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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August 31, 1939, the last of the seats of resistance of the 6th Japanese
Army, which had invaded the Mongolian People’s Republic, were wiped out.
Visiting our troops, Comrade Choibalsan cordially thanked our soldiers for
sealing with their blood their loyalty to the commitments they had taken upon
themselves. The devastating counter-offensive of the Soviet and Mongolian
troops, the unheard of defeat of a crack Japanese army made the Japanese ruling
quarters reconsider their views on the power and combat readiness of the Soviet
Armed Forces, and especially on the morale of Soviet soldiers.
8월 31일 몽골인민공화국을 침범했던 일본 제6군의 마지막 저항 본거지가 소탕됐다.
우리 부대을 방문한 처이발상(몽골 수상) 동지는 우리 병사들이 스스로 한 약속을 피로써 봉인한 것에 대해 진심어린 감사를 표했다. 소련군과 몽골군의 통렬한 반격과 우수한 일본군의 전대미문의 패배로 일본 지배층은 소련군의 전력과 전투준비태세, 특히 소련군의 사기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재고하게 되었다.
People’s Commissar for Defence Voroshilov wrote in his Order of
November 7, 1939: “The officers and men participating in the battles in the area
of the Khalkha river have covered themselves with true glory. For their bravery
and heroism, and excellent execution of combat orders, all those who took part
in the battles there deserve our deep gratitude.”
국방인민위원회위원장 보로실로프는 1939년 11월 7일의 명령서에 이렇게 썼다.
"할하강 지역의 전투에 참가한 장병들은 자신들을 진정한 영광으로 가득 채웠다.
그들의 용기와 영웅주의, 탁월한 전투명령 수행에 대해 그곳 전투에 참가한 모든 이들은 깊은 감사를 받을 만하다."
The heroic actions of our soldiers were inspired by the Communist Party and
the army’s Party organization. The courageous example of the Communists gave
heart to the soldiers and spurred them to feats of daring.
I would like to mention those commanding officers and political instructors
whose organizational skill, whose Party-political work, and competent
command, expedited the defeat of the Japanese invasion force and reflected
honour on Soviet arms.
우리 군인들의 영웅적 행동은 공산당과 군대의 당조직에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공산주의의 용기있는 본보기는 군인들에게 확신을 주고 용기있는 업적을 이루도록 박차를 가했다. 나는 이들 지휘관과 정치지도원들을 언급하고 싶다. 그들의 조직 기술, 당-정 업적, 유능한 지휘는 일본 침략세력의 패배를 촉진하고 소련 군사력의 영광을 반영했다.
I warmly remember Division Commissar M. S. Nikishev, a skilful leader and
a highly principled Party member. He succeeded in organizing the work of the
Military Council in such a way that even under the most strained and
complicated conditions we never had any disagreements. All of us who had
fought on the Khalkhin Gol were deeply saddened by news of his death at the
beginning of the Patriotic War in the Ukraine where he was member of the
Military Council of the 5th Army of the South-Western Front.
How, too, can we forget the hero pilots Y. V. Smushkevich, S. I. Gritsevets,
V. M. Zabaluyev, G. P. Kravchenko, V. F. Skobarikhin, V. G. Rakhov, and
those many others who displayed exceptional bravery and courage.
나는 노련한 지도자이자 매우 원칙있는 당원인 니키셰프 사단 정치위춴을 따뜻하게 기억한다.
그는 군사평의회의 업무를 성공적으로 조직해서 가장 팽팽하고 복잡한 상황 하에서도 어떤 불화의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할힌골에서 싸웟던 우리 모두는 그가 남서 전선의 제5군 군사평의회위원으로 있던 우크라이나에서 대조국전쟁 초기에 사망 소식을 듣고 깊이 슬퍼했다.
또한 영웅적인 조종사 000과 뛰어난 용맹과 용기를 보여준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잊을수 있겠는가.
Pursuing a group of Japanese airplanes, fighter pilot S. I. Gritsevets, Hero of
the Soviet Union, saw that the plane of his commander V. M. Zabaluyev was
missing. After firing a number of rounds at the fleeing enemy, Gritsevets began
to look for the missing plane. He made a round over the area of the last attack
and spotted the plane in the steppe on territory held by the Japanese. Diving low
Gritsevets saw Zabaluyev beside the plane. Apparently something had gone
wrong with the engine. What to do? Despite the great risk of landing behind
enemy lines, Gritsevets decided to save his commander. He acted on Suvorov’s
maxim: “Save your comrade even if you die.”
