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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재동 · 가회동 · 삼청동 등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이곳이 청계천과 종각의 북쪽에 있는 동네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예로부터 조선시대 왕족이나 고위관직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三色)이 섞여서
살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북촌이
권세 있는 양반들이 주로 모여 살았던 데 비해,
남산 기슭을 중심으로 한 남촌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양반들과 하급관리 ·
상인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후에 일제강점기에는 남촌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어,
조선인 중심의 거주지역으로서의 북촌과 일본인 중심의 거주지역으로서의 남촌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이번주는 100산을 쉬기로했다
보름전 북촌 역사탐방을 보고 가고 싶다생각했다
그런대 일요일은 집안행사가 생겼다
어쩔수없이 100산은 쉬게되었다
참 정신없이 달려온 100산이었는데
한번쯤 쉬어도 되지않을까한다
그래서 오늘이다
오늘은 블랙야크 역사문화탐방이다
계동 현대건설 사옥앞에있는 관천대가 첫번째 탐방지로 되어있었다
1시에 만나기로되었지만 점심관계로 좀일찍 갔다
시간이 다가오자 오늘 주촤자인 전종현셀파를 비롯하여 참가신청을 한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아 그분이다
지난번 주흘산에서 아주 정렬적으로 설명해주시던분
사실 이런일 하려면 지식, 체력, 목소리, 지도력 등등 고루 갖추어야 가능할것이다
아마 소시적 학교다닐 적에 소풍가면 개인 장기자랑 사회좀 보신분 같다
지금은 신청하신분들 도착여부를 체크중이시다
신청자들 정말 제시간에 도착하셨지요
원서공원 오르는 계단입니다
양지바른곳이기도하구요
우리는 계단에 않고 그분은 아래 혼자 서서 진행합니다
이런 장면 어디서 많이 보셨지요?
약장사 같지 않나요?
절대로 약장사는 아닙니다
서울시 역사문화 해설자 자격증이랍니다
꼭 그걸 보여 주시지 않더라도 우린 믿는데
한분씩 나와서 자기 소개를 하십니다
그리고 참가 상으로 양말 한개씩 받았답니다
시간 관계로 가족들이 단체로 나오기도했구요
이집은 집안이 총출동했나봅니다
많지요?
이런 가족 모임 바람직하네요
후미를 담당하시는 세르파님 이시고요
마지막인데 이분은 사진을 담당하시는 세르파님이시랍니다
자 이제 역사 탐방이 시작됩니다
관상감 관천대 앞입니다
현대에서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나 봅니다
보물이라 하던데
하늘을 보는 관천대가 높은 건물에 가려져있어
어린 학생들 이게 하늘보는 첨성대라 생각할수 있을까?
이제 설명이 시작 됩니다
북촌의 역사를 설명중입니다
멀리 고려에서부터
조선개국 왕장의 난 그리고 노론,소론, 안동김씨 구한말 그많은 사건들이 이곳 북촌에서 있었다 합니다
즉 말씀 이신즉 현재의 강남같이 있는 사람들이 북촌을 차지했다는 결론이십니다
그리고 관천대에대한 설명이 이어지지요
사적 제296호.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현대건설주식회사 사옥(옛 휘문고등학교 자리) 바로 앞에 있다.
조선 초기에 내관상감은 경복궁 안에 있었고 이곳에는 외관상감이 있었다.
이 관천대는 15세기경 이곳에 관상감이 세워진 직후 세워졌다고 생각되지만
서울에는 현재 조선시대에 만든 2개의 관천대가 있다.
하나는 창경궁 안에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작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옛 북부 관상감 자리인 전 휘문고등학교 교지에 있는 것인데,
두 관천대는 구조나 크기, 제작 방법이 거의 같다.
이렇게 하늘을 관찰하였을것이다
삼성갤러리이다
뒷편이 운현궁이다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고종(高宗:)이 출생하여 12세에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성장한 잠저(潛邸)이다.
