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충무 칼럼] 盧무현 자살에도 배우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희망이 없다!
대한민국 憲政史(헌정사) 60년 가운데 故人이 된 노무현(盧武鉉) 前 대통령은 가장 많은 신기록을 세운 인물이 됐다.
그는 또 8명의 전직 대통령들이 남긴 추한 발자취를 밟지 않는 ‘훌륭한 대통령’ ‘영웅적인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좋은 시대도 가졌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취임 후 주변 인물들을 잘못 두고 김대중, 김정일 세력의 간섭을 스스로 자초한 결과, 잘못된 판단과 정책으로 결국은 ‘자살’이라는 비극의 주인공을 자처하고 말았다.
스스로 영웅이 될 수 있는 길을 두고도 자신이 결국 던져 버린 것이다. 그런 결과는 노무현씨가 태어나고 성장한 배경과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23일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前 대통령 노무현(盧武鉉)의 죽음은 한국의 퇴임한 대통령 뿐만 아니라, 세계 수많은 나라의 퇴임 대통령, 퇴임수상, 퇴임총리 등 권좌에서 떠난 국가 최고지도자 가운데서 자살이라는 최초의 비극의 역사를 연 인물이 됐다.
2002년 12월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9번째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그의 대통령 취임과 청와대 입성은 지나간 8명의 청와대 주인 가운데 가장 많은 신기록을 남기고 화제를 뿌리며, 집권 기간 5년 내내 70%의 국민들과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보수우파 국민들과 보수 논조의 언론과는 거의 敵對(적대)관계를 이어갔다.
30%의 親 노무현 지지세력들은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 湖南 사람들, 親北 左派 세력들, 6.25 전쟁 후 지하에 숨어 있다가 김대중 정권 때부터 고개를 들고 나온 남로당(南勞黨-남한 공산당) 가족들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역사 가운데 대통령 취임 후 탄핵을 받은 대통령은 그가 처음이다. 그런가 하면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에 아들과, 一家 친척이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 당하지 않고, 5년 임기를 채우고 자기 발로 청와대를 걸어 나온 인물도 그가 처음이다.
그러나 퇴임 몇 개월 후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한 노무현 본인과 一家族 4명 모두, 형님과 형님의 사위, 가장 친한 친구, 그리고 측근들 수십명이 줄줄이 체포되어 감옥을 가는 부패사건이 터져 나오면서 결국은 자살이라는 비극의 길로 간 것도 그가 처음이다.
대한민국 탄생 후 전직 대통령 8명이 걸어간 수난과 고통, 오욕의 길을 그도 어김 없이 맞이했다. 그것도 자살이라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그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노 전 대통령이 살아온 과거의 행적과 言行 (언행)을 보고 그가 자살의 길을 택할지도 모른다는 정도의 예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어느정도 있었지만 그런 예감을 말과 글로 표현한 사람은 김동길 박사와 칼럼자 정도라는 생각이다.
김동길 박사와 칼럼자는 “노무현씨가 자신과 가족들, 측근들이 저지른 각종 부정사건의 책임을 지고 국민에게 진정으로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를 빌거나 그것이 싫으면 자살이라도 하여 자신의 진실을 보이라”는 칼럼을 발표했으며 김 박사는 강연을 통해 이야기 하기도 했다.
자존심이 강하고 남에게 굽히기 싫어하는 성격, 사실은 깊은 철학과 지식이 별로 없는 인물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는 냥 말 많이 하기를 좋아하는 그가 며칠째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버티다가 끝내는 자살이라는 최악의 마지막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어찌됐든 충격이며 슬픈 일이다.
하지만 평소에 그가 주장해온 도덕성, 청렴성, 정직성과는 너무 다른 결과가 계속 불거지면서 더이상 자신의 양심은 속일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책임감 없이 무능하고 무책임한 본래의 나약하고 혼란한 가치관을 보였다는 점이다.
