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녹두거리의 미림분식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02호(2020. 1.15)
글쓴이: 나지원 (사회복지93-98, 45세) 변호사
1993년에 대학을 입학하고 졸업 후에도 4년을 대학원 석사과정에 있었으니 2002년에 이사를 가기 전까지 나는 20대의 대부분을 신림9동(현재 대학동)에서 지냈다. 돌이켜보면 신림동은 나의 제2의 고향이기도 한 것이 초등학교 2학년에 가족들과 광주(당시 직할시)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정착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1982년부터 초중고를 모두 신림동에서 다녔으니 나의 유년기, 사춘기, 청년기를 합한 약 20년 동안 이곳에는 나의 울고 웃던 추억들이 서린 곳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신림동을 떠나 이사한 후에도 나는 종종 녹두거리를 찾아 익숙한 서점, 미용실, 밥집에 들러 허기진 몸과 마음을 충전하곤 했다. 그랬던 시간이 이렇게 흘러 그 익숙했던 서점과 가게들이 하나 둘씩 자취를 감추었고, 지금의 녹두거리에는 깔끔하게 새단장한 프랜차이즈 상점들로 즐비하다. 사라지는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고 했던가, 그럼에도 나는 이 동네에 아직도 남아 있는 것들에 안식을 느끼며 이를 단순히 추억거리가 아니라 우리의 소중한 자산으로 가꾸어 나갔으면 한다. 이런 바람이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는지 서울시는 관내의 ‘오래된 가게가 오래 가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2017년부터 서울시 ‘오래가게’를 선정하고 있다. 이런 오래된 가게들은 과거 세대를 직접 겪어보지 못한 젊은이들과 옛 추억을 그리워하는 중년들 모두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오래가게로 선정된 곳에는 인증 로고와 함께 개업 연도가 디자인된 현판을 두고 있는데 지난 2019년 9월 관악구에는 그날이 오면(1988), 미림분식(1988), 휘가로(1987) 세 군데가 오래가게로 선정되었다. ‘그날이 오면’ 서점은 학부시절 사회과학, 철학 등 교양서적을 주로 사보았던 곳이고, ‘미림분식’은 중고생 시절에 짜장떡볶이로 유명했던 우리 동네 분식점이었다. 모처럼 반가운 마음에 학과 동기들과 2019년 송년모임을 미림분식에서 하기로 정했다. 모임이 있는 날 퇴근하여 그곳까지 가는 거리의 풍경과 30년이 지난 가게의 모습은 시간을 거스른 듯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날 그곳에서 동기들과 이야기 꽃을 피우며 모처럼 즐겁고 의미 있는 자리를 가졌다.
미림분식에서 친구들과. 맨 앞 오른쪽이 나지원 동문.
곰곰이 생각하면 예전에 그 좋았던 가게들은 왜 문을 닫게 된 것일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새로운 트렌드에 맞추어 신상과 새로운 융합서비스가 넘쳐나는 시대에 한 가게를 오래 하는 것은 오히려 시류에 역행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한편으론 우리 마음과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빨리빨리’라는 조급증과 지나온 과거에 대한 홀대의식(피해의식)에 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직도 나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보다 남들이 가진 것이 더 좋고 크게 보이는 때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2020년 새해에는 내 일과 분야에서 아주 오래된 가게처럼 변함없는 꾸준함이 가지는 미덕을 지켜보자고 다짐해 본다.
* 나 동문은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 법학석사, 법학박사를 거치며 2018년 ‘FRAND 확약의 효력과 표준특허권 행사의 한계’라는 학술서를 내기도 했다. 현재 법무법인 충정에서 파트너 변호사로 일하면서 공정거래, 지식재산, 교육-학교, 정보통신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