일본 비행기들을 추격하던 전투기 조종사 그릿세베츠, 소련의 영웅은 지휘관 자발루예프의 비행기가 실종된 것을 알았다. 달아나는 적에게 수차례 발사한 후, 그릿세베츠는 실종된 비행기를 찾기 시작햇다. 그는 마지막 공격지역 위를 한 바퀴 돌고 일본 점령지의 스텝지대에서 비행기를 포착했다. 낮게 내려간 그릿세베츠는 비행기 옆에 있는 자발루예프를 보았다. 분명 엔진에 고장났다. 뭘 해야 할까? 적진 뒤에 착륙하는 대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릿세베츠는 그의 지휘관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수보로프의 격언에 따라 행동햇다. "죽더라도 동지를 구하라"
This daring and always composed pilot made a beautiful landing on terrain
pock-marked by shellpits and quickly taxied to Zabaluyev’s plane. He literally
squeezed his commander into the cockpit of his one-seat fighter plane. Then,
before the eyes of the stunned Japanese soldiers, he put the nose of his machine
against the wind and took off with a double load, and safely reached the airfield.
이 담대하고 늘 침착한 조종사는 포탄에 패인 자국이 있는 지형에 아름답게 착륙해서 자발루예프의 비행기에 재발리 올라탔다. 그는 상관을 자신의 1인 전투기 조종실로 말그대로 구겨넣었다. 그러고나서, 어안이 벙벙한 일본군의 눈 앞에서 기체 정면을 맞바람으로 두고 2배의 짐을 싣고 이륙하여 비행장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In one of the reconnaissance fights with the Japanese, a lorry was damaged
in the unit of Major Kasperovich. The driver, private Timokhin, did not abandon
the lorry and stayed in the battlefield in no man’s land, trying to fix the damage.
일본군과의 한 정찰전에서 카스페로비치 소령의 부대에서 화물차가 파손되었다.
운전자 티모킨 일병은 화물차를 포기하지 않고 아무도 없는 전장에 남아 수리를 시도햇다.
The Japanese who saw his bold action decided to capture him alive. Timokhin
fought like a real Soviet soldier should. Badly wounded, he continued to resist.
At that moment Major Kasperovich, the commanding officer of the unit,
undaunted by the extremely serious situation, took the risky decision to save the
soldier. He ordered to concentrate direct artillery fire on the Japanese weapon
emplacements, and led his company into an attack on the enemy. In an armoured
vehicle he drove at high speed to Timokhin’s lorry and took it in tow. When
Timokhin was brought to safety, he thanked his commanding officer and his
mates with tears in his eyes because they had saved him from certain death at the
risk of their own lives.
“I was sure you would not forget me and would not leave me to die,” he said
before being taken off to a hospital.
그의 대담한 행동을 본 일본군을 그를 생포하기로 결정했다. 티모킨은 진정한 소련병사처럼 싸웠다. 심하게 다쳤지만, 그는 계속 저항했다. 그 순간 그 부대의 지휘관 카스페로비치는 극히 심각한 상황을 무릅쓰고 병사를 구하려는 위험한 결정을 내렸다. 그는 일본군 무기 배치점에 직접 포격을 집중하라고 명령했고 중대를 이끌고 적을 공격했다. 그는 장갑차를 고속으로 몰아서 티모킨의 화물차로 가서 견인했다. 무사히 돌아와서 티모킨의 상관과 동료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 그들은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여러분이 나를 잊지않고 나를 내려려두지 않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병원으로 후송되기전에 말했다.
Hero of the Soviet Union, Senior Lieutenant V. F. Skobarikhin, a pilot, in an
unequal dog-fight, while saving his comrade Senior Lieutenant Vuss, rammed a
Japanese fighter plane and, having destroyed it, engaged two other planes. When
the Japanese pilots sensed who they were dealing with, they made off for their
airfields. Despite the serious damage to his plane, Skobarikhin reached his
airfield safely. Fragments of the enemy plane were found on the wing of his
plane.
