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66
12월8일[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사회 교리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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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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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c2s7JYwSk-Y
[인천교구 양성일 시메온(마니산(준본당)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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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보다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 사막 체험은 필수입니다!>
벌써 대림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 서두에는 당대 세상을 주름잡고 있던 사람들의 이름이 쭉 나열되고 있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 로마 황제를 대신해 유다에 파견나와 있던 본시오 빌라도 총독,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그의 동생 필리포스, 대사제 한나스와 가야파...
엄청 대단한 사람들로 여겨지지만, 한 명 한 명 자세히 들여다보면 너 나 할 것 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당시 세상과 종교의 주류 세력으로서 높은 자리에 앉아 세상과 교회를 쥐락펴락하던 권세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은 높은 자리에 앉아서 세상을 주름잡던 명망가들이나 세력가들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생각할수록 하느님은 참 묘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지니고 계신 본질적인 성향이랄까 속성 중에 두드러진 것 하나가 하향성입니다. 끝도 없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은 당시 가장 낮은 곳에 낮은 모습으로 살아가던 세례자 요한에게 내렸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생명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황폐한 광야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늘 깨어있기 위해, 늘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언제나 자신의 촉각을 하느님께로 맞추기 위해 광야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광야는 사실 무지막지한 곳입니다. 극한 체험을 하기에 딱 맞는 곳입니다. 먹을거리, 마실거리, 즐길거리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세찬 모래바람, 끝도 없는 메마름과 무미건조함, 세상과의 철저한 단절과 외로움만이 존재하는...모든 것이 결핍된 장소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그런 사막에서 끝도 없이 자신을 단련시키며 예수님께서 등장하시기만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사막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춰진 상태에서 매일 호의호식하며 부른 배를 두드리다보면, 주님 말씀과는 무관한 삶을 살게 되기 마련입니다.
보다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 사막 체험은 필수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보다 명확히 듣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결핍이 필요합니다.
남아있는 대림 시기, 보다 더 명료하게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우리도 기쁘게 사막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그 사막이 어디인지 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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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n-oiXfOZt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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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광야의 삶을 사는 이가 존경스럽다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만나게 해 주는 길과 같은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메시아를 만나려면 먼저 세례자 요한을 만나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 뇌엔 ‘망상활성계’(RAS, Reticular Activating System)가 있습니다. 망상활성계는 뇌와 외부 자극 간의 필터 역할을 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정보를 선별하고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이바지합니다. 뇌가 우리에게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를 다 처리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주의를 기울일까요? 바로 나의 ‘뜻’입니다. 예를 들어 공항에서 면세점에서 무언가를 사려 집중할 때는 공항 방송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다 시계를 보고 출발시간이 지난 것을 알았을 때는 벌써 몇 분째 자기 이름이 불리고 있었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당신을 보이셨는데, 어떤 이들을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하였고 어떤 이들을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는 마치 망상활성계가 하는 일과 같습니다. 그분에게 집중하고 있는 이들만 보입니다. 그러면 그분의 무엇에 집중하고 있어야 할까요? ‘뜻’입니다.
‘착한 뜻’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신 사랑입니다. 나에게 이웃을 사랑하려는 의지가 조금도 없다면 예수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만약 잘 생기고 예쁘고 돈 많고 인기 많은 아이돌을 죽자 살자 쫓아다니는 아이에게 구유에 뉘어진 예수님이 매력이 있을까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처럼 자발적으로 광야를 산 세례자 요한을 만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현대의 세례자 요한을 주윤발이나 워런 버핏, 일론 머스크, 척 피니와 같은 인물들을 들고 싶습니다. 이들은 인기 있는 세계의 거부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광야에 살았던 세례자 요한과 비교하느냐고요? 먼저 돈에 대해 말해볼까요? 이런 사람들은 모두 돈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고 실제로 재산 대부분을 기부하고 기부할 약속을 한 이들입니다.
그래도 잘 먹지 않았겠느냐고요? 워런 버핏은 오래된 집에서 오래된 자동차로 맥도날드에서 4달러도 안 되는 햄버거로 식사합니다. 일론 머스크는 자기 집도 없이 6천 만 원짜리 조립식 주택에 거주합니다. 그래도 명예를 추구했다고요? 워런 버핏은 나이가 들어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성공한 것이라 말합니다. 척 피니는 자기 전 재산을 기부하면서도 나라에서 조사받기 전까지 그가 기부하는 사람인 줄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존경스럽게 보인다면 착한 뜻이 들어온 것입니다. 착한 뜻은 이웃을 사랑하고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기에 그런 이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착한 뜻을 가지면 자발적으로 광야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많고 쾌락을 찾고 명예나 권력에 집착하면서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만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어디서 만났느냐면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에서 만났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이휘재나 욘사마와 같은 같은 나이 또래의 사람들을 부러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혀 부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그들의 가난하고 절제되고 멸시받는 삶이 부러워졌던 것입니다. 이는 그 책이 저의 시선을 바꿔놓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서 이젠 내가 아니라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삶이 진정한 행복임을 알게 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예수님을 성체에서 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을 때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주일학교 교사 중에 어떤 자매가 수박을 먹는데 빨간 부위가 하나도 없이 갉아먹는 것이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왜 저래? 맛있으라고 먹는 건데 저 흰 부분까지 먹다니. 누가 알아준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 책을 읽는 동안 시선이 바뀌었는데, ‘지금 나는 저렇게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저렇게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 신앙이 우리를 광야로 나가게 하여 참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존재로 변하게 하는 문입니다. 착한 뜻을 가져야 인간이 되신 착한 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발적 광야를 사는 이들을 존경하게 만들어줄 환경에 자신을 먼저 살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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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입니다. 미술 시간에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가져갔습니다. 크레파스는 12색, 24색이 있었습니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이 있습니다. 검은색, 흰색, 연두색, 갈색, 분홍색도 있습니다. 이렇게 모두 색을 중심으로 이름이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유독 피부의 색으로 이름을 부르던 크레파스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살색’ 크레파스입니다. 그 살색은 백인의 피부를 뜻하는 하얀색이 아니었습니다. 그 살색은 흑인의 피부를 뜻하는 검은색이 아니었습니다. 그 살색은 황인의 피부를 뜻하는 누런색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크레파스는 살색 크레파스가 아니라, 누런색 크레파스였습니다. 어린 시절에 저는 크레파스의 색을 통해서도 어쩌면 인종을 차별하는 교육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부터 17년 전입니다. 저는 이탈리아 로마 공항에서 캐나다 토론토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했습니다. 체크인하는 중에 착오가 있었는지 보안요원이 저를 불렀습니다. 저는 5시간 넘게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저의 외모가 범죄 용의자와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지만 이미 시간은 늦었습니다. 저를 조사하는 요원들에게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저의 외모와 피부색 때문에 인종차별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며 인권 주일입니다. 인권 주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모든 인간은 성별, 나이별, 피부의 색으로 차별받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 모두는 소중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슬프게도 인류의 역사는 인권 차별의 역사입니다. 인권 차별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가슴 벅차게도 인류의 역사는 인권 차별을 극복하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쉰들러 리스트’를 제작했습니다. 폴란드에서 사업하던 독일인 쉰들러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로 끌려가야 했던 사람을 보았습니다. 