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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님의 생애
1장 1절
도전께서 정사(丁巳)년 十 一 월 三十일에 충북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忠北 槐山郡 長延面 方谷里)의 박씨 문중에서 탄강하시니 성은 박(朴)씨이요 존휘는 한경(漢慶)이시며 자함은 경호(景浩)이고 존호는 우당(牛堂)이시니라.
1장 2절
방곡리는 백두대간 중 소백산맥을 따라 뻗어 내려온 산맥이 월악산과 속리산을 이루고 그 사이에 북(北)쪽으로는 주월산(舟越山)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신선봉(神仙峯)과 성불산(成佛山)이 동서(東西)로 보필(輔弼)하며. 남(南)쪽으로는 군자산(君子山)과 칠보산(七寶山)이 호위하는 가운데 우뚝 솟은 박달산(朴達山) 기슭에 자리한 마을이로다.
1장 3절
박달산은 예로부터 밝음과 신령함을 지닌 산으로 백산(白山) 또는 백두산(白頭山)이라 불리던 곳이로다.
1장 4절
도전께서 탄강하신 괴산군(槐山郡) 일대는 유서 깊은 사적지가 많은 곳으로 그 중 인근에 있는 미륵리(彌勒里)의 미륵석불(彌勒石佛)은 신라말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이곳에 와서 미륵불을 봉안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알려져 있도다.
1장 5절
박(朴)씨는 신라 박혁거세(朴赫居世)로부터 시작되고 한민족 고유의 성(姓)이로다. 신라 경명왕의 손(孫)인 기오(奇悟)로부터 그 후손들이 본관을 죽산(竹山)으로 하였으며. 기오로부터 十 六대손인 원형(元亨)은 청렴한 재상으로 명망이 높았고 원형으로부터 五대손인 홍구(弘耈)는 절의(節義)가 있는 분이었도다. 홍구의 十 一 대손인 재선(在璿)이 충주(忠州)로 이주하여 유선(有善) · 영선(永善) 두 형제를 두었고 영선이 비로소 방곡리로 들어와 살았도다.
1장 6절
도전의 부친은 성함이 영선(永善)이시고 모친은 경주 김(金)씨이며 성함은 원(瑗)이시니 성품이 단정하고 정성심이 지극하셨도다. 인근 미륵리의 미륵석불에 백일정성을 드리시니 그 뒤 태기가 있더니 도전께서 탄강하시니라.
1장 7절
도전께서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관후하고 침착하셨으며 남달리 예의가 바르고 언행이 진중하셨으므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경대를 받으셨도다.
1장 8절
도전께서 방곡리 마을 서당과 진대 사립학교를 거쳐 수안보 보통학교를 다니셨도다. 방곡리에서 수안보 보통학교까지 이십리가 넘는 험난한 산길을 홀로 사색에 잠겨 다니시는 일이 많았으며. 방곡리 뒷산 바위에 앉아 명상에 잠겨 계시는 모습이 동리 사람들에게 목격되곤 하였도다.
1장 9절
도전께서 스물두 살 되시던 무인(戊寅)년에 장연면(長延面) 광진리(廣陳里) 사람인 김운채(金雲彩)가 도전을 찾아뵙고 자신이 운영하는 진대 사립학교(陳垈私立學校)에서 인재를 양성해 주실 것을 부탁 드리니라. 도전께서 한동안 교편생활을 하시며 학생들을 가르치시니 그 가르침이 비범하여 인근 동리에까지 명성이 높았도다.
2장
2장 1절
때는 바야흐로 일본의 식민통치의 폐해가 극도로 심해진 시기라. 신미(辛未)년에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중국대륙으로의 침략을 개시한 일본이 침략전쟁 수행을 위하여 이 땅을 병참기지화하고 급기야 정축(丁丑)년에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하여 동양(東洋) 전체에 전운(戰雲)이 드리워지고 서양(西洋)에서도 대란(大亂)이 일어나게 되었도다.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표방한 황국신민화 정책(皇國臣民化 政策)을 실시하여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는 등 민족말살행위를 일삼으니 민심(民心)이 피폐해지고 세상이 흉동되는지라. 이 때에 도전께서는 잠시 교편을 놓으시고 충주(忠州) 시내에서 사진관과 시계방을 운영하기도 하셨도다.
2장 2절
경진(庚辰)년 六월 일본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주장하며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동남아의 여러 국가들까지 침략하고자 하는 목적을 실행해 나가다가. 그 해 八월에는 일본(日本). 독일(獨逸). 이태리(伊太利). 삼국이 동맹(同盟)을 체결하여 영국(英國)과 미국(美國)에 대항해나갈 것을 결의하고 이듬해인 신사(辛巳)년 十 一 월에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전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니라. 이 때에 도전께서는 연풍면(延豊面) 유하리(柳下里)에 있는 신흥사립학교(新興私立學校)에서 다시 교편생활을 하셨도다.
