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박근혜대통령이 삼성, 현대를 비롯한 우리나라 재벌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메디치가 처럼 사회에 많은 공헌을 해달라”고 당부한 사실이 있다.
난 이 이야기를 듣고 왜 하필이면 메디치가를 본받으라고 했을까? 하는 의구심과 동시에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도 메디치 보다 더 훌륭한 부자 가문이 많은데 하면서......
물론 메디치가가 인류 문명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메디치가는 이탈리아 중부지방 피렌체 메디치은행 1397년 설립한 조반니 디 비치 테 메디치(1360~1429)부터 메디치가의 마지막 1743년 안나 마리아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약 350여 년간 유럽 최고 부자의 지위를 누리면서 근대 인류사에 많은 공을 남김 것은 실로 대단한 사실이다.
유럽 최고의 명문가로서 이 가문이 인류에게 남긴 공적은 수없이 많다.
업적을 대충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라고 말 할 수 있다.
1. 세계 최고의 부자 가문
2. 16세기 교황을 두 명 배출(교황 레오 10세(1475-1521, 재위: 1513년 3월 9일 - 1521년 12월 1일 ),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년 11월 26일 ~ 1534년 9월 25일) 이 두 교황은 4촌 임)
3. 프랑스 왕실에 두 명을 시집보낸 왕실 가문(3명의 아들을 차례로 왕에 등극시킨 '검은 왕비'라 불리는 카테리나 데 메디치)
4. 피렌체 예술가와 학자를 적극 지원하여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1) 미켙란제로(1475. 3. 6 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 카프레세~ 1564. 2. 18 로마.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건축가·시인.)를 양자로 받아들여 세계 최고의 예술가로 길러낸 것을 비롯하여 세계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히는 <암굴의 성모, 1483작, 루브르박물관 소장>, <최후의 만찬, 1495-1498>, <모나리자, 1500-1503, 루브르 박물관 소장>를 그린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천재 화가를 비롯한 마사초, 브루넬레스키, 미켈로초, 도나텔로, 보티첼리, 라파엘 등 많은 화가들을 후원함
2) 지동설을 주장해 교황청의 견제와 탄압을 받았던 갈리레이 갈릴레오를 후원하여 망원경 및 천문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으며,
3) 정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니콜러 마키아벨리를 지원하여 정치론의 교과서라 불리는 <군주론>을 저작하게 했다. 그는 이 책을 메디치가에 헌정했다.
4) 오늘날 우리가 아는 오페라가 처음 탄생한 곳도 메디치 가문이 궁정이었고,
5) 포크와 나이프를 쓰는 교양 있는 서양식 식사 예법이 전 유럽으로 확산된 것도 메디치가 사람들의 공헌이었다.
6) 1492년 콜롬버스에 의해 발견된 신대륙의 이름이 ‘아메리카’로 불리게 된 까닭도 메디치 가문과 연관이 있다.
7) 예술에 대한 끝없는 관심과 후원, 인문학과 고학에 대한 경외는 르네상스라는 시대정신의 요람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이 근대사회의 문화적 근간이 된 르네상스 시대는 메디치 가문이 있었기에 그렇게 찬란하게 빛날 수 있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에 의해 기획된 거대한 문화 공간이였다.
메디치가가 없었다면 피렌체가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메디치 가문이 없었다면 르네상스도 사뭇 다른 양태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이 가문은 막강한 재력으로 화가, 조각가, 발명가, 탐험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계획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 등 어느 분야에도 앞서가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후원한 영향으로 증세 르네상스를 꽃피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 가문의 모든 재산과 예술품을 피렌체 밖으로 반출하지 않는 조건으로 전부 피렌체 시민들에게 기증하고 메디치 가문의 종말을 고한다.
오늘날까지도 이 진귀하고 찬란한 예술품을 관람하러 세계에서 밀려온 관광객 수입이 피란체 지방 정부의 주수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陽地도 있는가 하면 비난의 대상인 陰地도 있다.
메디치의 정당하지 못한 것을 요약하면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부의 축적 과정이 정당하지 못했다.
1) 메디치가는 사채업자에서 출발했다.
당시 시대적 배경은 기독교 교리에 따라 이자 수입을 추구하는 은행업을 ‘창조의 질서’에 역행하는 죄악이라고 보던 때이다.
즉 열심히 땀 흘려 일하여 얻은 소득만 인정받던 시기에 비밀리에 사채업을 했고 이것이 성장하면서 은행업으로 변신했다.
2) 부정, 불법과 결탁하여 부를 축척했다.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이 되기 위해 가짜 귀족이며, 해적 출신이며, 가짜 박사학위를 매입한 <발다사레 코사>라는 전력이 지분한 전과자 인물에게 대출 목적이 “추기경 자리를 매수 한다”라는 말 한마디를 듣고 아무런 담보도 설정하지 않고 조건없이 거액을 대출해 준다.
그는 이 거액으로 추기경 자리를 매수했으며, 후일 대립 교황이라 불리는 요한네스 23세(재위 1410~1415) 법명으로 교황자리에 오른다.
물론 그는 1414년 11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로마 지기스문트황제(1368~1437)에게 강제 파문되지만.......
2. 非倫理的인 생활과 무절제(無節制)한 생활(酒, 色)로 말기에 이르러서는 시민들의 원성을 많이 샀다.
1) 피렌체 시민들의 민중 봉기로 많은 물건들이 약탈당한다.
2) 무절제한 생활(酒, 色)로 과다 비만이 되어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자 의사가 처방한 걷기 운동을 위하여 코시모 3세는 선조들이 후원하여 매집한 명화들을 전시할 피트니스센터로 만들기로 한다.
