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빅파이론에 빠지면 안 된다. 우리의 희망버스!
희망버스의 앞길은 무궁무진하다. 희망버스의 심화를 모색하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비정규직 없는 공장 만들기 희망버스도 그 중 하나의 큰 길을 보여 주었다. 그 길을 가는 김소연 기륭전자 분회장은 이렇게 희망버스를 말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치열한 투쟁을 해 온 우리 비정규직노동자들이다. 그 동안 우리의 투쟁은 해도 해도 너무한 절망 사회에서 작은 희망을 지펴왔다. 기륭 동희오토, 지엠대우 비정규직 투쟁의 승리, 불법 파견 노동의 정규직화 판결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지속적인 투쟁의 결과라 해고 지나치지 않다. 우리시대 민주와 변혁의 희망을 깨우고 있는 ‘희망버스타기 운동’의 뿌리에도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녹아있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를 통해 희망버스의 기본정신인 자율, 헌신희생, 발품손품정신을 구축한 것도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현대모비스를 시작으로 ‘비정규직 없는 공장 만들기 희망버스’를 출발시킨다. 김진숙 지도위원과 한진중공업노동자들의 투쟁이 만든 희망버스를 더욱 아래로 확산하고, 우리의 희망이 한 지역 한 공장 한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이고 전 사회적이며 전체 민중의 문제임을 알리는 희망버스다."
희망버스가 우리 시대 희망이 된 것은 실천의 집중과 개성적 자발과 헌신적 연대정신이 죽음을 건 투쟁의 진정성과 잘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한사람이 때로는 역사'라는 금언이, 나 하나의 투쟁, 우리들의 지금의 투쟁이 지금 당장 작고 약해도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다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꿰는지를 신명나게 보여주는 눈부신 활력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왜 민주노총은 금속노조는 이런 활력을 만들지 못하나 한탄의 질문을 종종 들었다. 나는 투쟁의 진정성과 창의적 활동력이 유격대식으로 발휘되는 초심을 잃었기 때문이라 답했다. 민주노총과 금속노조가 활력을 잃은 것은 그들이 투쟁을 절차와 형식에 가두기 때문이다. 현장 정서가 현장 동력이 투쟁을 밀고 가는 힘이던 시절이 가고 현장정서가 소시민의 자기욕심에 지배당하고 현장 동력이 돈으로 움직여지는 유사 자본 형으로 비틀려 져 있는 상황에서 '소극적이고 정파적이며 관료적' 안목을 벗지 못하는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는 대중으로부터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상황이 이렇게 된 첫째 책임은 자본과 권력의 민주노조 죽이기 정책과 탄압과 조작에 있지만 대 민주노총과 대 금속노조가 김진숙 동지 하나의 상징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주체적 성찰도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소극적이고 정파적이며 관료적 절차와 형식의 안목'을 벗지 못한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는 대중 활력의 비밀인 '맹랑한 즐거움, 창의적 상상력, 그것을 밀고 가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유격대식 행동'을 해 내지 못한다. 그래서 제 몫만 해도 대단할(제대로 된 파업)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는 제 몫도 하지 못하고 세 살배기에 큰 황소가 코뚜레 뚫려 끌려가듯 방황하고 있다. 구심력과 원심력이 마구 헝클어져 있다는 것이다.
3차 희망버스가 1만 고정승객을 확보하며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제 4차 행보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하지만 민주노조운동과 희망 버스와의 아름다운 결합이 채 완성되지 못한 조건에서 3차에 이어 4차의 행보가 불안한 채 다시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 와중에 노회한 정치세력의 움직임과 그 움직임에 반발하는 서툰 운동세력들에 의해 벌써 파이 나누기 논쟁에 돌입했다. 결국 3차 희망버스가 제 길을 낸 지금 다음 길은 무엇인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우리가 파이를 나눌 시기인지, 파이를 키울 시간인지? 나눈다면 그 방법은 무엇이고 키운다면 그 지혜는 무엇인지? 그런 논쟁이 어느 덧 필요한 시간이 된 모양이다.
3차 희망버스를 탄 아침에 뿌려진 유인물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희망버스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 글을 낸 이들에게 나는 그 답을 글 서두의 김소연 분회장의 글로 대신하련다. 다만 기본적으로 희망버스의 '질적 심화와 양적 확산'에 대하여 지금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조금 더 말하고 싶다.