2장 3절
계미(癸未)년에 이르러 도전께서 극도로 피폐해진 민심을 살피시고 백성들의 고초(苦楚)를 몸소 체험하시고자 교편생활을 거두시고 유력의 길을 떠나셨도다. 도전께서는 유력(遊歷)하시는 중에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한 참상을 보셨으며 의주(義州)를 거쳐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 봉천에서 산판(山坂)일로 여비를 조달하기도 하셨도다. 일본의 식민통치와 세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백성들과 고초를 함께 하며 지내시던 중 이듬해인 갑신(甲申)년에 모친께서 병환 중이라는 소식을 받으시고 방곡리로 돌아오셨도다.
2장 4절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전황(戰況)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하여 극단적인 인적(人的) · 물적(物的) 착취정책을 썼으니 징병제(徵兵制)와 학병제(學兵制)를 시행하여 젊은 장정들을 전장(戰場)으로 징집하고 징용령(徵用令)을 내려 강제로 인력을 차출하여 국내 및 일본 등지의 여러 시설에서 노동케 하였도다. 방곡리 본댁에서도 한성(漢城)이 징용으로 차출되었도다. 도전께서 아우 한성(漢城)을 조용히 불러 가라사대『너는 성품이 근면하고 농사일에도 소질이 있으니 부모님을 봉양하고 집안일을 책임지라. 징용은 내가 가겠노라』고 말씀하셨도다.
2장 5절
도전께서 일본 아오모리현(靑森縣)에서 징용생활을 하시던 중에 해방(解放)을 맞으셨도다. 을유(乙酉)년 七월 十 五일 도전께서는 다른 징용자들과 함께 일본 군함 우키시마호(浮島丸)에 승선하시고 오미나토항(大津港)을 출항하며 부산으로 향하시던 중 十 七일 원인 모를 폭발로 마이즈루만(舞鶴灣)에서 배가 침몰하였도다. 이 사고로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 수천여 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도다. 사고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 당시 배의 선원들과 일본 군인들이 부산항에 도착하면 조선 사람들로부터 보복당하는 것이 두려워 일부러 폭침시켰다는 소문만 전하여 오는 도다.
2장 6절
도전께서도 황망 중에 배가 가라앉으므로 침몰(沈沒)당하게 되셨으나 홀연히 큰 거북이 나타나 도전을 등에 모시고 수면 위에 떠 계시도록 하였도다. 도전께서는 거북의 등에 의지하여 수면에 떠 계시다가 지나가던 어선(漁船)을 타고 육지에 도착하여 무사히 방곡리로 돌아오시게 되었도다.
3장
3장 1절
도전께서 방곡리로 돌아오신 후 병술(丙戌)년 새해를 맞으셨도다. 정월 보름에 감물면(甘勿面) 이담리(鯉潭里)에 있는 이모의 집에 들르시자 그 곳에 이미 도주께서 창도하신 무극도(无極道)에 입도하여 수도하고 있는 사람이 와 있었도다. 그는 도전께 주문(呪文)을 보여드리고 술청로에 있는 안상익(安商翼)을 찾아 가시면 상제(上帝)께서 대순하신 유의(遺意)와 도주(道主)께서 창도하신 유법(遺法)을 들으실 수 있다고 말씀드리니라.
3장 2절
도전께서 안상익을 찾아보신 후 상제께서 대순하신 유의와 도주께서 창도하신 유법에 크게 감오(感悟)하시고 四월에 치성(致誠)을 올리셨도다.
3장 3절
도전께서 치성을 올리신 직후부터 지방을 순회하시며 상제와 도주께서 대순하신 취지를 연포(演布)하셨도다. 도전께서 대순하신 진리를 순회연포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그 덕화에 감동하여 도전을 추종하였으니. 그 중에서도 경형중(慶亨中). 류철규(柳喆珪). 이갑성(李甲性). 김영하(金永河). 경석규(慶錫圭). 김해구(金海九) 등이 도전을 받들며 포덕사업에 전념하였도다.
3장 4절
무자(戊子)년 九월에 도주께서 도본부(道本部)를 경상남도 부산시에 설치하시고 도명(道名)을 태극도(太極道)로 정하시니라. 이 때 전국 각처에서 포덕(布德)이 크게 일어나 도인 수가 급증하였으니. 그 중에서도 도전께서 순회하신 충북지방이 단연 두각을 드러냈도다. 그 이듬해 도주께서 임원체계(任員體系)를 정비하시고 이용직(李龍稙)을 중산방면(中山方面) 포감(布監)으로. 안상익(安商翼)을 충주방면(忠州方面) 포감으로. 김태만(金台萬)을 김천방면(金泉方面) 포감으로. 김명구(金命求)를 영주방면(榮州方面) 포감으로 임명하시니라. 그 해 七월에 도전께서는 도주로부터 충주방면 차포감(次布監)의 임명을 받으셨도다.
3장 5절
그 당시 상제께서 천지공사를 행하시던 중에 말씀하신『아라사 군대가 내 사람이라』는 구절이 오해를 사기도 하였도다. 갑오(甲午)년 二월 충북도경(忠北道警)에서는 이 같은 소문의 근원을 추적하고 있었도다.
