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한국영상자료원(기증자 조희문)
“음반? 요즘은 용필이 오빠가 내도 안 돼.”
영화 ‘라디오 스타’(2006, 이준익 감독)에 나왔던 대사다. 새 앨범을 내서 왕년의 가수왕 최곤(박중훈)을 재기시키려는 매니저 박민수(안성기)에게 라디오 DJ 임백천은 이렇게 잘라 말한다. 척박한 가요계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하지만 7년이 지난 지금, 임백천의 대사는 머쓱해졌다. 올해로 데뷔 45주년을 맞은 가왕(歌王) 조용필(63)이 10년 만에 발표한 19집 앨범 ‘헬로(Hello)’ 때문이다. 음원 차트에서 월드스타 싸이를 누르더니, 숱한 음악팬들의 발걸음을 음반 매장으로 향하게 한다. 가왕의 전설이 현재진행형임을 오롯이 음악의 힘으로 증명한 셈이다. 알고 보면 영화계에도 가왕의 존재감은 지대하다. 한 편의 시(詩) 또는 영화 같은 그의 음악에 영화계는 끊임없이 구애를 보내왔다.
그 사랑 한이 되어
(1980, 이형표 감독)
조용필의 유일한 영화 출연작이다. 상영시간은 97분. 가수의 꿈을 안고 상경한 무명가수 용필과 그의 꿈을 성심껏 지원해주는 여인이자 시한부 인생인 혜련의 사랑을 그렸다. 조용필의 상대역 혜련을 연기한 건 유지인. 1980년대 당시 장미희·정윤희와 함께 트로이카로 불리던 톱 배우다. 가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의 좌절과 성공을 그린 이 멜로드라마에는 미군부대 클럽에서 가수 인생을 시작한 조용필의 자전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조용필은 ‘돌아와요 부산항에’(1976)를 국민가요로 히트시킨 뒤 ‘창밖의 여자’(1980)로 정상을 향해 내닫기 시작한 때였다. 가요계의 수퍼스타로 떠오른 그에게 영화계가 손을 내민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의 보도에 따르면 조용필은 충무로 톱 배우들보다 많은 개런티를 받았고, 촬영은 18일 만에 마쳤다. 이 영화의 촬영감독을 맡았던 전조명씨는 “조용필이 노래 연습뿐 아니라 연기를 열심히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조용필은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새로운 스타일로 편곡해 그해 백상예술대상 주제가상을 받았다. 대중음악평론가 이영미씨는 “서른 살 조용필의 연기와 노래하는 모습을 1시간40분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자료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영화가 어느 정도 흥행에 성공하자 영화사들이 앞다퉈 출연 제의를 했지만, 조용필은 ‘음악 외에는 한눈팔지 않겠다’며 모두 거절했다. 2009년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조용필 팬클럽의 주도로 이 영화의 상영회가 열리기도 했다.
일송정 푸른 솔은
(1983, 이장호 감독)
일제 강점기였던 1920년, 세계 전쟁사에서 보기 드문 전과를 거뒀던 독립군의 청산리 전투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 영화 제목은 만주 무대에서 활약한 독립투사를 노래한 가곡 ‘선구자’(윤해영 작사·조두남 작곡)의 가사 첫머리에서 따왔다. 이 영화에서 ‘선구자’를 부른 게 바로 조용필이다. 독립군의 장렬한 전사 장면을 배경으로 그의 노래가 흐른다. 조용필이 영화를 위해 노래한, 유일한 영화주제곡이다. 이 영화는 제22회 대종상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김좌진 역에 김기주, 이범석 역에 신일용이 열연했고, 독립군 아내 역을 맡은 이보희는 대종상영화제 신인상을 받았다. ‘서편제’(1993)의 김명곤도 이 영화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던 이들 중 당시 87세로 유일한 생존자였던 이우석 옹의 회상 장면도 있다.
이장호 감독의 말 “당시 조용필과 친분이 있어 이 영화를 위해 ‘선구자’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안 그래도 조용필이 가곡을 부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조용필이 돈도 안 받고 흔쾌히 노래를 불러줬다. 이후 ‘에고, 내 새끼’라는 제목으로 조용필이 출연하는 영화를 만들려 했는데, 시나리오가 신통찮아서 실현되진 못했다.”
