바튼~엠스튀르 약 28km
걱정도 잠시. 밤새 소리 없이 살포시 내린 눈이 검은색 화산 땅을 온통 새하얗게 덮어놓았다. 움
츠렸던 몸이 갑가기 바빠진다. 모두 잠들어 있는 산장으로 돌아와 카메라를 가지고 다시 나왔다.
눈바람 속에 걸을 걱정도 살을 에는 추위도 카메라 렌즈로 세상을 보는 순간에는 모두 잊어버리게 된다.
마냥 행복해지는 순간이다.
광활하게 펼쳐진 화산의 설경은 라우가베구르 트레일의 보너스이다.
모처럼 곡기로 아침 식사를 하고 나니 든든하다.
밖으로 나오니 더욱 거세진 눈과 바람이 합세해서 나를 몰아세운다.
알프다바튼Alftavatn까지는 가파른 내리막 경사 길이다. 유난히 안개와 비가 심한 구간이기도 하다.
온 몸을 휘감는 눈바람을 헤치며 행여 바람에 날아갈까 스틱으로 몸을 의지하길 수차례.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린다.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길을 걸었지만 다리에 힘이 빠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명심해야지.
“바람과 싸우지 마라. 바람이 너를 지나가게 하라.”
마음을 추스르고 두어 시간 걸으니 눈도 멈추고 바람도 잠잠하다.
푸른 초록의 이끼가 누런 황금빛으로 변한 들녘을 바라보니 풍요롭다.
그 들녘을 걸으니 마음도 조금 안정이 된다. 알프다바튼산장 근처에 오니 호수와 산이 청명한 모습으로 반겨준다. 눈이 부실 정도로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얹혀서 더욱 아름답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런 풍경이 또 그리워질 것이다.
알프다버튼산장에서 점심을 먹고 호수 앞에 멍때리고 앉아 있노라니 내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이곳에서 하루 쯤 쉬고 싶은데 갈 길이 멀구나~.
점심은 가볍게 스프로 해결하고 엠스튀르Emstur까지 걷기 시작한다.
얼마 되지 않아서 등산화를 벗고 건너야 하는 강이 나왔다.
라우가베구르 트레일엔 도강을 해야 하는 곳이 서너 군데 있다는 정보는 이미 알고 있어서 익숙한 몸짓으로 등산화를 벗고 강을 건넌다.
그러나 아뿔싸! 샌들을 신을 걸! 강바닥의 돌들이 너무 날카롭다.
차가운 물속에서 발바닥에 불이 나다니!
그 통증을 참고 강을 건너고 나니 어쩐 일인지 발이 한결 가볍다.
찬물 족욕에 강도 높은 돌 지압을 받아서일까? 강을 건너니 지루한 임도 길이 끝없이 펼쳐진다.
그리고 또 다시 강을 만난다.
이번 강은 건너온 강보다 더 깊고 물살도 세다.
사륜구동형 SUV차량 조차조차도 도강을 하지 않고 관망을 하고 있다. 트
래커들 중엔 강 위쪽으로 올라가서 건너는 이들도 있다.
몇 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참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간다.
때맞춰 도착한 캠핑카에서 나이 지긋한 부부가 내린다.
그분들께 부탁을 해서 차에 동승을 했다.
캠핑카를 타고 도강을 하는 순간에도 깊고 빠른 물살 때문에 긴장이 맴돈다.
강을 건너고 코뿔소의 코처럼 뾰족하게 솟아오른 봉우리를 가진 스토라술라Storasula 화산의 기슭을 따라 걷는 길은 지금까지보다 훨씬 수월하다.
검은 용암지대를 지나 황량하게 펼쳐진 사막 같은 검은 모래 지대를 걷는 게 좀 지루하게 느껴질 때 쯤 초원지대가 펼쳐진 엠스튀르에 도착한다.
이제부터는 자연의 생명체가 눈에 뜨인다.
나무와 꽃들이 있어서인지 공기의 냄새가 다르다. 오늘은 28km나 걸어서인지 텐트 안으로 들어오자 잠이 몰려든다.
밤이 깊어지니 또 비가 내린다.
내일 아침에 비를 맞으며 텐트 접을 일이 신경 쓰여서 깊은 잠이 오지 않는다.
나는 진정한 백패커가 되려면 아직 멀었나보다.
