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 이진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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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엽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산청, 거창 등 서부 경남 지역에는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학문을 계승한 학자들이 기라성 같이 배출되었다. 흔히 ‘주문팔현(洲門八賢)’으로 일컬어지는 한주 제자들인 면우 곽종석(郭鍾錫),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 후산(后山) 허유(許愈)자동(紫東) 이정모(李正模), 교우(膠宇) 윤주하,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祐),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은 성주를 중심으로 하는 경북 남서지역과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경남서부 지역의 학풍을 이끌던 학자들이었다. 특히 한말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경남 지역 유학의 종장이라고할 수 있는 면우 곽종석이 바로 한주의 수제자라는 사실은 서부경남지역에서 한주의 학문적 영향력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남명 조식의 학통으로부터도 일정한 영향을 받으면서 영남 성리학, 나아가 조선 성리학을 총결산하는 거대한 학파를 형성한다. 이 당시 영남 지방의 한주학파는 기호 지방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를 중심으로 하는 학파나 노사(蘆沙)기정진(奇正鎭)을 중심으로 학파와 함께 거대한 산맥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한말 영남학맥의 큰 줄기를 이룬 한주학파의 종장인 한주 이진상은 1818년(순조 18) 7월 29일 성주(星州) 대포(大浦:현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 1리 한개마을)에서 아버지 성산(星山) 이씨(李氏) 한고(寒皐) 이원우(李源祐)와 어머니 의성(義城) 김씨(金氏)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한주가 태어난 한개 마을은 성산 이씨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집성촌으로 ‘한개’라는 마을 이름은 ‘큰 나루’에서 유래되었다. 예전 마을의 앞에 있었던 나루 이름이 바로 한 개였다고 한다. 현재 60여가구가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경상북도 지정문화재인 한주종택외 8채의 고가옥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모부인 의성 김씨가 한주를 잉태할 때, 꿈 속에 등에 별자리가 그려진 말과 용의 형체를 한 짐승이 물속에서 뛰어나와 놀라고 있었는데, 이때 홀연히 옆에 한 노인이 나타나 “이것이 너의 집 물건이다” 라고 했고, 태어날 때도 노인이 다시 나타나 붉은 색과 흰색의 큰 붓 2자루를 주면서 잘 가지고 있으면 뒤에 반드시 쓸 사람이 있을 것 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예사롭지 않은 징조를 간직하고 태어난 한주는 7세 때 처음 아버지에게 글을 배워 8세 때 이미 ‘통감’을 읽어 문리를 터득했으며 13세 무렵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읽은 것을 비롯해 다양한 내용의 서적들을 섭렵했다고 한다. 17세 때 숙부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의 가르침에 따라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게 된다. 성리학에 전념한 한주는 이듬해인 18세 때 ‘성명도설(性命圖說)’을 지은 것을 비롯해 22세때 ‘성리도설(性理圖說)’, 23세때 ‘심경도설(心經圖說)’을 지으면서 성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20세때는 도산서원을 참배하여 퇴계의 학문 사숙(私淑)하고자 하는 뜻을 드러냈으며, 30세 때는 서재를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라 이름지었다. ‘祖雲憲陶’란 ‘조술요순(祖述堯舜) 헌장문무(憲章文武)(요순임금의 정신을 계승하고 문왕과 무왕의 법도를 본받는다)’란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주자(雲谷)’를 계승하고 ‘퇴계(陶山)’를 본받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한주 종택에 가면 ‘祖雲憲陶齋’라는 현판을 볼 수가 있는데, 한주가 세상을 떠난 후 후손들과 문인들이 그의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35세 때는 당시 퇴계 학통의 종장(宗匠)이라고 할 수 있는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을 방문하여 성리설을 토론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다시 40세 때는 정재와 그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을 방문해 퇴계학맥의 진수를 계승하려고 노력했다. 한주는 일생을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는 가운데 벼슬길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일찍이 27세 때 안의에 가서 증광동당시(增廣東堂試)에 장원을 하고 이어 31세 때에는 공도회복시(公都會覆試)에 합격, 32세 때에는 증광생원시(增廣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 생원이 된다. 그러나 다음 해인 33세 때 대과를 보러 한양을 갔다가 포기하고 돌아와 일생을 주자학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죽기 얼마 전인 67세 때 유일(遺逸)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받기는 하지만 일생을 선비로서 의 삶을 보냈다. 한주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처사로 일생을 마쳤지만 현실을 외면하면서 살지는 않았다. 45세 때 진주 등 삼남 지방에 민란이 일어나 조정에서 삼정이정청(三政釐整聽)을 설치하고 삼정의 구폐를 묻는 왕의 명령 내리자 ‘응지대삼정책(應旨對三政策)’을 올린다. 이듬해인 1866년에는 옛 성현의 이상적 제도를 본받아 당시 실정에 맞는 개혁안을 구상해 ‘묘충록(畝忠錄)’이라는 책자를 엮어 조정에 올리려고 했으나, 당시 조정사정으로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아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54세 때(1871년)서원철폐령이 내리지 상경하여 ‘청복설사원소(請復設祠院疏)’를 올렸으며, 1880년(63세)에는 직접 부산의 일본관을 찾아 “속임수는 우의가 무너지는 것의 매개요, 이익을 탐하는 것은 어지러워지는 것의 근원이다”는 말로 상호교린의 신의를 저버리는 일본에 대해 엄중히 꾸짖고 있으며, 이때 직접 화륜선에 올라 감회를 시로 읊기도 하였다.
