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해외 반정부 활동
한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자 김대중은 일단 귀국을 포기하고 국내 정세를 관망하였다. 1972년 11월 13일 김대중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김대중은 미국에서 먼저 미국 시민권자인 교포 임병규(林炳圭)씨를 찾아갔다. 나중에 김대중의 정책 고문이 되기도 한 임병규씨는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김대중씨는 도착한 다음날 워싱턴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그래서 그 다음날 즉시 김대중씨와 전 유엔 주재 한국대사 임창영(林昌榮)씨, 재미 한국인 학자 유기홍(柳基弘)씨 그리고 나, 네 사람이 뉴욕 힐튼 호텔에서 합류하였다. 곧 장소를 뉴욕의 뉴 포트에 있는 우리 집으로 옮겨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김대중씨가 자신의 활동 방침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미국의 정부 고관이나 학자들과 협력 체제를 만든다. 박대통령이 포고한 유신 체제는 한국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호소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한국 내의 자유 억압에 대해서도 호소해야 한다”고 했는데, 우선 협력을 구할 미국의 학자로서는 라이셔워, 제롬 코헨, 스칼라피노 등을 만났고, 그리고 하비브 미국무차관보와도 회담했다.
하버드 대학의 라이셔워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와는 두 번 만나 이야기했다. 나도 한국의 유력한 정치가인 그를 잘 알고 있었지만, 특히 민주주의의 성실한 신봉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독실한 크리스챤이고 훌륭한 리버럴 정치가라고 생각되었다.”
우리는 주로 유신 체제 이후의 한국 정정(政情)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는 한국에 돌아가면 자신의 신변 안전이 위태로와지기 때문에 하버드 대학에서 1년 정도 연구하고 싶다는 의향을 비쳤다. 나도 그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그가 초빙연구원으로 하버드에 올 수 있도록 조정을 시작하였다. 하버드 대학은 각국의 제인사들을 초빙하여 연구의 장을 제공하기도 하고 혹은 대학측이 그 사람들로부터 배우기도 한다. 한국인으로부터도 정부측의 인사들 -장성들과 정치가들- 을 초청하고 있다. 김대중씨 자신에게도 여기서 1년여를 푸근히 보내게 되면 휴식과 사색에도 안성마춤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11월 21일 김대중은 워싱턴에서 국민투표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 “나는 이것이 완전히 불법이며 무효임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김대중은 미국의 주요 언론과 인터뷰를 하거나 재미 교포들을 만나 유신 반대 세력을 묶어갔다. 이후 김대중은 주로 미국의 워싱턴에 머물면서 일본으로도 여러 차례 왕래했다.
1972년 12월 14일 김대중은 처음으로 500명 정도의 재미 교포들에게 시국강연회를 하였다.
1973년 1월 5일 김대중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으로 가기 조금 전 김대중은 임병규씨와 두 번째로 만났다. 임병규씨의 회고.
두 번째 만났던 때는 그가 일본으로 떠나기 조금 전으로, 그는 일본의 우인들과 만나서 조언을 듣고 최종적으로 정치가로서의 행로를 결정하고 싶다고 하였다. 나에게는 주로 한국에 돌아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해외에 머물러야 할 것인가를 상담하였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스스로를 위험에 빠지게 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역시 귀국여부는 타인이 조언을 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이는 본인만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런 조언도 하지 않았다.
2월 18일 김대중은 제9회 재일 한국청년동맹(약칭 한청동) 겨울 강습회에서 2백50여명의 청년들을 상대로 마이크 앞에 섰다. “조국에는 이제까지 근근이 명맥을 이어오던 민주주의가 이제 완전히 말살되었습니다”라고 말문을 연 김대중은 격렬한 어조로 박 정권을 규탄했다.
나는 공산당을 전멸시킨다는 방식에 반대합니다. 공산당에 숙청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양쪽 모두가 자신을 가지고 공존하며 함께 전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공존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중국에서는 장개석이 패주하고, 미국은 베트남에 60만 병력을 투입하고 하루에 1억 달러씩이나 쏟아 부어도 패했던 근본 원인은 독재정권의 부정부패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공산당에 패했던 것입니다.
