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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uropa Universalis 원문보기 글쓴이: 앙겔루스 노부스
말 나온김에 좀 더 끄적여 봅니다.
에릭 홉스봄이 장기 19세기(1789~1914), 단기 20세기(1914~1991)개념을 사용한 이래, 물리적 연도로서의 세기가 아닌, 시대적 통합성으로서의 세기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그렇게 어색하지는 않은 일이 되었죠. 프랑스의 경우는 이 19세기가 좀 더 길었는데, 1789년의 혁명을 출발점으로 하는 것은 비슷합니다만, 그 종결을 1945년으로 잡고 보기도 합니다.
이유는 프랑스의 19세기~20세기초반이 극심한 좌우익갈등으로 점철되었기 때문이죠. 프랑스혁명, 하니까 혁명으로 구귀족들을 싸그리 날려버리고 혁명정신의 프랑스! 로 다시 태어났다, 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천만의 말씀, 어림없는 소리! 일 뿐이죠. 지방 각지에서는 끊임없는 무력충돌과 소요가 있었는데, 이 무력충돌의 주체는 결코 귀족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농민들이 더 적극적으로 나선 경우도 많은데, 그 중요한 이유는 바로 종교였죠. 혁명정부는 계몽사상에 기반해 있었고, 그렇기에 캐톨릭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으며, 캐톨릭이 갖고 있던 각종 특권을 몰수하려고 시도했는데, 이것에 독실한 지역의 농민들이 저항한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한거지만, 프랑스의 귀족들이 전부 후레자식들이었던건 절대 아니고, 인망을 모으고 있던 귀족들을 중심으로 오히려 농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귀족들을 지키려 한 경우도 많았죠. 그렇기에, 혁명정부 초창기에는 프랑스의 자랑인 집권적 관료시스템이 거의 작동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이러한 통제체계를 복원하는데만도 혁명정부는 굉장히 많은 노력과 공을 들여야 했죠. 괜히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한건 아닙니다. 로베스피에르가 혁명의 이상에 사로잡혀 미친게 아니고, 이렇게 수도없이 많은 적들에 둘러쌓여서
"오히려 로베스피에르와 혁명급진파 자신이 공포에 휩싸였던"
측면도 있었던 것이죠. "혁명의 적"들이 워낙 많다보니... 시대와 장소를 넘어 그런 면에서 보자면, 혁명의 적들을 결국 물리치고 혁명을 끝끝내 (비교적)비타협적으로 관철시킨 레닌동무가 실로 대단한 인물이기도 할테고...
하여튼 혁명은 결코 단일하고 통합적으로 진행된건 아니었고, 다들 아시듯이 로베스피에르의 급진화에 대한 반동으로 유화적인 통령정부가 들어오고, 심지어 권위주의적인 나폴레옹정권이 들어오면서 부침을 겪었습니다만, 어떤 정권이 들어오든 보수파들의 입장에선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죠. 그리고, 그런 와중에, 알렉산드르 1세가 파리에 입성할 때 파리시민들의 열화같은 환성이 터졌던 것이고...
멀리갈 것 없이 2012년 12월 19일 밤에, 한국인의 반은 절망에 탄식했지만, 반은 열화와같이 환호했던걸 기억하시면... 사실 그 때문에, 최근의 한국의 정치갈등이 마치 프랑스의 장기 19세기가 한국에 재래하는거 아니냐, 하는 불안감을 들게 하는 것이기도 한데...
각설하고, 하여튼, 이 프랑스대혁명 25년은 출발점에 지나지 않았죠. 그 뒤로도 프랑스의 정치갈등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호이시리즈나 빅토리아 시리즈를 하다보면, 무슨무슨 사건, 무슨무슨 사태, 하면서 프랑스에 자꾸 이벤트가 터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거 대부분이 정치갈등, 정치소욥니다. 그나마, 비스마르크에게 패전(솔까 독일한테 진거 아니잖아요?)하고 들어선 제 3공화국시기에는 그나마 안정이 되었던 편임에도 정치소요는 극심했죠.