고종이 즉위하자 생부(生父) 이하응(李昰應)은 흥선대원군이 되었고, 생모 민씨는 여흥부대부인의 봉작을 받았다.
이곳에서 대원군은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세제개혁 등 많은 사업을 추진하였던 곳이기도하다,
삼성겔러리 즉운영궁 길건너이다
재계라이벌 현대 사옥이있는곳에 계동궁터라는 안내석이있다
이곳은 고종의
사촌형, 대원군의 조카인 이재원의 집으로 계동궁이라고 불리었다.
계동궁은
경우궁 남쪽에 있었다. 갑신정변 거사 이튿날 오전 10시경
고종이 겨울철 방한시설조차 변변치 못한 경우궁을 떠나 이곳으로 이어하고,
곧이어 신정부의 요인명단을 발표하면서 역사의 현장으로 떠오른 곳이다.
계동궁은 1960년대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계동궁 자리에 현대사옥이 자리잡고 있다.
현대사옥에서 북촌으로 들어가는 골목 코너에는 제생원터라는 안내석이있다
제생원은 1397년(태조 6) 조준(趙浚)의 건의에 따라 설치하였다.
의료·의약, 특히 향약(鄕藥)의 수납(輸納)·보급과 의학교육 및 편찬사업을 맡아보았다.
1459년(세조 5) 5월 용관(冗官: 중요하지 않은 벼슬)을 정리할 때 혜민국에 합병되었다.
입구 산내리식당이있다
이곳또한 그냥 지날수 없다
을사조약을 끝까지 반대했던 한규설대감 집터이다
원래있던 한옥은 국민대학교에 복원해 놓았다한다
그리고 이곳은 현재 민주당의 원조격인 한국민주당이 태동한곳이랍니다
여운영이 건준으로 앞서가자 그에 대응한 한국민주당을 창당했다지요
그런 역사의 현장이 음식점으로 번창하고 있답니다
산내리식당 바로 옆건물입니다
"건국준비위원회" 즉 건준 이 있던자리입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고
갑자기 치안 및 나라행정에 공백이 생겼을때
여운영이 중심이되어 건준을 조직했지요
미군정이 시작되고 그들과 거래가 되는 사람들에의해 와해되었지요
여기는 북촌 문화센터입니다
이곳은 원래 1921년 일제강점기에 탁지부 재무관을 지낸 민형기의 자택을 복원한옥 입니다.
민형기는 원래 딸이 5명이 있었는데 이집에 오면 아들을 나을까해서 이사왔답니다
그런데 여기서 딸을 3명더 추가하여 딸이 8명이 되었다지요
이곳은 서울시에서 주택을 구입하여 관광객들에게 개방을 한곳입니다.
북촌의 역사와 문화재를 안내하는 역할을 하며 근대 한옥 건축술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건축적 가치를 지닌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북촌 전반에 대한 설명이지요
정감있는 창호지 문입니다
우리 어릴때 렇게 좋은 집은 아니지만 이런 형식의 집에서 살았던 기억이있네요
그냥 갈수 없지요
사랑방앞 툇마루에 둘러앉았읍니다
우리 선생님 한옥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마루의 종류 대청마루 툇마루 쪽마루였든가?등등
북촌 문환센터를 지나 여운영 집터로 갑니다
언덕에 보이는건 하늘 뿐입니다
언덕넘어에는 무엇이있을까?
파랑새가 있을까?
파랑새는 잠시 미루고 여운영 집터를 살펴보지요
이곳일대 커다란 집이었답니다
집중앙으로 이길이 생겼다나?
이쪽편은 빌라가 되었답니다
여운형 선생 일제때 이런 집에 살았다면 과연
일제 협력없이?
이곳 동네 유명인이 많이 살았다지요?
