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Ⅱ-92]고창 ‘서점마을’의 젊은이들?
# 30일(월) 정읍의 5살위 아는 형님과 약속한 날이다. 눈을 뜨자마자 큰 바케스에 물을 데워 옹색하게 샤워를 하다. 오후부터 비가 내린다기에 우산을 챙기다. 형님이 부탁한 <우리들의 이순신전> 도록(35000원.'국중박'에서 사옴)과 김진명의 『글자전쟁』 그리고 보여드리고 싶은 재야 서지학자 박영돈씨의 『25현사(賢師) 수간사본집』을 가방에 넣었다. 이 수간본 (手簡本) 은 보각국사(일연스님) 비문을 복원한 국졸 출신으로 평생 학교 조경사와 은행 수위로 일한 박씨가 평생 고명한 학자와 문인 등 현사 25명에게 받은 손편지를 묶어놓은 것이다. 오전 9시, 나홀로 운전. 1시간 20분 걸리다. 정읍시 답곡길 70, 10시 30분 도착. 곧바로 12시 반까지 수담을 나누다. 3점 접바둑 1승 2패. 내리 3연패는 아니어서 칫수는 제자리, 선방(善防)하다. 내장산 입구 맛집 한정식에서 청국장과 비빔밥으로 점심을 하다.
# 전남 승주의 선암사 못지 않은 ‘꽃절’로 알려진 고창의 미소사(微笑寺)에 가다. 2001년 개명한 ‘소리없이 빙긋이 웃는다’는 절이름이 인상적이다. '부처의 미소' '마음의 평온'을 뜻한다고. 원래는 임공사(臨空寺). 방장산 벼랑 위에 매달린 듯한 작은 암자, 미선나무 동강할미꽃 등 야생화의 절이다. 봄철이 절정. 절 입구에서 커다란 진달래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반겼다. 요즘 보기 힘든 할미꽃 여러 개가 극락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 이재 황윤석(1729-1791)이라는 학자를 아시는가? 고창이 낳은 대표적인 실학자 『이재난고(頤齋亂藁)』라는 독특한 문집을 남겼다. 한문이 너무 어려워 번역이 까다롭다는 이 문집은 53년 동안 거의 매일 쓴 일기인데, 조선 후기 생활백과사전같은 기록이라고 한다. 호남지역의 문화, 지명, 풍속자료가 풍부하게 기록돼 있는데,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와 같이 500만자에 이른다고 한다. 전체 번역은 요원한 일. 그분의 이름을 기리는 뜻으로 지은 <황윤석도서관>이 독특한 위용을 자랑하는데, 마침 월요일이라 휴관이다. 유명한 건축가 유현준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종묘 건축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목조구조물로, 길게 뻗은 처마와 긴 장방형 공간이 무척 인상적이다. 종묘는 세계에서 가장 긴 목조건물로 110m. 숲 속에서 책 읽는 느낌을 준다는데 들어가보지 못해 아쉽다.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기 시작하다.
# 이어서 간 곳이 고창 대산면에 있는 <서점마을>. 마을 전체가 6개의 독립서점으로 이뤄져 있다는 게 상상이 되는가. ‘책으로 사는 삶’을 실험하는 공동체마을, 참으로 별난 곳으로 듣느니 처음이다. 책을 좋아하는 나를 위하여 정읍형님이 데리고 간 것이다. 시골 한적한 깡촌에 난데없는 서점마을이라니,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Hay-on-Wye(헤이온) 마을’에 온 듯하다. ‘남의 일’이지만, 가장 먼저 걱정되는 것은 ‘장사가 되겠는가’였다. 아무리 뜻과 취지가 좋다지만, 책방이므로 책을 팔아 돈을 벌고 생활을 꾸려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필이면 서점지기들은 한 사람만 남기고 모두 마을교육을 받으러 갔다고 한다.
주인없는 책방 다섯 곳(철학 인문서 위주의 세발자전거, 그래픽 노블의 NO.9, 여행서를 중심으로 한 목수의 책방, 시집과 독립출판물로 이뤄진 초롱이와 쑥, 생태-환경 서적의 맹그로브)을 구경한 후, 마지막으로 그림책 전문 책방 '고릴라'의 서점지기와 최근 그림책의 출판 경향 등에 대해 몇 마디 얘기를 나누는데, 주인 얼굴이 아무 걱정이 없는 듯 해맑다. 마지막 집은 중고서적이 빼곡이 진열돼 있다. 영업이 되든 안되든, 이들의 꿈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영글어갔으면 좋겠다. 언제든 다시 와 오랜 시간을 함께 했으면 좋겠다. 아무튼 무척 신기한 곳. 고창은 ‘책(冊)으로 삼각형 지도를 그리고 있다고 한다. 고창 해리 책마을은 이제 자리를 잡은 듯하고, 방장산 아래 간서치(책만 아는 바보)가 운영하는 <책이 있는 풍경>은 고정 회원이 4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아무튼, 좋은 일이다. 대한민국 방방곡곡에서 책마을, 서점마을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주말에 줄을 이었으면 좋겠다.
