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택시 안에서의 명상
이승철 시인
그날 밤 우리는 밤의 천국 속으로 총알택시를 몰았다. 설익은 밤바람이 휘달려와 차창을 때리고 한 여자가 연신 뱃가죽을 감싸 쥐며 캐터필러 같은 웃음을 터뜨리자 밤바람 소리는 이내 꼬리를 감추었다.
일산행 호텔 캘리포니아로 직진하는 그 택시 안 카세트에선 머라이어 캐리의 After tonight will you remember how sweet and tenderly라는 노래 가사가 상큼하게 울려퍼졌고 내 넋꽃의 삭정이를 가뭇없이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날 밤 내 마음속 악마가 문득 나에게 속삭였다. 오늘 또 하루, 썰물 같은 그대 인생이 이파리 죄다 떨군 채 겨울 잣나무처럼 당당하게 먼산바라기로 살아 숨쉬고 있음을 참으로 눈물겹게 찬송, 찬송하라고ㅡ
하여, 나는 채석강 단애처럼 고개 빳빳이 추켜세우며 잡탕 같은 내 인생의 끝을 밤 이슥토록 쳐다보았다. 내 몸뚱이 어디서나 네발 달린 짐승의 피가 거칠게 역류하건만 무슨 까닭으로 내 살과 뼈와 피 속에 문문히 박힌 헛된 사랑이라든가 혹은, 기다림에 지쳐 자리 보존치 못하는 한 마리 짐승을 저 들녘길 벼랑에 내다 버리지 못하는가.
아무도 몰래, 지상의 인간들이 전혀 눈치 못 채게 마침내 구원의 찰나를 찾고 있는 가엾은 나의 악마여. 모오든 순수한 것은 순간 속에 머물지 않는다. 의심치 마라. 그리하여 그대가 오늘 웃어도 장자의 말씀처럼 천지를 여인숙 삼아 어디론가 길 떠나는 나그네새가 되어야 함을 그날 밤 나는, 문득, 총알택시 안에서 깨달았다.
당산철교 위에서
이승철
2만 5천 볼트의 전류를 기운차게 뿜어내며
2호선 전동차가 바람을 헤치며 돌진한다.
당산철교 밑으로 푸르딩딩한 강물이 떠가고
당인리 발전소 저켠 치솟는 굴뚝 연기들이
사쿠라꽃처럼 화들짝 꿈틀거리고 있다.
나는 일순, 덜컹이다가 쓰라린 공복을 어루만졌다.
나는 지금 한 마리 낙타로 인생이라는 사막을
무사히, 잘, 건너가고, 있는가?
옛사랑이 다만 흐릿하게라도 남아있는 한
세상을 사는 존재의 이유를 되묻지 말아야 한다.
전동차 유리문 너머 오늘 또다시 手打국수처럼
수십 수백 가닥으로 흩어져 내리쳐질,
한 사내의 누리끼리한 얼굴이
저리도 점잖게 미소짓고 있다.
(제3시집 '당산철교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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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의 시를 밀고 나가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청춘의 가마솥을 달구어내던' 오월 광주 이후, 가파른 세월을 거쳐온 그의 시는 아직도 결기를 삭이지 못한 짐승 몇 마리쯤 기르고 있는가 보다. 나는 순치(順馳)되지 않는 그 욕망과 야성이 좋다." - 정희성(시인)
시인 이승철은 1958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1983년 시전문 무크 <민의> 2집에 시 '평화시장에 와서' '용봉동의 삶' 외 7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4년부터 나남, 인동, 산하 출판사 편집장 및 도서출판 황토 대표, 작가출판사 편집위원 등을 맡아 출판문화운동을 펼친 시인은 시집으로 <세월아, 삶아>(1992), <총알택시 안에서의 명상>(2001)을 펴냈다.
지금,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국장, 시 전문지 <시경> 편집위원, <도서출판 화남>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
이종찬 기자(2006년 1월 17일. 18:14 오마이뉴스에서 발췌)
그 후로 시집 '당산철교 위에서'(2006), '오월'(2013), '그 남자는 무엇으로 사는가'(2016)를 펴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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