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ver.me/xQeJvhjp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2장 (1)
윌리엄 제임스, 김재영 옮김,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한길사, 2022. <2장. 주제의 범위> (~106p).
#종교적감정 #개인적종교 #제도종교
종교를 그 기원이 아닌 ‘결과’의 차원에서, 특별히 종교적 경험을 통해 이해하고자 했던 제임스는 ‘기쁨’과 ‘삶의 열매’가 종교의 중요한 특징, 나아가 인간 본성의 특징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2장에서는 그것을 토대로 종교라는 주제의 범위를 한정짓는다.
1장의 논의에 따르면 종교는 어떤 하나의 원리나 본질이 아니라, 집합적 개념으로 이해된다. 제임스는 우리가 ‘정부’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에 이를 비유하고 있다. 정부의 본질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가능하듯, 종교 역시도 그렇다고 이해된다.
감정의 차원에서, 우리는 종교의 본질을 의존(슐라이어마허), 공포(오토), 혹은 무한에의 느낌(프리스)과 연관시키곤 하며, 때로 성적인 에너지(프로이트)역시도 포함된다고 주장된다. 그러나 종교적 경험들의 다양성을 통해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들의 집합이 종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부분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감정과 다원성에 기반하는 이러한 종교이해는, 그 자신이 밝히는 바대로 제도 종교와는 구분되는 개인적 종교이다. 제도 종교가 신으로 대표되는 초월적 실재를 제시하고 그의 가르침을 체계화하는데에 책임과 권위를 가짐으로써 종교의 한 축을 구성한다면, 개인적 종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을 잘 드러냄으로써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종교성’을 대변한다. 특히 제도 종교를 벗어난 종교성이 강조되는 현대의 사회에서 제임스의 연구가 다시금 주목받는 것도 이러한 종교의 개인적(감정과 경험에 근거한다는 점에서)이면서도 보편적(그러나 인간 전반에게서 발견된다는 점에서)인 다층적 특징을 포착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임스는 개인적 종교가 제도종교나 그들에 따른 신학보다 더 근본적인 것들을 입증해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2장의 제목인 ‘주제의 범위’는 바로 이 개인적 종교로의 집중을 의미한다.
개인적 종교의 틀 안에서, 종교란 개인이 신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맺은 관계에 다름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적’이라는 말은 다소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임스는 다양한 종교 경험들을 분석하면서 몇가지 특징을 추린다.
첫째, 신적인 것은 인간에게 ‘최초의 것’으로 생각되는 것, 따라서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둘째로 신적인 것은 ‘엄숙한 경험’을 유발하며, 이에 따라 첫째 정의에서 좁혀져 인간이 엄숙하고 장엄하게 반응하도록 강요되는 느낌을 받는 근원적 실재이다.
결론적으로, 종교란 인간이 근본적인 진리라고 느끼는 것을 향한 그의 태도와 동일시된다. 그 진리는 근본적이기 때문에 종교는 인간 삶에 대한 총체적 반응이며, ‘종교적’이라고 불리는 질문들 –삶의 목적과 의미는 무엇인가? 왜 존재하는가? 등- 에 대한 최종적이고 완전한 대답으로 믿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신적인 진리의 수용으로서의 종교 개념은 논리적이고 사변적인 것이 아니다. 제임스는 진리 그 자체가 근원적이고 완전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간이 그렇게 ‘느낀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즉, 여기서도 다시 한 번, 감정이 종교의 이해에 중요한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이 감정이 바로 종교의 ‘삶의 수용’을 매개하며, 따라서 종교를 실제적으로 만들고, ‘총체적으로’만든다.
우리가 궁극적 필연성 때문에 단조롭고 무감각한 방법으로 우루주를 받아들이는가 또는 ...정열적 행복감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는 엄청나게 감정적이고 실질적인 차이를 만들어낸다. 제임스는 스토아학파의 철학적 세계이해와 그리스도교의 감정적 정열을 여러 문헌을 통해 비교하면서, 종교적 경험의 본질을 ‘한쪽으로 치우치고 과장되며 강렬한’ 감정적 반응으로 제시한다. 그것이 종교와 철학(혹은 신학)의 실질적으로 중요한 차이점이다. 그것은 어떤 인간을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되게 하는 어떤 것이다.
