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 강조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사들에게 성도들 위에 군림하라고
특별한 권세를 주신 일이 절대 없으시다.
그리스도 자신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다른 모든 자들은 목사를 포함하여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에 불과하다.
목사가 그리스도의 자리인 머리가 되려한다거나 모든 지체들보다 특별한 권세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한다면 크나큰 오산이며 복음에 무지한 자라 여겨야 할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정치조례에서는 "목사는 계급을 가리킴이 아니요,
다만 각양 책임을 가르쳐 칭하는 것 뿐이다."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예장통합과
예장고신의 헌법에서는 삭제되었다. 왜 삭제했는지는 아래 글에서 다시 밝힌다.
신학자이며 성경주석가인 (고)정암 박윤선 목사의 주장을 들어보자.
그는 목사들에게 권세를 가지지 말라고 이렇게 경고한다.
"만일 목사들이 자기에게 어떤 권세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반역이다."
이 한마디 속에 목사들의 처신이 어떠해야 하는지 모든 의미가 잘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당시 한국교회 목사들이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강대상을 높이고 복식(가운)을
화려하게 갖추며 박사학위를 선호하며 자신을 위하여 교회의 재정을 낭비하는 현실을
비판 하기도 했다.
목사란 구약의 제사장처럼 성도들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가 아니다.
성도들 개개인이 모두 제사장이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일대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으며 이는 대제사장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중재자가 되시는 은혜로
목사를 비롯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똑같이 부여된 특권이다.
목회자의 권위에 대하여 말한다면,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는 것이지
그 말씀을 수종드는 종이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보배가 담긴 그릇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은 보배로 인함이지
그릇 자체의 가치는 아무 것도 아닌 것과 같다.
질그릇이 아무리 요란스런 치장을 하고 권위를 내 세운다고 금그릇이 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수종드는 종이 아무리 권위를 내세우려하나 그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목사에게 특별한 권위를 주신 일이 없으며 그 말씀 자체에만 오직 권위는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목사란 그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전하게 전하여질 때에
권위가 세워지는 것이지 그 말씀을 벗어난 인간의 생각인 목사의 말로 변개시켜 왜곡될 때
그것은 더 이상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성도가 순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하여지는 순간 그 권위가 함께하는 것이기에
따르는 것이며, 그와 반대로 헛된 말로 하나님의 본의를 가리며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 때
목사는 그 말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권위마져 실추시키는 크나큰 죄악이 된다.
보배를 담은 그릇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그 보배를 훼손한다든지 변질되게 하는
그릇일 경우는 어찌해야 하는가?
마땅히 폐기처분 되어야 하는 처지가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목사라는 그릇을 말씀을 담아 옮기는 도구로 사용하실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교회 권력의 전주곡
이는 말씀 전하는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그 말씀대로 행하지않고 그 명령을 거스려
자신의 생각을 따라 눈에 좋은대로 마음에 좋은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안에서
자신을 드러내기에 욕심을 부리며 당치도않은 권위를 세우려 하는 모든 일에 해당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도 전에 강단에 올라서는 목사라고 하는자의 마음가짐이
이미 성경을 벗어난 인간의 교만과 우월감으로 어깨를 부풀리며 특권의식으로 가득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거스르고 있다면 이를 어찌해야 옳단 말인가?
그 이후에 벌어질 모든 일들에 대해 안봐도 불을 보듯 그 결과는 예고되어 있는 것이다.
어떻게 성도들을 가르칠지 어떤 말로 성도들을 후리며 설교를 통하여 성도들을 우민화하고
목사대접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먼저 가르칠 것이며 목사의 마음을 상하게하면 어떤 저주가
임하는가를 은연중에 협박하며 교묘히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성도들을 서서히 세뇌시켜
자신의 수족처럼 길들여 갈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염려가 앞서는 것이다.
필시 모세와 미리암 얘기며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 얘기와 엘리사를 대머리라 조롱한
젊은이들을 암콤이 어찌했다는 얘기등등..
사실상 성경이 말씀하는 본의는 저버리고 아전인수격으로 목사를 위한 성경으로 둔갑시켜
설교시간을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는 말씀을 빙자한 자신의 유익을 챙기는 일에
서서히 본성을 들어낼것이며 이미 이러한 상황은 예정된 수순에 따라 진행될것으로
안봐도 불을보듯 뻔한 일이다.
성경이 조금이라도 목사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대접받기를 위해 쓰여진 책이란 말인가?
하나님은 목사의 대접과 특권에 관심보이시려 위 말씀들을 주신것이 전혀 아니다.