베트남에서는 병사가 전사할 때, 자신은 공산당의 총에 맞아 죽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없기 때문에 죽는다고 한답니다. 권력있는 자는 자식을 프랑스 등지에 유학 보내고, 부자는 돈으로 자식을 징집 대상에 빼돌립니다. 결국 권력없고 돈없는 사람들만 징집되는 것입니다. 전쟁터로 나갈 때에도 가족들이 걱정이기 때문에 가족을 데리고 갑니다. 내가 베트남에 갔을 때 병사들이 처자식과 개까지 데리고 행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또 부통령의 초대로 파티에 갔을 때에는 전쟁이 한창 진행중인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장관 부인의 양 손이 손가락마다 반지와 보석으로 번쩍거리는 꼴을 보았습니다. 이런 꼬락서니들이기 때문에 망하고 만 것입니다.
박정희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월 10만, 20만엔의 급료로는 생활하기도 어려울 것인데 5천만, 1억, 2억, 3억짜리 집을 짓고 부인의 손가락에는 3천 5백만 엔짜리 반지를 끼우고 있습니다. 신문에 보도된 바입니다만 한국에 균명(均明) 고등 학교라는 학교가 있는데 그 학교 교장 부인이 3천 5백만 엔짜리 반지를 가지고 있다가 밀수품 적발시에 압수되었습니다. 신병을 구속하려고 하자 그 여자는 항의하였습니다.
왜 나만 구속하느냐, 모모 장관 부인도, 재벌 부인도, 국회의원 부인도 다 가지고 있다. 나도 친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샀는데 권력있는 사람은 그대로 두고 왜 나만 적발하는가?
이러면서도 국민에게는 건설하자, 새마을 운동하자 등등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무슨 잠꼬대란 말입니까! 이러한 독재하에서 우리는 노예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민은 이러한 상태를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때가 이르러 기회가 오면 우리 국민은 일어섭니다….
김대중이 한국전에서 군 복무를 했다면 전쟁시 군 징집을 기피하는 것을 규탄할 자격은 있겠다.
김대중이 해외에서 반정부 투쟁을 시작하자 그를 아는 일부 외국인은 이에 대해 충고했다. 일본 마이니찌 신문 서울 특파원을 지낸 이시까와(石川昌)는 김대중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한국의 정치가가 일본과 미국 등지를 무대로 하여 정부비판을 한다면 외국세력과 결탁한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당신이 만일 여기에서 대정부 비난을 한다면 반드시 일본의 매스콤을 통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국적이 의심스럽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다음은 이 무렵 김대중이 뉴욕 타임즈에 기고한 내용이다.
Advice on Asia
By Kim Dae Jung
WASHINGTON-Having exerted their influence in Asia for the last 27 years, American forces are, in the name of the Nixon Doctrine, gradually withdrawing from Asia, thereby leaving behind the domino tendency of military dictatorship. The proud history of American democracy may not record this act kindly but also will in time inflict pain on the conscience of the American people; for with power comes responsibility. In the moment of hopelessness and of unfulfilled dreams, freedom-loving Asians will reflect on the valued friendship with America with bitterness.
Many countries in Asia under dictatorship have neither bread nor freedom. Since Communism at least guarantees them bread, you can very well see which way these people will be going. If Asia, especially Korea, turns to Communism, Japan will, of necessity, be armed with nuclear weapons and may well come under militaristic rule again. Who can foretell or guarantee, once again rearmed, Japan will not emerge in the Pacific for the second time? A particular issue during my Presidential campaign, I wish to point out here, was the security guarantee of the Korean Peninsula by four powers, representing the United States, U.S.S.R.,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and Japan; furthermore, these for powers should establish a non-aggression treaty among themselves to guarantee security for the rest of Asia.
Your experience in Asia during the last 27 years might remind you of bitter memories and sometimes ingratitude, but you must continue to help true democratic forces to take root there. Also keep in mind that the arms and money you gave should not be used by any dictators to oppress and weaken the very people you set out to help. Only when at last democratic forces in Asia take deep root and grow will the sacrifice of 34,000 young Americans in Korea and 45,000 in Vietnam prove to have been worth their heavy cost.