엠스튀르~소르스뫼르크 15km
밤새 내리는 비와 매트에서 올라오는 한기에 뒤척이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캠핑을 시작하기 전에는 텐트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경쾌한 관현악 협주곡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비를 맞으며 텐트를 접을 때마다 그때가 생각 난다. 그때의 낭만적인 감성은 어디로 갔을까?
마지막 날이고 거리도 15km라 그다지 부담감이 없었다.
버스 시간이 3시이니 시간도 넉넉하다. 모처럼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은 날이기도 하다.
산장을 지나 잠시 가파른 길을 오르면 평탄한 임도길이 시작된다.
임도길이 지루하다 싶을 때 엠스튀르Emstrur의 작은 계곡들이 나타난다.
작은 계곡들을 따라 오르내림을 반복하다보면 미르달스요쿨Myrdalsjokull 빙하에서 흘러나온 강을 만난다.
그다지 깊지는 않았지만 강폭이 넓은 강이다.
강을 건너자 초목이 하나둘씩 보이더니 우거진 소르스뫼르크 숲이 시작된다.
황량하기만 했던 트레일의 마지막 여정에서 이 울창한 숲이 내 어깨를 두드려 준다.
수고했어.
좁은 오솔길 사이사이에 열려 있는 블루베리에 시선이 멈춘다.
살짝 붉은빛을 띠고 있는 블루베리를 따서 입에 넣으니 새콤달콤한 향기가 입안에 가득 퍼진다.
몽블랑 트레일에서 따 먹었던 블루베리는 단맛이 더욱 강했는데 나라마다 맛이 다르다.
배낭을 메고 블루베리를 따먹던 생각을 하니 몽블랑 트레일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30분 정도 숲길을 걸으니 소르스뫼르크의 산장이다.
드디어 55km에 이르는 라우가베구르 트레일이 끝났다.
오랜만에 만난 숲길을 즐기며 레이캬비크까지 가는 버스 시간에 맞추어 도착했다.
여유가 된다면 주변 풍광을 천천히 바라보며 쉬엄쉬엄 걷고 소르스뫼르크에서 1박을 하면서 주변의 폭포와 빙하 하이킹, 동굴 탐험등을 즐기는 것도 좋을 듯하다.
정말 내가 그곳을 걸었던가?
지금도 낯선 행성에 떨어진 비현실적인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다.
자연의 보석이라 불리는 아이슬란드! 거기에서도 태초의 지구의 모습을 간직한 곳.
총천연색의 유화에서 뿌연 수묵화의 느낌까지 쉼 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파노라마를 즐감하면서 걸었던 시간들. 현실의 모든 걱정과 번민을 잊게 하고 비현실적인 몽환의 세계로 안내하는 곳.
순간순간마다 변하는 날씨,
내 몸과 정신을 강하게 만들어 준 비바람과 눈보라, 오르내림을 반복해야 하는 계곡길,
거대한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검고 낮은 산, 유황냄새와 초목냄새,
얼음과 불이 공존하는 신비한 땅, 억겁의 세월이 쌓여 만들어낸 빙하,
수증기를 뿜어내며 땅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 곳, 지금 다시 그 꿈을 만지며 걷고 싶다.
이동방법
■ 들머리인 란드만날뢰이와 소르스모르크 이동은 다음 두 여행사의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Reykjavik Excurtion https://www.re.is/iceland-on-your-own/TREX http://trex.is/landmannalaugar/■ 들머리, 날머리를 모두 버스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레이캬비크 익스커션스의 하이커스 버스패스를 이용하면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숙박시설
■ 텐트를 준비하거나 헛을 이용해야 한다.■ 헛 예약 http://en.fi.is헛에서는 주방은 있지만, 침낭이 제공되지 않고, 음식도 팔지 않으므로 트레일 기간 동안 먹을 음식물과 침낭은 필수이다.■ 캠핑을 하는 경우에도 500Kr를 지불하면 주방을 사용할 수 있다.복장
■ 스틱, 아이젠, 스패츠, 방수 재킷과 바지, 고어텍스 등산화는 필수■ 도강할 때 수월하게 걷고 내릴 수 있는 바지나 바지 안에 입을 반바지 준비■ 도강할 때 신을 샌들이나 아쿠아 슈즈기타
도로가 열리는 6월 말부터 10월 초까지만 통행이 가능하다. 눈이 일찍 오면 그 전에 도로가 닫히기도 한다. 최적기는 7월 말~9월 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