꿈보다 해몽이 낫더라는 말이 위와 같은 경우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목사들은 위 구절의 말씀을 왜 주셨을까 자세히 상고해보라.
성도를 섬기려는 참된 목사의 자세는 첫 걸음부터 다르다
우리속담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도 있다.
정숙하고 행실이 바르며 살림을 규모있게 하는 여인은 새색시 적부터 몸가짐과
옷차림이 역시 무언가 다르다.
학업에 정진하려 혼신을 다해 힘쓰는 청년은 청바지를 구멍내어 입지않으며
귀걸이를 하지않으며 머리털을 요란하게 염색하는둥 그런 쓸데없는 일과 치장에
신경을 쓰는 일이 없다.
일을 하러 나온 일꾼의 차림새를 보면 대강 그 일꾼의 마음가짐이 어떠함을
미리 짐작할 수 있으며, 첫 느낌부터 믿음직한 그 모습을 볼때 그가 비록 일을 잘할지
서툰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일을 대하는 그의 차림새 하나로도 일꾼을 부리는 주인의
마음에 벌써 절반의 칭찬과 성실함을 이미 인정 받는 셈이다.
하물며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분을 맡은 자로서 강단에 서야하는
목사의 각오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
하나님이 원치도 않으실 뿐더러 이런 행위를 삼가하라고 경계하시는 아래 구절 같은
말씀을 어기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 정면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역행하여 성도들에게
자신의 경건함을 외식적으로 드러내는 이런자들을 어찌해야 옳겠는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또한 마23: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차고다니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하고...)
(3) 가운을 즐겨입는 목사들의 공통점
가끔씩 보게되는 기독교 케이블 방송에서 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설교자들의 요란한 복장이다.
언뜻 봐서 카톨릭의 방송인지 기독교 방송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그들의 모습은
천주교 사제들의 모습과 흡사해서 헷갈릴 정도이다.
선입견이라 할지 모르나 나는 그 설교자의 옷차림만 봐도 저런 목사의 입에서
무슨 신통한 소리가 나오겠는가 하며 기대를 접는 편이며, 무슨 말을 할지
설교 제목만 보면 대강 설교의 내용을 안들어도 흐름을 읽어낼수가 있고
설교에 인용될 성경구절마져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나의 선입견이 아직 틀려본적이 없는 것은 가운을 걸치고
품위를 자랑하는 목사들 중에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자가 한 사람도
내 눈에 띄지를 않았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일반적인 양복으로 정장을 한 목사들 중에 그야말로 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를 드문드문 만나게 되는데 이것으로 나의 예상은 편견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이 사실로 밝혀지는 것이다.
이런것을 일컬어 차라리 선입견 이라기보다 목사를 판단하는 선견지명이라 해야 옳지않을까?
존경받을만한 소수의 목회자들
내가 아는 목회자중에서 평생토록 가운 걸치는것을 금기시 여기는 대쪽같은 성품의
목사도 있으며, 또 어떤이는 개척교회의 목사로서 형편이 어려워 단벌 양복을 입고
매주일 설교강단에 선다해도 부끄러워 하기는 커녕 오히려 가운입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는 목사도 있다.
이런 성품의 목회자들의 입에서 어찌 쓸데없는 세상 얘기며 자기 자랑과 인간의 헛된
교훈이 복음과 함께 섞여져 나오겠는가?
이런 진실된 목사들이 자기를 섬기라고 성도들에게 헛된 말을 하겠는가?
이런 소수의 목회자들이야 말로 성경의 가르침대로 배나 존경할 자로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
[눅 20: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마23: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차고다니는 경문을 넓게하며
옷술을 크게하고"
어쩌면 이렇게도 미리 아시고 이토록 정확한 묘사를 하셨을까?
가운의 생김새를 보라!
축~ 늘어진 넓은 소매하며 요란한 무늬와 색깔하며 더구나 띠를 두른 박사가운을 입고
으시대는 저들의 작태가 얼마나 적나라하게 성경에 기록되어있는지 신기한일이다.
이미 2000 년전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미리 아시고 말씀으로 기록하게 하셨는지
참으로 감탄할 일이다.
소위 종교 지도자라 칭하는 자들의 행태는 옛날의 서기관이나 지금의 목사나
어쩌면 그리 동일한가?
예수께서 옛적에 외식적이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질책하셨다면
그 말씀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유효하리라.
지금의 목사가 이런 식의 말씀을 저버리는 행위로 인해 예수님의 책망을 받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수 있으며 어느 누가 감히 이런 저런 반론을 제기할수 있단 말인가?