시민들의 해코지가 무서워 밖에 나가서 운동하지 못하고 800m나 되는 이 긴 복도에서 걷기 운동을 할 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메디치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 모든 조각품과 그림을 그곳에 일렬로 전시하도록 했다.
르네상스 예술이 피렌체 시민의 자부심이 되도록 배려했던 메디치 가문의 위대한 전통은 안타깝게도 이제 비만에 시달리는 한 개인의 시각적 즐거움을 위한 오락거리로 전락되고 말았다.
메디치가를 요약하면 초기에는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공헌한 혁혁한 공은 있지만
후대에 와서는 민중들로부터 존경 받지 못하고 비난의 대상으로 전략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 경주 최부자는 어떤가?
경주최씨 시조 고운 최치원 선생의 17대 손인 1대 정무공 최진립장군(1568-1636)부터 마지막 부자인 12대 최준(참봉)(1884-1970)까지 메디치가와 비슷한 약 350여 간 만석꾼으로 당대 최고의 부를 유지하며 주위 사람들로부터 좋은 대우와 많은 존경을 받았다.
최부자는 부와 존경의 비결은 바로 가정교육의 근간인 여섯 가지 수신(修身) 육연(六然)과 여섯 가지 행동지침격인 육훈(六訓)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육연’은 이 집안의 가정교육 근간(根幹)이자, 인품을 닦는 수신(修身) 철학이기도 하였다.
첫째는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낸다.
둘째는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한다.
셋째는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에는 맑게 지낸다.
넷째는 유사감연(有事敢然).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한다.
다섯째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에는 담담하게 행동한다.
여섯째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에는 태연하게 행동한다.
어떤 일이 실패했다고 해서 낙담하거나 절망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상이 6가지 연(然)이다.
또 하나는 행동지침격인 육훈(六訓)은 우리는 누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그 부를 자손대대로 지속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재산이 과유불급이 되지 않도록 절제하였다.
최부자는 이 육훈을 통하여 집안을 다스렸다. (일전에 언급하였기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1. 과거(科擧)를 보되 진사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2. 만석(萬石)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3. 흉년(凶年)에는 땅을 들리지 말라.
4.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5. 주변 100리 內에는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6.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이 얼마나 위대한 가정 교육이며 타의 모범이 되는가?
경주 최부자도 메디치가와 같이 마지막 12대 최준 대에 와서는 토지, 先山,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귀중한 도서류 등 전 재산을 지금의 영남대학교 전신인 대구대학 설립에 투입하고 막을 내렸다.
하지만 현재 재산은 없어도 아직도 경주 지방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전남 구례군의 운조류(雲鳥樓)는 어떠한가?
1779년(영조 52)에 당시 삼수부사를 지낸 문화류씨 류이주(柳爾胄)가 조선의 최고 길지라고 여기는 금환낙지(金環落地)에 세운 운조루는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설치한 <타인능해(他人能解)>!
즉 굶어가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나무 쌀독을 비치하여 일일 두 가마 정도의 쌀을 넣어두어 누구든지 식량이 없는 사람은 쌀을 가져가게 한 온정시혜 정신!
없는 사람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하여 쌀 뒤주를 잘 보이지 않는 외진 곳에 설치하여 구멍을 적당하게 작게 하여 두 손은 한꺼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적당한 양의 쌀만 가져가게 한 배려의 정신!
동학운동, 빨치산활동, 활빈당 활동 등 사회적 혼란 시기에 이 무리들이 저녁마다 출몰하여 민가를 덮 칠 때도 유독 이 집만은 온전히 보존된 것만 보아도 이 가문이 얼마나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덕을 쌓았는지 알 수 있다.
또 조선 중기 가사문학의 대부라 일컫는 고산 윤선도(尹善道1578-1671)의 해남 녹우당은 어떤가?
조선 중기 우리나라 가사문학을 꽃피게 한 업적은 차지하고라도 백성들의 기근을 해결하기 위한 선견지명으로 전남 지방에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바다를 간척을 하여 많은 농경지를 확보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농사를 짓게 한 시대를 앞서간 개척정신! 이런 부자들의 위대한 정신과 서민들을 배려한 따뜻한 정신은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우리나라에도 부를 이용하여 국가와 사회에 훌륭한 영향을 끼친 좋은 부자들이 많음에도 굳이 유럽의 부자를 인용한 박대통령에게 조금은 아쉬움이 있다.
아! 어디 유렵에만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있었던가?
이것이 바로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아니던가?
부정하고 부도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유럽의 부자들 보다는 부는 좀 적어도 정당한 방법으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가면서 부를 축적한 우리나라 부자들이 더 자랑스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부자들도 세계 부자들 대열에 합류시켜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이 차제에 삼성을 비롯한 우리나라 신흥부자들은 각성하기 바라는 마음도 있다.
정경유착을 통한 부도덕한 부 축적!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형제간의 재산 싸움!
전래문화를 어긴 이혼이 무슨 자랑인양 지면을 장식하는 꼴 볼견 건들!
공익인 회사가 마치 자기 회사인양 직원들을 우습게 아는 땅콩 사건들!!!!
신흥 재벌들에게 내 부탁하나있다.
前記의 부자들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으라!!!
즉 국민들에게 손가락 받을 짓 하지 말고 존경 받을 짓 좀 해라!!!!!!!!!!!!
나 백수인데 일자리 하나 주면 더더욱 좋고......ㅎ ㅎ
감사합니다.
泰山鳴動鼠一匹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