쉰들러는 자기의 재산을 모두 팔아서 죽음의 수용소로 가야 했던 유대인들을 구했습니다. 쉰들러의 선행으로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후손이 매년 쉰들러의 무덤을 찾아 경의를 표한다고 합니다. 뉴저지의 뉴튼 수도원에는 마리너스 수사님의 무덤이 있습니다. 마리너스 수사님은 한국전쟁 당시 화물을 운송하는 선장이었습니다. 흥남 부두에서 화물 선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남쪽으로 피난하려는 피난민을 보았습니다. 선장님은 배에 있던 화물을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태웠습니다. 그렇게 배에 오른 14,000명의 피난민은 성탄절인 12월 25일에 거제도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배에서 4명의 아이가 출생했습니다. 마리너스 선장은 하느님의 섭리를 알았고, 수사가 되어서 평생 뉴튼 수도원에서 지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님도 그 배에 있었습니다. 미국을 방문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마리너스 수사님의 무덤을 참배하였고, 기념식수를 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높은 산은 깎아내고, 골짜기는 메운다.’입니다. 이는 인종, 혈통, 세대, 이념, 사상, 신념, 신분, 종교 때문에 차별과 멸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품성은 사랑이고, 하느님의 모습은 끝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희생과 나눔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것을 이웃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을 닮은 모습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인권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높은 산을 낮게 하고 깊은 골짜기를 메우고 험한 길을 고르게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험한 산과 거친 들판을 건너고서야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었듯이 우리 안에 직면한 문제들을 풀어내고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일도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우리들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출 때 그래서 우리가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아름다운 기도로 남겨 주었습니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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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3,1-6: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오늘 전례는 우리에게 오시는 구세주를 잘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회개이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주시는 구원은 어떤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이웃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마음 자세를 온전히 새롭게 바꾸어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순수성을 되찾는 것 그것이 우리가 모두 필요로 하는 구원이다. 구원에 이르는 첫 단추는 바로 근본적으로 나 자신을 변화하는 것으로 하느님 앞에 회개라고 할 수 있다. 바룩 예언자는 참된 회개는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바룩 5,7) 되게 하는 데 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주님을 맞아들이고 모시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들을 없애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당신 영광 안에서 안전하게”(5,7) 나아갈 수 있다. 하느님 안에 우리가 머무르는 삶이 될 때, 참된 해방을 누리며,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 자체가 이미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보편적인 역사 안에 들어오셨고, 이제 그분이 역사의 중심이며, 역사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하시는 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바로 그리스도의 오심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보편적인 역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6절)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서 주님의 오심에 대비하여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내적 쇄신을 의미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내적 쇄신을 실현하는 성사적 행위를 수행하였다. “그는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3절) 이 세례는 근본적으로 마음의 회개를 불러일으켰고, 그 마음의 회개는 물이라는 상징을 통해 표현되었다. 여기서 물은 인간을 새롭게 하고 깨끗하게 해주며 하느님으로부터의 죄의 용서를 선포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어서 “주의 길을 마련하여라.”(4절)는 것은 주님의 오심을 알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윤리적 차원에서의 큰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분명하다. 낮아져야 할 산들은 바로 복음 첫머리에 말한 티베리우스, 헤로데 그리고 다른 정치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던 이기주의, 특권의식, 권력의 남용 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메워져야 할 골짜기들과 언덕들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불신과 실망과 낙담과 운명론과 체념에 빠져있는 태도를 말한다. 우리의 마음 안에 주님께서 임하실 수 있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비우고 내적으로 모든 면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윤리적인 면에서 항상 새롭고도 신선함을 갖추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영원한 과제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마음에 장애를 가질 수 있는 나약한 인간이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가운데 하느님께서도 우리 안에서 당신이 시작하신 훌륭한 일을 완성하실 수 있다. 이러한 완성은 이렇게 순화된 영적 감각에서 이루어진다. 우리 신앙인은 이 순화된 영적 감각을 통하여 선을 알고 행할 뿐 아니라,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어, 사랑과 정의 안에 계속해서 성장해 갈 수 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립 1,10-11)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여기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날을 두 번(필립 1,6.10)이나 반복하고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그날에 우리는 우리의 성덕과 정의의 결실을 내어놓아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대림은 항상 우리를 깨어있게 하고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옳은 일을 가려서 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 자체로 우리는 이미 구원에 다가서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있는 높은 언덕들인 이기주의나 특권의식 또한 권력의 남용 등, 골짜기들인 실망과 좌절 그리고 우리 사이의 불신 같은 것을 없애는 우리 자신의 내적인 준비와 사랑의 실천이 따라야 할 것이다. 이 대림시기를 지내면서 더욱 우리의 삶을 하느님 안에 살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시간 속에서 가장 옳은 일을 가려서 할 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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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루카 3,4) 사람들이 많은 ‘도시’가 더 효과적일 텐데 하느님께서는 왜 광야를 고르셨을까요? 더욱이 그 말씀을 선포할 사람으로도 사람들에게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본시오 빌라도, 헤로데나 필리포스, 대사제 한나스와 카야파가 아닌, 광야에서 살고 있던 세례자 요한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선택으로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3,6)라는 구약의 예언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구원을 준비하시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해 보이고 아주 비효율적인 방법, 비합리적이고 너무나 미약해 보이는 방법으로 당신께서 계획하신 일을 이루셨습니다. 믿음 없이는 절대로 알아볼 수 없는 방법들을 하느님께서는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3,3)야말로 우리 마음 안에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지며,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하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가장 탁월한 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3,4-5 참조)
고해성사는 우리가 이러한 은총의 길로 들어가게 해 줍니다. 많은 교우가 ‘회개하는 마음’ 없이 그저 ‘판공성사 표’가 나왔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합니다. 회개하는 마음과 함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영혼의 길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대림 시기를 지내며 하느님의 구원을 보는 은총의 주인공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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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는 ‘온 삶’의 변화입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1-6)
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은 서기 27년-28년경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기 시작한 시기는 서기 27년경입니다.> 복음서 저자가 당시의 로마제국 통치자들의 이름과 시기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인간 세상의 역사에 연결시키기 위해서이고, 대사제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연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가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또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인간 세상 안에서 실제로 일어났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또는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셨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아버지의 뜻이 구체적으로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시작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요한에게 내린 것은, 요한이 광야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지내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그에 관해서 1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루카 1,80) 성경에서 광야는 시련의 장소를 상징하기도 하고, 은총의 장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은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내렸다는 말은, 요한이 하느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셨고 뽑으신 사람이었는데(루카 1,12-17), 그를 부르신 때는 그의 나이 서른 살쯤 되었을 때입니다.
