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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마가복음 2:1-12
복음서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았습니다. 혈루병 여인도 질병에서 구원받았고 수로보니게 여인도 귀신으로부터 딸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믿음으로 병과 귀신, 그리고 운명으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도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도전적이였고 큰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그들은 육신의 질병으로부터 구원받게 도왔고 이로인해 영혼까지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여 이런 놀라운 승리를 이룰 수 있었을까요? 오늘 말씀에서는 그들이 승리한 비결이 나옵니다. 오늘 말씀통해 우리 성도님들은 승리하는 마인드를 갖추어서 승승장구 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가 이렇게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첫째, 그들이 공격적인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5)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수일 후에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집에 계신다는 소문이 퍼졌고 이에 발디딜 틈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들에게 참된 위로와 소망이 되고 그들 영혼의 기쁨이 되심을 잘 아셨습니다. 이에 많은 무리들이 이 말씀을 진지하게 들으며 은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이들은 평소에 중풍병자에 대한 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친구들이었습니다. 중풍병은 뇌졸증으로 인해 몸이 반신불수요 의식불명이 되는 병으로 이 병에 걸리면 늘 누워있어야만 합니다. 그들은 친구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를 회복시키고자 여러모로 애썼습니다. 유명한 의사를 찾아가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러던 중 이들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돌아오셨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이여 드디어 기회가 왔다. 모이자, 하나되자, 우리가 갈 길이라’하고 중풍병자의 집에 집결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중에 힘센 4명에게 중풍병자를 메게하고 예수님께로 다함께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예수님이 계신 집에 도착해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집 밖까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나갈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사이를 힘써 뚫고나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 중에 한명이 다음에 기회를 잡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팀리더가 “아니야 우리에게 실패는 없어. 실패는 바느질할 때 쓰는 말이야, 그리고 포기는 김장할 때 쓰는 말이야, 연기는 담배 피울 때나 나는거야, 우리에게는 실패, 포기, 연기가 없어. 길을 찾자, 믿음을 갖자 ” 하고 친구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아멘하고 화답하며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이때 그들은 ‘아, 바로 저거야’ 하였습니다. 그들의 아이디어는 사다리를 놓고 지붕으로 올라가 예수님이 계신 쪽의 지붕을 뜯어내고 그곳으로 중풍병자를 달아내리는 것이였습니다. 그들은 곧장 행동개시했습니다. 즉시 사다리를 구해왔고 지붕으로 병든 친구를 들어올렸습니다. 그리고 지붕을 뜯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기왓장이 떨어지기도 하고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로도 흙먼지가 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붕에서 중풍병자의 침상이 네 귀퉁이에 묶여 대롱대롱 내려왔습니다. 친구들은 마치 해군UDT 요원들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보고 한편으로는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야단했습니다. “아니 저 사람들이 지금 무얼하는게야” 집주인도 온몸을 부르르 떨며 ‘아니 저자들이 지금 제정신이야 허락도 없이 왜 남의 집 지붕을 뜯고 난리들이야!’ 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모처럼 은혜받겠다고 앞자리에 앉았는데 망쳤다고 분개했습니다. 은혜롭던 집회 분위기는 일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정말 몰지각한 행동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때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5a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사람들은 겉으로 나타난 행동을 보고 판단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내면에 있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다시 말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저렇게까지 행동하게 했는가를 보시며 그들 안에 있는 믿음이 저렇게 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타난 그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들의 믿음은 될 때까지 도전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실패와 포기, 연기를 모르는 근성과 집요함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천국은 이렇게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여름성경학교 및 수련회를 위하여 안가겠다는 아이들을 데려올 때도 이들과 같은 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아이들은 중풍병자와 같습니다. 자기 발로는 교회로 찾아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데리고 오기위해서는 두명이상 네명까지 힘을 합쳐서 수련회에 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을 데리고 오자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이 본문의 친구들처럼 불굴의 강한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저돌적인 믿음으로 도전하여야 합니다.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도전이 없으면 결코 한사람도 제대로 데리고 올 수가 없습니다. 이런 집요한 도전정신은 늘 긍정적인 사고를 가져오고 앞에 놓인 어떤 장애물도 극복하게 합니다. 이런 분들은 이유가 없고 핑계가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다 뛰어넘어갑니다. 어떤 비난과 욕설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분명하게 살고자 할 때 사람들에게 비난과 방해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이 본문의 중풍병자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좋은 친구는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께 데려가는 친구입니다. 나쁜 친구는 교회가 아닌 노래방이나 PC방 같은 데로 데려가는 친구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데려올 때는 그 집 남편의 욕을 먹기도 하고 그 부모에게 야단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뚫어서라도 데려오는 사람이 좋은 목자요 좋은 친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이 정도의 친구가 되라는 것입니다. 어떤 반대와 방해가 있더라도 겸손하게 인도하는 인도자, 교사, 친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집념이 있어야 결국 그 사람을 도울수 있고 나도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믿음으로 시작하다가 장애물에 부딪치면 주춤거리고 이로 인해 뒤로 물러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장애물을 보고 이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뜻인가보다 하고 나름대로 해석하여 포기합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일생 무기력하게 살고 아무런 기도응답도 받지 못합니다. 세상에 무엇을 이루고자 할 때 역경이나 시련이 없는 것이 어디있습니까? 세상일에도 무엇인가 뜻을 세워 하자면 거기 역경이 있고 산같은 장애물을 넘어가야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일에 있어서는 영적 훼방을 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밥 리처드라는 사람은 올림픽 장대높이뛰기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입니다. 