희망버스의 뿌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다. 그리고 쌍용자동차 투쟁을 통해 정리해고 문제가 다시 파종되었고 김진숙 동지와 한진 노동자들의 '절망에 답하는 희망'의 투쟁에 대중의 연대로 꽃피었다. 그러므로 희망버스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 정리해고 없는 세상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자기 해방의 길이었고 그 투쟁의 봄 햇살이 모든 산하의 생명을 한꺼번에 깨어나게 하는 기적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기적이 새로운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우리는 그것을 "오래된 미래"라 한다. 우리가 걸어왔던 대중이 주체가 되어 나서던 그 시간, 우리가 아직 헌신과 희생으로 생의 보람을 찾던 그때, 돈을 내고도 연대에 나서고 몸을 던져서 투쟁에 나서고, 발품과 손품을 팔지 않으면 마음이 아팠던 그 시절, 우리가 절로 실천하고 있었던 즐거운 투쟁, 신명나는 연대의 경험이 우리 역사 속에 고스란히 있으며 우리들의 몸과 마음속에 깊숙이 자욱이 남아있다.
문제는 노동자 계급의 운명을 책임지는 민주노총이 금속노조가 아직 자기 각성을 하지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뿌린 '자학과 비관'이란 오물에 떡칠한 모습이 자기 모습이라 착각하는 우매를 벗지 못하고 있다.
지난 시기 촛불이 타 오를 때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는 노동자 민중의 조직된 힘으로 촛불의 허벅지와 허리가 되어 펑! 명박산성을 깰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는 이상하게 전위가 아니라 후위를 자처했다. 민주노총은 그리고 금속노조 등은 시기와 역할을 거꾸로 생각한다. 상황인식이 거꾸로 작동한다. 그것은 마지막 막을 깨어 달라는 전체 민중의 요구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실망을 주고 있다. 이런 상황을 아직 깨닫지 못한다. 이 미묘한 불일치는 우리 민주노조운동이 정말 살아있는 정세판단력과 상황에 충실한 결단적 실천을 가로막아 저절로 주눅든 우리의 모습을 보여 준다.
희망버스는 민주노총의 혼란과 대중운동의 활력을 함께 극복할, 즉 미묘한 불일치를 극복할 또 하나의 기회를 주고 있다. 이명박 정권 들어 두 번째의 기회를 맞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양쪽으로 온다. 하나는 민주노총 금속노조 역할에 대한 요구와 불일치이다. 또 하나는 정치적 성과를 즉 결과를 누구에게 귀속시킬 것인가에 대한 요구와 불일치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전자지만 더 예민하고 미묘하게 작동되는 것은 후자로 보인다. "희망버스의 주인은 누구인가?"를 묻는 이들에게는 후자의 위험성이 다급한 모양이다.
미묘한 불일치를 극복하기 위해 우선 희망버스의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희망버스는 우리 시대 두 개의 비극의 쌍봉우리를 넘고 있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라는 봉우리가 그것이다. 이 중심을 잡고 중심을 해결하는 것을 놓치지 않는 다면 지금의 불일치는 노동운동의 자성과 혁신의 계기가 될 것이며, 화를 복으로 바꾸는 기회가 될 것이다.
민주노총 위원장의 장시간 단식에 사회가 충분히 반응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민주노총 위원장의 단심이 국민의 마음을 울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목숨을 건 진정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위원장의 3차 희망의 버스에 동승하지 않는 것이나, 정리해고와 한진중공업 사태 해결에 집중의 지혜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것 등이 다 마음이 통하지 못한 결과다.