인용되어 있는 이사야서에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듣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한 것은 아닙니다. 3절에는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회개를 선포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을 보면, ‘요르단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세례를 베풀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 1,28)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라는 말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회개하라고, 또 회개했다는 표시로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하였다.”라는 뜻입니다.
2) ‘주님의 길’은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길이기도 하고, 내가 주님께 나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는 “회개하여라.”입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는 ‘탐욕’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는 ‘교만’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에 물들어 있는 생활을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즉 하느님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누구든지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메시아의 구원에는 민족, 인종, 신분, 직업, 남녀 등의 차별이 없습니다.
3) 세례자 요한은 뒤의 8절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행동으로(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라는 뜻입니다.(루카 3,11-14) 말로만, 또 생각으로만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회개가 진짜 회개입니다. 그리고 회개한다면 ‘온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변화가 ‘회개의 열매’입니다. 회개는 한 번 한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것도 회개이고, 그 길을 그 상태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평생 끊임없이 계속해야 하는 일입니다.
4)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했고, 자기가 지은 죄를 뉘우쳤습니다.(마태 27,3-5) 그러나 그런 뉘우침은 회개의 시작일 뿐입니다.
죄를 뉘우쳤다면 보속도 해야 하고, 주님에게로 돌아가려는 노력도 해야 합니다. 그런 일들을 모두 합한 것이 회개입니다. 배반자 유다가 자살을 한 것은(마태 27,5) 회개하기를 포기한 것이고, 구원받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자살은 배반보다 더 큰 죄입니다. <스스로 구원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절망하는 것’과 구원받기를 ‘포기하는 것’이 ‘죄 중에 가장 큰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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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문종원 베드로(주교좌 기도 사제) 신부님]
<회개>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고, 오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라고 외칩니다. 공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라고 선포하십니다. '회개하여라.'의 의미는 '삶을 쇄신하라.', '마음과 정신을 완전히 바꾸어라!',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향하라.' 등을 뜻합니다.
'회개'는 방탕한 짓을 그만두고 올바로 행동하라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품행이 단정하고, 행동에 어긋남이 없고, 책임감 있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기도도 많이 하는 바리사이들이 사실은 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와 가장 갈등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엄격주의, 완벽주의, 율법주의, 공로 업적주의, 우월감, 중독증(권력, 명예, 폭력), 상호 의존적 관계, 세심증, 간헐적 폭발 장애(분노조절장애), 편집 증에 사로잡힌 이중인격자들입니다. 이러한 위선자들 때문에 백성은 도탄에 빠졌고, 결국 나라가 망했습니다.
마르코복음에서 사도들은 일면 예수님의 외침을 이해한 것처럼 보입니다.(1,16-20 참조) 그러나 그들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를 잘못 알아들었음을 복음의 후반부에서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그들은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려는 생각에 십자가를 지고 종이 되라는 말씀에 귀를 막았습니다.
바리사이든 제자들이든 모두 진정한 회개, 즉 그들 자신을 분명히 대면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따라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는 공관복음에서 '회개하여라.'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하고 말하자 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공동번역 요한 1,38)
이 같은 회개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여러 방법과 많은 단계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에서 ~으로'라는 패턴(분열된 상태에서 온전함으로, 죄에서 은총으로, 정체 상태에서 새 삶으로의 변화)을 따르는데, 반드시 어떤 것을 '거쳐야만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개 역시 눈이 멀고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하면서 단번에 완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전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들과 우선순위들을 재평가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회개는 윤리 항목 몇 개를 고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을 드러낸다는 것으로, 내재하시는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시켜 한층 더 그분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심리학에 따르면, 이 아이는 본래의 자기(self)입니다. 훌륭하고, 거룩하고, 강하고, 능력 있고, 기쁨이 가득하고, 현명하고, 희망에 차 있고, 그 자체가 선물인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아이는 참된 자기, 내면의 아이, 성스 러운 아이, 경이로운 아이, 지혜로운 아이로도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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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용태 마태오 신부님]
<우선순위>
네 사람이 물에 빠졌다. 대통령, 의사, 본당신부, 대학생이다. 과연 누구를 먼저 구해야 할까? 정답은… 넷 중에서 가장 ‘수영 못하는 사람’이다. 우리 삶에는 ‘우선순위’라는 것이 있다. 한정된 시간, 한정된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챙길 수는 없으니 가장 소중하고 가장 절박한 것부터 먼저 챙기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동등한 존엄성을 지닌다. 따라서 모든 인간의 생명은 다 같이 소중하다. 대통령의 생명이 말단 공무원의 생명보다 더 귀하다고 말할 수 없고, 부자의 생명이 가난한 이의 생명보다 더 값지다고 말할 수 없고, 젊은이의 생명이 노인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 모두에게 소중한 생명을 우리는 다 함께 잘 살아내야 한다. 이는 하느님의 뜻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요한 6,39)
다만 똑같은 생명이라도 각자의 사정과 형편에 따라 그 위급함과 절박함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 똑같이 물에 빠졌어도 수영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그 처지가 달라지듯이, 똑같이 배고프고 똑같이 병에 걸려도 통장 잔고에 따라 그 처지가 달라진다.
그러니 생명의 소중함은 다 같다 하더라도 단 하나도 잃지 않고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해서는 가장 어려운 처지의 가장 절박한 이들부터 먼저 구해야 한다. 과연 착한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마태 18,12) 않는가!
결국 우리 모두의 구원은 이 ‘우선순위’에 우리 모두가 동참할 때 가능해진다. 이는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하느님 구원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서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는 것은 결국 산과 언덕이 깎여 골짜기를 메워줄 때 가능하게 된다.
골짜기에 대한 우선적 선택에 산과 언덕이 동참하는 모습이다. 우리 모두의 구원은 이처럼 가장 절박하고 가장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
물론 빌라도와 헤로데, 한나스와 카야파 못지않은 자들이 다스리는 지금의 이 세상에서 주님의 구원을 선포한다는 것은 우리 또한 세례자 요한처럼 수난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이 시대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여야 하지 않겠는가! 여전히 골짜기는 깊고 산과 언덕은 높기만 한 세상이지만 우리의 정성과 노력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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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유영 스테파노 신부님]
<안녕安寧>
안녕安寧. 안녕하세요. ‘편안할 안’安에 ‘편안할 녕’寧. 무심코 수없이 던졌던 이 말이 ‘나’와 ‘너’의 안녕을 확인하는 가벼우면서도 가볍지 않은, ‘나’와 ‘너’의 만남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소중하고도 아름다운 말임을. 서로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음으로 인한 안도와 감격을 만끽하는 말임을. 지금처럼 앞으로도 안녕할 것을 서로에게 빌어주는 정겨운 말임을.