3장 6절
二월 十 八일 밤 도전께서 청주(淸州) 서운동(瑞雲洞)에서 류철규. 김영하. 이갑성 등에게 수의(修議)를 보고 계셨도다. 이 때 충북도경 소속 형사들이 들이닥쳐 도전과 도인들을 국가보안법 위반(國家保安法 違反) 혐의로 압송하여 취조하니라. 도전께서 구속되신 사실이 부산도장에 전해지고 도주께서 직접 준래(俊來). 승래(昇來). 영래(永來) 등 세 자제와 정운교(鄭雲敎)를 데리고 청주로 오셨도다.
3장 7절
청주옥사(淸州獄事)가 있기 전인 신묘(辛卯)년 三월에 도주께서 도전에게 명(命)하여 청주 근방에 있는 청천면 화양동의 만동묘(萬東廟)를 살펴보고 도주께서 거처하실 곳을 알아보라고 하신 적이 있었도다. 그 후 분부가 계시지 않다가 三년 후인 갑오(甲午)년에 도전의 옥사로 인하여 도주께서 청주에 오시어 북문로(北門路)에 있는 북일여관(北一旅館)에 거(居)하시니라.
3장 8절
三월 二十 七일 도주께서 도전의 옥사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시고 준래(俊來). 승래(昇來). 영래(永來) 세 자제와 안상익(安商翼). 정운교(鄭雲敎)를 대동하시고 만동묘 유지(遺址)를 두루 살펴보신 후 북일여관에 돌아오셨도다. 도주께서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저녁상을 받으시고 수저로 상머리를 한 번 치시니 뇌성벽력이 크게 일어나며 산악이 무너지는 듯하니라. 이 때 만동묘 위 화양구곡(華陽九曲) 중 오곡(五曲)의 첨성대 아래쪽 암벽에 새겨진 숭정황제어필(崇禎皇帝御筆)의 비례부동(非禮不動) 암각 좌편에 닫혀 있던 석문(石門)이 두 쪽으로 갈라져 내리고 그 안에 옥조빙호(玉藻氷壺)의 네 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의 네 자가 나타났다고 전하는 도다. 그런데 이 지역에는 예로부터『화양동의 석문이 열리면 천지가 개벽되고 진인(眞人)이 세상을 구제하리라』는 말이 구전(口傳)되어 왔도다. 그 후 곧 도전께서 보석(保釋)으로 풀려나시고 이어 무죄(無罪)로 판결되었도다.
3장 9절
갑오(甲午)년 四월 도전께서 도주로부터 충주방면 포감(布監)의 임명을 받으시고 그 이듬해인 을미(乙未)년 五월에 충주방면 수포감(首布監)의 임명을 받으셨도다.
3장 10절
병신(丙申)년 어느 날 도주께서『투전노름에 진주노름이 있으니 진주를 잡고 까야 먹는 법이니라. 이제 내가 진주를 잡았으니 까는 것은 너희들이 하라. 까기는 여반장(如反掌)이니라』고 말씀하셨도다.
3장 11절
그리고 다시 말씀하시기를『내가 진인(眞人)을 만나지 못할까 노심초사(勞心焦思)하였느니라. 그러나 이제 진인을 만났으니 너희들은 아무 염려(念慮) 없이 수도에 전념하면 되느니라』고 분부하셨도다.
3장 12절
그 해 三월에 도전께서 도주의 명을 받아 도(道)의 취지(趣旨) · 종통(宗統)과 강령(綱領) · 기원(起源) · 신조(信條) · 도인(道人)의 수칙(守則) · 지도체계(指導體系) 등을 내용으로 하여《태극도 통감(太極道通鑑》을 편찬하시니라.
3장 13절
《태극도통감(太極道通鑑)》말미에 도주약력(道主略歷)을 도전께서 직접 초(抄)하시니라.
道主略歷
道主趙鼎山任은 檀紀四二二八年(乙未)十二月初四日에 元故鄕인 咸安郡會文里에서 誕生하시와 十五歲時에 排日思想으로 渡江而西하사 僑寓滿州하시다가 二十三歲丁巳春에
甑山聖師의 太極道理에 感悟하사 東回國하신後 名山古蹟을 遍歷修道中 道德을 慕仰하는 從徒들이 日加月增하며 師師相授하야 蔓延四方이라 門徒等이 道主任으로 堆戴하며 無極道로 稱號하야 進行中 雖倭憲의 暴政으로도 大義名分이 嚴然함으로 繼續發展하였으나 得道하신 以來 四十年間 修道上 苦心하심도 枚擧키 難하거니와 外來的 波瀾도 또한 重疊하였으나 恒常泰然自若하시고 不墝不屈 勵精修道하사 苦盡力行이러시니 渠所謂大東亞戰爭當時 宗敎團體 解散令에 依하야 道人의 行動連絡을 中止하시고 獨修苦行하시던中 祖國解放을 맞이하야 信仰自由의 國是에 따라 過去從徒들이 父母膝下에 도라옴과 같이 會集하야 太極道라 改稱하고 今日에 至하셨음.
