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제주시 일도1동 1458-1번지(중앙로53)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옛터
광복을 맞이하자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하였다. 건준은 미군진주가 임박함에 따라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자 1945년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제주도에서는 1945년 9월 10일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미군정이 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탄압하였다.
그러자 건준 위원이자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을 맡았던 이강국(李康國)은 “조선인민공화국은 그 존재가 연합국의 군정과 대립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고 주관적으로 군정을 방해하려는 의사도 없으며 또한 사실상 방해되는 일을 한 적도 없다. 군정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원조하며 중앙 및 지방의 인민위원회는 군정에 협력하여 자주독립을 완성한다. 이것이 곧 양자의 본질적 관계이며 상호적 연관이다.”라고 밝혔다. 그렇지만 미군정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제주신보(濟州新報 1945년 9월 25일자 호외)에 9월 14일자 아놀드 장관의 성명(聲明)이 일본어로 실렸는데 ‘정치단체·시민 등의 경찰력 행사를 금지함’이라는 제목으로 ①연합국 군 최고사령부 포고 제1호 제2조에 의해 현재의 조선(북위38도 이남)에서의 경찰기구는 그 기능을 계속한다. ②정치단체, 귀환병단, 또는 다른 일반 시민대가 경찰력 및 그 기능을 행사하거나 또는 행사하려는 것을 금한다. ③현재의 경찰기구는 종전의 일본정부와는 전연 관계없이 군정장관인 내 아래서 운영되고 그 조직의 실권은 내가 부여하며 또한 그 조직은 헌병사령관 쉭크 준장에 속한다.(後略)라고 되어 있다.
9월 22일에는 중앙 정치 상황의 변화에 따라 건준은 제주도 인민위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제주목관아지 내의 제주도청(濟州島廳) 사무실과 관덕정을 함께 사용했고, 건준 산하의 건준청년동맹은 처음에는 관덕정을 사무실로 사용했다. 1998년경 제주목관아지 발굴 당시에 ‘朝鮮人民共和國濟州委員長’ 직인이 발굴되어 도청에 인민위원회 사무실이 있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제주도인민위원회는 대일항전기 항일운동가들과 명망있는 마을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그래서 미군정이 전국적으로 인민위원회를 해산하도록 명령한 후에도 해산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한 강력한 자생조직이었다. 이러한 제주도인민위원회의 독특한 성격을 정부의 4·3진상조사보고서는 다음 6가지로 요약·설명하였다. ①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자치기구였다. ②항일투쟁 경험자들이 주도했다. ③온건한 정책을 추구했다. ④미군정중대와 밀접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⑤존속기간이 전국에서 가장 길었다. ⑥중앙이나 전남 인민위원회 조직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어 독자성이 강했다.
제주도인민위원회에 대해서는 1945년 전남도청에 근무했던 미군정 요원 그랜트 미드(Grant Mid)도 《주한미군정》에서 ‘제주도인민위원회는 이 섬에서 하나밖에 없는 정당인 동시에 모든 면에서 정부 행세를 한 유일한 조직체였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대일항전기 항일운동을 했던 사회주의 성향의 인물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은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미군정과 대립하기 시작했고, 1947년 3·1 발포 사건 이후에는 경찰에 쫓기는 상황이 되었다. 이들은 이후 4·3이 격화되면서 대거 희생되었다.
초기 제주도 각 읍·면 건준이나 인민위원회 위원장들은 제주읍 현경호(玄景昊), 애월면 김용해(金容海), 한림면 김현국(金顯國), 대정면 우영하(禹寧夏), 안덕면 김봉규(金奉奎), 중문면 강계일(康桂一), 서귀면 오용국(吳龍國), 남원면 현중홍(玄仲弘), 표선면 조범구(趙範九), 성산면 현여방(玄麗芳), 구좌면 문도배(文道培), 조천면 김시범(金時範)이다. 이들 중 우영하, 김봉규, 현중홍, 조범구, 김시범은 미군정 치하에서 초대 면장을 지냈으며 김봉규와 현중홍은 1948년 5월까지도 면장 직에 있었다.
제주읍 인민위원회는 4·3 시기에 목포여관을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이곳은 1990년대까지 나사로병원이 자리했으며 지금은 ‘천년타워’라는 건물이 세워졌다. 따라서 당시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제주4·3유적Ⅰ개정증보판)
《작성 22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