인권 주일을 맞으니, ‘나’의 안녕, ‘너’의 안녕, ‘공동체’의 안녕, ‘나라’의 안녕, 그리고 ‘세상’의 안녕이 더욱 절실해진다. 인권. 인권을 지키고 보장한다는 건, 남녀노소 모두가 차별 없이 별 탈 없이 ‘안녕’하도록 마음 쓰는 것이며, 혹 어떤 사건이 누군가의 안녕을 방해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안녕’을 방해한다면, 그 원인이 재발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나라 안팎으로 시끄럽다. 밖에서는 전쟁戰爭. 안에서는 정쟁政爭. 그로 인해 안녕 못하게 된 희생자들과 피해자들만 속출한다. ‘안녕’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전쟁 터에서, 건설현장에서, 공장에서, 바다 한가운데서, 군대에서, 길거리에서, 도시 한복판에서, 세상 곳곳에서, 그렇게 누군가는 소중한 존재를 안녕 못한 곳에서 안녕한 곳으로 떠나보낸다.
곳곳에서 인권이 유린되는 걸 바라보면서도, 그래도 다시금 희망한다. 수학여행을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세상(세월호), 길거리에서도 안전하게 놀 수 있는 세상(이태원), 노동자가 부당하게 목숨을 잃지 않아도 되는 세상, 군인의 명예와 진심이 공권력에 실추되지 않는 세상, 사형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세상, 전쟁이 종식되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학생, 노동자, 이주민, 수용자, 전쟁피해자할 것 없는 모든 이가 안녕할 수 있는 그런 세상 말이다.
한 사람의 안녕으로 인해, 국민들의 안녕이 위협받는다면, 그 한 사람의 안녕은 정당하지 못하다. 우리나라가 전체주의 국가라면 한 사람의 안녕을 위해 국민들의 안녕이 희생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 ‘이제는 더 이상’ 한 사람의 안녕을 위해 국민들의 안녕이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국민들의 안녕을 위해 한 사람의 안녕은 ‘이제 안녕!’이어야 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등장하는 한 ‘어른’의 대사가 떠오른다. “편안함[安寧]에 이르렀는가?” 이 물음은 ‘너’를 향한 염려이고, 우리 모두를 향한 염려이며, 세상 온 존재를 향한 염려이다. ‘안녕에 이르렀는가?’ ‘안녕’할 권리가 있는 인간 모두가 지금도 앞으로도 안녕하기를 바라는 간절함과, 안녕 못했던 이들이 이제는 안녕함에 이르길 바라는 염원이 담긴 물음이다.
아기예수님은 안녕한 곳에서 안녕 못한 곳으로 육화 하셨다. 장성하셔서는 안녕의 무덤이었던 십자가를 안녕의 성사聖事로 성화聖化시키셨다. 안녕에 이르기를 갈망하는 ‘나’에게 당신 이부자리를 내어주시고, 안녕 못함에 허덕이는 이들에게는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안녕(평화)을 선사하신다. 곧 오실 아기 예수님에게 말을 건넨다. “아기예수님, 안녕!” 이에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안녕安寧이 너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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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3,6)
수도원에서만 생활하다가 1997년 12월 제가 제주 표선 본당신부로 파견되어 떠날 때, 어느 수녀님이 축하한다는 인사와 함께 보내준 시가 바로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라는 시였습니다. 매번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길이 되는 사람, 그렇습니다. 저도 그 길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래서 늘 새로운 곳, 안성에서 요양병원의 원목 신부로, 베트남에선 선교사로, 또다시 안성에서 요양병원의 원목 신부로 살면서 새 길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지나 다른 환경 속에 살면서도, 저는 가끔 예전의 습관처럼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경향이 되살아나고 있는 저를 봅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결심하고 사는데도 때론 ‘나떼’를 말하는 제 모습을 반성할 때가 많습니다.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님에도, 선택의 가능성이 다양하게 열린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제 생각이나 느낌을 강하게 내세워 말하고 있는 저 자신을 보았습니다. 봄길이 되는 사람은 모든 것이 얼어붙고 닫힌 차가운 시선이 아니라 스스로가 봄의 따뜻함과 포근함처럼 모든 가능성을 믿고 마음을 열고 단지, 사랑으로 묵묵히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겠지요.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요한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되는 사람이었고,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었던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봄길이 되어 외치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가 천둥 벼락처럼 제 마음속에 울립니다.