주유소 습격사건
(1999, 김상진 감독)
사회적 편견과 제약에 꿈이 억눌린 청춘들이 심리적 탈출구를 찾기 위해 아무런 이유 없이 주유소를 터는 내용의 블랙 코미디. 돈만 밝히는 코치가 싫어 운동을 그만둔 야구 천재 노마크(이성재), 음악을 들어야 소화가 되는 딴따라 로커(강성진), 전위적인 누드를 즐겨 그리는 화가 뻬인트(유지태), 험상궂은 얼굴 때문에 늘 범죄자로 오인받는 무대포(유오성) 등은 즉흥적이자 도발적인 하룻밤의 비행(非行)에 짜릿함을 느낀다. 얼떨결에 주유소를 점거당한 주유소 사장(박영규)은 노래를 불러보라는 딴따라 로커의 요구에 조용필의 히트곡 메들리(‘고추잠자리’ ‘창밖의 여자’ ‘킬리만자로의 표범’)로 자신의 서글픈 신세를 표현한다.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슬퍼지지”(고추잠자리)를 부르다가 딴따라 로커가 “다른 거 없냐”고 하자, “용필이꺼밖에 몰라”라면서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창밖의 여자)를 애절하게 부른다. 때마침 중국집 배달원(김수로)이 도착, “왜 새벽에 배달시키는 겁니까”라고 불평하자,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개사해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런지 묻지를 마라”는 노래로 답한다.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다고 평가받는 부분이다.
김상진 감독의 말 “주유소 사장은 조용필 노래밖에 모르고, 딴따라 로커는 다른 노래 부르라 하고. 세대의 차이를 드러내려 한 거다. 그런데 젊은 관객들까지도 좋아해주는 걸 보고, 조용필 노래는 세대를 아우르는 힘이 있다고 느꼈다. 조용필은 노래가 워낙 많기 때문에 상황에 맞아떨어지는 가사를 찾기 쉽다. 그리고 가사도 참 좋다. 조용필 노래만으로 뮤지컬 한두 편은 충분히 만들 수 있다. 당시 박영규는 키를 낮춰 부르면 조용필 노래는 맛이 안 난다며 노래 연습을 열심히 했다. 참, 만일 조용필의 ‘모나리자’를 영화에 삽입한다면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웃음을 뽑아낼 수 있을 것 같다.”
킬리만자로
(2000, 오승욱 감독)
죽은 쌍둥이 동생 행세를 하며 동생의 과거를 파헤치는 형사의 이야기를 그린 누아르 영화. 깡패와 형사라는 상극의 인생을 살아온 쌍둥이를 박신양이 일인이역으로 열연한다. 안성기는 카리스마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력한 깡패 보스 번개로 등장한다. 번개가 목욕을 하며 흥얼거리는 노래가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예전의 위세를 잃어버린 한물간 깡패 번개처럼 밑바닥으로 추락한 삼류인생들의 처절한 삶이 쓸쓸하면서도 강렬하게 묘사됐다. 영화의 정서가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무관하지 않은 이유다. 퓨전사극 ‘1724 기방 난동 사건’(2008, 여균동 감독)에도 모략꾼 만득이(김석훈)가 조선시대에 난데없이 ‘킬리만자로의 표범’ 가사를 중얼거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챔피언
(2002, 곽경택 감독)
1982년 세계 챔피언에 도전하다가 숨진 ‘비운의 복서’ 김득구의 삶을 스크린에 옮긴 작품. 김득구 역을 맡은 유오성이 관장의 호통을 들은 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필의 ‘정’을 개사한 노래를 부른다. 주먹 하나에 삶의 전부를 거는 복서의 비애를 절절하게 표현한 대목이다. ‘정이란 무엇일까 받는 걸까 주는 걸까 받을 땐 꿈속 같고 줄 때는 안타까워 정을 쏟고 정에 울며 살아온 살아온 내 가슴에 오늘도 남 모르게 무지개 뜨네’(원곡 가사) ‘권투란 무엇일까 맞는 걸까 때리는 걸까 때릴 때는 꿈속 같고 맞을 때는 안타까워 승리에 웃고 패배에 우는 살아온 살아온 복서의 가슴에 오늘도 남 모르게 샌드백 두들기네’(개사한 가사).
곽경택 감독의 말 “김득구 선수의 스토리를 취재하러 호주까지 갔었다. 김 선수와 함께 권투하던 친구가 호주에서 살고 있었다. 그와 얘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난다며 조용필의 ‘정’을 개사한 노래를 부르더라. 김 선수와 함께 권투할 때 소주 한잔 하면서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다고 했다. 노래가 재미있기도, 서글프기도 했다. ‘정’을 개사해 부른 사람들이 권투선수뿐이었겠나. 다른 직업의 사람들도 각자 상황에 맞게 개사해서 불렀겠지. 언젠가 조용필의 ‘눈물의 파티’를 영화에 써보고 싶다. 어떤 대목에 쓰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다. 영화적으로 뭔가 연상되는 노래다.”
