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웨이터의 세계
복잡한 식탁 사이로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우주의 천체 같은 웨이터
분업·정교함·속도…
근대가 자랑하는 것 집약
완벽 아니면 파멸 선택
전문성 유지하는 자존심
원하면 늘 기분 좋게 외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밖에서 괜찮은 식사를 할 수 있는 곳, ‘원기를 회복시켜주는(레스토레, restaurer)’ 곳, 바로 레스토랑(restaurant)은 18세기에야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레스토랑은 근대의 산물인 것이다. 우리는 근대를 ‘계획적인 전문적 사업’의 시대로 이해한다. 그러면 근대의 산물로서 레스토랑 역시 이 근대의 전문성을 비추어주는 거울이 아닐까? 특히 매뉴얼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절도를 갖춘 웨이터들은 근대 직업의 상징이다.
레스토랑은 근대의 시계나 공장 톱니바퀴처럼 정확히 돌아간다. 바로 레스토랑이 자랑하는 완벽하게 전문적인 웨이터들 때문이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웨이터들이 톱니바퀴를 돌리는 레스토랑이라는 이 경이로운 천체의 질서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0세기 초의 풍경이다. “틀림없이 그들 중 한 명은 전채 요리를 나르거나 포도주를 바꾸거나, 잔을 더 갖다 놓기 위해 달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특별한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둥근 식탁 사이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경주는 마침내 현기증이 날 정도로 규칙적인 순환 법칙을 산출해 내기에 이르렀다. 수많은 꽃 더미 뒤에 앉아 끝없이 계산에 몰두하던 두 명의 끔찍한 계산대 아가씨들은, 마치 중세 과학에 따라 구상된 천구(天球)에서 때때로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점성학적인 산술로 예측하는 일에 전념하는 구 마법사와도 같았다.”(김희영 역) 웨이터들은 복잡한 식탁들 사이로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천체들이다. 그리고 계산대의 아가씨들은 천체의 오차를 바로잡는 마법사 또는 과학자들처럼 계산하고 손님들에게 계산의 결과를 정확히 알려준다. 분업, 전문성, 규칙성…근대가 자랑하는 모든 것이 레스토랑에 집약되어 있다. ‘수호전’ 같은 고전에도 호걸들이 술집에서 술을 주문하는 수많은 장면이 등장하지만, 이런 과학적이고 정교한 종업원의 동작은 없다. 무엇보다 근대는 눈이 돌아가는 빠른 속도의 세계이다. 프루스트는 경탄하며 쓴다. “음식을 나르는 종업원 몇 명이 쭉 펴 올린 손바닥에 접시를 올려놓고 식탁 사이로 잠시 풀려났다가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마치 접시를 떨어뜨리지 않고 하는 달리기 시합처럼 보였다.”
웨이터의 업무는 반도체나 자율주행 자동차의 기술만큼 전문적이며 그만큼 탄복할 만하다. 호텔과 레스토랑을 다루는 소설들은 놀라운 웨이터들의 증언자들이다.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영국왕을 모셨지’는 호텔 레스토랑 웨이터의 생생한 삶을 유쾌하고도 과장되게 기록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의 소설은 프루스트가 기록한 웨이터의 모습 자체를 더욱 세밀히 관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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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한 웨이터는 경이로울 만큼 전문적인 기술을 보여준다. “사실 아무도 카렐(그 웨이터 이름이다)처럼 그렇게 많은 접시를 들고 갈 생각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는 스무 개나 되는 접시를 한 쟁반에 가지런히 담아 팔을 뻗어 그 쟁반을 손에 얹고 뻗은 팔이 좁은 테이블이라도 되듯 그 위에 접시 여덟 개를 더 올렸다. 거기다가 부채꼴 모양으로 쫙 벌린 손가락에 두 개를 더 얹은 다음 다른 팔로 접시 세 개를 들었다. 거의 곡예 수준의 숫자였다.”(김경옥 역)
이 웨이터는 자신의 직업 자체의 전문성에 몰입하고 있다. 그가 혹시 접시를 떨어뜨리는 실수를 한다면? 그렇다. 한 손님과 부딪치며 그는 접시 두 개를 떨어뜨린다. 그러자 그는 들고 있던 나머지 열 개 모두를 내던져 버린다. 그리고 화를 못 참으며 주방과 레스토랑 자체를 난장판으로 만든다. 모든 유리잔이 들어 있는 큰 찬장을 넘어뜨리려 하고, 세면대를 발로 차고 수도 파이프까지 잡아뗀다. 왜 그럴까? “이 방면의 전문가인 사람은 누구나 그 접시 두 개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자신들도 나머지 접시 열 개를 똑같이 만들어 버릴 거라고 했다. 웨이터에겐 자신을 대표하는 서빙 기술만이 자존심이며 명예이기 때문이었다.” 완벽함이 아니면 파멸이 낫다. 그것이 전문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자존심이다.
