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애틋한 사연을 간직한 강화도
강화도는 풍요로운 섬이다. 얼마 전까지도 1년 농사를 지으면 3년 먹을 양식이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인삼과 화문석
같은 유명한 특산물이 많거니와 갖가지 해산물 등의 먹을거리도 풍성하다. 그리고 풍광이 아름다운 바닷가, 소나무 숲과 어우러진 운치 있는 마을도 많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한 시간 남짓이면 차를 탄 채로 편하게 오고 가며, 푸짐한 음식을 먹고 소박한 농촌과 바닷가 정경을 구경하고 쉬었다 갈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강화도에는 여느 지역과 다른 무언가가 있다. 우리 민족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그 역할과 책임을 성실히 수행한 슬기와 집념을 느낄 수 있는 역사의 섬이기에…….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아득한 선사시대로부터 오늘날 국토 분단의 현실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겪어 온 영광과 수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 강화도이다.
3천여 년 전에 진지한 자세로 고인돌을 세우던 선사시대 조상들의 목소리도, 7백여 년 전 대제국 몽골에 맞서 싸우려고 북산 아래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던 고려인의 비장한 음성도 들을 수 있다. 고려의 온 국민이 정성을 모아 완성한 팔만대장경 경판을 서문 밖 대장경판당에 봉안하고 모두 함께 감격하던 그날의 분위기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1백40년 전쯤 프랑스 군이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해 가고 궁궐들을 불태우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강화도 주민들의 안타까운 한숨소리도, 며칠 동안만 피난하면 곧 돌아갈 줄 알았던 50년 실향민의 망향가도 들을 수 있는 곳이 강화도이다.
강화만큼 우리 민족이 걸어온 길을 비춰 주는 거울로서의 애틋한 사연을 이야기할 수 있는 지역이 우리 땅 어디에 또 있을까 싶다.
삼랑성 성문을 들어서면서
강화도 하면 전등사가 떠오를 만큼, 전등사는 역사의 섬 강화도를 대표하는 절이다.
전등사는 산성의 성문을 통해서 들어간다. 사다리꼴 돌을 반원형의 무지개 모양으로 쌓아 만든 홍예문이 전등사의 출입문이다. 성문 안쪽 전체가 전등사의 경내이고 일주문이나 사천왕문이 따로 없으니, 산성이 가람을 수호하고 있는 셈이다.
전등사를 감싸 안고 있는 산성은 삼랑성(三郞城)이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오는 성이다. 그 장소의 유구함과 신성함을 말해 주는 상징적 의미로 만족할 수 있기에 역사적 사실 여부를 굳이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전등사에 갈 때 나는 삼랑성의 동문보다는 남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좋아한다. 남문이 이 성의 정문이기도 하거니와, 문을 지나자마자 동쪽 언덕으로 이어지는 산성을 올려다보며 삼랑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돌아올 때는 동문까지 가서 오른쪽 언덕의 산성을 따라 남문으로 내려오는 길을 택한다. 여기서는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 군을 물리칠 당시의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삼랑성은 다듬지 않은 막돌을 맞추어 가며 견고하게 쌓은 방식이 보은의 삼년산성과 비슷하여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 때에 몇 차례 보수공사를 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 영조 때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누각을 만들어 ‘종해루’라 하였다 한다. 지금의 종해루는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서쪽, 북쪽과 동쪽의 세 봉우리가 삼각형으로 벌린 정족산의 능선을 따라 성을 쌓았다. 동남쪽을 향한 계곡에 남문이 있고, 동쪽 능선에 동문이 있다. 북문과 서문은 산 쪽에 있다.
산성 안에 자리한 전등사는 불교 본연의 수행과 교화 외에 나라와 관련한 일도 성실히 하였다. 13세기 강화도읍 시절, 몽골의 압박을 완화해 보고자 이곳 삼랑성에 가궐을 짓고 4개월 동안 대불정오성도량을 베풀 때 전등사가 이 일을 주관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 왕조실록과 왕실계보를 봉안한 정족산 사고(史庫)를 관리하는 막중한 일도 전등사에서 맡았다. 나라에서는 스님 중에 총섭을 임명하고 그 일을 총괄하게 했다.
천상의 세계를 담은 대웅보전의 장엄
삼랑성 남문 종해루(宗海樓)를 지나 들어온 5월의 경내는 온통 푸른빛이다. 거목들 사이로 드문드문 비치는 햇살과 스치는 바람결을 맞으며 녹음 우거진 산길을 올라가면 오른편으로 ‘전등사’라는 편액이 걸린 누각 대조루가 눈에 들어온다.
‘전등사(傳燈寺)’라는 절 이름은 13세기 말 정화 궁주가 옥등(玉燈)을 시주한 이후 붙여진 것이라 전한다. 그런데 정화 궁주는 옥등과 아울러 중국에서 인출해 온 송나라 때의 대장경도 시주하였다. 밤의 어둠을 밝히는 옥등과 세속의 무명을 밝히는 대장경인 법등(法燈)이 모두 등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대조루 밑을 거쳐 마당에 오르면 전등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보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규모는 작지만 매우 단정하여, 조선 후기 건축물을 대표한다 하여도 손색이 없다. 특히 내부의 연꽃 모란 조각이 정교한 불단과 그 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함은 건축 공예의 극치를 이룬다고 하겠다. 천장에는 용과 극락조가 장엄되어 있고, 주변에는 연꽃, 모란 등이 화려하게 양각되어 있다. 천상의 세계를 묘사해 놓은 대웅전 내부의 장엄은 반드시 보고 지나가야 한다.
대웅전 서쪽엔 향로전, 약사전, 명부전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고, 서북쪽 언덕 위쪽에 삼성각이 있다. 삼성각을 지나 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정족산 사고가 나온다. 장사각과 선원보각은 몇 해 전에 복원되었고, 작년에 이를 관리하던 취향당도 새로 지어져 이제 정족산 사고가 모두 복원된 셈이다. 정족산 사고의 문에서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바다 전경은 왕조실록을 관리하던 옛 스님들이 보던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귀중한 것을 지키다
정족산 사고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스님들의 거처인 적묵당 쪽으로 나온다. 대조루 앞에서 동문까지의 오솔길 주변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많다. 소나무와 참나무, 느티나무들이 어울려 깊은 산중에 든 느낌이다.
동문 쪽으로 내려오면 왼편에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있다. 정족산 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지금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사실 양헌수 장군이 이곳에서 프랑스 군을 물리쳐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동문으로 나가지 않고 오른쪽의 낮은 언덕을 오르면 삼랑성을 따라 남문 쪽으로 내려갈 수 있다. 전등사가 산성 안의 사찰이라는 사실도 실감할 수 있고, 프랑스 군과의 전투 장면도 연상해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길로 지나가 보기를 권한다.
섬은 물로 울타리를 친 요새이다. 그 안의 산에 다시 돌로 성을 쌓아 귀중한 것을 지키고 후대에 전했다. 전등사가 그 성안에서 진리의 법등을 지켰고, 나라의 역사 기록을 지켰다.
글
김형우 문학박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관, 인천천광역시 문화재위원·사진
하지권 사진작가
첫댓글 전등사 다녀온지 오래전이라 사진으로 다시보니
고찰 풍광과 글 많은 공부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