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진 스타킹처럼 대책 없는 날이다". 무작정 떠돌다가 만난 "바다를 배경으로 걸어둔 작은 카페 입구"에는 구원의 손길처럼 "낮술 환영"이라고 걸려 있다. 카페의 주인은 스스로 손님이 되어 이미 낮술에 취해서 "눈빛이 붉다". 시인은 묻는다. "왜 낮술을 파시나요?". 주인은 대수롭지 않은 듯이 답한다. "바다가 너무 새파랗네요". 바닷물 빛이 너무 새파란 게 낮술을 마시는 이유란다. 낭만적인 이 반응은 차라리 선문답에 가깝다. 문득 시인은 깨닫는다. "오늘은 파란 기분/그래서 파란 것 이외에는/아무것도 궁금"해 하지 않기로 한다. ―김남호(시인,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차례
시인의 말
1부 종이접기 검은 선들이 목줄 낮술 한잔할래요 나비란 물비린내 모빌 카페의 사각 유리창 너머의 왜 이리 일찍 피었나 불면증 데드플라이 태양광 사나이 몬순 여러 개의 그림자 검은 레이스의 길 위에서 맨살에 니트를 걸친 것처럼 외면 유통기한 슬품을 건너뛸 때마다 뿌리의 꿈
2부 벼꽃 겨울이 오기 전 밤비가 내고 간 소리 내 기억속의 통이력 내 귀에 새가 앉았다 나무의 숲 향기에 취하는 방식 세상에서 가장 좁은 골목 반월당역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당신이 와있다 부고 물빛시간 풀잎에 베이다 hODE Mi Cras Tibi 슬도瑟島 행복은 행복하지 않아요 만약에 되돌릴 수 있다면 나비는 무슨 향기를 맡고 왔을까 구름이 정말 양 같아요 오월
3부 노을카페를 여는 그 여자 새의 의식 사하라 실연 해갈을 위하여 건조한 사랑 독일마을에서 하룻밤 버렸다고 생각한 허물이 다시 내게로 탯줄도장 두고 간 편지 황사 잠씨 머물다간 신발 속 작은 돌멩이를 털어내고 셧다운 원격조정 무릎을 꿇고 앉으며 부조리 먼지가 고요하다 학대 적막이 깊다
해설_ 김남호(시인, 문학평론가)
■ 시집 속의 시 한 편
나의 손때가 실핏줄로 연결될 때마다
새들은 조금씩 몸을 부풀리고
나는 새들의 깊은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불을 끄고 주문을 외워볼까
깃털이 생기게 해주세요
지지배배 지지배배 지지배배
운이 좋다면 정말 생길지도 몰라
눈이 흐릿해진 밤은 주문을 따돌리고
나는 그만 잠 속으로 갇히고 말았어
열린 창문으로빗소리가 뛰어들어와
새들이 발목을 첨벙첨벙
둥근 내 손바닥을 뚫고 새들이 날아간다
깃털이 공중에서 떨어진다
―「종이접기」 전문
■ 시인의 말
한 발은 정상에 두고
다른 한 발은 광기를 밟고 선 나
온갖 의식과 내가 모르는 무의식 속의 나
위선과 거짓을 혼동하던 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던 언어들로
잠들지 못하던 나
길 밖에서 길을 찾아 헤매던 나
세 번째 시집으로 주저 없이 뛰어든 나
2024년 게으른 봄날
■ 김옥경
대구 출생. 2013년 『시와사람』으로 등단. 시집 『벽에 걸린 여자』, 『바다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