찬란한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인물, 그러나 패배자로 낙인 김대중 패거리들과 386 좌파세력들에 둘러 쌓여 자초한 실패 그가 책임감이 강하고, 40여 년 동안 쌓아온 公人으로서, 한 사람의 사회구성원으로서, 한 가정의 家長으로서의 의무감을 가진 남자였다면 결코 이런 방식의 최후를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노무현씨는 자신의 결백과 나머지 가족의 안위만 걱정한 졸장부 같은 남자였을 뿐,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자격이나 능력은 조금도 갖추지 못한 인물이다.
국가와 민족을 지키고,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맡았던 국가 최고지도자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이렇게 허술하고 무모하게 자신의 몸을 부엉이 바위에서 던져 생을 마감해서는 안된다.
노무현 보다 몇 천만배 더 많은 부정축재를 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오랏줄에 묶여 재판을 받고 감옥을 갔다. 그리고 부정축재한 자금을 지금도 추징 당하고 있고 언론과 국민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살이라는 극단의 방법은 사용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죄를 지었다면 죄값을 받으면 되고 진정 국민들에게 미안하다면 용서를 빌고 남은 여생 속죄하고 살면 된다.
▲ 부정부패로 얼룩진 노무현 패밀리 | | 그래도 전직대통령으로서 대우받으며 조사 받지 않았던가, 더욱이 변호사 출신이라 법률지식도 해박하다. 만약 자신이 진짜로 지은 죄가 없다면 법정에서 있는대로 밝히면 될 일이다.
그런데 세계에 유래가 없는 자살극으로 비겁하게 죄를 모면하려 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국격과 자존심은 후진국 수준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국민들이 그 많은 세금을 부담하면서 전직 대통령이라고 예우를 해 주는 이유는 국가의 체면과 품위를 잃지 말라고 그러는 것이 아닌가! 결국 노무현은 그런 최소한의 의무도 이행하지 않은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대한민국이 자살 1위 국가로 미래가 위협받고 있는데 대통령까지 지낸 인물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사실은 이 사회에 망국적 자살 열풍에 불을 지핀 격이라 할 말조차 없게 만든다.
노무현은 1946년 8월6일 경남 김해시(당시는 김해군)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아버지 노판석(盧判石) 어머니 이순례(李順禮)씨 사이에서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노씨에게는 큰형 영현(英鉉) 둘째 형 건평(建平)씨가 있는데 그는 지난 2008년 12월 농협과 관련된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으며 장례식 준비를 위해 1주일간 가석방되었다.
노무현은 자기 위로는 누나 명자(明子) 누이동생 영옥(英玉)을 두고 있으며 2명의 형은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 세무 공무원을 지냈다.
노무현은 진영대창국민학교(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1963)를 졸업하고 부산상업고등학교를 1966년에 졸업했다. 집안 사정 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1968년 육군에 입대해 강원도 원주 육군1군 사령부에 근무하다 만기 제대했다.
군 복무를 마친 그는 부인 권양숙씨와 1973년에 결혼, 아들 건호(建昊) 딸 정연(靜姸)을 두었는데 아들 건호는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500만 달러를 받았으며 딸 정연은 45만 달러를 받아 뉴저지주에 고급 호화 아파트를 구입한 사실이 들통나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원인을 제공했다.
결혼 후 지금 구속중인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과 함께 김해 근처의 절에 들어가 고등고시 공부를 함께 했으며 1975년 제17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교육을 마친 그는 1977년 대전지방법원에서 판사로 부임, 7개월 동안 판사 생활을 하고 사퇴한 후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부산의 선배 변호사 김광일씨 도움으로 김영삼 만나 김영삼 전폭 지원으로 공천 받고 당선, 마지막엔 김대중 곁으로 그러나 고졸 출신 변호사에게 사건을 의뢰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변호사 개업 후 고생하다가 김광일 변호사를 만났다. 김광일 변호사는 자신이 맡은 사건 가운데 미쳐 손을 대지 못했던 학생들과 노동자들에 대한 변론을 노무현 변호사에게 넘기며 도와주도록 부탁했다.
1981년 제 5공화국 시절 전두환 정권의 정보망 눈을 피해 부산의 대학생 20여 명이 공산당 서적과 친북세력들의 작품을 돌려가면서 읽은 사건으로 학생들이 무더기로 검거됐다.
