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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 5일
오페라 ‘영웅 이순신’ 이탈리아에서 초연
오페라 ‘이순신’의 한 장면.
한국과 이탈리아의 합작 오페라 ‘영웅
이순신(L`erioco Yi Sun Sin)’이
2000년 12월 5일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로마의 ‘테아트로 델 오페라’
에서 막을 올렸다.
이날 극장을 찾은 1400여명의 이탈리
아인 초청 관객들은 장면이
바뀔때마다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성곡오페라단에 의해 이탈리아어로
무대에 올려진 이 작품은 기존의
오페라 ‘이순신’을 곡 자체를 새로 쓰는
등 재창작에 가까울 정도로 뜯어 고친
것이다.
작곡은 브루크너의 유족들로부터 위촉
받아 그의 교향곡 제9번 피날레 부분을
공동으로 재작곡한 바 있는 이탈리아인
작곡가 주세페 마주카와 니콜라 사말레
등 2명이 맡았다.
이날 무대에서 주역은 한국인과 이탈리
아인이 고루 맡았다. 첫날 공연에서 이순
신역은 클라우디오 디 세니, 부인역은
토리 롬바르도지 클라우디오, 기생
초월역은 카티아 마르티나, 선조역은
류현승, 원균역은 김승철 등이 맡아
호연했다.
오페라 ‘이순신’은 1998년 이순신 장군
순국 400주년을 기념해 충남 아산시
현충사에서 초연된 이후 1999년 서울
국립극장 등 전국 각지에서 순회
공연됐다.
오페라 "이순신"의 세계화를 꿈꾼다 / 제작자 백기현 교수
▶ 2014년 오늘,
대한항공 086편 회항 사건 발생.
천민자본주의에 관한 고상한 해설!
http://naver.me/Gu9Lgxof
그러나 아래의 경우는 '패악질'!(못 배워 먹은)
▶ 2013년 오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제8대 대통령 넬슨 만델라 (Nelson Rolihlahla Mandela)남아공 요하네스버그 호턴 에스타테 에서사망 (1918년 7월 18일 남아공 음베조 에서 출생~ )
대통령 임기 1994년 5월 10일 ~ 1999년 6월 14일 /1962년 8월 5일 반역죄로 체포되고 1964년 무기 징역을 선고 받았으나, 27년 만인 1990년 2월 11일에 출소했다. 1993년 데 클레르크 대통령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1994년 실시된 평등 선거에서 AN C는 62%를 득표하여 AN C의 지도자인 넬슨 만델라는 1994년 5월 27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진실과
화해위원회(T R C)를 결성하여 용서와 화해를 강조 하는 과거사 청산을 실시했다.
아즈위 Azwie (희망).
1964년, 종신형을 선고 받고,
절해의 고도 루벤섬 감옥으로 투옥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감옥은 두다리 뻗고 제대로 누울수 조차 없을 정도로 좁았다.
변기로 찌그러진 양동이 하나를 감방 구석에 던저 넣어 주었습니다.
면회와 편지는 6개월에 한번 정도만 허락 되었습니다
간수들은 걸핏하면 그를 끌어다가 고문하고 짓밟고 폭력을 가했다.
이미 사람으로서의 품격과 지위는 상실되었고
견딜수 없는 모욕과 고통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감옥에 끌려간후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살던집을 빼앗기고
흑인들이 모여사는 변두리 땅으로 쫓겨났습니다.
감옥살이 4년 되던해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이듬해 큰아들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장례식에도 참석 할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감옥살이 14년이 되던 해에 큰 딸이 결혼을 해서 아기를 데리고 할아버지에게 면회를 왔습니다.
그리고 큰 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아버지는 말없이 땟물이 찌들은 윗 주머니에서 꼬깃 꼬깃 꾸겨진 종이 조각 하나를 꺼내어 딸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딸은
그종이 조각에 쓰여진 글자를 보는 순간 눈물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글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아즈위 Azwie (희망)
그는 그후로
온갖 치욕을 다 당하면서 13년 간이나 옥살이를 더 하고 나서야 마침내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1964년부터 1990년까지 무려 27년 간이나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44세에 억울한 감옥살이를 시작해서 71세에 풀려 났습니다.
그는
남아공 흑백 분리 정책을 철폐하고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당선 되었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되어서
자기를 박해하고 고통과 치욕을 주었던 정적들을 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인간의 고고한 삶의 방식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때
세계 언론은 이를 가리켜 인간의 품격을 한계단 올려준 놓은 사람이라고 존경을 드렸습니다.
이가 바로 넬슨만델라 입니다.
