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보십시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5,9-12
9 형제 여러분,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심판받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
10 형제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11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관하여 들었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시고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12 나의 형제 여러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그 밖의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십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1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다.
2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6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지난 부활 성야에 세례식이 있었습니다. 세례 대상자 중에 사회에서 혼인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관면혼배’가 필요하여서. 먼저 관면혼배를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본당 신부가 관면혼배를 할 수 있도록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미국에서도 당연히 그런 줄 알았습니다. 혼인성사를 담당하는 부제님이 절차상 문제가 있다고 의견을 주었습니다. 한국은 선교지역이기에 관면혼배의 권한이 본당 신부에게 주어졌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오는 신부님이 미국의 사정을 잘 모르고 관면혼배를 줄 때가 있는데 그렇게 하면 절차상의 문제가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모두 세례를 받은 신자이고, 댈러스 교구 소속인 경우에만, 본당 신부가 혼배성사를 집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먼저 교구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혼인무효도 절차가 까다롭고,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교포 사목 본당에서 혼인무효 절차를 하려면 한국의 교회법원에 문의하는 것이 더 빠르고, 쉽게 해결된다고 합니다.
교우들과 면담하면서 ‘혼인장애’로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부부의 인연이 끊어진 분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괴롭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싶지만, 주변의 시선이 부담되기도 합니다. 인연을 만나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지만, 교회의 법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교황님께서도 그런 분들이 공동체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사목적인 관심과 돌봄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국가에는 ‘사면’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운전면허가 취소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서는 꼭 운전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용되면 안 되겠지만 국가에서 ‘사면’을 통해서 다시 운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피선거권이 박탈된 사람에게도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성서에도 ‘희년’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희년에는 빚을 탕감해 주기도 합니다. “약자는 속박으로부터, 강자는 탐욕으로부터 해방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성경 속 희년의 의미입니다. 2023년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혼인은 19만 4천 건이고, 이혼은 9만 2천 건이라고 합니다. 결혼 대비 이혼율이 47.4%로 세계 3위에 해당한다고 보도했습니다. 신자들의 이혼 비율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의 권한과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지만, 교회에서도 이런 상황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아는 신부님은 생일이 2월 29일이라고 합니다. 그 많은 날 중에 2월 그것도 29일입니다. 그래서 생일을 찾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본인이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생일을 몇 년에 한 번씩밖에는 기억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저도 제 몸에 대해서 아쉬운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키가 조금 작은 것입니다. 다른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면 제 몸에 맞는 제의가 거의 없는 편입니다. 영화를 볼 때, 앞자리에 앉은 사람의 키가 크면 화면이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관하여 들었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시고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생일이 4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것도, 키가 작은 것도 어찌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이라도 편한 것 같습니다. 교우들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고, 사랑하며 지내야 하는데 때로 불신과 반목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의 시작도 사소한 말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십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