道人代表 朴 景 浩 等 謹抄
4장
4장 1절
정유(丁酉)년 어느 날 도전께서 도주로부터「우당(牛堂)이란 호(號)를 받으시니라.
4장 2절
다음 해 二월 도주께서 도전에게 총도전(總都典)의 임명을 내리시니라. 그 당시 도주께서는 정유는 十 一월 二十 一일 자시부터 불면불휴하고 백일도수를 보고 계셨으며 도전에게 도의 운영 전반을 대행하게 하시니라. 백일도수는 무술(戊戌)년 三월 三일에 마치게 되었도다.
4장 3절
三월 六일에 도주께서는 간부 전원을 문 밖에 시립케 하신 후 도전을 가까이 하시어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도의 운영 전반을 맡도록 분부를 내리시고『오십년 공부 종필(五十年工夫終畢)이며 지기 금지 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가 금년이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고 말씀하시고 화천하시도다.
4장 4절
도주께서 유명(遺命)으로 종통(宗統)을 도전에게 전하신 사실은「명령전달(命令傳達)」과「공포사항(公布事項)」이란 제목의 공문으로 모든 도인들에게 전하여지니라.
명령전달
오십년공부종필이며 지기금지사월래가 금년이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모든 일을 행하든 대로 잘 행해 나가라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공포사항
지존께옵서 무술 삼월 초육일 신미일 을미시(오후 한시 삼십칠분)에 화천하시다
명령에 의하여 앞으로 모든 행사를 종전대로 도전령에 의하여 행함
모든 도인들은 조금도 낙심 말고 성경신을 다하여 수도에 전심할 것
대순전경에 내가 앞에 있으니 너희들이 알며 뒤에 있으니 너희들이 알겠느냐 내가 다시 와야 너희들이 알 것이다 하지만 다시 올 때는 눈이 부시어 잘 보지 못하리라 하셨음
지존께서도 항상 크게 의심날 일이 있고 땀 뺄 일이 있다 하셨음
4장 5절
도전께서는 도주의 탄강일과 화천일을 기념일로 정하고 치성을 모시었으며 도주를 조성상제 하감지위(趙聖上帝 下鑑之位)로 봉축드리다가 十년 후인 정미(丁未)년 三월에 이르러 조성옥황상제 하감지위(趙聖玉皇上帝 下鑑之位)로 진법주(眞法呪)를 변경하셨도다
4장 6절
도주의 유명으로 종통을 계승(繼承)하신 도전께서는 상제와 도주께서 행해 오시던 천지공사를 계속해 나가시니라. 그리고 도장(道場)내에 수진각(守眞閣). 진양원(眞養院). 백학관(白鶴館). 청학관(靑鶴館). 종각(鐘閣)을 건축하여 완공하시는 한편 시학(侍學). 시법(侍法). 법학(法學). 청학(靑學) 공부를 시행하셨도다.
4장 7절
시학(侍學)은 三十 六명이 한 반이 되고 시학원(侍學員)과 정 · 진급(正 · 進級)은 운장주(雲長呪)를. 회원(會員)은 칠성주(七星呪)를 봉송하며 외수(外修) 내수(內修)는 도통주(道通呪)와 태을주(太乙呪). 기도주(祈禱呪)를 봉송하니라. 시법(侍法)은 三十 六명이 한 반이 되고 三명으로 이루어진 조가 모두 十 二개조가 되어 진법주(眞法呪)를 봉송케 하였으며. 법학(法學)은 외수 三十 六명 내수 三十 六명 모두 七十 二명이 한 반이 되어 외수는 이십사절주(二十四節呪)를. 내수는 이십팔수주(二十八宿呪)를 봉송케 하셨고. 청학(靑學)은 四명이 한 조가 되어 모두 六개조 二十 四명이 태을주를 봉송케 하셨도다. 그 중 청학공부는 취정 개안(聚精開眼)의 경지에 이르게 하시니. 도인들이 도전을 상제와 도주의 뜻을 이어 천지공사를 종결하실 진인(眞人)으로 받들며 존경하였도다.
4장 8절
그 당시 공부 자리에서는 신비한 일이 빈번하게 있었도다. 특히 청학공부는 취정 개안까지 이르게 하는 공부인지라 공부하는 사람과 신명 사이에 여러 현상이 발생했으며 척(慽)으로 인해 사고(事故)가 일어나기도 하였도다. 그 때마다 시학관(侍學官)이 도전께 말씀을 드리면 무위이화(無爲而化)로 풀리곤 하였도다. 임규오(林奎五)가 청학공부의 시학관을 맡고 있었는데 같은 조로 공부하던 경석규(慶錫圭)와 민병록(閔炳錄)이 주문을 읽지 않고 서로 욕설을 하며 싸우는 모습을 보고 도전께 아뢰니. 도전께서 크게 꾸중을 하시니라. 임규오가 도전의 꾸중을 듣고 돌아와 보니 석규와 병록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주문을 봉송하며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도다.