오시는 주님을 그리움으로 깨어 기다리는 우리에게 오늘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통해 예수님의 구원에 동참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오실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은 하느님께 돌아섬, 곧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한 회개로 시작합니다. 히브리어에서 본디 돌아섬을 뜻하는 회개 는 결국 인간이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의 모습으로,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회개는 단지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이며 생명이신 하느님을 향해 온 존재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우리의 길이 아닌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3,4) 하고 외칩니다. 광야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비록 천둥 벼락처럼 큰 소리인데, 판단과 단죄의 목소리가 아닌 사랑어린 위로요 격려의 부드러운 울림입니다. 다시금 그의 메시지를 희망으로 들어봅시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3,4-6)
그런데 복음에서 말하는 주님의 길을 마련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길이란 본디 두 곳을 연결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길이란 나와 주님 사이에 뚫려있는 길,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고 내가 주님께로 가는 길일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의 길을 새로 내라고 하시지 않고, 이미 길은 나 있으니 그 길을 닦으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려는데 가로막는 것들을 치우라는 말씀이겠고, 다른 한 편은 우리가 주님께 돌아가려는데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것을 제거하라는 초대로 들립니다.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낮게 하고, 굽은 길은 곧게 하고, 거친 길을 평탄하게 하라는 말씀을 어느 영성가는, 이 말씀을 우리 내면의 상태와 비교해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곧 골짜기는 인간관계에서 상처로 인해 깊숙이 패인 마음은 아닌지, 산과 언덕은 끝닿은 줄 모르고 높이 솟은 교만한 마음은 아닌지, 굽은 길은 말을 왜곡되게 받아들이는 비뚤어진 마음은 아닌지, 거친 길은 주변에 개의치 않고 앞만 보고 내달리는 고집스러운 마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자신의 상처 받은 마음, 교만한 마음, 비뚤어진 마음, 완고한 마음을 메우고 낮게 하고 곧아지게 하고 평탄하게 만들어야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 필리피 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1,9-11) 기도는 사랑의 소통이며 사랑의 앎입니다. 사랑인 하느님과 소통함으로써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깨닫게 되고, 이 사랑을 통해 우리가 누구임을 깨닫게 되며,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좋은 일을 시작하신 하느님 안에서 영광과 찬양을 드리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 앞에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서게 이끌어 줍니다. 사실 주님의 구원을 알리는 표지로 소개하고 있는 이미지들, 말하자면 높고 낮음, 굽고 곧음, 거칠고 평탄함은 그 길의 상태 자체만으로도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우리를 더 불편하게 하는 것은 그 이미지가 던지는 심리적이고 영성적인 무시나 차별로 겪게 되는 부당함입니다. 즉 일상에서 개개인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훼손당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모두 깊이 상심하고 때로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당하고 훼손당하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고서도 관심을 쏟지 않거나, 외면하고 살아간다면 이는 우리네 삶을 더 불편하게 하고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도록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몸소 그 길을 마련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젠 말이 아니라 주님처럼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이 되어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교회는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정해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의 회개를 실현하는 길은 인권에 대한 우리 인식의 전환과 실천에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사목헌장 27항」엔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들어보십시오. 『온갖 살인, 집단 학살, 낙태, 안락사, 고의적인 자살과 같이 생명 자체를 거스르는 모든 행위: 지체의 상해, 육체와 정신을 해치는 고문, 심리적 억압과 같이 인간의 온전함에 폭력을 자행하는 모든 행위: 인간 이하의 생활 조건, 불법 감금, 추방, 노예화, 매매춘, 부녀자와 연소자의 인신매매와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 또한 노동자들이 자유와 책임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이윤 추구의 단순한 도구로 취급당하는 굴욕적인 노동 조건: 이 모든 행위와 이 같은 다른 행위들은 참으로 치욕이다. 이는 인간 문명을 부패시키는 한편, 불의를 당하는 사람보다도 그러한 불의를 자행하는 자들을 더 더럽히며, 창조주의 영예를 극도로 모욕하는 것이다.』
끝으로 일본의 미쓰하라 유리라는 분이 쓴 시 「길을 만든 사람들」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맨 처음 길을 걸은 사람 훌륭해 험한 길 처음으로 걸은 사람 이름을 외울 가치가 있을 만큼 훌륭해 그 오롯한 자세 정말 아름다워 허나 그 뒤 이어 이름 따위 안 남을 줄 알면서도 꾸준히 길을 밟아 다지며 걸어간 이들의 소박한 걸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워.』 대림 둘째 주간은 우리보다 앞서 봄길이 되어 걸었던 세례자 요한처럼은 아니더라도 우리도 이름 따위 안 남을 줄 알면서도 꾸준히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 길을 걸으면서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되어 주님을 닮아가는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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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대림 제2주일의 복음말씀은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그 배경이 되는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사실들을 꽤나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루카 복음사가가 지닌 특징이기도 하지요. 그 당시는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가 즉위하여 통치를 시작한 지 15년째 되는 해였고, 본시오 빌라도라는 인물이 총독으로 임명되어 유다지역을 관리 감독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주요 고을을 다스리던 영주가 누구였으며, 예루살렘 대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를 관장하던 대사제는 누구였는지 구체적인 이름들을 밝히고 있지요. 그렇게 하는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활동하신 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신기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분명한 ‘현실’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겁니다. 한 가지 의외인 점은 이 세상의 구원과 직결되는 중요한 ‘하느님 말씀’이 예루살렘에 있는 대사제나 율법학자가 아니라 먼 광야에서 은수생활을 하던 요한에게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다른 이들은 다 제쳐두고 요한에게만 말씀하셨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동안 여러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가지 방식으로 수 없이 당신의 구원계획을 말씀하셨지만, 재물과 권력에 대한 욕망에 휘둘려 세상 것들에만 귀를 기울인 이들에게는 그분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에 비해 요한은 세상과 떨어진 ‘외딴 곳’에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깊이 머무르며 그분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기에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을 받은 요한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소명을 시작합니다. 그에게 맡겨진 소명은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일이었지요. 당시 팔레스티나 지역에서는 여러 형태의 ‘세례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율법만 지나치게 강조하며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성전에서 행해지는 속죄예식을 사유화, 물질화하여 돈이 없어 그 예식을 치르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을 깊은 절망 속으로 몰아넣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반발하여, 물로 몸을 씻는 예식 만으로 자기 죄를 씻을 수 있다는 의식운동이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요한이 전개한 세례 운동에는 그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점이 있습니다. 즉 요한은 물로 죄를 씻는 세례는 일생에 한 번만 받을 수 있으며, 그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지요. 요한이 강조한 ‘회개’란 욕심에 눈 멀고 나태함에 안일해져 잘못된 길을 걷던 것을 중단하고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완전히 돌리는 일입니다. 그전까지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그분과 상관 없는 사람처럼 살았지만, 이제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생각하며 전적으로 그분 뜻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다시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 신앙인답게 살기 위해 끊임없이, 꾸준히 노력하는 일입니다.
요한이 그처럼 회개를 강조한 것은 그것이 우리 구원에 직결되는, 가장 중요하고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주님과 사랑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구원의 길’은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길이기도 하고, 내가 주님께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일단 내가 주님께 나아가는 ‘큰 길’은 하느님께서 친히 준비해두셨습니다. 이 점에 대해 오늘 제1독서인 바룩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 영광 안에서 안전하게 나아가도록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되라고 명령하셨다.” 즉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품으로 돌아가는 그 길의 중간에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도록, 당신 손으로 고통의 산과 시련의 언덕을 낮추시고 슬픔의 골짜기를 메워 평평하게만들어 주셨다는 겁니다. 모두에게 당신 나라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신 것이지요. 그렇기에 우리도 주님께서 나에게 오실 ‘작은 길’을 닦아야 합니다. 그 작은 길은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 가운데에 계십니다. 그리고 내 마음의 문 밖에 서서 내가 그 문을 열어드릴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빨리 나를 구원으로, 참된 행복으로 이끌고 싶지만 나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기에 기다려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분께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드릴 수 있을까요?