이어서 제임스는 그러한 종교적 감정의 대표적인 특징들 몇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한 논의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지면을 할애해 각각 숙고할 필요가 있다.
https://naver.me/IItDE69H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2장 (2)
주제의 범위 (~109p). (2)
#종교적감정 #윌리엄제임스
제임스에게 종교란 인간이 엄숙하고 장엄하게 반응하도록 강요되는 느낌을 받는 근원적 실재(즉, 개인이 신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와의 관계로 정의된다. ‘신적이다’라는 서술이 ‘엄숙’과 ‘장엄’이라는 감정적 반응으로 설명되었고, 그것은 단순한 감정에 그치지 않고 어떤 인간을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되게 하는 파급력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진정한 종교는 순수하게 논리적이고 사변적인 이해로서의 종교와는 명백히 구분된다.
그런데 장엄이든 엄숙이든, 도대체 그것이 어떤 감정이길래 인간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수 있는가?
2장의 남은 지면을 통해 제임스는 구체적으로 그 감정의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그가 분석한 ‘종교적 감정의 특징’은 하나하나가 종교와 인간성 이해의 핵심으로 다루어져야 할만큼 중요하고 깊이 있는 것들이다.
첫째로, 종교적인 사람들에게는 알려져 있지만, 다른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마음의 상태로 ‘우리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것을 꼽는다. 이러한 마음상태를 통해 인간은 두려움의 대상 영역을 오히려 안전한 거주지로 인식하면서, 그 영역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종류의 황홀감을 삶에 첨가할 수 있게 된다.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감정은 일차적으로,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해서 인식하는 단계를 필요로한다. 조금 더 철학적으로 살펴보면, 부정을 통한 존재 인식이다. 즉, 나를 나이게 하는 어떤 본질적인 핵심을 근거로 한다기보다는, 나 아닌 것들을 부정해가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외곽선으로서의 존재로서 자아를 파악한다는 말이다.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경계의 안쪽(나)와 바깥(타자 혹은 세계)을 묶어서 생각할 수 밖에 없이 되며, ‘전체의 부분으로서의 나’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이러한 단계 다음에야 비로소 나 이외의 부분들과 나와의 위계를 설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종교적 자아 인식은 그 경계에 절대적 위계를 ‘느끼도록’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나는 전체 세계의 일부분인데, 나를 제외한, 그럼으로써 나를 가능케 하는 그 세계에 압도된다는 것은 나 자신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의미와 같다. 왜 나는 나이고 나 아닌 다른 것은 다른 것이라고 건조하게 받아들이지 못할까?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단순히 이를테면 개미가 인간과 자신을 비교하여 위계를 느끼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개미와 인간의 비교는 존재자들끼리 공유되는 특성의 정도(크기, 힘 등)의 비교이지만, 종교적 감정은 그 존재자들 전체를 포괄하는 영역과 그 일부로서의 자신에 대한 인식, 즉 존재자이든 그 특성이든,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그 근거 자체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오는 압도의 감정은 하나의 새로운 근거를 필요로 한다고 여겨진다. 다시말해, ‘우리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감정은 단순히 자의식이나 (진화)생물학적 원인으로는 근거짓기 어려운 특징을 지닌다. 오히려 그것들의 근거까지도 포괄하는 본성 차원의 근거를 요청한다.
이로부터 비롯되는 두 번째 특징은, 바로 그 ‘아무것도 아님’을 가능하게 하는 전체 혹은 온전함의 지평이 인간에게 있어 최종적인 희구의 대상이 됨으로써 인간에게 절대적이고 영원한 행복감을 주고, 따라서 그것을 신봉하려는 열렬한 기질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여기서의 행복이 동물적인 만족감이 아님은 분명하며, 이 차이는‘엄숙함’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즉, ‘엄숙함’의 내용은 인간과 전체로서의 차원과의 관계에서 오는 위계의 절대성, 그 아래에서 우연적이고 부정적인 존재자가 필연적으로 느끼는 자기인식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것’즉 전체는 압도적이고 온전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을 ‘신봉할 수밖에’없다. 그것은 취향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그리고 이것이 제임스가 이후 서술할 신비체험의 특징이기도 하다). 경험의 차원에서 접근하다보면, 최소한 인간이 그러한 절대 혹은 온전 혹은 전체를 상정하는 것이 특징적이고 자연스럽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즉각적이고 직관적으로 알고 수용한다는 점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필자가 ‘~다움’이라고 표현했던 독특한 인간 자기인식의 철학적 내용이다. 존재의 전체성 안에서 존재자의 부정성을 인식하는 것, 그럼으로써 부정으로서의 자기존재와 부정 바깥의 전체와의 관계를 상정하는 것, 그래서 필연적으로 그것을 희구하는 것. 이 과정을 ‘필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간 본성 규정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