실미도
(2003, 강우석 감독)
1971년 실미도 북파부대원들이 섬을 탈출해 서울로 진입하다가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한 이른바 ‘실미도 사건’을 다룬 영화.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동원했다. 설경구·정재영·안성기·강신일·허준호·임원희 등이 실제 훈련을 방불케 하는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받으며 열연했다. 영화 예고편의 OST로 조용필의 ‘태양의 눈’이 사용됐다. ‘어두운 도시에는 아픔이 떠 있고 진실의 눈 속에는 고통이 있고 답답한 내 가슴에 간절한 소망~’ 록 오페라풍의 장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이 곡은 영화 전체의 비장미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강우석 감독의 말 “‘태양의 눈’을 듣고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조용필의 음악세계가 이렇게까지 깊어지는구나 감탄했다. ‘실미도’ 예고편에 ‘태양의 눈’을 배경음악으로 써도 되겠느냐고 조용필 측에 문의했더니, 영화 제목과 감독이 누군지를 묻더라. 그래서 제목은 ‘실미도’이고 감독은 강우석이라 했더니 부담 갖지 말고 쓰라고 답이 왔다. 정말 감사했다. 음악을 영상에 입혀보니 마치 영화를 보고 노래를 만든 것처럼 딱 맞더라. 나중에 서정적 영화를 만든다면 조용필의 ‘한강’이나 ‘끝없는 날개짓 하늘로’를 써보고 싶다.”
너는 내 운명
(2005, 박진표 감독)
순진한 시골 노총각 석중(황정민)과 에이즈에 걸린 티켓다방 종업원 은하(전도연)의 순수한 사랑을 그린 영화. 전도연은 대한민국영화대상과 대종상에서 여우주연상을, 황정민은 대한민국영화대상과 청룡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둘이 난관을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하는 날, 피로연에서 새신랑 석중은 총각 시절 18번이던 조용필의 노래 ‘일편단심 민들레야’를 흥겹게 부르며 결혼을 자축한다. “님 주신 밤에 씨 뿌렸네 사랑의 물로 꽃을 피웠네 처음 만나 맺은 마음 일편단심 민들레야.” ‘운명의 여인’ 은하를 향한 석중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노래는 없었다.
박진표 감독의 말 “일단 영화 주제에 잘 맞는 노래였다. 석중이 노총각 시절에도 자주 흥얼거리는데, 결국 노총각 딱지를 뗀다. 노총각의 애환과 결혼의 기쁨이 함께 녹아있는 거다. 결혼 피로연에서는 노래의 템포를 보다 빠르게 했다. 농촌 총각들이 춤출 수 있을 만큼 흥겹게 하자는 의도였다. 석중의 친한 동생 류승수가 로봇 춤을 추면서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기회가 된다면 조용필의 ‘어제 오늘 그리고’ ‘비련’을 영화에 쓰고 싶다.”
라디오 스타
(2006, 이준익 감독)
한물간, 철없는 가수 최곤(박중훈)과 언제나 그를 위해 희생하는 매니저 박민수(안성기)의 우정을 그린 영화. 좀체 사용 허락을 받기 쉽지 않은 조용필의 노래가 온전하게 삽입된 최초의 영화다. 최곤이 라디오 사연을 통해 매니저 박민수를 찾는 가슴 찡한 장면에서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가 흐른다.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숨결이 느껴진 곳에 내 마음 머물게 하여 주오 그대 긴 밤을 지샌 별처럼 사랑의 그림자 되어 그 곁에 살리라.” 조용필은 ‘라디오 스타’의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을 뿐 아니라, 중학교 동창인 안성기에 대한 우정의 표시로 이 노래를 영화에 쓸 수 있게 흔쾌히 허락해줬다. 오랜 시간 서로를 지켜봐 준 정과 고마운 마음이 녹아있는 최곤과 박민수의 관계는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의 정서와 잘 맞아떨어졌다. 이 영화는 대한민국영화대상 음악상,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안성기),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안성기·박중훈)을 받았다.
이준익 감독의 말 “각본을 쓴 최석환 작가와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가 좋겠다고 마음이 맞았다. 노래의 가사와 선율이 영화의 정서와 잘 맞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떠난 매니저 박민수에 대한 최곤의 그리움과 돌아와 달라는 간절한 염원, 그리고 버스 안에서 가슴이 뻥 뚫린 채로 김밥을 우적우적 씹는 박민수의 감정에 가장 적합한 노래였다. 최곤에게는 노래가사 속의 ‘그대’가 박민수인 것이다. 그리움과 아쉬움을 표현한 그 노래를 들으면 지금도 훈훈해진다. 누군가에게 훈훈한 사람으로 기억된다는 게 얼마나 좋은 관계인가.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은 영화를 만들 때 꼭 써보고 싶다.”
안성기 배우의 말 “‘왕의 남자’(2005)의 이준익 감독이 연출하는 ‘라디오 스타’라고 했더니, 흔쾌히 허락했다. 감독에 대한 믿음, 영화의 느낌, 그리고 친구에 대한 우정이 작용했겠지. 친구 조용필에게서 받은 소중한 선물이다. 예전부터 방송국 출연하면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를 듣고 싶다고 항상 신청했었는데, 그 노래를 영화에 쓰라고 허락해주니 무척 기뻤다. 그 노래를 들으면 묘한 감정이 생긴다. 편안해지면서 뭔가 생각하게 만든다. 조용필 노래 중에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비련’을 특히 좋아한다.”
글=정현목 기자
중앙일보 영화주간지 '매거진M' 1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