가운을 입은 목사가 설교중 자주 하는말은 이것이니 (목사를 잘 섬겨야한다. 목사를 잘 대접하라....)
단언하건대 이것들은 권위주의의 발상에서 나온것들이다.
이는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며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난 행위다.
이렇게 비성경적으로 생겨난 목사의 권위주의는 참으로 무서운 권세라 할수있다.
이 권세는 곧 교회안의 권력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며 한번 섬김의 맛을들인 목회자를
성도들이 비판하거나 견제하려 권면을 하다가는 사탄의 앞잡이란 모함을 듣기 십상이다.
이런 성도들을 향해 표적설교로서 비난 및 저주의 포화가 집중될것이며
이런 공격성 설교의 결과로 어리숙한 성도들에 의한 왕따가 잇따른다.
결국 그 성도는 목사 권위의 희생양이 되어 교회를 떠나야만 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목사에게 부여된 권위는 성도들을 휘두르는 권세가 아니고 대접을 받으라는 권세가 아니며
성도를 섬기고 양육시키라고 위임받은 말씀의 권위 아래 복속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주님께로 부터 위임받은 이 권위를 이용하여 악한 사단으로 부터 교회를
보호하며, 진리 위에서 교회를 바르게 세워 나가는데 사용해야 하는데 그 권위를 자신을
높이는 일을 위하여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자신이 섬기는 교회와 성도들을 상대로 지배하려
한다거나 섬김을 받는데 사용을 하고 있으니, 이는 목사가 교회에 사단의 자리를 잡고서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된다.
목사들의 예배용
가운 (견본들)과
일부 지각없는 목사들이 선호하는 박사가운(팔소매 띠 두른것)견본
카톨릭의 사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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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 신부들 |
위 사진을 비교해 봅시다.
기독교 목사의 복장과 이것이 무엇이 크게 다르단 말인가?
오히려 기독교 목사들의 가운이 더 요란하고 권위적이지 않은가?
종교개혁의 정신은 어디가고 기독교가 카톨릭의 전통을 버리기는 커녕
아예 한술 더 떠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있다.
사실상 목사의 가운은 천주교의 짝퉁 사제복 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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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제호 교수가 제시한 논문
여기에 또 하나의 글
설교시 목사의 가운 착용의 문제점에 관하여 한국성경신학회의 한제호 교수가
제시한 논문의 일부분을 발췌 소개합니다.
한제호 교수는
"우리나라 기독교 목사들의 예배 인도시의 복장이 1951년에 일어났던 6.25 동란을
계기로 해서 급속한 변화를 보이는 기현상이 발생했다"고 밝히고 "기독교 목사들이
예배 인도 시에 기독교의 전래 이후 6.25 동란까지 70여년 동안 입었던 평복 대신
갑자기 소속 교단이나 어떤 연구단체들과의 아무런 합의도 없이 개인마다 처음에는
검은 색 가운을 입더니 점차 그들 개개인의 취향을 따라 천주교나 성공회, 루터교의
성직자들의 복장을 닮아 가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우리나라 기독교 목사들의 지금까지의 예배시 복장이 평복인 이유는
무원칙의 산물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기독교의 토대인 성경의 원리를 충실히 반영한
신앙 고백의 한 표지였으며, 따라서 그것은 공교회의 오랜 기간의 훌륭한 불문율의
전통을 이어온 관례였다"고 주장했다.
한 교수는 우선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라는
구절이 포함된 갈라디아서 2장 15-18절을 낭독하며, 위와 같은 사도의 말에서
기독교 목사의 설교와 예배용 복장에 관한 원리를 얻을 수 있다며 이를 제시했다.
기독교 목사는 이미 헐리고 사라져 버린 구약적, 율법적 제복 개념을 좇은 복장을
다시는 입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한 교수는 어떤 종교의 성격을 살펴보는 판단 기준은 그 종교의 교리와 의식이라고
말하며, 교리는 그 교리를 전하는 설교를 통해 그리고 의식은 예배 시 인도자의 복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한 교수는 모세 율법에 제정된 많은 교리들과 예배 의식들 및 복식 관련 규정들은
그것들이 아무리 정교하고 화려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예비적 방도의 하나로서만
계시되었던 것들, 즉 '개혁되기 위해서 개혁의 날까지만 남아 있었던 것들'(히9:10)'
이었다는 사실을 신약성경의 예수님 말씀 및 사도들의 기록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지적하며, 목사가 이것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이어서 "목사가 이미 '개혁된'(갈 2:18, 히 9:9,10) 구약의 율법에 있는 제사장의
복식을 닮은 예배용 복장을 입으려고 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행위와 마찬가지다.