We recognize that American influence on Asian countries is no longer prevalent. But if American influence can be joined with a newly emerging Japanese influence, then America is in a much stronger position than she was in 1950. If and when these two nations demand democratic policy from other Asian leaders, there can hardly be anyone who could refuse such a demand.
North Korea and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are still in favor of the withdrawal of American forces from Korea; but an anticipation that once American forces withdraw from Asia, especially from Korea, Japan will not only rearm but lean toward a militaristic regime is a source of great concern to these Communist nations and allows them second thoughts about the American withdrawal. Although American forces have remained in Korea simply to prevent another invasion from the North, new political developments in Asia present circumstances calling for a complete revaluation of the entire Asian policy by the American people.
Kim Dae jung, who now resides in Washington, was nominated for the presidency of South Korea in 1971 by the New Democratic party.
Advice on Asia
워싱턴-지난 27년간 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해온 미군은, 닉슨 독트린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에서 점진적으로 철군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군사독재정권이 줄지어 생기고 있다. 자랑스러운 미국 민주주의 역사는 아마도 이것을 우호적으로 기록하지 않을 것이며 조만간미국인의 양심에 상처를 줄 것이다; 영향력과 더불어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절망과 좌절된 꿈의 시간을 보낼 때, 자유를 사랑하는 아시아인들은 미국과의 소중했던 우정을 고통스럽게 회고할 것이다.
독재치하에 있는 많은 아시아 국가에는 빵도 자유도 없다. 공산주의는 최소한 빵은 보장하므로, 아시아 국민이 어떤 길로 갈 것인지 당신네 미국은 잘 알 것이다. 만약 아시아가, 특히 한국이, 공산화되면, 일본은 필연적으로 핵무장을 할 것이고 다시 군국주의로 갈 가능성이 높다. 일본이 재무장을 하면, 다시 태평양에서 떠오르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나의 대통령 선거유세에서의 쟁점은-여기서 특히 지적하고 싶은-미국, 소련, 중화인민 공화국, 그리고 일본 등 4대 강국에 의한 한반도 안전보장이었다; 더 나아가, 이들 4대 강국은 상호간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여 나머지 아시아 국가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
당신네 미국이 지난 27년간 아시아에서 겪은 일 중에는 고통스러운 기억도, 그리고 가끔 배은망덕을 맛본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네 미국은 참된 민주 세력이 뿌리를 내리도록 그들을 계속해서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당신들이 준 무기와 돈이 독재자에 의해 당신들이 도우려 한 국민들을 탄압하고 약화시키는데 사용되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한다. 아시아의 민주세력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때에만 한국전에서 전사한 34,000명의 젊은 미군과 베트남에서의 45,000 명의 막대한 미군 희생이 가치있는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
우리는 미국의 대 아시아 영향력이 예전처럼 강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미국의 영향력이 새로이 떠오르는 일본의 영향력과 합쳐진다면, 미국의 영향력은 1950년 당시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된다. 만약 이들 두 나라가 민주정치를 다른 아시아 지도자들에게 요구한다면, 그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지도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북한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여전히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일단 미군이 아시아에서 철수하면, 특히 한국에서 철수하면, 일본이 재무장할 뿐 아니라 군국주의화 할 것으로 예상이 된다. 이는 이 두 공산국가에게는 매우 우려되는 일로 그들은 미군 철수를 재고할 것이다. 비록 미군이 북한의 재침을 막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현재까지 한국에 남아 있으나, 아시아에서의 새로운 정치상황 전개로 인해 미국의 대 아시아 정책 전반에 걸친 철저한 재평가를 요구하는 상황이 도래했다.
현재 워싱턴에 거주하는 김대중은 1971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였다.
1987년 10월~11월 사이 관훈 클럽은 대통령 후보 4인을 차례로 초청, 토론회를 가졌다. 김대중은 10월 30일 토론회를 가졌다. 여기서 김대중은 위의 기고문을 부인하는 발언을 했다.