# 오후 5시, 정읍 쌍화차거리 '차마루'에서 쌍화차를 마시다. 가래떡과 땅콩 그리고 밤이 몽땅 들어있는 쌍화차 한 잔이 7000원. 배가 부르다. 형님과 헤어진 후, 정읍 무형문화전수관 기계감리로 일하는 매제를 만나 한돈세트로 저녁을 하며 술 한 잔과 정담을 나누며 같이 잠을 자다.
# 다음날(31일, 벌써 3월의 마지막날이다) 매제의 원룸에서 전복죽으로 아침을 함께 먹고, 가요박물관 '달하공원'을 산책하다. 달하공원은 백제가요 <정읍사>를 주제로 전통 노래와 사랑 이야기를 테마로 만든 문화공원. ‘달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애절한 사랑을 노래한 정읍사의 첫 구절 <달하 노피곰 도다샤>에서 따온 멋진 이름이다. 봄비가 밤새 내린 후라 청신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기분좋은 모닝 산책이다. 이런 힐링공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선진국인 것은 불문가지. GNP가 어느새 4만달러가 넘었다니, 가히 선진국이다. 베이비붐 세대인 우리는 비록 후진국에서 태어났으나, 우리의 사랑스런 아들딸 그리고 손자손녀들은 구김살 하나 없이 선진국에서 살 수 있을 터이니, 이 아니 좋은 일인가. 정치가 문제이고, 통일이 지상과제인 것을.
# 돌아오는 길, 정읍 산외면에 2019년 조성됐다는 <박준승기념관> 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민족대표 33인인 박준승(朴準承. 1866-1927)은 임실이 낳은 독립지사(생가가 잘 보존돼 있다)이나, 말년에 이곳에서 생을 마쳐 '정읍 독립운동의 별'이 되었다. 동학농민전쟁 때에도 활약한 호남의 접주로 삼혁당 김영원 독립지사의 수제자였다. 3.1만세운동으로 2년의 옥고를 치른 후에도 천도교 지도자로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기념관 앞 너른 광장에 한반도 지형의 타일이 깔려 있어 인상적이고, 그분의 동상 주위로 태극기가 펄럭거려 보기 좋았다. 1915년까지 고향 임실 청웅에 살면서 항일투쟁을 했으므로, 기념관을 정읍에 뺏긴 듯해 아쉬운 마음이다.
# 12시 임실 도착, 임실의료원장 선배와 모처럼 점심을 하다. 이 분은 전북대 의대에서 정년퇴직한 후 고향도 아닌데, 지역 진료의 책임자로서 마지막 봉사하는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여러 권의 시집을 펴낸 시인이며, 화가와 사진작가로 전시회도 여러 번 가졌다는 중견 예술인이다. '천도교 임실공소'를 참관하다. 이 유서깊은 공소는 임실지역의 천도교 전파와 활동상을 알게 한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1873년 임실 청웅 조항마을에서 설법을 하며 3주간 체류했고, 이 공소는 일제강점기 한때 전국 총본부역할도 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간 곳은, 오늘날 임실을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임실치즈의 창시자 지정환(1931-2019) 신부의 '삶터'에서 아메리카노 한잔을 친구와 마시며, 치즈를 숙성시켰다는 토굴과 그분이 거처한 숙소 등을 참관했다. 벨기에 출신으로 1964년 임실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디디에르는 맨처음 양 두마리로 시작해 임실치즈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돌아가시는 날까지 전주에서 봉사활동을 한 진정한 '한국인'이 되었다고 한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엄청나게 훌륭한 성직자. 가치있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에 숙연해졌다.
# 오후 3시 귀가하자마자 팔을 걷어부친 게, 대문 밖 밭뙈기와 마당 꽃밭에 거름(퇴비)를 깔았다. 친구에게 관리기로 갈아달라고 부탁해야겠다. 상추 등 푸성귀를 심을 판이다. 고랑을 만들어놓아야 검정비닐을 씌울 게 아닌가. 고추도 20여포기 심고, 6월에는 들깨도 심을 예정이다. 이웃마을 친구가 단호박 씨를 50개 준다고 한다. 모처럼 하는 일이라 온몸이 땀에 젖다. 5시부터 1시간 동안 밭두럭에 마구마구 솟아난 쑥을 한 바구니 캐다. 내일모레 온다는 오랜 친구에게 쑥국을 끓여줄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쑥국도 역시 제철이다.
#저녁밥을 짓고 있는데, 이장의 전화다. 얼마 전 귀향한 여덟 살 위인 형님집에서 삼겹살 파티를 한다며 빨리 오란다. 널찍한 마당에서 다섯 명이 막 잡은 돼지 삼겹살을 구워먹는 맛은 최고이다. 손빠른 형수님이 만든 머위무침은 정말 별미였다. 저녁까지 해결하고, 동네의 묵은 옛날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돌아오니 밤 9시. 이틀 동안의 일기로는 넘치는 일정, 보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