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한 대
윤동주
초 한 대 -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면인 심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려 버린다.
그리고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작품해설]
이 시는 윤동지가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다닐 때인 1934년 12월 24일, 그의 나이
17세에 쓴 처녀작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습작기에 쓴 작품으로 다소 문학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나, 윤동주가 나아가게 될 문학 세계를 가늠하게 해 준다는 측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즉 후기에 접어들수록 높은 문학성을 획
득하게 되는 많은 윤동주의 작품들도 이 처녀작에서 보여 주고 있는 ‘순결’과 ‘참회’
그리고 ‘자기희생’ 등을 좀더 의미있게 변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윤동주의 시에는
남달리 순결한 마음 혹은 고결한 정신을 추구하면서 고독한 가운데 자신을 성찰하는
시인의 모습이 짙게 베어 있다. 그리고 고독한 가운데서의 자기성찰은 자신을 참회하
는 삶의 태도로 나아간다.
먼저 이 시에서 형상화되고 있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육신을 불살라 어둠을 밝히는
촛불의 자기희생정신이다. 이러한 촛불의 정신이 바로 윤동주의 삶의 태도이자 인생관
의 비유로, 그는 어둠을 홀로 밝히면서 스스로 육신을 불사르는 존재가 되고자 한다.
이렇듯 타인을 위해 자신을 죽이는 삶, 다시 말해 자신이 스스로 제물이 되는 이 속죄
양으로서의 삶은 원형 상징의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고독한 삶이자 고독 속에서
자신을 성찰한 삶이라 할 수 있다. 어두운 밤 홀로 빛을 발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육신
을 바치는 이 촛불의 자기희생이야말로 처절한 고독 속에서의 자기 성찰이 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와 같은 자기 성찰은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 그의 생명
인 심지’라는 구절에 나타나 있는데, 제단에 제물로 바쳐진 ‘염소의 갈비뼈’ 같은 몸이
라는 표현에서 속죄양의 이미지를 연상할 수 있다. 그가 쓴 최초의 시(詩)인 이 작품과
최후의 시(詩)인 「쉽게 쓰여진 시」를 관류하는 이 자기희생의 순절 정신이야말로 그가
동시대 많은 문학인들과 차별성을 갖게 하는 점이다.
두 번째로 이 시에 나타나는 것은 어떤 이념에 대한 순결한 시인의 의지이다. ‘그의
생명인 심지’,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라는 시행이 바로 그것이다. 등심(燈心)인 ‘심지’는 동음이어인 마음
에 품은 의지라는 뜻의 ‘심지(心志)’를 표상하며, ‘깨끗한 제물’과 신을 섬기는 ‘선녀’로
비유된 촛불의 자기희생은 곧 어떤 이념에 대한 순결한 의지를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시인의 깊은 참회의 자세이다. ‘그의 생명인 심지 /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 불살려 버린다.’와 같은 시행에서 보여 주는 삶의 태도
가 그 단적인 예가 된다. 백옥같이 정갈한 눈물과 피를 쏟는 희생양의 모습은 바로 참
회하는 인간으로서의 전형적인 모습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작가소개]
윤동주(尹東柱)
1917년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출생
1925년 명동소학교 입학
1929년 송몽규(宋夢奎) 등과 문예지 『새 명동』발간
1932년 용정(龍井)의 은진중학교 입학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
1936년 숭실중학 폐교 후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전입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
1942년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과 입학, 가을에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전학
1943년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
1945년 2월 16일 큐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
시집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유고시집, 1948), 『별을 헤는 밤』(1977),
『윤동주 시집』(1984), 『윤동주자필시고전집』(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