그 오랜 세월 어떻게 절망의 세월을 견디어 낼 수 있었을까?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위대한 변화가 반드시 일어 나리라는 아즈위(희망)을 한 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2010년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별세
▶2000년 탤런트 최진실과 프로야구선수
조성민 선수 결혼
▶1997년 고려증권 영업 정지
▶1995년 노태우 전대통령 재벌총수
등으로부터 2,838억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
▶1994년 유럽안보협력회의,
헝가리 부다페스트서 개막
▶1993년 라파엘 칼데라,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당선
1993년 12월 5일 실시된 남미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선거에서 지난 1969년∼74년 집권했던 라파엘 칼데라 후보(77)가 당선됐다. 칼데라는 지난 1946년 자신이 직접 창당한 기독민주당(COPEI)에서 당권경쟁을 벌이다 1993년초 축출된 이후 `수렴운동`이라는 신당을 창당, 대권도전에 성공해 25년 만에 다시 권좌에 오르게 됐다.
베네수엘라의 농업 중심지인 야라쿠이주 산 펠리페시에서 태어난 칼데라는 중부베네수엘라대에서 박사학위를 딴 뒤 잠시 대학에서 사회학과 노동문제를 가르쳤다. 지난 1946년 기독민주당(COPEI)을 창당했으며 COPEI 후보로 다섯차례 대통령 선거에 출마, 지난 1968년 처음으로 승리한 뒤 1974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칼데라는 지난 1958년 베네수엘라의 마지막 군사정권 지도자인 마르코스 페레스 히메네스가 물러나자 사회민주행동당 지도자들과 신생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협력키로 하는 `푼토 피효 조약`의 산파역을 맡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칼데라는 지난 1969년부터 1974년까지의 대통령 재임시절 좌익세력의 반란을 강력 진압한 데 이어 경제여건도 견실하게 만들어 후임인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에게 정권을 넘겼다.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했던 칼데라는 1993년 2월 두차례의 불발 쿠데타 발생 후 현 정치체제를 강력히 비판하며 다시 정치일선에 복귀했었다.
▶1991년 부시 미국 대통령, 국방부에
미사일방위체제 개발 위임하는 법안 서명
▶1988년 금리자유화 실시
▶1988년 강영훈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84년 대만 이쿤 탄광에서 가스 폭발.
95명 사망
▶1983년 금강 하구 둑공사 착공
▶1982년 아랍연맹 사절단 중국방문
▶1981년 한국 최초의 TV 공익광고 방송
▶1981년 루마니아에 동구권서
첫 반핵시위
▶1980년 바르샤바조약국 모스크바서
정상회담. 동맹국의 결속 강화
▶ 1980년 오늘,
존 레논, 뉴욕에서 마크 채프먼에게 암살.
▶1975년 영동선 완전 전철화 개통
영동선 운행 모습
▶1970년 소련 지식인 30여명,
제헌 34주년 맞아 침묵데모
▶1968년 국민교육헌장 선포
1968년 12월 5일 오전 9시30분,
서울 시민회관 대강당에서
국민교육헌장 선포식이 열렸다.
▶1965년 미국의 생리학자 조셉 얼랜저
사망
▶1962년 계엄령 해제1961년청계천
복개도로 개통
청계천 복개후 고가도로 공사중
(세운상가 주변)
- 1950년경 청계천 모습
- 복개공사중인 모습
청계 고가도로 모습
청계천 복원 사업 (2003.7.1.~205.10.1.)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2710&cid=46624&categoryId=46624
▶1961년 제1회 수출의 날 기념일
▶1961년 미국 새 대외원조기관(AID)
발족
▶1961년 주(駐)콩고 유엔군,
카탕카군과 충돌
▶1957년 소련, 최초의 원자력
쇄빙선(碎氷船) 레닌호 진수
▶1957년 국회 동성동본금혼안 통과
▶ 1952년 오늘,
영국 런던에 스모그 현상/ 이날부터 9일까지 이어진, 낮에도
전조등을 켜야 했던 스모그 현상으로 4,000여명이 사망했는데 원인은 자동차배기가스로 밝혀졌다.
1952년 12월4일 영국 런던. 쾌청하던 날씨가 정오쯤 짙은 안개로 바뀌었다. 따뜻한 바람도 멈추고 기온이 떨어졌다. 날이 저물어 냉기가 퍼지자 각 가정에서는 석탄을 마구 땠다. 런던 시민들은 밤새 콜록거렸다.
하루가 지난 12월5일, 도시가 스모그에 덮였다. 굴뚝 수십만개가 내뿜는 연기와 아황산가스가 대기로 빠져나가지 못한 채 안개와 뒤섞여 버렸기 때문이다.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스모그에 보행자의 통행조차 어려웠다. 차량들은 대낮에도 전조등을 켰다. 런던 외곽으로 퍼진 스모그 때문에 교외 역에서 열차충돌사건도 일어났다. 템스강의 선박운행도 금지됐다.
