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Ⅱ-91]손자 사랑은 ‘신(新) 팔불출’?
여덟 가지 자랑(자기 자신, 아내, 자식, 부모, 형제, 조상, 자신의 학식, 자신이 사는 동네) 중에도, 특히 ‘아내 자랑’을 팔불출(八不出)이라 놀리기도 하지만, 요즘은 ‘사랑꾼’이라며 치켜세우는 경향도 있으니, 말이든 뭐든 자꾸 변하는 게 세상인 것같다. 겸손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던 옛날에 ‘팔불출’은 뭔가 좀 덜떨어진 사람을 비하하는 말이었지만‘남들에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자랑을 늘어놓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의미도 있다하겠다. ‘6학년’에 진입하고서부터는 손자 손녀의 사진을 지갑에 넣어갖고 다니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손자손녀 자랑은 남녀(할아버지, 할머니)를 불문한 게 특징, 가히 ‘신(新) 팔불출이라 하겠다. 나 역시 어찌 예외이겠는가. 나도 모르게 언제부터 지갑에 손자 사진이 있다. 마음이 심히 울적할 때 녀석의 사진만 보면 웃음이 절로 나니, 생활의 비타민이 따로 없다. 손자가 아직 없는 친구들에게는 정말로 미안한데 어쩔 수가 없으므로 이해를 구한다. 막말로 5만원을 내고 자랑을 하랜다도 모두 할 기세가 충분하지 않는가.
며칠 전, 11살 유일한 손자가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할아버지, 언제 와?” “이거 내가 그린 거야”보내온 그림<사진 1>을 확대하니, 한켠에 글이 있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나는 글에 깜빡했다. 제목: 겉바속촉 “치킨은 겉바속촉이다. 하지만 진짜 겉바속촉은 아보카도다. 아보카도가 치킨에게 타이틀을 뺏긴 것이다. 기다려라, 치킨”아보카도를 먹어본 사람들은 공감할 듯한데, 나는 “기다려라, 치킨”으로 끝을 맺은 녀석의 위트(?)에 놀라고, 기분이 매우 좋았다. 1주일에 한번 미술학원에 다니는데 재미가 쏠쏠한 모양이다. 아들네 집을 가면 보름, 아니면 한 달에 한번 제가 그렸다며 가져온 그림 7,8장이 붙여 있었다. 그 그림들을 볼 때마다 ‘손자바보’‘손자 바라기’인 나는 돈이든 맛있는 거든 녀석에게 주고 싶어 몸살이 난다.
‘진짜 그림에 재주가 있는 걸까’ 화가가 됐으면 좋겠다는 나의 말에 “화가는 배가 고프잖아”라고 한숨에 말하는 녀석이, 학교 가기 전인 일곱 살 때 고흐의 위인전을 읽었는데, 늦게까지 잠자지 않고 도표처럼 그려놓은 게 고흐 작품이 있는 세계의 미술관 안내도<사진2>였다. 그것을 떼다가 1학년 비가 많이 올 때 등교하던 날 그린 그림일기<사진3>와 함께 내 방의 장롱문짝에 지금껏 붙여놓고 있다. 제 할미는 신통방통하다며 얘가 그린대로 고흐의 작품을 보여줘야 한다며 당장에라도 네덜란드든 어디든 달려갈 기세였으니. 어느 날 네가 그린 그림 중 가장 잘 그린 그림이 뭐냐?고 하니까, 녀석이 돌보고 있는 반려앵무새 ‘자두’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사진4>. 세밀화같이 잘 그렸다고 칭찬을 해줘도 반응은 무덤덤.
그런데, 미국 미술협회에서 주최한 공모전에서 한국학생으로 입상<사진5>을 했다며 미술선생님이 인증액자를 받으려면 9만원을 내라고 했단다. 제 생각에도 비싸다고 했지만, 제 부모는 그런 것 만들 필요없다 했지만, 그 돈이 아까워 내지 않을 할미-할애비가 어디 있을까? 한 달 후쯤 도착한 액자는 제법 그럴 듯했다. 기와집 벽돌담이 고풍스러워, 나의 고향집 담을 연상시켰는데, 제 말은 경주 양동마을에 갔을 때 담에서 힌트를 받았다고 했다. 자전거도 제법 어울리게 배치한 게, 나의 눈에는 그저 신통방통, 신기방기하기만 했으니. 감수성이 무한대인 어렸을 때 이곳 저곳 많이 데리고 다니는 것은 이런 ‘효과’와 ‘효능’이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큰아들도 초등시절 그림을 제법 그렸다. 4칸짜리 만화도 여러 편 선보였으니, 애비의 피를 이어받은 것일까? 그런데, 글은 아무래도 할애비 피를 이은 것같아 은근히 흐뭇하다. 짧은 글에도 제법 위트가 있다. 4학년 첫 한 주를 보내고 선생님이 글쓰기 숙제<사진6>를 내주었는 모양이다.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교실에 처음 들어서며 느낌을 적은 후, 반장선거에 나서게 된 사연도 재밌었다. 호오, 비록 2등으로 떨어졌다지만, 나름대로 3가지 공약을 발표한 경험을 쓰고 있는데, “자존심이 생겨났다”며 “이것은 아주 큰 변화다”라고 결론을 지어 썼다. 참으로 기특한지고. 뉘집 손자일까?
지난주 토요일, 아내와 함께 녀석에게 어린이영화를 보여주기로 했다. 판교현대백화점 CGV 애니메이션 영화 <호퍼스><사진7>는 어른인 우리가 봐도 흥미로웠다. 동물과 자연을 사랑하는 소녀 메이블이 할머니와 추억이 깃든 연못이 사라질 위기에 놓이자, 이를 지키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어느 날 사람의 의식을 동물 로봇으로 옮기는 ‘호핑’기술을 우연히 체험한 메이블이 로봇 비버로 호핑(hopping)되어 동물 세계에 잠입하여, 우여곡절 끝에 연못을 지키게 된다는 내용이다. <아바타>만큼 흥미롭고 <주토피아> 뺨치게 귀여운 애니멀 어드벤처. 1시간 40분 동안을 한눈 팔지 않고 몰입하는 녀석이 한없이 예쁘기만 한데, 상영관을 나오면서 하는 말에 하래비는 기가 죽고 말았다. 다음부터는 대사를 더빙하지 않은 영어(english)버전으로 보여달라는 것. 아니, 영어로 말하는 것을 다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게 아닌가. 그렇게 보는 게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는데, 할미는 알았는지 “미안하다”고 하지 않은가. 참 별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실감했다. 아지 모게라!
쓸쓸한 일요일 오후, 고 녀석이 유난히 보고 싶어 써본 손자사랑의 이야기. 혜량하시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