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남은 사랑니가 탈이 나는 바람에 삼일 째 끙끙 앓다가 아파트 앞
치과를 찾아갔습니다. X-ray를 찍어 보니 48번에 문제가 생겼다고 진단이
나왔습니다. 모니터에 비쳐진 내 해골을 보니 킬링필드 한 컷을 옮겨놓은 것
같아 기분이 묘했습니다. 해골로 비쳐진 내 치아는 위쪽 14개, 아래쪽 1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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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36번이 발치가 된 상태라 나도 모르게 40번 쪽으로 음식을 씹게 되어 사랑
이가 과부하가 걸리지 않았을까 사려 됩니다. 잔뜩 성이 나 있는 잇몸에 마취
바늘을 4방이나 찌르는데 죽는 줄 알았습니다. 마취가 덜 되서 두 방을 추기로
찌른 뒤 발치를 했는데 뭔가 내 몸의 일부가 뚝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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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애를 낳아보진 않았지만 양수가 터지면서 애가 나오는 기분이랄까 뭐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이왕 온 김에 스케일링을 하려고 했는데 스케일링은
나중에 하고 36번을 임플란트 하지 않으면 해골이 부정교합 된다고 협박을
해서 쫄았습니다. 35번도 덮개가 빠져버리는 바람에 아말감을 한 채로 10수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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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 방치해 놓았는데 조만간 골드 크라운을 씌우든 임플란트를 하든 해야 할
것입니다. 난 겁이 없는 편인데 이거 고소 공포증과 주사 공포증은 뭐지요?
딸내미가 한 예종에 붙는 바람에 아빠인 저까지 불경기에 히죽거리고 다닙니다.
함께 보려던 "베테랑"을 보기위해 밤12시에 기어이 롯데 시네마를 찾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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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얼마 전 "암살"을 보고 포스팅을 했는데 또 1000만 영화가 나와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우리나라에 영화라도 대박을
친다니 우리나라 만세입니다. 영화가 크게 좋은 구성은 아니었지만 골치 아픈
세상살이 소주 한 잔 먹고 푸는 것처럼, 앓던 이 빠진 것처럼 유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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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점유율이나 마케팅 등 외부 요인들은 제외하고, 작품 자체를 놓고 봤을 때,
가장 먼저 베테랑의 흥행 이유로 꼽을 수 있는 건, 관객들이 느꼈을 카타르시스와
대리 만족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대중들은 권력에 눌려있고 지쳐있습니다.
빤히 보이는 권력의 거짓말이 증명이 안 되는 시대입니다. 논리가 강하지 않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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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의 논리는 먹힙니다. 저런 몹쓸 것들이 무너지는 모습에 나도 너도 짜릿함을
느낄 것 아닙니까? 1%상류사회를 다룬 드라마지만, 베테랑은 강력반 형사 황정민이
주인공인 수사 활극 액션영화입니다. 베테랑은, 양념처럼 가미된 로맨스도 없이,
선 굵게 남자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여배우들의 연기는 아쉬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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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의 연기가 워낙 압도적이었습니다. 황 정민, 유아인, 오 달수, 유 해진을
비롯하여, 정 웅인, 배성우도 아주 좋은 연기를 보여줬고, 천 호진, 송영창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정도 연기파들이 한 자리에 모였으니 그냥 모여서
바둑이나 장기만 두고 있어도 흥행에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밖에도 조연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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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역에 이르기까지 남자들은 다 좋은 연기를 보여준 것 같습니다. 다들 너무 쟁쟁
해서 서로 각축하기에는 비좁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흥행 측면에서 얘기하자면
유아인의 똘 끼 충만한 연기가 특히 잘 먹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황정민의 강력 반 형사 역은 가히 압권입니다. 오 달수나 유해진, 배성우 등
언제든지 웃길 준비가 된 배우들이 포진한 조연급도 더할 나위 없이 빵빵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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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연기가 선을 넘지 않으며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도 이 영화의
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아쉬운 점은 스토리나 구조가 너무
단순합니다. 반전이 없고 선악의 구별도 너무 일차원적이고, 인물도 입체적이지
않고, 오묘신묘하게 이거 정말 최고다 할 만한 요소들이 별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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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것들을 모아서 이렇게 재미있게 만들어 놓은 게
바로 류 감독의 연출력 아닐까 싶습니다. 러닝타임 내내 스펙터클한 액션은
가히 특급입니다. 우레 같은 빵 터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작은 재미는 어떤 장면
어떤 흐름에서도 소홀하게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류 감독은 개인의 억울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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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작은 세계를 공감하게 해주고, 재벌과 권력의 진절머리 나는 거대함도
잘 담아서, 액션과 코믹을 가미해 사회성까지 담은 드라마로 만들어 냈습니다.
코털 찰스 브론슨 나오는 "내 이름은 튀니티"가 생각납니다. 나도 상황이
아무리 더러워도 유머를 잃지 않고 순수성을 지키는 베테랑 악동이 되고 싶다고.
2015.8.31.mo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