4장 9절
청학관 건립 공사가 한창일 때 도전께서 공사현장에 납시어 계셨도다. 그때 갑자기 도장 옆 산 중턱에 있는 큰 바위가 비탈길을 따라 공사현장까지 굴러 내려 오니라.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단지 도전께서 계시므로 도전의 덕화만 기대하고 있었도다. 도전께서 가만히 바위가 덮쳐 오는 것을 직시(直視)하시니 그 바위가 사람이 없는 장소로 굴러와 대강전 앞 연못 한 가운데에 멈추어 서니라. 그런데 그 바위와 연못이 조화를 이루어 마치 조경하는 사람이 일부러 꾸며 놓은 모습처럼 보이니 사람들이 참으로 기이한 일이라고 탄복을 금치 못하였도다.
4장 10절
서용덕이 청학공부를 하던 중에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나오면서『죽은 부친이 신명계에서 위난에 빠졌으니 내가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소리치며 도장 밖으로 달려 나가니라. 도장 근무를 하던 젊은 도인 여러 명이 제지하였으나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도다. 서용덕은 유약한 사람이었으나 젊은 장정 여러 명을 한 손으로 뿌리치고 도장 밖으로 나가 부친 묘 앞에서 부복하고 있는지라. 시학관이 도전께 말씀을 올리니 도전께서 도장 앞 본정(本庭)으로 나오시어 서용덕이 있는 곳을 향하여 휘파람을 부시니. 용덕이 갑자기 부친 묘에서 일어나 다시 도장으로 돌아와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공부에 전념하는 도다.
4장 11절
그 당시《정감록(鄭鑑錄)》의「청학동(靑鶴洞)에 살며 무병장수하고 죽어서 신선이 된다.」는 구절이 시속에 퍼져 있었도다. 강순임(姜舜任)이 부산(釜山) 영도구(影島區) 청학동(靑鶴洞)에 거처를 두고 포교를 하면서 바로 그곳이 정감록에서 말하는 청학동이라고 말하고 다니니라. 도전께서는 그 같은 소문을 들으시고『청학(靑鶴)이 아니고 청학(靑學)이며 청학(靑學)이 바로 도학(道學)이니라. 그리고 청학관(靑鶴館)에서 공부하기 때문에 청학공부(靑學工夫)라 하느니라.』고 말씀하셨도다.
4장 12절
또 어느 날『도통은 어려운 것이 아니니라. 법방(法方)만 알려주면 되는 것이니 성도(成道) 후에 개벽(開闢)이 있고 개벽 후에 도통(道通)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도다.
4장 13절
병오(丙午)년에 도전께서《태극도안내서(太極道案內書)》와《수도규정(修道規定)》을 발간하시어 도(道)의 취지(趣旨)와 연혁(沿革) 등을 밝혀 주시고 도인의 바른 수도생활을 격려하시니라.
4장 14절
대강전(大降殿) 상층(上層)을 영대(靈臺)라 하고 그 중에서 상제와 도주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닫집 안은 원위(元位)로 불리워지며 신성시되었도다. 원위(元位) 한 가운데에는 상제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편(左便)에 도주의 진영이 모셔져 있도다. 그런데 도전께서는 영대 원위의 상제의 진영 우편(右便) 빈자리에 의자를 두고 앉아 계신 일이 많았도다.
4장 15절
도전께서 종통을 계승하실 무렵에는 八명의 포장(布丈)들과 四명의 호장(護丈)들이 도전을 받들며 종무(宗務)와 지방사업(地方事業)을 담당하였도다. 부전(副典)에 류철규(柳喆珪). 내무(內務)에 박중하(朴重夏). 외무(外務)에 신상철(申祥㯙). 재정(財政)에 김용화(金容和) 등이 종무를 담당하였고. 지방사업으로는 중산방면(中山方面)은 이용직(李龍稙)이. 충주방면(忠州方面)은 이경수(李京洙)가. 청주방면(淸州方面)은 임규오(林奎五)가. 영주방면(榮州方面)은 김명구(金命求)가. 연풍방면(延豊方面)은 김사학(金思學)이. 괴산방면(槐産方面)은 오치국(吳治國)이. 서울방면은 이갑성(李甲性)이. 대전방면(大田方面)은 김해구(金海九)가 각각 포장(布丈)으로서 책임을 맡고 있었도다.
4장 16절
그런데 당시 재정을 맡고 있던 김용화(金容和)는 종단의 직영사업체인협동상회(協同商會)를 사유화하여 협화산업주식회사(協和産業株式會社)를 설립하고 자신을 대표자로 등기하는 등 난동을 저지르니라. 김용화는 박중하와 이윤섭을 끌어들여 도전에게 반기를 들고 四 · 一 九 혁명직후 계엄사와 수사당국에 모략중상하며 고발하였으나 심리 끝에 사필귀정으로 종결되었도다.