소위 ‘釜林事件(부림사건)’으로 부산지방에서는 최대의 학생 공안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부산 지역 언론에 오르내리며 인권 변호사 소리를 듣게 됐다.
특히 1987년 대우조선 노동자들이 시위 도중 사망한 사건을 맡으면서 사건에 제3자 개입,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당시 김영삼 야당총재와 김광일 변호사의 눈에 띄게 됐다.
▲ 시국사건을 맡으며 유명해진 당시 노무현 변호사 | | 한국의 정치 개혁과 지역타파를 외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외로운 투쟁을 해온 그는 정계 투신 전 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잘 모르는 부산지역의 인권 변호사에 불과했다.
그 시절 선배 변호사 김광일씨(YS 정권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는 노무현이 정치에 뜻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야당총재 김영삼에게 소개했으며 김영삼의 도움으로 1988년 통일민주당 공천을 받아 부산에서 출마, 국회의원 금배지를 달게 되었다.
김영삼이 그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갖고 있었으며 많은 功을 들였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노무현은 “선거 때 내가 태어난 후 돈을 한없이 원없이 써 봤다”고 말할 정도로 YS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국회의원 당선 후 1년만인 1989년 전 국민이 TV를 통해 지켜보고 있는 국회 5공화국 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전두환 당신은 살인마야” 하면서 고함치며 자신의 의원 명패를 전두환씨를 향해 집어 던졌다.
그 일로 그는 일약 스타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1990년 1월 김영삼이 김종필과 함께 민정당과 3당 합당을 할 때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고 김대중 쪽으로 갔다.
김대중 黨 이름으로 부산에서 14대 총선거(1992) 에 출마 낙선하고 1995년에는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또 실패했다.
1996년에도 출마했지만 역시 낙선한 그는 김대중 정권 출범 후 2000년-2001년 사이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으며 그를 발판으로 김대중, 김정일의 눈에 들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 제16대 대통령에 올랐다.
그러나 대통령 당선 후에도 그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정계에서 異端兒(이단아) 취급을 받던 그가 청와대에 들어갔으니 기존 정치세력들은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 기성 정치인과 언론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그 배경에는 이인제씨와 민주당 후보 경선 싸움을 하면서 “언론과 전쟁 선포를 해야 한다. 내가 당선되면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국유화 시키겠다”는 골수 공산주의자들보다 더 급진적인 思想(사상)과 이념을 표출, 부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노무현은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을 ‘차떼기 정당’이라고 매도하면서 “기존 정치인들은 재벌들로부터 검은 돈을 받으며 정치를 해오지 않았는가?” 라며 자신은 돼지저금통으로 당선된 것을 자랑했다.
그러면서 “내가 야당이 쓴 선거자금 가운데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사퇴하겠다”고 까지 큰소리 쳤으나 실제 재벌들로부터 더 많은 돈을 받은 것이 밝혀졌음에도 그는 자신의 발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이어 노 대통령은 선거법 중립의무 위반, 국정파탄, 경제파탄, 측근 비리 등으로 16대 국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탄핵을 받는 대통령이 됐다. 2004년 3월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기각한 5월 14일 까지 63일 동안 대통령 직무를 정지 당하기도 했다.
탄핵에서 살아나자 그는 카톨릭 정의평화사제단 신부 몇 명과 기독교 목사 몇 명이 청와대로 들어가 노무현에게 포도주 잔을 높이 들고 “예수께서는 3일 만에 부활하셨는데 한국의 노무현은 63일 만에 부활한 우리들의 노무현 대통령 만세…” 찬가를 불렀다.
그러나 계속되는 정치 미숙, 천정부지로 뛰어 오르는 부동산 정책 실패, 세금 폭등, 김정일에게 끌려 다니는 對北정책,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함부로 내 뱉는 발언에 국민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등을 돌렸다.
당시 부산에서는 자고 나면 오륙도 섬 앞에 손가락이 2포대 씩 떠 다닌다고 했다. 멋 모르고 노무현에게 표를 찍어준 사람들이 손가락을 잘라 버렸기 때문이라는 말들이 나돌았다.