지금 민주노총 등에게 필요한 것은 죽음을 건 투쟁의 진정성을 대중에게 인정받는 것, 분명한 집중 점의 형성으로 돌파력을 강화하는 것, 조직대오의 제대로 된 출전으로 대중적 분출의 두 번째 도약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노조의 조직된 뚝심이 노조의 절차와 형식에 치여 만성피로에 신음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버스의 활력을 담고 2차 도약을 하는 발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4차 희망버스는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적 조직적 힘을 처음처럼 부활시키는 것과 희망버스로 희망을 보는 촛불들이 부활하는 이중의 부활의 장으로 만들어 져야 한다. 이를 위해 희망버스 기획단과 민주노총 금속노조 등 투쟁 주체들의 올바른 정세판단과 실천을 해 진로를 잘 합의해 내야 한다. 희망노총 운운하는 바보스런 그러나 장차 너무나 클 파괴력을 담고 있는 병증에 집착하지 말고, 나아가 희망버스가 누구 것이기를 따지기 전에 노동자 민중이 어떻게 희망버스의 중심으로 실천의 주력이 되는 것인 가를 먼저 모색하고, 그 과정을 통해 희망버스라는 흐름이 왜 노동자 민중의 흐름임을 입증해야 한다.
희망버스타기와 민주노총 등의 총 투쟁, 총파업 투쟁의 아름다운 일치! 이것으로 우리의 첫 베이스캠프가 쳐져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양한 하나를 위해 다양한 길이되 한 곳을 향하는 지혜를 견지하는 것이다. 희망버스의 양을 확산하기 위해 연대를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희망버스의 질적 심화를 위해 민주노총과 희망버스는 제대로 된 단결을 달성해야 한다. 의식적인 노력보다 자연스런 흐름으로 채워지는 시기는 1~3차 희망버스로 충분했다. 지금이야 말로 보다 목적의식적인 정리해고 철폐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주체들의 목적의식적 노력이 필요할 때다.
연대에 대한 "희망버스의 주인은 누구인가?"의 우려는 역사적 트라우마가 있는 주제로 결코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문제제기가 중심이 되는 순간 우려하는 것에 쓸려 가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희망버스" 자체다. 자기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이가 전술적 행위를 무서워한다. 지금 우리는 희망버스로 조직을 만들고 있지 않다. 흐름과 분출을 만들어 내는 초기 행보이다. 아직 우리는 내년 대회전에 필요한 워밍업을 하고 있다. 100만 1,000만 대행진을 위해 우리의 연대는 순결한 첫 눈뭉치가 아니고 대하를 품는 바다의 연대가 필요하다. 왜 걱정하는가? 김진숙 동지의 투쟁이 저렇게 선명한데 왜 걱정하는가? 희망버스의 흐름이 오히려 모든 것을 품어 안고 가는데. 그러니 구더기 무서워 장을 담지 않는 우를, 벼룩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태우는 우도 범하지 말자.
빅 파이 이론은 낡은 이론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성급하게 제몫 찾기에 빠져든다. 그런데 제몫 찾기 경쟁으로는 우리는 자본은커녕 우리도 바로 세울 수 없다. 나는 정동영의원의 행보를 충분히 인정한다. 그가 한진 투쟁의 퀵맨이라 하는 순간 나는 그가 훌륭한 희망버스 승객이라고 생각한다. 그 어떤 의도를 가지든 유시민과 이정희가 어떤 정치적 의도를 펼치던 희망버스가 그들을 정케 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배가 고파야 한다. 더 유명한 이들 더 유명한 세력들이 우리시대 제대로 된 노동자 민중의 해방로 희망버스라는 대하에 몸을 담그게 해야 한다. 더욱 많은 연대는 희망 버스의 몸체가 될 것이고 노동자 민중의 제대로 된 단결과 투쟁으로 심장을 만들어 "희망버스의 주인은 누구인가?"가에 대한 답을 상황이 말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 누구 것을 따지는 행위는 그 충심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투쟁의 맥을 끊는 바보짓이 되고 말 것이다.
지금 우리는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등 조직된 힘으로 뚝심 있게 통 크고 진공적으로 총파업을, 총파업을 향한 제대로 된 진지를 구축하는데 희망버스라는 상쾌한 길을 타게 하자. 또한 희망버스 기획자들도 희망버스 기획에 총파업 및 총력 투쟁을 담는 안목을 열어 놔야 한다.
희망버스를 비난하는 김대호라는 인물이 조중동의 찬사를 받고 있나보다. 구로출신의 노동운동을 하다 김우중의 품으로 달려가 대우차 정리해고를 찬성한 이다. 이들이 불만을 만들고 그들이 견딜 수 없는 사회적 연대를 달리는 이 자체가 바로 희망버스가 이기고 있음을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