그것은 목사 자신이나 교인들이 목사의 중심 대신 그의 외모를 주목케 함으로
목사를 우상화하는 행위며, 이는 목사를 죽이는 행위다."라고 말했다.
한 교수는 목사의 예배용 복장 문제에 있어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마23:5,6)
목사들이 복장 같은 외모의 능력을 의지하는 대신 그들의 중심에 확실히 새겨진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고전 12:8)의 능력에만 의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의 우상화 금지에 포함된 목사의 우상화 금지
십계명에서 두번째로 다루고 있는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행위에 대해,
한 교수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사람의 눈에 보이도록 형상화하는 행위는 성경 전체에서
강하게 다루고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로,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죽이는 행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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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운에 대하여 그토록 집착하는 목사들의 심리상태는
왜 그러하며 그 원인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교회안에서 목사가 성도로부터 섬김 받는것에 익숙해지는 심리상태를 신랄하게 지적한
어느 분의 글이 있어 올립니다.
아래 글들을 통하여 왜 가운착용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지 그들 마음속을 순서대로
들여다 보기로 하겠습니다.
( 발췌)
서기관들은 섬김을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현대판 서기관들과 후보생들
[눅 20: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그 차고다니는 경문을 넓게하며 옷술을 크게하고...)
이런 사실이 비단 예수님 당시로만 국한된 이야기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현대판 서기관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습니까?
높은 자리를 추구하고, 인정받기를 원하고, 존경을 받으려는 무리들이
오늘날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회생활에서 보다 책임 있는 위치에 서 있어야 할
목회자들이 부패하여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뢰하고 맡긴 지위를 자신의 목적과 자신의 안일을 조장하는데
이용하는 모습이 불신자들에게도 그대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한국교회의 자화상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주된 요인을 찾아보면,
목회자들이 대접받는 일에 익숙해지도록 훈련을 받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는 청년시절이 거의 없습니다.
소년에서 바로 장년으로 뛰어 올라갑니다.
청년기가 없이 장년으로 넘어가게 되는 이유는 어린 나이에 신학교에 들어가기만 하면
바로 ‘전도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없는 전도사를 교인들은 ‘주의 종’이라고 대접합니다.
특별한 훈련과 지식 없이 단지 신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공식적 입장을 갖춘 성직자로 이해합니다.
나이 많은 장로나 권사들이 손자 같은 신학생에게 “전도사님, 전도사님”하면서
예(禮)를 갖춥니다.
'주의 종'이라고 존경과 대접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지나친 예우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지만 나중에는 예우를 해주지 않으면 서운해 합니다.
학교에서는 그저 학생일 뿐이지만 교회에 가면 영혼을 지도하는 교역자로 대접받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목회란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는 것이다’라는 잘못된
목회관이 정립됩니다.
섬김을 받기 위해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까지 하게 됩니다.
단 한 번도 섬기는 훈련은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신학생들이 어떻게 변화되어 갑니까?
처음부터 섬김을 받으려는 서기관들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가게 됩니다.
교만해 집니다. 자신들이 대단한 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설교를 대단히 잘하는 줄 압니다.
자신이 지금이라도 개척해서 교회를 세우면 수천 명이 몰려 올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자신이 거룩한 줄 알고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합니다.
충고를 해줘도 깨닫지 못합니다.
선배 목회자들 중에서 작은 교회를 하는 목회자를 무시합니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대접만 받다 보니 겸손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런 목회자 후보생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배워야 할 것은 안 배우고, 안 배워야 할 것만 배운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것은 안 배우고, 좋지 않은 것만 배우려고 합니다.
목소리를 저음(低音)으로 사용하여 나이든 체 합니다.
이런 후보생이 목사가 되면 아무 교인에게나 반말을 합니다.
‘주의 종’이라는 백만 믿고 나이가 많든 적든 반말로 짓거립니다.
목사안수를 받기까지는 그나마 겸손하다가 목사안수만 받으면 선배목사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아버지 같은 목사님에게도 반말을 서슴지 않는 무례함이 팽배합니다.
이것이 목회자 세계입니다.
수치스러움을 모르는 백성이여 그대이름은 가운목사!
요즘 인터넷으로 예배실황을 지켜보면 설교자의 가운이 정도를 지나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교파마다 가운도 입는 종류가 다르고 목에 거는 후드도 형형색색
여러 가지입니다. 마치 가운 패션쇼를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박사 가운에다 후드를 걸치고 강단에 선 설교자도 있습니다.