웨이터의 전문성이 곡예사의 정교함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정교함은 기술뿐 아니라 우아함으로도 표현된다.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는 러시아 혁명 이후 모스크바의 메트로 폴 호텔에 연금된 채 살아가는 매력적인 귀족의 이야기인데, 1920년대 이 호텔의 고급 레스토랑의 웨이터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자리에 앉으면 손님은 하얀 연미복을 입은 웨이터에게서 나무랄 데 없는 시중을 받을 것이다.…그 여자가 와인 목록을 들고 추천해 달라고 했을 때 그는 적어도 게르만식으로 딱딱하게 1900년산 보르도를 가리키지는 않았다. 그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려진, 조물주가 생명의 불꽃을 보내려는 찰나의 그 손짓을 연상시키는 태도로 집게손가락을 천천히 폈다.”(서창렬 역) 미켈란젤로가 그림으로 메워야 했던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서, 아담에게 닿을 듯 말 듯 우아하게 뻗치고 있는 손가락은 현실 세계에선 누구의 것인가? 하느님의 것인가? 바로 우아한 웨이터의 것이다. 레스토랑의 전문성은 웨이터의 우아함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근대적 직업은 농부나 기사, 사도, 순교자, 신내림 받은 점쟁이 같은 천직이 아니다. 그러므로 직업은 ‘연기(演技)’의 문제이다. 출근과 퇴근은 무대에 오르고 내려오는 시간이며, 모든 말은 대사(臺詞)이다. 무대에서 내려온 뒤에도 연기할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되기에 퇴근 후 전화 호출이나 톡은 금물이다. 이 배역으로서의 직업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바로 웨이터이다.
장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잘 간파하고 있다. “카페의 종업원을 두고 생각해보자.…그는 조금 지나치게 민첩한 걸음으로 손님 앞으로 다가온다. 그는 조금 지나칠 정도로 정중하게 절을 한다.…그는 그 걸음걸이 속에서 어딘지 모르게 로봇과 같은 딱딱하고 빈틈없는 태도를 보이려고 애쓰면서 곡예사같이 경쾌하게 접시를 가져온다. 접시는 끊임없이 불안정하고 균형을 잃은 상태가 되지만, 종업원은 그때마다 팔과 손을 가볍게 움직여서 접시의 균형을 회복한다. 그의 모든 행위가 우리에게는 하나의 놀이처럼 보인다.…그는 카페의 ‘종업원이라는’ 연기를 하고 있다.”(정소성 역)
프루스트, 흐라발, 그리고 지금 읽고 있는 사르트르의 구절까지, 작가들은 마치 베낀 듯이 똑같은 웨이터의 초상화를 그려내고 있다. 절도 있고, 걸음이 빠르고, 예의 바르며, 배려심 깊고, 그러면서도 무심하며 마음을 열지 않는 인물(당연하다, 웨이터가 왜 내게 마음을 열겠는가!). 한마디로 작위적으로 고안된 인물, 하나의 ‘배역’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이 배역과 이 배역을 연기하는 자는 근본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사르트르는 저 웨이터라는 주체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그것으로 ‘있어야’ 함에도 내가 결코 그것으로 있지 않은 것이 바로 이 주체이다.…나는 이 ‘주체로 있음을 연기(演技)할’ 수밖에 없다.…내가 아무리 카페 종업원의 직분을 완수하려고 해도 헛일이다. 나는 배우가 햄릿인 것과 마찬가지로…카페 종업원일 수 있다.” 아니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내가 카페 종업원으로 있는 것은, 즉자존재의 존재 방식으로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내가 그것으로 있지 않은 것으로 있는’ 존재 방식으로 카페 종업원으로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은 그 자체로 웨이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웨이터라는 배역 자체와 일치할 수 없는 한 사람으로서만 웨이터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직업들 자체의 특성이다. 우리가 웨이터다! 우리는 우리와 일치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나쁜 것인가? 오히려 반대이리라.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열정과 더불어 직업 속으로 용해돼 들어가려는 우리 자신을 이성의 끈이 붙잡아 준다. 너의 배역은 네가 아니라고. 배역을 위해 너를 내버리지 말라고. 그러나 아마도 우리에게 불안한 것이 있다면, 평생 이 배역에서 저 배역으로 건너가는 끊임없는 방황을 종결시켜줄 나의 얼굴이란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는 의혹이리라.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 본문 중 언급된 책들
호텔과 레스토랑이 현대적 삶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은 식사 장면을 담은 우리 시대의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본문 중에 언급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흐라발의 ‘영국왕을 모셨지’,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는 레스토랑을 단지 서사의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 삶의 비밀을 드러내는 의미 있는 성찰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사르트르의‘존재와 무’에서 이뤄지는 카페 웨이터에 대한 분석은 인간은 자신이 삶에서 수행하는 역할과 불일치하는 존재라는 것을 밝힌다.
첫댓글 웨이터는 음식을 서빙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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