-일관성문제하고도 관련이 있고 또 앞으로 외교정책 구상문제하고도 관련이 되는 것 같아서 보충해서 여쭤 보겠습니다. 金위원장께서는 지난 27일에 계보대학생들과 만난 자리에서 친미도 반미도 아닌 보다 자주적인 對美외교를 강조했습니다. 저희가 일기로는 金위원장께서 두 차례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에 거의 대부분을 미국에 계셨고 또 그런 점에서 볼 때는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부터 상당히 도움을 받은 그런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난 27일의 발언으로 불 때는 느낌상으로는 조금 미국 쪽에서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으로 해설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는데 金위원장께서 미국에 계실 때는 朝野에 다니면서 軍援삭감이나 경제원조를 중단해서라도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미국이 압력을 넣어야 된다, 이런 주장을 펴오셨는데, 27일 대학생들하고의 토론에서는 조금 다른 뉘앙스의 얘기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외국의 간섭도, 선의의 간섭도 수용을 해야 된다는 소신이 변하신 것인지, 아니면 지지기반을 의식한 전술적인 발언인지 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녁 내가 여기 잘 나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저렇게 자꾸 오해된 일이 여기서 얘기하는 과정에 풀려가는데, 나는 미국서 단 한번도 軍援을 중지하라든가, 그런 얘기 한 일이 없어요. 이게 정부의 정보정치의 조작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나는 그런 일이 없어요. 또 나는 안보에 대해서 미국이 그것을 한국민주화에 대한 압력수단으로 이용하라는 것을 주장 안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반대했어요. (이하 생략. 위의 질문에 대한 김대중의 답변 전체는 자료집 참조)
-제가 기록을 위해서, 1973년 2월 金위원장께서 미국에 당시 망명으로 있을 때, 유신치하에서, 그때 뉴욕 타임즈에 기고한 어페어즈(affairs)난에 金大中 명의의 글에서는 분명히 한국에 정치적인 압력을 가하기 위해서, 군사원조의 중단까지를 고려해서, 그런 문제가 분명히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제가 기록을 위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기록 나온 일이 없어요. 난 그렇게 쓴 일이 없어요.
김대중의 부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기고문 자체를 쓴 일이 없다는 것인가, 아니면 기고문에서 미국에게 對韓 군사원조나 경제원조를 한국정부에 대한 압력수단으로 사용하라고 요구한 내용이 없다는 것인가.
3월 25일 김대중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여러 곳에서 재미교포를 상대로 연설했다. 4월 24일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 대학의 강연에서 김대중은 발언 수위를 높였다.
괴뢰 괴뢰 하는데 무슨 놈의 괴뢰냐. 공산주의란 기정사실을 우리는 27년 간이나 무시해 왔는데 이북은 공산당으로 안정되어 있으나 이남은 민주체제도 안정되지 못했고 오히려 혼란과 불안, 민생고만 극심할 뿐이다. 또한 김일성이 주체성을 확립시킨 것은 잘한 것이 아니냐.
5월 18일 샌프란시스코 국제학생회관 강연에서는 남북연방제를 주장하였다.
내가 집권하면 남북연방제와 대중경제를 실시하겠다. 교포들은 앞날의 수권태세를 확립하여야 하며 그 방법으로는 청와대와 백악관에 계속 편지를 내어 항의하여야 하고 특히 경제 원조의 부정사용에 대하여는 백악관에 이를 항의하여 중단하도록 주장하여야 한다.
7월 6일 김대중은 워싱턴에서 재미교포 김상돈․임창영․안병국․동원모․김성동․정기용 등 30여 명과 함께 ‘한국 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 미국본부(약칭 한민통)’를 결성하여 명예회장에 취임했다.
7월 10일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김대중은 7월 13일 오후 동경에 있는 플라자 호텔에서 배동호, 김재화, 조활준, 김종충, 김군부 등과 만나 한민통 미국 본부 결성 경위를 설명했다. 김대중은 일본에도 같은 조직을 만들 것을 제의하였고 이들은 한민통 일본본부 결성에 합의했다.
김대중은 1987년에 월간지「신동아」에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기고한 바 있다. 여기에는 일본에서 벌인 활동을 설명한 부분이 있다.
박대통령이 유신체제를 선포했을 때 나는 국내에 있지 않았다. 1971년 국회의원 선거당시 박 정권의 자동차 사고를 위장한 살해미수로 얻은 고관절의 부상을 치료받기 위해 일본에 체류하고 있을 때였다. 동경에서 유신선포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곧 박대통령이 사실상 종신독재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으로 간파했다. 이런 체제 아래서는 참된 야당이 설 땅은 존재할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외국에서 반독재활동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다.