상록수의 심훈 형님 살던 고이라네요
다시요
그언덕 넘었읍니다
창덕궁이 보입니다
파랑새는 대궐이었군요
이곳이 북촌 1경이라한다
창덕궁의 건물 높이가 다르다
그이유는 그곳 주재하는 사람의 지위를 표시한단다
물론 제일 높은 건물은 임금이 계신곳이다
이곳은 인증장소이다
세르파께서 자기가 아니라도 괜찬다 했다
난 지난번 주흘산에서본 이친구를 인증 대상으로 했다
잘나왔나요?
버지니아 울프....
박인환시인의 생가랍니다
일식집으로 사용되고있고 지금은 지붕수리중입니다
그리고 마고 카페와 은덕 문화원
이건물은 원불교 소유랍니다
특히 마고 카페는 김지하 시인의 활동 무대로 원불교에서 제공했답니다
마고 카페의 마고는 우리나라 토속신앙의 창조주같은 할매신이라지요
그런 창조정신으로 마음껏 활동하란 의미가 아닐까요
그 마고카페의 원주인인 은덕 문화원이구요
문화원에대한 설명입니다
복잡하고 협소한 북촌입니다
사람도 많고요
차도 어디서 나올지모릅니다
이렇게 창덕궁 돌담옆 주차장 훌륭한 교실이되지요
그 돌담에서 설명하십니다
닫혀있는 문 그리고 낮으맛한 담장 그담장 넘어로 삐죽올라온 돌탑입니다
불교하고 관계되는 집이겠지요
한국미술박물관으로 되어있네요
불교미술도 한국미술이지요
그런데 문을 닫아 놓은게....
주변 한복입으신 할아버지 할머니입니디
주변 노인정이있는데 햋볕이 좋아 여기계시는듯합니다
할아버지 창 하시는데 보통은 넘으시는듯
곡조가 흥에 겹읍니다
조기 뒤가 창덕궁이지요
예전 어렸을때 소풍가고했을때는 비원으로 더 기억되는곳입니다
창덕궁은 크게 건물(전각)지역과 후원 지역으로 나뉘는데,
건물지역 뒤편 깊숙한 곳에 위치한 후원은 다양한 수목과 정자, 누각, 연못 등을 볼 수 있는 넓고 아름다운 왕실 정원입니다
이곳은 궁의 뒷쪽에있다하여 후원, 북쪽에있다하여 북원이라불렸으며
임금과 몇몇사람들이외에는 들어 올수없는 곳이라해서 비원이라 불리었다는 말이있다
그리고 다음은 궁중음식연구원입니다
요리와 음식은 다른것이랍니다
음식은 우리의 삶과 건겅을 위해 준비하는것
요리는 맛을 위한 기호품을 만드는 것이라지요
대장금 같은 사람들이 있는곳이랍니다
상궁에 족보등은 난 모르겠구
어느날인지 이곳에 오면 음식 맛볼기회가 있다지요
이곳은 빨래터입니다
궁중의 쌀씼은 물 세제을 거친물들이 이곳을 통해 나온답니다
일반인들은 절대 풍족하게 사용할수 없는거지요
그러니 여기서 빨래를하면 빨래가 더잘되었다지요
이곳은 창덕궁 후원 서쪽 동네 원서동이라지요
그래서 여기가 원서동 빨래터입니다
참 고맙읍니다
목이 쉬도록 정렬적인 강의 식을 줄모릅니다
가끔 궁내의 대형 빨래는 이곳 주민에게 하청이 나간답니다
그때 궁궐안 사람들과 궁밖사람들의 소통이 되겠지요
그래서 이곳은 세상 물정을 궁안에 알리고 바깥세상의 일들을 궁안에 알리는 소통의 장이 었답니다
빨래터보다 조금위입니다
백흥범가옥입니다
1910년대에 지어진 이 집은 한 때 상궁이 살던 집터라고 전해진다.
궁궐의 궁녀들 병들면 궁궐에서 죽을수 없었단다
그래서 궁궐밖 이런곳에 궁녀들이 살았답니다
그렇게 살다 병색이 심해지면 이집뒤 언덕에 목메죽은 궁녀들이 그리 많았다는 ....