소련의 영웅 조종사 스코바리킨 중위는 불리한 공중근접전에서 그의 동료 중위를 구하는 와중에 일본전투기 한 대와 부딪혀 파괴시켰고 다른 2대의 전투기와 교전햇다. 일본군 조종사들은 그들이 누굴 상대하고 있는지 깨닫고 자신들의 비행장으로 도망쳤다. 비행기에 심각한 손상을 입엇음에도 스코바리킨은 비행장에 무사히 도착했다. 적기의 파편들이 그의 비행기 날개에서 발견됐다.
Hero of the Soviet Union, Senior Lieutenant V. G. Rakhov, distinguished
himself, too, in the air battles. On July 29, he met up with a Japanese ace pilot,
Takeo. Skilfully controlling his plane, V. G. Rakhov engaged the enemy. In the
dog-fight, the Japanese pilot demonstrated all his skill and yet Rakhov set fire to
his plane. The Japanese baled out, and seeing that he was coming down on
Mongolian territory, attempted suicide. But he was taken prisoner.
소련의 영웅 중위 라호프는 공중전에서도 탁월했다. 7월 29일 그는 일본군 에이스 조종사 다케오를 마주쳤다. 근접공중전에서 일본군 조종사는 기술을 총동원했지만 라호프는 그의 비행기에 불이 나게 했다. 그 일본군은 비상탈출을 했지만 그가 몽골 영토로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자살을 시도햇다. 하지만 그는 포로로 잡혔다.
On recovering from his ordeal and seeing that he was being well treated by
officers of the Red Army, Takeo asked his captors to introduce him to the pilot
who had so skilfully shot him down. When Rakhov approached, the Japanese
bowed low to him in tribute.
시련에서 회복하며 그가 붉은군대장교들에게 대우받는 것을 보고, 다케오는 자신을 능숙하게 격추시킨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소련군에게 요청했다. 라호프가 다가오자 그 일본인은 절을 하며 경의를 표했다.
I gratefully remember many commanders with whom I was in daily contact
at that time. At the beginning of the hostilities on the Khalkhin Gol, Ivan
Fedyuninsky was administrative assistant commander of a regiment. When we
needed a commander for the 24th Motorized Regiment, Fedyuninsky’s name
was given as the first choice. And we never had reason to rue it. In the most
complex of situations Fedyuninsky always found the correct solution. When the
general offensive began his regiment successfully fought the enemy.
나는 당시 일상적으로 접했던 많은 지휘관들을 고마운 마음으로 기억한다.
할힌골의 적대행위 초기에 이반 페듀닌스키는 한 연대의 행정보조 지휘관이었다.
우리가 24기동연대의 지휘관이 필요했을 때 페뉴닌스키의 이름이 첫번째 선택으로 주어졌다.
우리는 이것을 후회할 이유가 결코 없었다. 가장 복잡한 상황에서도 페듀닌스키는 항상 올바른 해결책을 찾았다. 총공세가 시작 됐을 때 그의 연대는 성공적으로 적과 싸웠다.
After the
end of the fighting on the Khalkhin Gol, Fedyuninsky was appointed
Commander of the 82nd Division, which during the initial stage of the Patriotic
War obstinately fought the Germans in the neighbourhood of Mozhaisk. Later
on, Major-General Fedyuninsky acquitted himself splendidly as commander of a
rifle corps of the South-Western Front, and then of the 42nd Army at Leningrad.
Brigade Commander Mikhail Potapov was my deputy. He was responsible
for organizing the interaction between formations and arms of the service. And
when we launched our general offensive, he was in command of the main group
of forces on the right flank. He was a man of astonishing self-possession.
할힌골전투가 끝난 뒤, 페듀닌스키는 82사단장으로 임명되었고 대조국전쟁 초기 동안 모짜이스크 긑어체서 독일군과 완강하게 싸웠다. 나중에 페듀닌스키 장군은 남서전선의 소총군단의 지휘관으로 그 다음은 레닌그라드에서 42군의 지휘관으로 훌륭히 임무를 수행했다.
미하일 모타포프 여단장은 나의 부관이었다. 그는 군대의 편성과 무기 사이의 상호작용을 조직하는 책임을 맡았다. 우리가 총공세를 개시했을 때 그는 우측의 주요 부대를 지휘했다. 그는 놀랄만치 침착한 인물이었다.
Nothing could upset him. He was absolutely calm in the most complicated and
perilous situations. And the troops liked him for it. He was just the same during
the Patriotic War as commander of the 5th Army of the South-Western Front.
Communication in battle and in any military operation plays a decisive role.
