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의 인상화(印象畵)
윤동주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작품해설
이 시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던 1938년에 쓴 작품으로, 어느 날 밤 형인
화자가 아우와 나누었던 대화를 소재로 하여 삶의 우수(憂愁)를 노래하고 있다.
언뜻 보면 뛰어난 문학적 기교도 없고 인생에 대한 깊은 철학도 담겨 있지 않
은 평범한 작품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이 시는 윤동즈가 추구하는 삶이
무엇인지 가늠케 해 주는 열쇠 구실과 함께, 일제 치하라는 암울한 시대 상황
앞에서 어떤 시를 쓰게 될지 알게 해 주는 나침반 역할을 하는 중요한 작품이
라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2·3·4연에서 형제가 주고받는 몇 마디 대
화와 동작뿐이며, 나머지 1·5연은 아우의 얼굴에서 느낀 화자의 슬픔을 변주하
여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즉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라는 화자의 질문에 아
우는 ‘사람이 되지’라고 짤막하게 대답한다. 이러한 아우의 말에 대해 화자는 ‘
진정코 설은 대답’이라고 여기며, 아우의 순진서을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에게
서 슬픔을 느낀다. 이것이 이 작품의 전부이다. 그러므로 이 시를 온전하게 감
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형제가 나누는 대화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
엇 때문에 화자가 아우에게서 ‘슬픈 그림’같은 모습을 발견했는지 정확히 파악해
야 한다.
이십일 년이라는 결코 길지 않은 삶을 살아온 시인이지만, 그가 삶에 대해 갖는
태도는 다분히 부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자식으로, 그것도
한 많은 만주 유이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민족의 아픔을 맛보면서
남다른 민족의식과 각별한 신앙심을 키우며 성장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마도 자
신의 이상과 암울한 현실 사이에서 빚어지는 온갖 갈등을 겪으며 이 같은 부정적
인식이 배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신의 행복을 위해 양심을 버리는 부끄러운 삶
을 살 수는 없다고 생각 하면서도, 정직한 인간으로서 양심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몸소 체험으로 터득하게 된 그로서는 ‘자라서 무엇이 되려니’라는 물
음에 ‘사람이 되지’라고 쉽게 말해 버리는 아우의 대답이 여간 불만스러운 게 아니
었을 것이다.
사랑스런 아우가 어름이 되기까지 겪어야 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알고 있
는 화자는 그 순진무구한 아우의 대답을 듣고, 다시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
때, 아우의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어리어’ 있음을 발견한 화자는 그의 얼굴에서
‘슬픈 그림’을 떠올린다. 다시 말해, 달빛에 젖은 아우의 얼굴이 화자의 눈에는 마치
‘슬픈 그림’처럼 보이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실제로 슬픈 것은 아우가 아니라, 그
를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이다. 아무런 걱정거리 없이 행복하게 생활하는 아우에게서
잃어버린 자신의 유년을 찾곤 하던 화자로서는 아우가 자라면서 상실할 수밖에 없는
그 행복과 순진무구함이 더할 수 없이 슬프게 느껴지게 된 것이라 하겠다.
암울한 식민지 치하에서 온갖 고통을 극복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화자는 어린 아
우와의 대화를 통해 그 순진무구함과 행복스런 모습을 발견하지만, 자신이 소망하는
성실한 인간으로 성장하며 겪아야 할 아우의 고통을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이와 같이
다소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전개되는 시인의 비극적 자기 인식이야말로 투철한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며, 올곧은 삶을 살고자 했던 참 신앙인으로서의 철학적 산물
일 것이다. 이 같은 삶의 자세 덕분에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완벽
한 삶을 살 수 있었고, 그러한 삶이 표출된 시를 다수 창작해 냄으로써 우리 시만학
사에 ‘위대한 시인’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작가소개]
윤동주(尹東柱)
1917년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출생
1925년 명동소학교 입학
1929년 송몽규(宋夢奎) 등과 문예지 『새 명동』발간
1932년 용정(龍井)의 은진중학교 입학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
1936년 숭실중학 폐교 후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전입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
1942년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과 입학, 가을에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전학
1943년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
1945년 2월 16일 큐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
시집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유고시집, 1948), 『별을 헤는 밤』(1977),
『윤동주 시집』(1984), 『윤동주자필시고전집』(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