병원은 환자들로 넘쳐났다. 저항력이 약한 유아나 노약자들이 기관지와 호흡기 질환, 폐렴으로 죽었다. 남서풍이 불었던 9일 런던을 빠져나가기까지 5일간 스모그는 런던 시민 915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후유증은 더 컸다. 12월 말까지 누계사망자가 4,000여명선을 넘고 이듬해에는 8,000여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런던 시민 1만 2,,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모그 피해는 런던 교외는 물론 영불 해협을 넘어 프랑스ㆍ벨기에ㆍ네덜란드의 기후에도 영향을 미쳤다. 날씨와 기후, 환경 보전에 대한 국제적 협력의 필요성이 크게 부각된 것도 런던 스모그 이후다.
스모그는 남의 일이 아니다. 서울의 스모그는 공장과 가정의 매연이 원인인 런던형 스모그와 자동차 매연이 요인인 LA형 스모그의 복합형이다. 치유와 예방이 그만큼 어렵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조사한 환경지속성지수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조사대상 146개 국가 중 122위다. 환경과 경제여건을 감안할 때 지속적인 성장이 불가능할 수 있다는 얘기다. 환경을 도외시한 성장은 더 이상 불가능한 시대다.
▶1946년 북한 북조선통신사
(조선중앙통신사 전신) 설립
▶1945년 군사영어학교 설치
조선 국방경비대의 행진 모습
1945년 오늘, 미 군정청에 의해 '군사영어학교' (Military Language School)가 설치됩니다. 개교식에는 미군정장관 '하지' 중장과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이 참석하여 축사를 했습니다. 서울시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의 건물을 빌려 설립된 군사영어학교는 애초에 '기초적인 군사영어 해독이 가능한 미군 지휘관의 통역관'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시설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영어실력에 따라 A,B,C,D 등 4개반으로 나누어 군사 영어 이외에 국사, 참모학, 소총 분해, 자동차 운전 등의 교육을 받았죠. 하지만 군사영어학교의 설립에는 이런 실용적인 목적 이외에 해방이후 난립했던 좌, 우익 사설(私設) 군사 단체들을 정리하겠다는 미 군정의 의도도 있었죠. 국군의 역사에서 군사영어학교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 학교에서 건군의 주역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초 미 군정은 군사영어학교의 정원을 60명으로 예정하여 광복군 출신 20명, 일본군 출신 20명, 만주군 출신 20명으로 할당하여 학생을 모집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에 있던 광복군은 자신들이 개선하여 건군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군사영어학교에 참가하는 것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 때문에 군사영어학교 학생의 대부분은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들이었습니다.
초창기 조선 국방 경비대 장교(좌)와 병사(우)의 복장
실제 군사영어학교를 통해 임관한 장교 110명의 이전 경력을 살펴보면 일본군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아 일본육사 출신이 12명, 학병(학도특별지원병, 명칭과는 달리 대부분이 강제 징집이었던) 출신이 72명, 지원병 출신이 6명이었고, 만주군 출신이 18명, 중국군 출신이 2명이었습니다.
마땅히 건군의 주역이 되어야 했을 광복군 계열이 불참했던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또 미소의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 논란으로 군사영어학교 학생들도 양분되어 서로 상대방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는 일도 비일비재했죠. (실제 이 학교 출신 임관자 중 상당수가 이른바 '숙군' 과정에서 희생되었습니다)
1946년 5월 1일 개교한 조선 경비사관학교 정문
군사영어학교는 이듬 해인 1946년 1월, 국군의 전신인 '남조선 국방 경비대'가 창설되면서 지금의 육군사관학교가 자리한 태릉으로 이전하여 4월말 폐교(5월 1일 조선 경비 사관학교 개교)할 때까지 모두 110명의 장교를 배출하였습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은 이전 군경력에 따라 대령에서 소위까지 계급을 받아 임관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새롭게 창설된 국방 경비대의 기간요원으로 활약하게 되죠. 군사영어학교 출신 임관자 110명 중 한국군의 별을 단 사람은 모두 68명에 이릅니다.
[출처] 역사 속의 전쟁 이야기 1941년 ~ 1950년|작성자 영원속으로
▶1940년 영국-터키 통상협정 조인
▶1936년 소련, 스탈린헌법 채택
▶1933년 미국 금주법 14년 만에 해제
금주법과 마피아 알 카포네!
미국의 ‘금주(禁酒)시대’가 막을 내렸다. 유타주(州)가 금주법 폐지를 내용으로 하는 헌법 제21조 수정안에 36번째로 비준함으로써 수정안에 비준한 주가 전체의 4분의 3을 넘은 데 따른 것이다.