현재 이 집의 이름은 문화재 지정 당시의 소유주 이름을 따른 것이다
그옆 요란한 건물이있읍니다 문화적 가치는 없어보이지요
요즘 새로지은 한샘 연구소라네요
다시 길을 나온다
원서동 고희동 가옥이란다
앞마당에 비석이 서있네요
아! 저글자가" 의"자가 아니고 "희"자였네요 고희동
춘곡의 집이라 쓰여있읍니다
춘곡 고희동 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랍니다
그시절 일본유학 서양화가가 되었다면 어떤부류의 사람인지는 알겠지요
이집도 일본식이 가미된 개량한옥입니다
앞에 한말들 그 설명일겁니다
고희동 가옥을 나와 다시 언덕을 오릅니다
여기또한 북촌의 삶이있읍니다
명가재라는 간판이 보입니다
게스트하우스랍니다
북촌 스타일의 텃밭도 보입니다
그리고 중앙고등학교
여기서도 역사는 계속됩니다
천도교에서 김성수까지
친일파는 논하지 않기로 했읍니다
예전 외지인들이 처음 북촌으로오면 이길로 올랐다 했읍니다
모든 사람들 특히 졸부들 그리고 갑자기 권력이 생긴 사람들은 이곳에 살고 싶어했다지요
이제 공방의 거리로 들어섭니다
여기부터는 조용해야한다지요
이곳에서 바라본 큰건물이 덕성여대랍니다
그곳은 감고당이라하며
조선시대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친정을 위하여 숙종이 지어준 집이다.
인현왕후의 부친인민유중이 살았으며, 인현왕후가 폐위된 후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이후 대대로 민씨가 살았으며, 1866년(고종 3) 이곳에서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된다.
왕비로 책봉된 명성황후는 과거 인현왕후의 일을 회상하여 '감고당(感古堂)' 이란 이름을 붙였단다.
지금은 경기도여주에 복원하여있단ㄷ다
이제 공방의 거리로 들어섭니다
이곳 골목 골목도 한옥이 멋드러지게 도열해있읍니다
이곳은 한복 장인이 사시는곳입니다
개방되었나요?
입장료있으면 안갑니다
그리고 사람이 가득찬 골목입니다
날도 좋은데 나만 여기 오고프겠어요?
이해합니다
특히 이집을 잘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화장실이 개방된 집이기때문입니다
필수로 알아야합니다
이골목은 공방들이 많이있읍니다
자수 매듭 그리고 공예를 만드는 공방들이
이쁜 한옥속에 들어있읍니다
이집은 매듭이 유명한 집이라네요
공방 한옥촌을 다지나 큰길을 건넜읍니다
비교적 큰집입니다
가회동 성당이라 쓰여있지요
여기선 성당 정도는 볼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냥 통과합니다
본격적인 북촌 한옥을가기전입니다
사람들 많으니 각오 단단히하란 말씀
그리고 화화나무 이야기하십니다
조기 회화나무가 있거든요
잠깐 회화나무 보기 전
담장밖 불쑥 나타난 불상입니다
나 당황했어요
안녕하세요!
주택과 전선줄사이로 불쑥 솓은 회화나무입니다
예전에 장원급제를 하면 임금님이 하사했다는 회화나무입니다
이나무는 궁궐,사찰, 그리고 사대부집외에는 심을수가 없다지요
나무가 커져서 집밖으로 나와도 베지 않음은
"우린 양반사대부 집이었어"하고 말하는 듯합니다
여기 북촌마을 인종도 없읍니다
이렇게 얼굴이 어두우신분도있구요
분을 안발랐는데도 얼굴이 하야신분도있구요
단체여행오신 중국분들도계십니다
한옥마을 우리나라이긴한데
지금은 인종전시장입니다
아! 여기가 사진에서 많이 보았던 그골목이군요
야~ 사람 정말 많읍니다
뒤돌아 내려다 보어도 많읍니다
여기한옥이요?