프랑스혁명이 패하고 들어선 루이 18세는 그나마 합리적인 면이 있어서... 반대파를 너무 몰아붙이면 다시 혁명이 날 지 모르니, 유화적으로 임했습니다만, 이 양반이 몇년못가 죽고 들어선 샤를 10세는 철저한 왕당파였죠. 그리고, 그의 정책에 대한 반발로 1830년 혁명이 일어났는데... 이 혁명의 결과로 들어선 7월왕정은 그야말로 어정쩡한 타협일 뿐이었는데다 시민의 왕을 자처한 루이 필리프의 리더쉽도 시원치 않아서, 정치소요를 막을 수가 없었고...
유럽 전체가 다시한번 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쌓이게 만든 1848년에 또다시 거~하게 혁명이 터졌죠. 그러나, 이 혁명도 전유럽에서 패퇴했고... 프로이센에선 권위주의자들의 완전승리, 오스트리아에서는 포풍간지 러시아군 하앍하앍~ 이었고, 프랑스에서는 잘 아시다시피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죽쒀서 개준꼴이 되어버렸죠.
루이 나폴레옹 시기도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지만, 멕시코 원정부터 뭔가 사람이 좀 이상해지더니, 민족주의의 폭풍이 몰아닥치는 와중에, 이탈리아, 독일에서 스텝이 꼬인 루이나폴레옹이 자빠지면서 결국 제2제정도 붕괴... 그리고, 이 과정에서 또한번 좌우익갈등이 대폭발한게
파리꼬뮌
이었죠. 추산 3만명 이상 학살로 끝난...
어쨌건 이 후로 프랑스에서 군주주의는 영원히(일단은?) 끝났고, 우익들은 왕당파에서 반동보수파로 색채가 변하게 되었긴 하지만, 좌우갈등은 수그러들줄을 몰랐죠. 위에도 말했지만, 이 과정에서 종교집단은 큰 역할을 했는데, 전통적인, 교회의 "교육권" 을 국가가회수하는 문제를 둘러싼 "교권투쟁" 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 외에 불랑제 장군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고, 드레퓌스사건또한 넓게 보면 좌우익간의 이념투쟁의 성격을 짙게 띄고 있죠. 3공화정시기에 급성장한 노동운동도 한 몫을 했고(영화 제르미날에 이 시기 프랑스의 노동운동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1차대전에서 승리하면서 대 프랑스의 영광은 크게 회복되긴 했지만, 3공화정의 혼미는 수그러들질 않았습니다. 정치갈등은 끊이질 않았고, 유력 정치인들의 암살도 잇달았죠. 그 와중에 2차대전이 벌어졌고... 패배한 프랑스는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할 지를 놓고 또 한번 기로에 서게 되었죠.
그 와중에 주도권을 잡은 우익은 대독협력노선을 취하였죠.
여담으로, 그 시기에 민주주의는 근본적인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1차대전이 끝난후 대부분이 민주국가였던 유럽에서, 2차대전무렵에 확고한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던 나라는 영국프랑스베네룩스노르딕지역 이외에는 없었죠. 동유럽의 정권들은 전부 파쇼화하였고, 에스파냐에선 우익권위주의의 승리... 남아메리카의 제국에서도 대개 친나치적 우익국가들이 우세해졌구요.
그런 상황에서, 새로이 세계를 지배할 것처럼 여겨졌던 "신우익" 의 상징이 나치독일이었고, 사실 전~~~~혀 민주주의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프랑스의 우익으로서는 이 새로운 시대의 이념으로 여겨졌던, 신권위주의를 추종하는 것이 국제정세로 보나, 국내에서의 좌우투쟁으로 보나 전혀 불리할 게 없었던 것이죠.
민주주의를 "당위" 로 여기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안됩니다. 당시는 코뮤니즘과 파시즘앞에 민주주의는 미래가 없는 이념으로 여겨졌던 시대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바로 비시정권이 착수한 것이 좌익의 색출과 박멸입니다. 10만명에 이르는 좌익인사들이 추방, 처형, 투옥되어 좌익들은 큰 위기에 처했죠.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는 프랑스의 저항신화의 상징으로 되어 되게 미화된 측면이 있지만... 이들중 상당수는 이러한 비시정권의 탄압에 맞서 조직된 저항무장세력인 측면이 있습니다. 레지스탕스의 대부분이 좌익이었던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죠. 물론 우익레지스탕스도 있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아주 긴 사설끝에 드디어 드골이 등장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드골은 우익입니다. 우익의 성격을 이 자리에서 본질적으로 논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볍게 논하고는 넘어가야 할 것은
"나라를 팔아먹은 페탱과 나라를 구한 드 골을 어떻게 우익이란 틀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매우 중대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근대우익의 지향을 아주 거칠게 두 가지로 정리하자면 국가 - 질서에의 충성앞에 모든 것을 바치는 경향성과
"좌익의 위협에 대한 반동운동으로서의 우익"
이렇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우익중의 우익이랄 수 있는 히틀러세력은 저러한 두가지의 지향이 매우 강하면서, 그것을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해 냈다는 점에서, 여러 전쟁 - 인도적 범죄를 빼고 생각한다면, 우익역사에서 매우 강력하고도 획기적인 세력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아직도 신나치들이 활보할 수 있는거죠. 우익의 영웅일 수 밖에 없거든요.