That is why I would like to address a few words of praise to Colonel Alexei
Leonov, who always, in any situation, provided troop control with adequate
communication.
그는 어떤 것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가장 복잡하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완전히 침착했다.
그리고 부대원들도 그런 그를 좋아했다. 그는 남서전선의 제5군 사령관으로서 대조국전쟁 기간에도 똑같았다. 전투와 어떤 군사 작전에도 소통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이 내가 알렉세이 레오노프 소령에게 칭찬의 말을 건네고 싶은 이유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충분한 소통을 하며 부대를 통제햇다.
Party organizations made a great contribution to our military mission.
Especially praiseworthy were the Chief of the political department of the Army
Group Pyotr Gorokhov, Regimental Commissar Roman Babiichuk, and secretary
of the Party Committee of the Special Corps, Alexei Pomogailo, and commissar
Ivan Zakovorotny.
당조직은 우리의 군사적 임무에 엄청난 공헌을 했다.
특히 칭찬할 만 사람들은 표트르 고로호프 육군 정치부장, 로만 바비추크 연대장, 특수부대 당위원회 서기, 알렉세이 포모가일로, 이반 자코보로트니 정치위원이었다.
Among the political officers of larger units, Regimental Commisar Vasili
Sychov, commissar of the 9th Motorized Brigade, figured especially
prominently. In the past he was a metal worker from the Urals. Sychov
efficiently helped his commanding officer and often led his men in combat, his
own courage inspiring them to feats of valour. During the Patriotic War when he
was member of the Military Council of an army, he carried out his duties with
the same daring and courage, as in those days.
더 상급부대의 정치장교 중에서는 바실리 시초프 연대 정치위이자 제9기동여단의 정치위원이 특히 현저히 눈에 띄었다. 과거에 그는 우랄출신의 금속노동자였다. 시초프는 효율적으로 그의 상관을 도왔고 자주 부하들을 이끌고 전투를 했다. 그 자신의 용기로 부하들이 용감한 공훈을 세우도록 고무시켰다. 대조국 전쟁 동안 그가 한 부대의 군사 위원회의 일원이었을 때, 그는 예전과 같은 대담한 용기로 임무를 수행했다.
Days and nights the medical personnel laboured in the most difficult field
conditions, saving the lives of our officers and men, and not only ours at that:
they displayed a most humane attitude towards captured Japanese.
I remember my meetings with Professor M. N. Akhutin. Once I was told that
the Professor, though dead tired after performing many operations, had ordered
that his blood be given to a wounded officer. I rang him to ask that blood be
obtained from some younger doctor. But Akhutin barked into the telephone:
밤낮으로 의료진은 최악의 현장 조건에서 일하며 우리 장병들의 생명를 구했는데 아군의 생명뿐만 아니었다. 그들은 일본군 포로에 대해서도 가장 인간적인 태도를 보였다.
나는 아크후틴 교수와의 만남을 기억한다. 예전에 그 교수가, 비록 많은 수술을 하고 난 후에 죽도록 피곤했지만, 부상당한 장교에게 자신의 피를 주라고 명령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젊은 의사에게서 피를 받아오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아크후틴 교수는 전화로 소리쳤다:
“I’ve no time to find the necessary blood group.” He asked me not to detain
him, and gave his own blood after all.
Professor Akhutin devised and organized an efficient system of treating the
wounded by stages. He extended much assistance to the medicos of the fraternal
Mongolian army. Working from 15 to 18 hours daily, he found time to give
further training to our young surgeons, and I do not think I will be far wrong in
saying that those who worked with Professor Akhutin learned a great deal from
him of the art of surgery. It was Professor Akhutin who supervised the early
work of the young talented surgeon, A. A. Vishnevsky.
"필요한 혈액을 찾을 시간이 없습니다."그는 자신을 막지말라고 요청하며 결국 피를 뽑았다.
아크후틴 교수는 단계별 부상자 치료의 효율적인 체계를 고안하고 조직했다. 그는 형제같은 몽골군의 의무병들에게 많은 원조를 베풀었다. 하루에 15시간에서 18시간까지 일하면서 그는 우리의 젊은 외과의사들에게 더 많은 훈련을 시킬 시간을 냈고, 아크후틴 교수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그에게서 수술 기술을 많이 배웠다고 말해도 크게 틀릴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 젊은 재능 있는 외과의사 비슈네프스키의 초기 작업을 감독한 사람이 바로 아크후틴 교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