<한주의 스승 응와 이원조〉
이원조(李源祚)의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凝窩)이다. 1792년(정조 16년) 2월 6일,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에서 형진(亨鎭)의 차자로 태어나 백부인 증 의정부 좌찬성 규진(奎鎭)의 양자로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총명, 영민하여 퇴계학맥을 이은 입재 정종로(立齋 鄭宗魯)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809년, 약관 18세로 전시문과(殿試文科)에 급제하였으나 고향에 돌아와 다시 학문에 열중하였다. 1817년 26세 때 성균관 전적, 그 이후 1840년까지 20여년간 정랑, 지평, 사서, 정언, 장령, 군자감정 등의 벼슬을 지냈다. 1840년 강릉 부사에 임명되어 삼정폐소(三政弊所)를 설치하여 조세와 부역을 경감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841년 제주목사가 되어 삼천숙(三泉塾)을 세워 교학을 장려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1843년에 형조참의, 우부승지·좌부승지를 역임하고 1850년 경주부윤이 되었다가 1856년 병조참판에 올랐다. 1865년 한성판윤이되고 이듬해 공조판서에 승진, 1869년 정헌대부, 1871년 숭정대부에 올랐다. 1871년 80세를 일기로 향리에서 별세하고, 그의 사후(死後) 10년이 되던 1880년(고종 17년) 5월 나라에선 정헌(定憲)이라 시호를 내렸다. 응와는 도학과 문장으로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이 되었으며, ‘응와집(凝窩集)’ 12권을 비롯한 ‘성경(性經)’ 2권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름: 강동욱
2004/11/27(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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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 이진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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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 이진상의 학문과 사상은 우리나라 유학사에 있어 ‘한주학파’라고 불리는 한 거대한 학파를 형성하는데 밑걸음이 됐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면우 곽종석, 후산 허유, 물천 김진호 등 대학자들에 계승돼 19세기 중엽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산청, 거창 등 서부 경남 지역 학풍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게된다. 수제자인 면우는 평생 독서와 저술 작업으로 일생을 살아간 전형적 유학자였던 스승 한주를 가르켜 ‘금세의 정자(程子)’라고 칭하기도 했다. 일찍이 한주는 30세 때는 서재를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라 이름 지어 주자(雲谷)’를 계승하고 ‘퇴계(陶山)’를 본받겠다는 학문적 지향점을 드러냈다. 주지하다시피 주자의 학문은 ‘주자학’ 즉 ‘성리학’이다. 우리나라에선 퇴계가 주자학을 집대성했다고 할 수 있다. 주자학이 우주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심성(心性)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문이라고 할 때, 한주의 학문 체계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주가 주자와 퇴계의 학문을 있는 그대로를 계승하고자 했다면 ‘한주학파’라는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유학사에서 한 학파를 형성한 것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학문 체계가 있을때 가능한 일이다. 한주는 주자와 퇴계의 학문 체계를 무조건 받아들이기 보다 이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려고 평생을 정진하며 살았다. 당시 성리학의 주된 관심사인 심성(心性)의 문제 즉 마음의 문제를 두고 퇴계의 주장을 한층 더 발전적으로 계승하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영남학파 학자들은 마음의 문제는 퇴계의 학설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여겼다. 즉 퇴계의 주장인 “마음의 작용에 있어서 사단은 이가 발함에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이라는 이와 기가 호발(互發)한다는 학설을 충실히 계승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던 것이다. 참고로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 등의 마음을 뜻하며, 칠정은 회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으로 7가지 인간의 감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찍이 퇴계가 “사람의 마음은 이와 기가 함께 뒤섞여 있어 이에 기가 다르지 않으면 사물을 이룰 수 없고 기에 이가 타지 않으면 질서가 없어진다”라고 하였는데, 한주는 마음의 작용에서 기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주는 1860년 “옛 사람이 心을 논하는데 心卽理보다 더 선한 것이 없고 心卽氣보다 더 선하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선언하고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정립하였다. 