그리고, 지금 논의되는, 페탱과 드 골이 어떻게 다른가는 이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드 골도 당연히 좌익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지금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좌익따위가 문제냐! 라는게 드 골인거고... 이왕 나라가 망한거 좌익이라도 조져보자, 라는게 페탱이다, 라고 단순하게 정리하면 되겠습니다.
더 근사한 예로 이승만과 김구를 들 수 있겠죠. 김구는 백색테러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혐의가 있으며 임정때도 좌익을 혐오하여 임정내에서 좌익을 몰아내는데 앞장서기도 했던 극우주의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분단의 위기앞에서 반좌익적 태도를 철회함으로서, 민족통합의 상징이 되었고, 아직도 많은 존경을 받게 되는 그런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드골입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빨갱이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라는 점에서 페탱인거죠. 물론, 이승만이 페탱처럼 극악한 반역행위를 저지른건 아니지만,
반공주의적 우익 VS 애국주의적 우익
이라는 근대우익의 큰 두 갈래라는 점에서 볼 때 이렇게 대치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드 골이 일단 프랑스의 우익을 구한것은, 우익 주류가, 이왕 패한거 나치에 협력하여 반공운동에 전념하자, 라며 체념주의적으로 행동할 때, 그는 프랑스의 이름으로 맞서 싸울것을 택했습니다. 아래는 드골의 1940년 6월 22일의 연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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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일단 프랑스 우익의 입장에서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죠. 우익의 주류가 체념하고 패전을 받아들일때, 결코 패전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전후 프랑스 우익이야말로 나라를 구한 세력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했다는 정파적 측면이 있습니다.
프랑스 국가측면에서는, 패배하고 심지어 나치독일의 전쟁수행에 프랑스인과 프랑스땅의 자원들이 지원되었음에도 드 골의 탁월한 정치력으로 인해 승전국으로서, 나아가 독일에 대한 점령국으로서, 더 나아가 유엔의 상임이사국의 지위까지 얻게 했다는 점에서, 이는 실로 프랑스 국가를 구한 역사적 결단이자 용기라고 말하지 않을수가 없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대독협력자 처벌은 유명하죠. 그것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긴 합니다만, 결국 레지스탕스 신화, 드골 신화와 함께, 대독협력자 처벌이라는 3대신화에 바탕하여, 현대프랑스는 민주주의의 고향이자 종주국이라는 명예를 유지하면서 다시 태어날 수 있었고, 그것을 수행한 드 골은 여러 의미에서 프랑스의 위대한 영웅일 수 밖에 없는 것일겁니다. 오히려 나폴레옹보다 위대하면 위대했지 못할것은 없을 정도로...
전후에 또 하나 남은 문제는, 국내에서 가장 극렬하게 저항했던 좌익 레지스탕스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제가 잘은 모르기에 할 말은 없지만, 하여튼 드골이 이들도 적절히 제압 통제하여, 프랑스의 통합과 질서를 회복시킨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프랑스의 "장기 19세기" 는, 드 골이라는 인물의 탁월한 용기와 결단에 이르러 드디어 수습될 수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구조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영웅주의 의지주의에 반대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결국 역사와 세계라는 것이 어느 하나의 관점만으로 이해될 수 없다고 할 때, 드 골이라는 인물이 보였던 비범하고도 탁월한 용기와 결단은 비록 저와 다른 우익의 인물이라 할 지언정 그 어떤 칭송을 바쳐도 모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캐 위너(키 196)... 뭐 이건 너무 커서 부담시러운가...--
첫댓글 제 지식이 부족하여, 중간중간 비는 곳이 많습니다. 다만 제가 쓰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있다보니...-- 그런 부분은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고, 더 깊은 학식을 지니신 분들께서 메워주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드골 때 알제리에서 쿠데타가 일어난걸 막기도 했져. 연설 한방으로 저지
드골이 프랑스를 세번 구했다, 라고 하는데, 본문 - 한국사람님 댓글 - 첝님 댓글로 다 나왔네요~
공수부대가 쿠데타에 가담해서 파리에는 공수부대가 파리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정도였는데 드골이 티비에 연설한번해주니까 일반징집병들이 쿠데타수뇌부에 반발해서 무산됫죠.