4장 17절
신축(辛丑)년에 군사혁명이 일어나자 김용화. 박중하. 이윤섭. 최중하 등은 혁명정부에 태극도를 용공단체로 음해하고. 四월 二十 八일 봉천명(奉川命) 치성을 맞이하여 많은 도인들이 치성 참배를 위해 도장에 모이는 것을 혁명정부에 반대하는 집회라고 속여 고발하였도다. 이들의 무고(誣告)로 도전과 김해구(金海九). 류한규(柳韓珪). 이갑성(李甲性). 김영하(金永河). 임문재(任文宰)등이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조사결과 무고로 밝혀지고 김용화 등이 오히려 혁명정부에 의하여 무고죄로 구곡되었도다.
4장 18절
당시 감천지소(甘川支所) 소속 고모(高某) 형사가 도장을 방문하여 조사를 하였도다. 그는 근무자의 만류를 뿌리치고 예의도 갖추지 않은 채 대강전으로 들어가다가 갑자기 얼굴이 사색이 되어 들어가지도 못하고 나오지도 못한 채 식은땀을 흘리며 전전긍긍 하니라. 근무자가 도전께 아뢰자. 도전께서『그만하면 되었다. 내보내도록 하여라.』하시는 도다. 도전의 분부가 계시자 그는 굳었던 몸이 풀리고 황급하게 도장 밖으로 달려 나갔도다.
4장 19절
김용화의 배도행위가 사필귀정으로 종결되고 도전께서는 공사(公事)에 더욱 전념하셨도다. 도세(道勢)는 일가월증으로 번창하였으며 교육사업과 구호자선사업에도 가일층 힘을 기울이시니 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여 도인자녀들의 무료교육을 실시하셨고 수십 개 병상의 감천의원을 설립하여 무료의료사업을 실시하시는 등 구제 사업을 베푸셨도다.
4장 20절
신축(辛丑)년 어느 날 도전께서 황진규(黃鎭奎) 등을 불러 책자 한 권을 내려 주시니라. 그 책자는《명심보감(明心寶鑑)》을 낱장으로 뒤집어서 그 면에 상제께서 행하신 공사의 내용과 가르침을 편년체로 기록한 것이었도다. 내용의 많은 부분이 이상호가 편찬한《대순전경(大巡典經)》과 같았으나《대순전경》과 그 밖의 다른 기록에서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구절들도 많았도다. 도전께서 이 책자를 내려주시며『이를 보완하여 상제의 행록과 공사를 편찬하되《선도진경(宣道眞經)》이란 이름으로 출판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시니라. 황진규 등은 도전의 분부를 받들어 더욱 자료를 수집하고 내용을 보완하여 을사(乙巳)년에 이르러《선도진경》을 편찬하게 되니라. 후에 도전께서는 도주의 행록과 공사내용을 수집하여 창도진경(創道眞經)을 편찬토록 명하셨으나 편찬 중에 태극도를 이궁(離宮)하시게 되었도다.
4장 21절
도전께서 종단활동을 더욱 활성화하시는 한편 도(道)의 체계를 새롭게 정비하셨도다. 계묘(癸卯)년 五월에 사회단체등록령(社會團體登錄令)에 의해 종교단체로서 등록하셨으며 그 해 九월에는 재단법인(財團法人) 인가를 받으셨도다. 또한 임원체계를 개편하시니. 부전(副典)을 종무감(宗務監)으로 개칭하고 류철규(柳喆珪)를 종무감에 임명하셨도다. 크게 종단(宗團)과 종의회(宗議會). 재단(財團). 사정원(査正院)으로 구분하시어 종단에는 총무부(總務部) · 전도부(傳道部) · 교화부(敎化部) · 수도부(修道部)를 마련하시고 그 부장(部長)에 김해구(金海九). 경석규(慶錫圭). 김영하(金永河). 류원규(柳元珪)를 각각 임명하셨도다. 종의회(宗議會)에는 협의회(協議會)와 의사회(議事會)를 두시고 의장에 신상철과 윤금현을 임명하셨으며 재단(財團) 이사장(理事長) 에 류철규. 심사위원장에 신상철. 징계위원장에 김영하를 각각 임명하셨도다.
4장 22절
을사(乙巳)년 三월에 도전께서 전체 도인들에게 각각 납폐지(納幣紙)를 七만 장씩 소화(燒火)하도록 명하시고 二十 一일 후에 다시 五만 장을 소화하도록 하셨도다. 그 후 정미(丁未)년 三월 五일에 납폐지의 내용과 주문 일부를 변경하시니 기도주 납폐지의 一항을 「태극도주 조성옥황상제(太極道主 趙聖玉皇上帝)」로 변경하시고 각 납폐지의 구덕정사(九德精舍)와 산회당(算會堂)을 삭제하시니라. 또한 봉축주(奉祝呪)의「무극신 대도덕 봉천명 봉신교 태극도주 조정산 대운대사 소원성취케 하옵소서」를 「무극신 대도덕 봉천명 봉신교 도문소자 소원성취케 하옵소서」로. 진법주(眞法呪)의「조성상제 하감지위(趙聖上帝 下鑑之位」를「조성옥황상제 하감지위(趙聖玉皇上帝 下鑑之位)」로 변경하셨으며 모든 치성과 공부 시간을 三十분씩 늦추도록 하명(下命)하셨도다.