음료용 술을 제조, 운반, 판매해서는 안된다는 금주법은 1920년 1월 시행됐다. 19세기 초부터 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된 금주운동이 정치적인 힘을 얻어 급기야는 금주법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 1차 대전의 영향으로 당시 맥주업계를 손안에 넣고 있던 독일인에 대한 반감도 한몫했다.
‘맑은 정신의 시민사회 구현’. 하지만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막을 수 있는 법은 예나 지금이나 불가능한 법. 금주법 시행 초기에는 수 천개의 밀조공장이 파괴되는 등 공개적으로는 술이 자취를 감추었지만 6개월이 지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술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대도시에는 무허가 술집들이 독버섯처럼 생겨났다. 캐나다와 멕시코에서 밀주(密酒)가 속속 들어왔다. 최대 수혜자는 단연 알 카포네였다. ‘마피아’는 밀주 제조와 밀매 등을 통해 범죄왕국을 형성했다.
1920년대는 1차 대전의 고통에서 벗어난 미국인에게 자동차와 문화가 넘치는 ‘굿 올드 데이스’(good old days)이자 ‘무법의 10년’이기도 했다. 밀주 제조업자들이 술이라는 것을 속이기 위해 조잡한 밀주에 과일 등을 넣어 칵테일을 만들었던 것도 이때이다.
▶1930년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
독일에서 개봉
▶1926년 프랑스 화가 모네 사망
▶1925년 니카라과 독재자 데바일레
소모사 출생
▶1917년 러시아-루마니아 휴전
▶1916년 헝가리 지휘자 리히터 사망
▶1911년 청(淸) 위안 스카이,
북경정부 전권 장악
▶1909년 대한협회 등의 단체,
원각사에서 한일합방론을 통박
▶1906년 작곡가 안익태 출생
▶1901년 독일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출생
▶1901년 월트 디즈니 출생
미국 월트 디즈니 (영어: Walter Elias "Walt" Disney)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 에서 출생 (~ 1966년 12월 15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버뱅크 에서 사망)신문 배달을 하면서 어렵게 공부했다.
1925년에 아카데미상을 받았는데 그 때 그의 나이는 24살
1932년에는 최초의 3원색 색채만화 으로 아카데미상수상 1937년 세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 공주를 제작하여 개봉
하였는데 당대에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1955년 로스앤젤레스 교외에
디즈니랜드라는 거대한 어린이 유원지를 설립하여 영화 제작자
이상의 사업가로서도 자리를 굳혔다.
▶1876년 미국 브루클린 극장 화재.
. 295명 사망
▶1870년 프랑스 작가 앙리 뒤마 사망
▶1867년 폴란드의 초대 대통령
파우수트스키 출생
▶1833년 의병장 최익현 출생
▶1830년 영국 여성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 출생
▶1791년 모차르트 사망
모차르트 [Mozart, Wolfgang Amadeus, 1756.1.27~1791.12.5]
오스트리아 작곡가 모차르트가 1791년 12월 5일 사망했다. 어렸을 때부터 재능을 나타내어 4세 때 건반 지도를 받고 5세 때 소곡을 작곡했다. 그의 뛰어난 재능을 각지에 알리기 위해 당대에는 꽤나 유명한 궁정음악가였던 아버지가 계획한 여행은 그가 작곡가로서의 활동에 커다란 자극과 영향을 주었다. 특히 서유럽을 일주하면서 파리에서 알게 된 J.슈베르트, 런던에서 알게 된 J.C.바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771년까지는 주로 잘츠부르크에 머물면서 미사곡과 사교적인 작품을 많이 작곡하였으나 1780년말 뮌헨궁정으로부터 오페라 상연을 의뢰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아버지의 반대와 사표의 반려에도 불구하고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에서 거주, 그의 후반부 작품세계가 시작됐다. 빈에 머무는 동안 작곡한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곡은 하이든의 것과 함께 고전파시대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확립하는 작품이 됐다. 이시기에 작곡한 작품으로 '피가로의 결혼'(1786) '돈조반니'(1787), 3대 교향곡 '제39번 E장조''제40번 G단조''제41번C장조:주피터교향곡'이 있다.
1791년 9월 징그슈필의 대작 '마적'을 완성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나 잦은 여행으로 인한 건강악화와 경제적 궁핍으로 '레퀴엠'을 미완성인 채 남겨두고 이날 빈에서 36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36년을 채 채우지 못한 모짜르트의 삶은 '천재적인 것'의 온갖 세속적 징표들로 가득했다. 조숙, 범절에서의 일탈, 가난, 요절 등이 그 징표였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