한주의 심즉리설은 가령, 사람이 말을 타고 어느 지점에 도착하면, 그쪽에서 사람이 왔다고 하지 말이 왔다든지 말과 사람이 함께 왔다 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는 논리이다. 한주의 이러한 학설은 23세 때 이미 ‘이단설(異端說)’을 지어 “이단의 설이 천갈래 만갈래 있지만 그 시초는 기를 의식함에서 연유하였고 끝내는 모두 주기로 돌아갔다”며 주기(主氣) 입장을 옹호하던 노장(老莊) 열자(列子) 순자(荀子) 등을 통렬히 비판했다. 한주는 왜 ‘심즉리설’을 주장했을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권오영 교수는 한주의 심즉리설 주장에 대해 “성리학자로서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가 주기적(主氣的) 학풍에 의해 혼란이 심해지고 있고, 또 자기가 속한 도덕 사회가 점차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려면 순선(純善)의 이(理)를 더욱 강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기에 대하여 분명하게 마음의 본체가 이라는 것을 밝혀주는 것이 학자가 해야할 일이라고 여겼던 것이다.”라고 했다. 한주의 이러한‘심즉리설’주창은 당시 유림계를 뒤흔들만한 대사건이었다. 대선생인 퇴계의 주장과 다르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이 뒤따랐던 것이다. 어떤 이는 이것을 양명학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그의 문집인 한주집 간행도 쉽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 아들 이승희가 ‘한주집’을 간행하려고 방산(舫山) 허훈(許薰)에게 교열을 부탁했다. 그러나 허훈은 이진상의 ‘심즉리설’이 퇴계 이황의 학설과 배치되므로 안동 지방에서 비판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자 제자 곽종석(郭鍾錫)이 이 일을 주관해서 한주가 세상을 떠난지 9년만인 1895년 거창 다천의 원천정(原泉亭)에서 목활자로 간행을 했다. 간행을 매듭짓고 맨 먼저 도산서원에 보냈다. 그러자 퇴계의 여러 후손들이 이단으로 배척하고 책권 뒤에 글을 써서 돌려보내며, “이 책들은 가야산 골짜기 속 깊이 감추어두었다가 우리 道가 끊어져 없어진 뒤에야 세상에 내놓으라!”라고 하였다. 심지어 그 문집들을 모아놓고 불을 사르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한주 집안은 수십년동안 영남지방에서 거의 용납되지 못하였다. 한주의 제자인 면우 곽종석은 스승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1899년 곽종석은 퇴계 후손인 이병호(李炳鎬)에게 편지로 심즉리설(心卽理說)에 대하여 논하였다. 이병호는 본심(本心)이 진실로 이(理)이지만 ‘즉(卽)’이란 글자가 너무 급(急)하다고 하였다. 곽종석은 마음은 진실로 본심(本心)을 지적하기 때문에 이같이 설명하나 마음을 범범하게 말하면 또한 마땅히 이기(理氣)를 합하고 있다고 말해야 하고 인하여 아울러 기질(氣質)의 성(性)에 미쳐야하고 미발(未發)의 처지에서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의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의 중도(中圖)가 심학(心學)의 종지(宗旨)를 드러낸 것이라고 하였다. 면우 곽종석은 심즉리설을 비판하는 당시 유림계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학설을 을 굳게 지켰다. ‘한주문집’에 실린 이진상의 학설이 문제가 있다면 반드시 도산(陶山)에서 문제를 삼을 것이 아니라 천하사람들에게 보이어 객관적인 평가를 받는 것이 더 온당하다고 말하였다. 지금 학계에선 한주 이진상의 ‘심즉리설’은 퇴계의 심학(心學)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퇴계의 학통에 깊이 연결되어 있으나, 그의 학설이 지닌 독자적 성격에 따라 그 자신이 성주 지역을 중심으로 독립된 학통을 열었으며,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한 퇴계 정맥이라고 할 수 있는 유치명(柳致明)에서 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지는 학맥과 뚜렷한 구분을 짓게 되었다. 한주는 일생동안 초야에 묻혀 살면서 85책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한주문집’외에 성리학에 관한 이학종요, 예학에 관한 사례집요(四禮輯要), 국가경륜에 관한 묘충록(畝忠錄), 사학에 관한 춘추집전(春秋集傳) 춘추익전(春秋翼傳), 경학에 관한 구지록(求志錄). 여러가지 이론에 대한 변지록(辨志錄)등의 저술들이 지금 전해지고 있다. 한주는 평생동안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한가롭게 세월을 보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독서하고 쓰고 글짓는 일을 하루 종일 쉬지 않았다. 평생 학문하는 자세로 살았다는 말이다. 저서가 매우 많았지만 만년까지도 손수 베껴 옆에서 보기 민망할 정도였다고 한다. 제자들이 간혹 옆에서 대신 하겠다고 하면 “글이란 보면 볼수록 고칠 곳이 있는 법이어서 손수 쓰지 않으면 그것을 찾아낼 수가 없다”라고 했다. 그는 독서와 저술로서 일생을 살아간 전형적인 유학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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