원래 사대부집 한옥은 한집당 2000평에서 4000평정도했답니다
일제가 들어서면서 동양척식회사에서 큰한옥을 수용했답니다
주택건설업체였던 ‘건양사’에서 이땅을 인수받아 대지를 매입해 30~60평짜리 한옥을 지어 분양한
개량한옥들입니다
우리동네 사람이이리 많으면 어떻게 살겠읍니까?
나좀 살려줘여~~~하겠지요?
오죽하면 이런 글을 써놓았겠읍니까?
하두 얼굴들이 많아서 사진도 쩨대로 찍을수 없읍니다
겨우 윗부분만 스카이라인을 만들어보았읍니다
북촌이 풍수지리로볼때 왜좋냐면
1. 궁궐 출퇴근이 좋구요
2. 산에서아래를 향해서 배수가 잘되고
3. 뒤가 산으로 막혀서 북풍을 막아주고 남쪽을 바라보니 햇볕이 잘든다
4. 위에서보는 서울 경관이 좋은거래요
시간이 가도 사람의 물결은 줄지않읍니다
우와~~~
중국군인가 했지요
안내하시는분입니다
적어도 몇개국어는 할수있을만한 복장입니다
적어도 한국말은 합니다
취운정이라쓰여있읍니다
물총새 구름 집?
풍수지리상 상당히 좋은집이랍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되기위해 2개월간 살았던 집이랍니다
그래서 대통령의 꿈을 이루었다지요
이곳 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십니다
총력을 다해서 기를 받아가라고
이꼬마들 대문에 손을 어대고 기를 모으고있읍니다
끙끙~~ 소리가 들리지요
잘될것입니다
우리나라 여자대통령이 또 탄생할것입니다
이명박집에서 언덕을 바라봅니다
이준구가옥이라 합니다
그시절 프랑스에서가져온 청기와를 사용하였고
개성에서 화강암벽돌을 가져와 졌다합니다
당대 부자임을 말하는거지요
경향신문을 만들었던분이구
516당시 부정축재자로 재산이 몰수당했다지요
다음은 맹사성집터를 갑니다조선 삼대 청백리중한명이랍니다
원래 고불 맹사성의 집은 충남 아산에 있다지요
아마 이곳은 공무원생활을 하며 생활하던곳이아닐까요?
조선시대에는 청백리(淸白吏)가 꽤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중에서도 세종시대의 삼대 청백리를 치면 우리가 잘아는 황희정승(1363~1452),
높은 벼슬에도 비 새는 초가에서 우산 쓰고 지냈다는 유관(柳寬·1346~1433)
그리고 이곳에 살았다는 고불 맹사성(1360∼1438)을 말한답니다
정말 멋진 꽃담도 좋구요
2층은 찻집인데요
전망이 그리 좋답니다
차맛도 무지 좋다네요
이곳에서 바라본 전경입니다
인왕산이지요
이곳이요?
삼청동 돌계단옆 난간이다
총리공관이보이고 청와대 춘추관 지붕도 보인다
이곳 벗꽃 필무렵 가치가 발휘되는 곳이랍니다
온 세상이 하얗타지요
계단 및 그아래 집들입니다
정비가 덜되었는지 보기는 썩 좋지는 않군요
이따 저밑에서 여길 바라볼껍니다
그리고 이계단 말고 화강석으로 된계단이있읍니다
삼청동 돌계단이라나요
계단을 내려갑니다
이제 계단을 내려왔읍니다
여기가 그유명한 삼청동입니다
항아리수제비집도 보입니다
낙지마당집도 보이고요
우리해설사님 키가 커보이지요?
왜 꽃밭 경계석위로 오르셨는지 몰랐는데 다 이유가 있네요
정면의 집중에서 가장 낮은집보이시나요?
예 맞읍니다 노란색 유리가 있는집이요
그집위 아주위 축대하고 그집사이에 바위가 보이십니까?