그 방법에 대해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합니다. 첫째, 골짜기를 메우라고 합니다. 나와 이웃 사이에 생각이 달라서, 입장이 달라서, 제대로 모르고 오해해서 감정의 골이 생겼다면 그것을 이해와 용서로 메우라는 겁니다. 누구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입니다. 남들보다 뛰어난 게 있는만큼 부족한 부분도 있지요. 그러니 남의 부족함과 허물, 실수와 잘못을 비난하고 단죄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며 ‘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어가주는 넓은 아량이 필요합니다. 또한 나와 ‘다른’ 이를 ‘틀리다’고 배척하지 말고 서로의 다름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며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산과 언덕들을 깎아 낮추라고 합니다.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 군림하고 싶은 욕망을, 나 자신을 멋져보이게, 있어보이게 꾸며 주목과 인정을 받고 싶은 교만을 경계하며, 늘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낮추라는 뜻입니다. 참 하느님이시면서도 사람이 되시어 자신을 낮추시고, 제자들 앞에서 종처럼 자신을 더 낮추시어 발까지 씻겨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작고 약한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무시하거나 우습게 여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여 사랑으로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종말의 날에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구원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굽은 데는 곧게 만들라고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마음 먹은대로 세상을 보는 법입니다. 내 마음이 고집과 편견, 시기와 질투로 굽어져 있으면 내 눈에 비친 모든 사람과 세상도 다 굽어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를 보고 ‘넌 왜 마음이 굽어있느냐’며 지적하기 전에, 그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굽어 있지는 않은지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모습을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 안에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나의 부족함과 약함, 실수와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것들이 다른 이에게 피해나 상처를 입혔다면 ‘내가 잘못했다’며 먼저 손 내밀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넷째, 거친 길은 평탄하게 만들라고 합니다. 너와 나의 마음이 통할 길을 만드는 것은 ‘말’입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지만, 말 한 마디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내 마음 내키는대로, 분노라는 감정에 휘둘려 거친 말들을 함부로 쏟아내지 말고,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어떤 뜻으로 받아들여질 지를 그의 입장 상황 마음을 충분히 헤아린 다음 조심하고 배려해가며 부드럽게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 상처를 주고 받을 일이 없습니다. 상대방을 내 안에 받아들여 사랑으로 참된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성탄과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가 해야 할 마음의 준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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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금 제 나이는 오십 대 중반입니다. 문득 마흔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처음으로 본당신부로 나가서 재미있고 기쁘게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또 빠다킹 신부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렸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사제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마흔에 아이를 여섯이나 둔 아빠였다면 어떠했을까요? 교회 안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을까요? 또 사회생활 역시 그렇게 재미있게 살기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자녀들을 부족함 없이 키우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교육비가 얼마나 비싸고, 들어가는 생활비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부족함이 많은 저로서는 아이 여섯과 함께 잘 살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를 성공적으로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제 부모님이십니다. 전혀 쉽지 않은 삶을 사셨을 것입니다.
이런 부모님을 잘 모셔야 할 텐데, 이제는 기도로만 못다 한 효도를 대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분 모두 하느님 나라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 제일 후회가 되는 것은 부모님 말씀을 잘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듣지 않고 오히려 반대하면서 제 할 말만 했던 기억이 제일 큰 후회가 됩니다. 어쩌면 잘 듣는 것이 가장 큰 효도가 아닐까요?
하느님께 충실한 자녀의 삶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임을 깨닫습니다.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효도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하느님 말씀에 곧바로 “그렇게 어떻게 살아요? 나는 싫어요!!”라면서 화를 낸다면 어떨까요? 효심 가득한 자녀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대림 제2주일인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을 실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풍요롭고 화려한 세상을 등져야만 했습니다. 광야에서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산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리고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 꿀 뿐이었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이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셨다’라는 뜻인데, 그 모습을 보고서 과연 은총을 받은 사람처럼 보일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던 세례자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구원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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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님의 길입니다>
루카 3,1-6 (세례자 요한의 설교)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우리는 님의 길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4-6)
우리는
님의 길입니다
우리는
길이신 님을 맞는
님의 길입니다
모든 것 집어삼키는
게걸들린 골짜기를
비움과 베풂으로
메우는 우리는
길이신 님을 맞는
님의 길입니다
사람들을 가르는
날선 산과 언덕을
너그러움과 품음으로
낮추는 우리는
길이신 님을 맞는
님의 길입니다
불의한 미친 짓들에
뒤틀려진 굽은 데를
흐트러짐 없는 의로움으로
곧게 하는 우리는
길이신 님을 맞는
님의 길입니다
미움과 거짓으로
죽임 가득한 거친 길을
사랑과 진리의 살림으로
평탄하게 하는 우리는
길이신 님을 맞는
님의 길입니다
우리는
길이신 님을 맞는
님의 길입니다
우리는
님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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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를 기다리고 계신 하느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대림 제2주일입니다. 대림 초 두개에 불이 당겨졌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 만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주님의 빛이 환히 비춰지길 희망하며 기쁨의 성탄으로 한 발 더 내딛기를 빕니다.
피아노 조율은 언제 해야 합니까? 피아노 조율은 ‘연주가 끝난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연주 앞에서 조율’을 합니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렇게나 산 다음에 후회하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삶을 조율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데 함부로 헛되이 삽니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여정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한다는 것은 바로 나를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신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상적인 마음가짐에서 하늘을 향한 마음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는데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였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들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보리라” 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곧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보를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삶의 양식을 바꾸고 하느님께로 향한다는 것은 분명 광야에 길을 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마음 보따리를 바꾼다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일이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단호한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남의 잘못은 잘 보지만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는 연약함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결국 돌이킬 마음도 없게 됩니다. 사실 고해성사를 자주 보지 않는 사람은 고백할 것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며 외모를 단장하듯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비춰봐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영혼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한번 살펴보십시오. 우리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골이 나 있는 것은 없는지? 혹 골이 있다면 그 골을 메워야 합니다. 서로의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좋은 점과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와 다른 그를 ‘나와 틀리다’ 고 단죄하며 거리를 둘 것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골짜기는 메워져야 합니다. 산과 언덕들도 낮아져야 합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 교만함이 있었다면 겸손함으로 낮아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내려오신 그 마음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던 그 모습으로, 간음한 여인의 처지로 내려가서 허리를 굽혀 땅 바닥에 무엇인가 쓰시던 그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굽은 데는 곧아져야 합니다. 마음이 굽으면 모든 사람과 사물이 다 굽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굽으면 모든 사람과 사물이 다 굽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굽은 마음을 곧게 해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의 마음으로 보면 증오와 저주를 낳게 되고 영혼이 망가집니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고, 인정해 주는 올곧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거친 길은 평탄케 해야 합니다. 거친 마음은 상처만 남깁니다. 남이야 손해를 보든 말든 나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화는 불입니다.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할 수도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이규경) 잘못된 열심은 영혼에 상처만 남긴다고 했습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기대로 화를 키워서는 안 되겠습니다.
시리아의 이사악 성인은 “죄인이든 의인이든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회심하는 이들을 가장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돌이키는 일은 한두 번에 끝날 일이 아닙니다. 매일이 마음을 돌이키는 회개의 때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 10,22)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죄가 드러날 때 고백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자백입니다. 회개는 자발적인 것입니다. 아무도 내 죄를 알지 못하고 추궁하지 않는데도 하느님 앞에 부끄러워 고백하는 것입니다.