68혁명 때도 적절한 치고빠지기를...
그 때도 프랑스의 국론분열위기를 드골의 결단으로 막을 수 있었죠. 솔까 따지고 보면 좌익한테 빅엿을 먹인거기도 하고, 코뮤니스트들의 뒷통수치기도 있었긴 하지만...-- 하여튼 소셜리스트 입장에서 코뮤니스트들은 이쁘게 볼 수가 없다능...
그래도 쏘련은 하앍하앍~
프랑스 68혁명 당시 코뮤니스트 당이 오히려 대중운동에 소극적으로 나왔다고 본 것 같군요. 으아니 프랑스 적화의 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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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말 유명하죠. 우익이라면 모름지기 사회통합을 최 우선으로 해야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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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자처벌은 전형적인 빨갱이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부역자 청산은 드골손을 떠난거였죠. 프랑스 공산당과 좌익세력들은 나치에게 안긴 우익들을 절멸시키고자 했고. 어느정도 성공은 했습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런식의 처벌은 마녀사냥으로 귀결될수밖에 없던거였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을수는 없었긴 하겠죠... 과도한 측면은 과도한 측면대로 비판해야하지만, 그러한 "명백한 국가반역자" 들에 대해 대대적인 처벌을 하지 않고, 새로운 국가가 정당성을 갖기는 어려워지는 측면이 있으니까...
드골은 큰그릇을 가진 대정치가로 뛰어난 외교가 이기도 했지요. 적어도 그는 스탈린에게 함부로 확언이나 약속을 하지 않는 현명함을 보였고. 가장 큰 결단은 독일-프랑스간의 우호적인 틀을 만드는데 성공했다는점이지요. 이것은 서독에는 아데나워를 프랑스에는 드골이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였을겁니다. 그리고 드골은 자신의 인기를 독재적인 수단으로 삼았지만 패배하자 깨끗히 물러났다는점에서 위대한사람이지요
네. 오늘날의 유럽합중국에의 꿈도 결국은 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죠. 물론 드골주의같은 독자노선은 좀 고집스러웠다, 할 만한 면도 있겠지만서두...-- 유럽합중주의의 이면정도로 보자면 이해하지 못할것은 아닐지도...
작년도에 극단의 시대를 읽은 기억이 새록... 우익 인사로서는 매우 건전하다고 인상을 받은 사람 중 하나가 드골이었죠.
세상에 저런 수준높은 우익만 있다면 아마 좌익이 멸망할지도 모르죠~
뭐 좌익도 당하고만 있진 않고 저렇게 뛰어난 인물들을 양성해낼 수 있으면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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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평가의 어울리는 인물은 아마 처칠아닐까 합니다. 처칠이야말로 스스로가 인정했듯이 히틀러가 아니였으면 결코 영웅이 될수없었던인물이지요. 전후처리및 정치재편 복지향상등 국가전반을 다시짠인물은 바로 드골이였죠. 사실 지금의 프랑스는 드골 이후와 이전으로 나뉘며. 드골이후는 지금에는 오히려 드골같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의 부재로 국정혼란을 겪는다는 소리가있지요. 퐁피두, 미테랑모두 지도자적측면에서는 사르코지랑은 차원이 달랐으니까요
좌익이 국내 레지스탕스를 주도해서 지금도 프랑스에서 공산당이나 사회주의 계열이 힘이 센 걸로 알고 있어요.
전후에도 'ㅋㅋ 너님 전쟁때 뭐함' 요러면 자유프랑스군 소속 드골의 직속 부하아니면 아닥되버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