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0장 37 - 43절
37.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38.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 구유에 세워 양 떼를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39.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40.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을 라반의 양과 서로 마주보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41. 튼튼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 떼의 눈 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이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42.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그렇게 함으로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된지라
43.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
우리의 눈은 영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볼 수 있게 된 눈이라서 우리는 큰 의미를 두지 않고서 눈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의 눈이 무엇을 보느냐의 따라서 우리의 영적인 상태도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을 하면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아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이 얼마나 중요하냐면 우리의 눈이 죄를 범하거든 그 눈을 뽑아내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이렇게까지 말씀해 주실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눈으로 범할 수 있는 죄가 무엇일까를 고민해 봤습니다. 대표적인 것인 컨닝이라고 할 수가 있고, 음란물을 보는 것도 죄라면 죄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남에게 크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그것 때문에 눈까지 빼버리라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눈으로 범하는 죄가 그렇게 크다고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눈으로 죄를 범하는 것보다는 그 눈을 빼어 버리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우리의 눈이라는 사실을 잘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가 있기 때문에 롯의 아내가 소돔과 고모라 성을 뒤돌아 봤다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심판을 받아서 소금 기둥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무엇을 보느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밝혀준 과학적인 증거도 있습니다. 1989년 미국의 심리학자가 진행한 실험이 있었는데 생면부지의 남녀 48명을 모집하고 난 뒤 A그룹에게는 특별한 주문을 하지 않았고, B그룹에게는 2분간 상대의 ‘눈’을 바라볼 것을 요청했습니다. 2분 후에 특별한 주문이 없었던 A그룹과 달리 상대의 눈을 바라볼 것을 요청한 B그룹의 남녀는 눈 맞춤 만으로 서로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하였습니다. 이 실험 후에 B그룹의 사람이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눈이 참 예쁘더군요.”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설레었습니다.” 이 결과를 통해 눈 맞춤은 호감도와 비례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눈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깨닫게 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미신 같은 행위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 부분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삼촌 라반의 가축과 야곱의 가축을 서로 분리를 했습니다. 야곱의 가축은 아롱진 것, 점이 있는 것, 검은 것이었는데 야곱은 그런 자신의 가축을 상징할 수 있도록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겼던 것입니다. 다 벗긴 것이 아니라 일부만 벗겼기 때문에 마치 얼룩지고 점이 있는 것 같은 그런 모양의 가지를 만든 것이고 그 가지를 가축들이 물을 먹으로 올 때마다 양들이 볼 수 있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모든 양들에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튼튼한 양이 물을 먹을 때 그 가지를 두었고 튼튼하지 않는 양이 물을 먹을 때는 그 가지를 치워버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했더니 어떤 역사가 일어났냐면 41, 42절 말씀에 보면 “튼튼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 떼의 눈 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이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그렇게 함으로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된지라” 자연의 힘을 빌어서 마치 미신처럼 야곱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야곱은 간절한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양에게 자신의 비전을 보여주고 자신의 계획을 보여 줬더니 양들이 그것을 보고서 야곱의 뜻대로 새끼를 낳아주는 기적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쉽게 생각해 보면 이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등학생이 좋은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그냥 두루뭉술하게 꿈을 꾸기 보다는 그 학교의 사진을 책상 앞에 걸어 놓고서 공부를 하면 더 동기부여가 되고 더 노력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야곱은 이런 바라봄의 원칙을 믿고서 그런 믿음으로 이런 일을 했던 것이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야곱의 소원대로 역사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야곱처럼 하나님의 복을 받고 은혜를 누리는 사람이 되려면 두루뭉술하게 소망을 하고 꿈을 꾸면서 살기보다는 보다 더 구체적인 꿈을 꾸고 보다 더 확실한 비전을 품고서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부자 되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는 하나님을 굉장히 난처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부자의 개념은 각자의 기준이 다 다르지 않습니까? ‘하나님, 우리 자녀들 훌륭한 사람 되게 해 주세요. 좋은 믿음 주세요.’ 이런 기도도 굉장히 난해할 수 있습니다. 야곱처럼 보다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고백을 해야지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야곱을 풍성하게 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풍성하게 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 구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몰라서 못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런 표현이 우리의 간절함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보여 드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이런 모습으로 기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 좋은 교회되게 해 주세요. 우리 교회 성장하게 해 주세요.’ 이런 표현은 간절함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좋은 교회가 되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를 하든가 ‘우리 교회가 성장을 해서 본당을 가득 차게 해 주세요.’ 이런 구체적인 기도를 하면서 구체적인 꿈을 표현해야 우리 기도의 간절함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기쁨 가운데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확실한 믿음과 간절함이 없기 때문에 응답받지 못하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취한 행동은 믿음의 행동이었습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고, 우리의 기도가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는 기도가 아니면 100% 응답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야곱처럼 이런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며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지만 야곱처럼 응답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응답을 받기 위해서 야곱의 믿음을 본받을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시고,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오늘도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힘껏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