2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리피 1,10-11) 하고 권고합니다. 따라서 하루하루가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나무랄 데 없는 축복의 날 되길 희망하며 ‘내가 바라는 하느님’을 기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로 거듭날 수 있는 한 주간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준비를 갖추고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일까?’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를 생각하며 아기 예수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회개의 핵심은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잘못했다고 발만 동동 구르고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전과는 다른 삶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회개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회개는 한없이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다시 발견하는 데서 얻어지는 결실입니다. 자비의 하느님! 너그러우신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끊임없는 회개의 원천입니다.”(요한바오로 2세) “회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내가 그분을 알기 전부터 나를 사랑하셨고 용서해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삶의 추구로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지나치게 세상과 땅만 바라보지 않고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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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이제 우리는 대림 2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대림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이미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에 대한 갈망과 희망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희망을 품고 그분이 오시길 노래한다. ‘김지하’ 시인은 아프고 어두웠던 암흑의 군사독재 시절에 그 간절함을 이렇게 노래했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메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금관의 예수)
오늘 말씀전례에서, <제1독서>와 <제2독서>와 <복음>은 같은 메시지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 바룩 예언자는 아주 특별한 사건을 전해줍니다. 여기에서, 예루살렘을 자녀를 잃은 ‘과부’로 비유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과 아름다움을 입어라.”(바룩 5,1)고 기쁨이 선포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당신 영광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바룩 5,9)고 말합니다.
<제2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 신자들을 위해 드리는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리 1,10-11)라고 기도합니다.
<복음>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6)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보기 위해, 우리는 지금 세례자 요한과 함께 ‘광야’에 나와 있습니다. 사실, ‘광야’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기에,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자신을 마주해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방이 트여 있어서, 어디 하나 숨을 데가 없으니 벌거벗고 자신의 실상을 낱낱이 확인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우리 공동체가 바로 ‘광야’입니다. 제 실상을 낱낱이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는 항상 고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과 부재를 동시에 체험하기도 합니다.
사실, 홀로 있을 때보다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가 훨씬 고독할 때가 많습니다. 홀로 있을 때는 자신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 되고,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는 서로 다름과 차이로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께 있을 때가 더 괴롭고 힘들고 고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이 ‘광야’로 불러내시어 사랑을 속삭여주십니다.
그러기에, 공동체가 바로 하느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사막이요, 동시에 하느님께서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시는 사막입니다. 곧 공동체가 저를 불러내어 사랑을 속삭여주는 아름다운 저의 광야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가정이 광야요, 본당이 광야요, 직장이 광야요, 이 세상이 광야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듣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4-6)
요한은 자신이 단지 ‘미리 주님의 길을 닦는 이’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루카 3,3)
이를 <마르코> 복음사가는 병행구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마르 1,4)
그는 용서를 선포하였지만, 결코 자신이 죄를 용서할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죄의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기까지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단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준비를 시켰을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사명을 지니셨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곧 ‘사명의 차이’뿐만 아니라, ‘신원의 차이’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은 “용서를 위한 회개”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그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서의 회개’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한 회개는 하늘나라가 선물로 주어졌기에 그에 합당한 응답인 ‘결과로서의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위한 회개”가 아니라, “용서를 받았기에 하는 회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회개했기에 하늘나라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기에 그에 합당한 삶으로서의 회개인 것입니다. 곧 우리의 회개가 먼저가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가 먼저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이미 용서와 은총을 입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용서하고, 그 은총을 나누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니 오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을 보내면서,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알아보고, 신뢰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감사의 응답으로 진정한 회개로 성탄을 기다리고 맞이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그 뜨거운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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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루카 3,5)
주님!
사방이 탁 트여 어디 하나 숨을 곳이 없는 곳,
발가벗겨진 광야로 불러내어 제 실상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어
제 안의 굽은 곳, 거친 길을 새롭게 하소서.
오늘도 제 마음의 광야에
숨어계시는 현존으로 속삭이는 사랑의 노래를 듣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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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길을 마련합시다>
- “기도, 기쁨, 회개” -
“주께서 과연 우리에게 큰 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못 견디게 기뻐했나이다.”(시편 126,3)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이 대림의 기쁨을 샘솟게 합니다. 주님 탄생을 앞둔 대림시기 또한 하느님의 크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영롱하게 빛나는 대림촛불 둘이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의 기쁨을 표현합니다. 어떻게 주님을 기다려야 하겠는지요? 바로 주님께서 오시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 세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마냥 기다릴뿐 아니라 주님의 길을 마련하기 위한 구체적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결같은, 끊임없는 실천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곧게 낼 수 있는 지 그 방법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기도입니다.
늘 기도하십시오. 성탄을 앞둔 대림시기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데 우선적인 일이 기도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기도는 한결같아야 하고 끊임없어야 합니다. 기도는 간절하고 항구해야 합니다.
기도 역시 훈련입니다. 부단한 기도의 훈련으로 기도를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삶이 기도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기도의 모범입니다. 사도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형제 여러분, 나는 기도할 때 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누군가 우리를 위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자신은 물론 이웃을 위해 언제나 기도해야 합니다. 영혼 건강, 정신 건강에 기도가 제일입니다. 희망을 잃고, 꿈을 잃고, 길을 잃을 때 정신은 방황하게 되고 병들기 마련입니다. 우리 마음이 희망을 북돋아 주고 꿈을 심어주고 주님의 길을 밝혀주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기도를 통한 영혼을 튼튼히 하는 예방이 처방보다 백배 낫습니다. 무엇보다 기도할 때 좋은 분별력을 지니게 됩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가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은혜가, 기도의 열매가 얼마나 깊고 아름답고 풍요로운지요. 바오로처럼 기도하면 우리도 정화되고 성화되어, 이런 좋은 분별력에 온갖 영적부요의 찬양과 감사의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대림시기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데 우선적인 일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둘째, 기쁨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기도할 때 기쁨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희망에서 샘솟는 기쁨이요 감사입니다. 희망과 기쁨, 감사보다 정신 건강, 영혼 건강에 좋은 것은 없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의 특징입니다. 주님을 희망하며 기다리기에 기쁨입니다. 오늘 바룩서는 온통 기뻐하라는 권고로 가득합니다. 대림시기에 참 알맞는 자세입니다.
“예루살렘아, 슬픔과 재앙의 옷을 벗어 버리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입어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의 겉옷을 걸치고, 영원히 영광스러운 관을 네 머리에 써라. 하느님께서 의로운 평화, 거룩한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너를 부르실 것이다.”