4장 23절
도주께서 감천동에 태극도장을 건립하셨을 때에는 그 형국(形局)이 감천만(甘川灣)에서 아미동(阿彌洞) 방향으로 배가 들어오는 모양이었으나. 도전께서 청학관(靑鶴館) 백학관(白鶴館)을 새로 건립하시고 진양원(眞養院)을 四층 회관으로 개축(改築)하시자 도장의 형상이 배가 바다로 나가는 모양이 되었도다. 후에 도전께서 이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도다.
5장
5장 1절
병오(丙午)년부터 임원들의 난동(亂動)이 시작 되니라. 도전께서 도주의 유명을 받들어 종통(宗統)을 계승하신 일은 명령전달과 공포사항의 공문을 통해 도인들에게 공지(公知)된 바 있도다. 도주께서 화천하신 후 도전께서 공사를 행하시는 중에 여러 차례에 걸쳐 권능(權能)을 현신하시니 지각 있는 도인들은 도전께서 상제와 도주의 종통을 계승하여 천지공사를 완성하고 후천선경을 개벽할 진인(眞人)이심을 깨닫고 도전을 지극히 공경 하니라. 그러나 일부 임원들은 이 같은 믿음을 배척하고 오히려 비난하였으니. 도전께서 어느 날『도통은 어려운 것이 아니니라. 법방만 알려주면 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강식(降式)날 대강전 영대 원위 닫집 안에 의자를 두고 앉아 계신 일을 두고 이는 상제와 도주에 대한 범상(犯上)이며 배도(背道)라고 말하며 도전께 무례한 언행을 일삼았고 그 중에서도 류철규. 신상철. 윤금현. 김영하. 김해구 등이 더욱 심하였도다.
5장 2절
이들은『도전은 대외적으로 종단을 대표할 뿐. 대내적으로는 도주께서 도통을 주실 분이고 도전은 도통을 받을 분에 불과하므로 종통계승(宗統繼承)은 성립하지 않으며 도전의 신격화는 배도(背道)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며『어떻게 도전께서 마치 도통하신 진인처럼 말할 수 있으며 대강전 영대의 상제와 도주의 진영이 모셔진 닫집 안에 의자를 놓고 앉아 계실 수 있는가』라며 비방(誹謗)을 일삼았도다. 도전께서는 한량없는 덕화로써 이들을 용서하고 포용하고자 하셨으나 난동은 쉽게 수습되지 않았도다.
5장 3절
정미(丁未)년 七월에 들어서부터 류철규. 신상철. 이갑성. 김영하. 김해구 등 포장(布丈). 호장(護丈)들이 도전의 종통계승과 신성성을 부정하고 무례한 행동을 일삼을 뿐 이니라 도전을 배격하는 움직임까지 보이자. 김기태(金基泰). 김영진(金榮珍). 김하정(金夏正). 임문재(任文宰). 이학녕(李學寧) 등이 이들을 찾아가 도전을 배격하는 행위를 즉시 그만 둘 것과 도전에 대한 임원으로서의 예의를 지킬 것을 요구 하니라. 그러자 이들은 오히려 김기태 등의 요구를 빌미삼아 도전께 올라가『도전을 위하는 것 같이 하여 포장. 호장 타도 공작을 하는 자가 있으니 징계해 주십시오. 도전을 따르지 않으면 운수를 받을 수 없다고 하는 난동자가 있으니 파면해 주십시오. 도전의 신격화 또는 인존설(人尊說)에 대한 견해를 밝혀 주십시오.』라는 내용의 건의서를 올리는 등 망동(妄動)을 자행하였도다.
5장 4절
포장. 호장들의 배도행위(背道行爲)가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도전께서 마침내 태극도(太極道)를 이궁(離宮)하시게 되었도다.
5장 5절
무신(戊申)년 六월 二十 四일 상제의 화천치성을 마치신 후 도전께서 태극도장을 나오시어 김기태에게 통지하셨도다. 다음 날 김기태(金基泰). 민병록(閔炳錄). 김하정(金夏正). 김일준(金一俊)이 해운대 부성여관에서 도전을 뵙고『저희들이 비록 미욱하오나 성경신을 다하여 도전을 모시고자 하니 환궁(還宮)하시옵소서』라고 간청하였으나 도전께서는『천의(天意)가 이러하니 어쩔 수 없도다.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말라. 단지 너희들은 도인(道人)들의 동요(動搖)를 막고 도(道)에 욕(辱)이 미치지 않도록 하라. 도에 욕이 미친다면 이것이 바로 덕화손상(德化損傷)이며 배도(背道). 배신(背信)이니라. 설령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인내로써 극복하고 정심(正心) · 정의(正義)로 나아간다면 하늘이 살필 것이며 결국 사필귀정이 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도다.
