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自畵像)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없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작품해설
주지하시다시피 윤동주와 이육사는 다함께 일제 말기 암흑의 시기에 죽음으로 저항하며
항일 민족문화의 맥을 이은 시인들이지만, 두 사람의 작품 세계는 여러면에서 이질적이다.
육사의 경우, 극한 상황에 밀린 민족의 위기를 초인적 의지로써 극복하려는 데 비해, 윤동
주에게는 그러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반면에 윤동지의 시는 자신의 생활에 대한 애
정 있는 성찰과 자신이 지켜야 할 이념에 대한 신앙적 자세를 시 세계에 담아냄으로써 ‘부
끄러움의 미학’이라는 독특한 체계를 세웠다.
이 시도 ‘부끄러움의 미학’을 바탕으로 하여 1939년 9월, 연희전문학교 재학 당시인 22
세 때 쓴 작품으로,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번뇌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애증(愛憎)을 서
술체 문장으로 보여 주고 있다. 먼저 이 시에는 ‘우물 속의 사나이’와, 그를 들여다보는 화
자인 ‘나’, 이렇게 두 사람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이 시는 양분된 이 두 존재가 부정(否定)과
긍정(肯定)을 거듭하거나 마침내 화합하는, 이른바 변증법적 구주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우물 속에 비친 사나이’는 바로 시인 자신이며, ‘우물’은 「참
회록」에서의 ‘구리거울’과 동일한 이미지로서 자신의 삶을 투영할 수 있는 매개체이다. ‘우
물 속의 사나이’를 발견하는 자기 인식의 심리적 묘사가 함축미 있는 시어의 구사로 윤리
적이고 심미적인 긴자암을 배가시킨다.
1연에서 화자는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 자신을 성찰하고 있다. 우물은 ‘산모퉁이
’를 지난 ‘외딴’곳에 있고, 그 곳을 ‘홀로’ 찾은 화자는 ‘가만히’ 우물을 들여다본다. 이것으로
볼 때, 우물은 일상의 세계와 분리된 곳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외딴’·‘홀로’·‘가만히’
등의 쓸쓸하고 외로운 느낌의 시어들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성찰하겠다는 화자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연은 들여다본 우물 속을 묘사한 부분으로 아름답고 순수한 자연의 모습이 나타나 있
다. 이것은 ‘나’를 포함한 현실 세계에 대한 만족감에서 비롯된 인상적 표현이라 볼 수 있
다.
3연에서는 2연의 풍경 아래 화자가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물 속의 사나이’는 2연의
분위기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화자는 그가 ‘미워져’ 돌아가고 만다. 화자가 우물 속
에서 발견한 ‘사나이’는 시대적 고뇌를 안고 살아가는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
이 아니라, 그저 현실에 안주해서 만족하고 있는 자신의 현재 모습으로, 그는 그러한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자기 혐오감을 갖게 된다.
4연에서는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이 함께 나타나
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자신이 가엾어져서 다시 우물을 찾아가 들여다보는 행위가 바로 그
것이다.
5연은 내적 갈등, 고민, 방황이 집약적으로 드러나 있는 부분이다. 미워져 돌아가고 돌아
가다 다시 그리워지는 화자의 행위가 반복된다.
6연은 우물속의 풍경을 다시 묘사하는 동시에,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추억’은 그리움 내지 동경과 상통하는 것으로, 이제 우물 속엔 그 ‘사나이’가 더 이상 존
재하지 않고, 다만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 있을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두 자아가 비로소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작가소개]
윤동주(尹東柱)
1917년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출생
1925년 명동소학교 입학
1929년 송몽규(宋夢奎) 등과 문예지 『새 명동』발간
1932년 용정(龍井)의 은진중학교 입학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
1936년 숭실중학 폐교 후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전입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
1942년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과 입학, 가을에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전학
1943년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
1945년 2월 16일 큐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
시집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유고시집, 1948), 『별을 헤는 밤』(1977),
『윤동주 시집』(1984), 『윤동주자필시고전집』(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