그는 후에 운동선수들의 정신상태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는데 그에 의하면 우수한 선수는 결코 불가능을 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오직 목표에 대해서만 말한다고 합니다. “되지 않을 것 같다”라는 말보다 “이렇게 해보겠다”고 말하며 항상 방법을 바꾸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고 합니다. 장애물이 왜 있습니까? 이는 극복되어지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 나와 축복받는 자들을 보면 거의 다 이런 장애물을 극복하고 집요하게 예수님을 향해 나온 사람들입니다. 소경거지인 바디매오조차도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소리지르며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꾸짖었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 주변에 있는 소위 제자들이요 성도들이였습니다. 믿음으로 나가고자 할 때 때로는 이런 성도들의 비난과 꾸짖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소경거지 바디메오가 이들의 비난이나 판단을 듣고 주춤했더라면 그는 결코 예수님께 나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이런 비난이나 평가가 어떠하든 이런 것에 메이지 않고 더욱 소리높이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넘어져도 또 일어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집요하게 될 때까지 소리지르며 따라갔습니다. 그러자 결국 예수님이 그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그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리고 그를 칭찬하고 그의 눈을 뜨게 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소리 지르며 끝까지 따라간 그 행동 속에서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에게 실패를 허락하시지만 우리가 자포자기하는 것을 허락치 않으신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집요하게 믿은 사람치고 실패한 사람이 없습니다. 위대한 역사를 창조한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나간 사람들입니다. 미얀마의 한 장군은 자기 부하들에게 이런 명령을 했습니다. “누구든지 정글을 통과해보기 전까지는 이 정글은 통과할 수 없습니다 하는 보고를 절대 하지 말라” 이는 해서 안되는 것이 어디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성도님들은 안된다하지 마시고 믿음에서 나온 집념을 가지고 이번 성경학교 수련회에 많은 아이들을 데려오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는 죄사함받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주어야 합니다.(5)
어린영혼들은 육체로도 중풍병자이지만 영적으로도 스스로의 재간으로는 예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도 우리가 도와주어야 합니다. 간절히 중보기도 해주어야 합니다.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어린영혼들은 기도도 잘 못하지만 기도해도 기도가 잘 안됩니다. 그러므로 옆에서 통성으로, 눈물로 중보기도 해주어야 영적으로 막힌 것이 뚫리고 기도의 문이 열려서 예수님께로 가게 됩니다. 교회로 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께로 나가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닫혔던 마음이 뚫리고 소원이 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하여 지붕이 뚫릴 수 있도록 기도가 터지고 영적인 소원이 생기도록 눈물로 옆에서 함께 통성으로 기도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은 어떻게 축복해주실까요? 5b절을 보면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작은 자야”라고 부르셨습니다. 누워있는 중풍병자는 냄새가 나고 더러우며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친구들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 믿음 안에서 중풍병자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를 사랑스런 아들로 보시고 “작은 자야”(son)라고 부르시며 따뜻이 영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고 말씀하시며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반응은 최초입니다. 지금 이들이 예수님 앞에 나온 목적은 다만 중풍병을 고침 받고자 함 이였습니다. 그들 보기에 그것이 가장 시급히 해결되어야할 문제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목적과는 다르게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기지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그것은 죄사함의 선포가 모든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장에 중풍병이 낫는 것보다 먼저 받아야할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죄사함을 선포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말하고 그 당시 중풍병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라고 여겼으므로 그 역시도 죄의식이 많았고 자신은 버림받았다고 여겼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로서 하나님과 교제해야 비로소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고 생명의 힘과 은혜를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면 먼저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어려움에 처해있어도 내면에 먼저 죄사함을 받아야 영이 살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되고 인간은 이제 비로소 행복하게 되기 시작합니다. 그 마음에 참 기쁨과 능력을 누립니다. 예수님의 이 사죄의 선포는 효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죄사함의 선포는 사람의 내면에 죄의 결박을 풀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죄사함을 받고 난 뒤 죄의 결박이 풀리고 충만한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곤 합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그 사람이 진정 불행한 것은 중풍병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 그의 영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죄사함을 통하여 영을 살리고 그 다음은 혼을 살리고 그 다음은 육신을 살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죄사함을 통하여 우리의 영이 살아나면 육신은 자연적으로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무서운 고통과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영은 살게 되고 혼도 육신도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통해 영이 회복되자 육신에게 바로 영향이 갔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중풍병자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12a절을 보면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가거늘” 이제까지 누워서 꼼짝을 못하던 사람 이였지만 영이 회복되자 바로 육신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자기가 누워있던 침상을 한 손에 들고 보무가 당당하게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집으로 갔습니다.
우리 사랑의 교회 성도님들은 이 네 친구들처럼 혼자 발로는 도저히 못나오고 있는 영적 중풍병자들을 연합하여 잘 데리고 오시기를 바랍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서 데리고 오시고 지붕을 뚫는 믿음을 주님께 보여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들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함께 울며 눈물로 기도하시면서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피흘려 죽기까지 사랑해 주신 예수님이 계시므로 이 예수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도전하시기를 바랍니다. 해도 안된다는 중풍병자같은 생각을 다 떨쳐버리고 믿음으로 일어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붙드시고 기도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여러분 때문에 이번 성경학교와 수련회에서 살아나는 역사, 고침받는 역사, 죄사함 받는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축원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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