그바위에 글자가 써있지요
한문으로 "삼청동문"이라 쓰여있답니다
도성에서 경치가 제일 좋다는 삼청동 병풍바위였답니다
그경치를 기리기위해 쓰여졌다지요
삼청동은 산좋고, 물좋고, 사람좋다는 뜻이랍니다
이글자를 보기위에 화단에 올랐답니다
물론 나도 화단 턱에 올라서 사진을 찍었지요
이제 정독도서관을 향해서 가는길입니다
세상에 서울사람들 오늘 모두 북촌에 왔나 봅니다
도데체 갈수가 없읍니다
우리일행 40명 그래도 서로 놓치지않고 잘도 따라옵니다
정말 대단하지요?
앞사람을 볼수가 없읍니다
경복궁방향에서 화동쪽으로 돌아섭니다
인파는 여전하구요
이런 호떡집에 불이났나요?
왠사람들 호떡 먹으러 줄서서기다립니다
여긴 떡복기집인데
줄 길이가 우와~~~~
그냥 돈을 쓸어 담읍니다
여기가 화동입니다
예전이름은 꽃이 활짝 핀다해서 화개동
그래서 집대문을 꽃으로 장식했읍니다
이곳이 화동이 된 이유는 이곳에 장원서가 있었답니다
장원서는 궁중의 정원과 꽃·과일 나무를 담당하던 관청입니다
그러니 이곳은 항상 꽃이피어있어서 동네이름도 그랬을꺼라 생각합니다
여기는 정독도서관 입구입니다
이 도서관터는 여러 역사적 장소로 이용 되었나봅니다
우선은 화기도감 터입니다
성삼문 선생이 살던 집터가 이근처에있었고
김옥균도 이동네살았나봅니다
그리고 또 경기고등학교가 있던곳이기도 하답니다
입구에서 도서관을 바라보며
공부잘했던 친구들을 그려봅니다
내친구는 이런 좋은학교를 나온 친구는 없군요
생각이 안나요
자전거 인력거가 보입니다
뒤에 사람들태우고 관광안내를 하는가봅니다
재미는 있겠네요
명문당이라쓰인간판에 남루한 4층건물이 보입니다
명문당은 출판사이고요
이건물은 역사를 가지고있답니다
명문당도 무척 오래된 출판사랍니다
1926년 창업했다니 엄청 오래된 회사이지요
명문당 바로앞에있는 한옥 저택입니다
이곳은 우리나라2대대통령인 윤보선대통령의 집이랍니다
문이 굳게 닫혀있지요
5.16이지나고 3공화국시절 윤보선대통령이 무서웠던 정권은
저택 바로앞에있는 이건물 4층을 이집 감시하는데 이용했답니다
그래서 그장소 보관하느라 치장을 안하는건가요?
그많은 사람들이 이저택을 구경하러옵니다
누가 이집에 살면서 얼굴 내밀수있을까요
일년2번만 개방한다지요
윤보선 저택과 마주보는 교회입니다
안동교회로 쓰여있지만
이교회는 또다른 이름이있읍니다
양반교회라고요
인근에 승동교회가있었다
백정출신 박성춘이 장로로 선출된다
양반들이 불복한다
그후 양반들은 안동교회를 만들었다
그래서 양반교회인것이다
안동교회의 병관이다
새벽을깨우는....
지금은 섬김의 교회로 변했단다
북촌 탐방을 마감한다
평생을 서울서 살면서 북촌을 처음가보았다
그냥 막연히 거기일 것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생겼을 것이라 생각했던 곳이다
그냥 내가 생각했던 북촌은 아니다
그많은 사람들이 찾는 북촌이다
왜? 그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을까?
지금이라도 북촌을 찾은걸 다행이라 생각한다
더욱이 멋진 해설자분과 동행했음을 더욱 다행이라 생각한다
100산 잠시 중지하고 따라온 북촌 정말 잘왔다 생각한다
딴 때와 달리 오랜시간 사진을 보고 정리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면 인터넷으로 확인하고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보람된 탐방을 위해 나름 노력했답니다
서울촌놈 북촌 여행 참 보람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