또 목포와 광주 호남지역에서는 목이 틀어진 환자들이 갑자기 늘어나 정형외과 의사들과 침을 잘 놓는 한의사들이 톡톡히 재미를 봤다는 소문도 널리 퍼졌다.
김대중의 꼬임에 노무현에게 몰표를 찍어 주었던 전라도 사람들이 노무현의 배신과 정치 미숙에 혀를 내 두르며 ‘노무현이 언제 하야 하는가?’ 하고 서울 방향만 쳐다 보다가 목이 비틀어져 생긴 환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증오와 미숙함은 그를 향한 국민들의 마음을 싸늘하게 만들었으며 자신이 만든 ‘열린우리당’의 인기는 ‘돼지우리가 열려 도망간 돼지당’이라는 비참한 비난도 감수해야만 했다.
결국 노무현은 14번 씩이나 “대통령 못해 먹겠다. 괜히 대통령에 출마해 당선됐다”는 말을 내뱉아 국민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자신의 잘못을 언론 탓으로 돌리고는 정부부처 기자실에 큰 대못도 박아 기자들이 한동안 정부청사 복도에서 신문지를 깔고 앉아 기사를 송고하게 만들었다.
궁지에 몰린 노무현은 궁여지책으로 대통령 재임 기간을 4년 연임으로 하는 개헌안을 내기도 했으나 야당과 국민의 반대로 물거품이 됐다. 그러자 그는 김대중과 김정일에게 매달려 임기 3개월을 남겨 놓고 평양으로 들어가 김정일을 만나 북한에 마구 퍼부어 주는 것 외에 몇 천억 달러를 갖다 바치는 10.4 선언을 발표했다.
그런 바보 짓은 김대중의 햇볕정책에 진저리를 낸 국민들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고 결국 대통령 자리에 오른 5년 동안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이 행동한 노무현은 “고향 봉하마을로 내려가 초야에 묻혀 살겠다”고 했다.
▲ 자살이라는 충격적 방법으로 비극의 주인공을 자처한 인간 노무현 | | 한때 국민들은 “그래도 노무현이 다른 점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으나 무려 150억이라는 막대한 공사비를 들여 ‘봉하왕국 궁전’을 건축하는 바람에 또한번 비웃음의 대상이 됐다.
그런 가운데 터져 나온 ‘박연차 리스트’ ‘강금원 리스트’에 의해 一家族 스캔들이 폭발되고 결국 ‘박연차 리스트’ 와 ‘강금원 리스트’는 ‘노무현 가족 게이트’로 ‘노무현 측근 게이트’로 그 추하고 더러운 정체를 드러냈다.
이로 인해 노무현의 생애 동안 입만 열면 자랑하던 도덕성과 청렴성, 정직함이 실상은 거짓이요 위선이며 가면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는 궁지에 몰렸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몰랐다는 모르쇠로, 아내와 조카사위가 한 짓으로 핑계만 대는 비겁함으로 일관, 결국 더이상 거짓말 하거나 “모른다”는 말로는 부인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진보진영 정치인들, 젊은 386 좌파세력들, 오랜 시간 가장 가까운 친구인 정상문, 평생토록 자신을 도와준 후원자 박연차, 강금원을 감옥에 보낸 죄책감으로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시피 하며 부엉이 바위로 올라가 투신하면서 파란만장한 그의 生도 끝나고 말았다.
이제 한국은 노무현의 죽음을 계기로 정치인들이 재벌로부터 부정한 돈을 받지 않고 정치를 할 수 있는 제도를 논의해야 한다. 그 첫걸음은 당연히 정당이 제대로 된 품성과 인격을 가진 인물을 공천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제2의 노무현, 제2의 전두환, 노태우, 제2의 김대중이 같은 도둑놈들, 날강도 같은 대통령, 함량미달의 정치인들이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노무현의 죽음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아니 건질 수 있는 교훈이기를 희망해 본다. 만약 아직도 정치인들이 국민들의 그런 바람을 깨닫지 못한다면 한국은 선진국은 커녕 희망이 없는 3류국가로 남게 될 것이다.
ㅁ 손충무 –국제저널리스트.www.usinsideworld.com –편집인 겸 발행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