5장 6절
김기태가 눈물을 흘리며『저희들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도전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바르게 수도한다 한들 누가 알아주겠습니까.』라고 말씀을 올리니. 도전께서『누가 알아주고 안 알아주는 것을 탓해서는 안 되느니라. 덕(德)은 음덕(陰德)이 크니라. 우리 도(道)는 허령(虛靈) · 지각(知覺) · 신명(神明) · 도통(道通)이니 지각(知覺)에서 믿고 나가면 신명판단(神明判斷)이 있을 것이며 나아가서 우리의 소원이 성취될 것이로다. 오직 인내로써 난관을 극복하고 남을 잘 되게 한다는 마음을 굳게 지키고 나아가는 것이 도인(道人)의 본의(本意)이니라』고 말씀하셨도다.
5장 7절
도전께서 김기태를 비롯한 몇몇 임원들에게 도인들의 수습을 맡기시고 전국을 순회(巡廻)하셨도다.
5장 8절
도전께서 부산 해운대를 출발하시어 경주에 잠시 계신 다음 팔공산(八公山) 동화사(桐華寺)에서 며칠을 유(留)하시다 서울로 올라오시어 자하문(紫霞門) 밖 부암동(付巖洞)에 거처를 마련하고 한동안 머무르셨도다.
5장 9절
도전께서 부암동에 계실 때 권봉우(權鳳宇)가 도전을 찾아뵙었도다. 권봉우는 자하문 근처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며 연정원(硏精院)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문도들을 모아 고조선 전래의 민족사상과 정신수련을 가르치고 있던 사람이로다. 그는 일제시대에 중국대륙을 유력하면서 많은 현인(賢人)들을 만났으며 평소 문도들에게『 하느님이 조선 사람에게 천하를 살릴 권한을 주셨으며 앞으로 조선이 후천 오만년을 다스리는 상등국이 될 것이다.』고 가르쳐 왔도다. 그는 도전을 여러 차례 찾아뵈었으며 도전을 뵐 때마다 지극히 공경하며 예를 다하였도다.
5장 10절
도전께서 자하문 밖 부암동에서 머무르시다가 곧 서울을 떠나시어 인천(仁川)에 들르신 후 조치원(鳥致院)에 잠시 머무르셨도다. 금산사(金山寺)에 이르셨도다. 다시 금산사를 떠나신 후 바로 계룡산(鷄龍山)에 가시어 갑사(甲寺)와 신원사(新元寺)를 둘러보시었으며 논산(論山) 관촉사(灌燭寺)를 살펴보고 군산(群山)으로 가시었다가 다시 금산사에 도착하신 후 조치원과 수원을 거쳐 안양(安養) 견불산(見佛山) 수리사(修理寺)에 이르셨도다. 도전께서 수리사에 도착하신 때는 무신년 가을이었도다.
5장 11절
김기태. 김하정. 김영진. 이종식. 이학녕. 등은 도전께서 명하신 바에 따라 지방 도인들을 수습하는 한편 수시로 도전께서 순회하며 공사를 행하시는 곳을 찾아와 시종하였도다.
5장12절
도전께서 수리사(修理寺)에 공부실(工夫室)을 마련하고 사십구일을 한도수로 정하시어 불음불식(不飮不食)과 불면불휴(不眠不休)의 공부를 하셨도다. 이 때 김용수가 시종을 들고 안준순 등이 간헐적으로 모셨도다.
5장 13
전께서 수리사에서 공부하시는 동안 수리사 주지승이 도전의 주문소리를 듣고『과연 도통하신 분의 주성(呪聲)이로다.』하며 도전을 지극히 공대(恭待)하니라. 도전께서 공부를 하시면서 창생과 신명의 원(冤)을 대속하여 해원하시니 이로 인해 큰 고초(苦楚)를 겪으며 괴로워하시니라. 도전께서 공부를 마치신 후『이 공사가 나를 위한 일이었다면 못하였을 것이니라. 오직 창생과 신명을 구하는 일이기에 공부를 마칠 수 있었도다』라고 말씀하셨도다.
5장 14절
전께서 공부를 마치신 후 수리사에 계시면서 도장 터를 알아보시니라. 김기태. 김영진. 안준순 등이 분부를 받고 원지동(院趾洞) 청계산(淸溪山)과 신림동(新林洞) 관악산(冠岳山) 기슭 그리고 아차산(峨嵯山) 부근을 말씀드리니 허락하지 않으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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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백의님 덕분에 몰랐던 내용을 알게되어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계속해서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책을 구해 보려고 노력 했으나 어렵네요 인터넷에 있는걸 퍼왔습니다.
태극도 시절에 기도 시간을 조정하신게 세존님이란 사실을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