얼마나 존엄한 아름다운 품위의 삶인지요! 바로 우리 하나하나가 예루살렘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대림시기 은총을 상징합니다. 슬픔과 절망, 재앙과 불행, 온갖 사악한 옷을 벗어버리고 주님 영광과 의로움의 옷으로, 희망과 기쁨, 감사의 옷으로 바꿔입는 미사시간입니다. 이어 눈을 들고 시야를 넓혀 대림시기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라는 권고입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높은 곳에 서서, 동쪽으로 눈을 돌려 보아라.”
셋째, 회개입니다.
회개 은총의 열매가 겸손과 순수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회개만으로는, 기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반드시 행동의 실천이 되따라야 합니다. 회개의 실천이 회개의 진정성을 보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인용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바로 회개의 실천에 해당됩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얼마나 멋진 회개의 실천을 상징하는 지요! 개인 회개도 좋지만 공동체적 회개는 더 좋습니다. 불평등의 골짜기는 모두 메워져 공정과 정의로 공평해질 때, 크고 작은 교만과 허영은 겸손과 진실로 낮아질 때, 굽은 마음은 곧아져 정의로워지고 거친 분노는 평온해질 때, 바로 하느님의 구원이 환히 드러날 것이며 모든 이가 이런 구원을 볼 것입니다. 오늘 인권주일에 최상, 최선의 응답이 이런 회개의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의 실천에 따른 하느님의 구원의 응답입니다. 바룩 예언자는 회개의 실천과 더불어 구원의 아름다운 장면을 감동깊게 묘사합니다. 이스라엘 역시 모두 믿는 이들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의 명령으로 숲들도 온갖 향기로운 나무도, 이스라엘에게 그늘을 드리우리라.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당신 영광의 빛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희망, 대림의 기쁨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길을 마련해야 합니다. 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실천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이때 모두가 하느님의 구원을 볼 것입니다. 대림시기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단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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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실 길을 같이 마련하는>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오늘 대림 제2주일에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는데 그 길을 마련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서 주님께서 길이 없어 못 오시나, 길을 내지 못해서 못 오시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실 주님께서 오시는 길은 주님께서 내실 것입니다. 이 말은 주님의 길을 우리가 내기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겸손의 차원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주님의 길을 낼 수 있단 말입니까? ‘주님, 주님께서 오시는 길은 제가 내겠습니다.’라고 감히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는 말은 어떤 뜻이겠습니까?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오시는 길은 주님께서 마련하시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길은 내가 마련하고, 우리에게 오시는 길은 우리가 마련해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먼저 나에게 오시는 길을 마련하는 것에 대해 보겠습니다.
이 주제를 묵상하면서 마련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 뭔지 생각해봤습니다. 마련의 제일 적극적인 반대는 거부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오는 것을 거부한다면 마련하기는커녕 길에 바리케이드를 치거나 문을 닫아걸거나 하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이유는 주님이 내게 오시는 것이 나를 파괴하거나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에 더러운 영들이 주로 보인 태도이고, 현대적으로 적용하면 Privacy 고수 태도입니다.
더러운 영은 주님께서 게라사라는 자기 영역에 들어오는 것이 싫어서 게라사 마을 입구에서 주님을 막고서는 나를 괴롭히려고 오셨냐고 따지고, 떠나달라고 애걸하는데 통하지 않자 돼지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합니다.
다음은 무관심입니다. 예를 들어 신앙이 없는 사람은 주님이 오시건 말건 상관없고 그래서 무관심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을 사랑하고 더 정확히 말하면 세속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셨고 세상 모든 이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과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는 무관심한 사람, 이 세상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을 일컬어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이라고 하는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하느님 나라보다 이 세상일에 관심이 더 많고 근심 걱정도 많습니다.
요즘 같으면 우리나라 돌아가는 것 때문에 대림절은 저리 밀려난 실정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오히려 주님을 놓치지 않도록 집중해야겠지요.
다음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것에 대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단독 세대라면 나에게 오시는 주님만 맞이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가족과 같이 살거나 공동체로 생활한다면 같이 맞이해야겠지요.
이 대림절에 이런 의식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혼자서 주님을 맞이하지 않는 다시 말해서 혼자서 대림절을 보내지 않고, 공동체가 같이 주님을 맞이하고 대림절을 보내려는 의식과 노력 말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 혼자 기도하고 같이 기도하지 않는 집이 많고 자녀들과 같이 기도하지 않는 가정은 더 많습니다.
나 외에 가족이 신자가 아니거나 갈등이 많아 같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데 다 신자인데도 같이 해야겠다는 의식이 없고 그래서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문제이겠지요.
대림절 초를 마련하여 그 불을 하나하나 밝히며 주님 오심을 같이 깨어 기다리고 준비하며 기도하는 우리 집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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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3,6)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오늘 복음(루카3,1-6)은 '세례자 요한의 설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 오늘 복음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3,4ㄴ-6)
'대림 제2주일'인 오늘은 '인권주일'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림 제2주간'은 '사회교리주간'입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 회복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는 날'이고, '보다 더 복음을 실천하는 주간'입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신성한 존재(Imago Dei)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중한 인권이 돈과 전쟁과 폭력 등으로 짓밟히고 있습니다.
'인권 침해의 주범'은 대체적으로 '경제적으로나 권력과 명예로나 높은 자리에 있는 힘 있는 이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침해합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계엄을 선포하고 우리나라의 진정한 주인인 선량한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드리댄 것은 매우 심각한 인권 침해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되지 않는 '공정과 정의와 상식의 나라'입니다. '법과 경제와 교육 등에서 공정과 정의와 상식이 살아있는 나라', 그래서 '모두가 함께 구원으로 나아가는 공동선이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우리나라가 그런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교리'는 '공동선의 실현을 위한 하느님의 가르침이요, 교회의 가르침'이며, '삶의 자리에서 보다 더 복음을 살자는 외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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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루카 3, 4)
시린 손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추운
시간입니다.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는 것이
가톨릭의
인권이며
사회 교리의
분명한
실천입니다.
구체적인
현실의
골짜기에서
다시 시작하는
복음의
길입니다.
복음의 길은
뼈저리게
회개해야 할
우리의
길입니다.
회개의 길은
인권의 길이며
인권의 길은
사람다운
사람의
소중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권을
소생시키시는
인권의
하느님이십니다.
이웃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곧 하느님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입니다.
하느님의
살아있는
목소리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는
우리를
꾸짖습니다.
이 대림시기가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불
실천의 불이
필요합니다.
모순과 거짓의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권력자의 교만은
낮아지고
비겁한 데는
곧아지고
마음을 돌이켜
실천으로
평탄하여 지길
기도드립니다.
실천의
길은 갈고
닦아야
빛납니다.
복음의 길은
하느님의 길이며
인권을 훼손하지
않는
구원입니다.
모두가 행복한
삶을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묻고 답하는
대림 제2주일의
시린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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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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