나는 미국과 일본 캐나다에 반유신 민주화의 거점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리하여 일차적으로 73년 6월에「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회」라는 조직을 미국에서 결성했다. 똑같은 조직의 동경본부를 만들기 위해 나는 73년 7월에 일본을 방문했다.…
유신 선포 후 본국에서는 정부비판의 소리가 일제히 숨을 죽인 가운데 나는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교포와 미국 일본의 정부 의회 매스컴을 상대로 반유신독재 및 고국의 민주화를 위해 정력적으로 뛰어 다녔다. 나의 이와 같은 해외활동은 영구독재정권을 꿈꾸고 있던 박대통령에게는 커다란 타격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당시 박정권과 유착관계를 이루고 있던 일본 自民黨 정부에 나의 영향력이 침투해 들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박정권에 있어 중대한 위협으로 평가되었다.
나의 활동 결과 일본 자민당 소속의 많은 중진들이 박정권에 대해 비판적으로 돌아섰다. 이를테면 田中派 소속으로「기무라 다께오」란 사람이 있는데,「기무라元帥」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田中派에서는 발언권이 세다. 이 사람이 하루는 나하고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1시간 반가량 내 이야기를 듣고 난 그는『나는 솔직히 말해 한국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고 정부가 하는 대로 지지했으나 이제 보니 그대로 둬서는 안되겠소. 우리 田中派에서 문제 삼아 한국정책을 재고토록 해야겠소. 비록 우방이라고 해도 그토록 독재적이고 부패한 정부를 어찌 지원할 수 있겠소』라고 말했다.
한일회담 당시 농수산대신이었던「아까기 무네노리」(赤城宗德)씨는『일본국회의원들이 한국에 가서 박 정권으로부터 돈을 받고 들어오다가 공항에서 그 돈 가방이 열려 소동을 벌인 일도 있는데 이런 부도덕한 일을 묵과할 수 없다』고 분개했다.
또「사또」(佐藤) 전 수상으로부터 큰 신임을 받았던「기무라 도시오」(木村俊夫)씨는 양심적으로 나를 지지했고, 심지어는 박 정권과도 가까웠던「후꾸다 다께오」전수상같은 사람도 나를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7명 내외의 회원을 가진 자민당 내의「아시아․아프리카 연구회」는 회장인「우쓰노미야 도꾸마」(宇都宮德馬)의원외에 전의원이 나를 지지하고 나섰다. 사회당내의 지지도 컸다.「고노 겐조」(河野謙三)참의원의장도 나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렇게 되니 박정권은 나의 해외활동에 큰 위협을 느꼈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나의 활동을 저지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노력의 하나로 나타난 것이 나에 대한 회유였다.
이 회유는 박 정권과 가까웠던 어느 자민당 소속 중진 의원에 의해 73년 3월 나에게 제시되었다. 내용인즉 내가 만일 귀국하면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장이나 부통령제를 신설하여 부통령을 시켜주겠다는 제의였다.
나는 지금도 이 제의가 어떤 경위로 이루어졌는지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다만 몇 가지 사실을 간접적으로 듣고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내가 접촉하고 있던 일본 정객들 가운데는「후꾸다」전 수상「가네야마」(金山政英) 전 주한일본대사 같은 친한적인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자주 박대통령과도 만나 내 문제를 이야기했다 한다. 그들의 말인즉 한국에서 대통령후보까지 했던 사람이 외국에서 본국정부의 일을 비판하고 다니니 모양도 좋지 않고 또 일본으로서도 한국정부와 협력해 나가는데 지장이 크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박대통령이 나를 달래 귀국토록 하라는 주문이었다.
이에 대해 박대통령은『당신들이 김대중씨에게 귀국하라고 권유 좀 해달라. 나는 그가 귀국해도 처벌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가 귀국 후의 신분보장과 직책 즉 남북조절위원장이나 부통령 자리의 제공이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이를 나에게 제의한 중진은 아주 진지한 태도로 내가 이 제의를 받아들여 해외활동을 중지하고 귀국할 것을 권유하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나는 무엇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유신체제가 지속하는 한 이 같은 나의 활동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