과연 가운이 목회자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대답이 있겠지만,
성경적으로 조명해보면 예수님의 책망을 받던 서기관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입어야만 교인들이 거룩하게 보고 존경한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가운을 벗어야 합니다. 가운은 성경적인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차라리 최고의 예의를 보여주는 신사복을 정중히 입고 설교에 임하면 됩니다.
목회자가 가운에 파묻혀 있는 것은 형식에 치우쳤다는 것의 반증입니다.
형식은 내용이 내용다워지기 위해 존재하는 최소 조건일 뿐입니다.
내용과 형식은 동반자이되 내용이 형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지나친 형식은 바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내용의 무게를
삭감시키는 일만 할 뿐입니다.
목사가 박사가운을 좋아한다구요?
예수님도 엄숙한 가운을 몸에 걸쳐본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즈음엔
그 성의라는 것도 직분의 차등 差等(?)에 따라 어깨 주름의 숫자가 다르다고 합니다.
안수집사는 주름이 하나, 장로는 둘, 목사는 셋이랍니다.
심지어 박사학위를 지닌 어떤 목사님은 무려 네 개의 어깨 주름이 접힌 가운을
즐겨 입는다는데, 이것은 엄격한 위계적(位階的 hierarchical) 조직체인
카톨릭에도 없는 일입니다.
▲ 믿을 만한 분으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어느 수상쩍은 외국 신학교에서
몇 개월만에 갑자기 목회학박사 학위를 얻은 어떤 목사님은 다른 곳에 강사로 초대되어
갈 때도 행여 그곳에 어깨 주름 네 개 짜리 예복이 준비되어 있지 않을 경우를 염려하여
주름 네 개 짜리 자기 가운을 꼭 싸들고 간답니다.
목에 스톨 걸치기를 아주 좋아하는 어떤 목사님을 아는데, 이분이 하루에 결혼식과
장례식을 모두 집례해야 하는 날이면 목에다 흰 스톨과 검은 스톨을 번갈아 매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헷갈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마치 끝장이라도 나는 것처럼 무척 신경을 씁니다.
그 절반만큼이라도 마음과 영성의 준비에 더 신경을 썼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자신의 인격으로 오죽 신뢰를 주지 못했으면, 자신의 삶으로 오죽 신앙적 권위와
모범을 나타내지 못했으면 가운이니 스톨이니 하는 따위에 저토록 집착할까 싶은 것이
여간 안쓰럽지가 않습니다.
스톨이라는 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로마시대 여성들이 어깨에 장식용으로 걸치던 스톨라(stola)에서 유래되었다는데,
영어로는 '훔치다'라는 뜻의 동사 steal의 과거형인 stole과 글자가 꼭 같습니다.
무엇을 훔친 것일까?
진실을 훔친 거짓의 표상인지, 존경과 신뢰의 시선을 훔친 위선의 징표인지...
▲ 문제는 예복을 입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복이 가리키는 정신입니다.
예복을 걸친다고 숨은 부끄러움의 허물이 감춰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예복을 입지 않는다고 해서 없던 허물이 생겨나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어린양의 신부가 입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모시 옷)는 곧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라고 썼습니다(요한계시록 19:8).
신앙인의 예복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삶이요 올곧은 행실입니다.
미움과 거짓을 떨치려고 애쓰는 인격이며 진실하고 정직한 삶을 지향하는 발걸음입니다.
삶과 행실은 말할 수 없이 더럽고 천박한데 몸에만 근엄한 예복을 걸친다고 해서
바른 제사장이 되지는 않습니다.
종교적 상징은 물건이나 형상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이나 직분 자체를 신성시 하는 인격의 우상화가 더 무섭습니다.
연면한 종교사 속에서 사제나 직업종교인들을 우상화해왔던 수많은 사례와 경향들을
숱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도 바울과 바나바에게 그곳 사람들이
"제우스와 헤르메스의 환생"이라는 칭송과 함께 제사의 예식을 바치려 하자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의 옷을 찢어 탄식하며 제사를 금지시켰습니다(사도행전 14:8∼18).
자신들이 종교적 우상으로 전락되는 것을 끔찍한 죄악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얼마나 많은 종교인들이 섬김 받는 우상으로 변질 되는 것을
끔찍이도 좋아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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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접을 받고 섬김을 받기에 수단방법을 안가리는 자들
한국 교회 목사들은 자신들을 '기름 부음 받은 자' 또는 '성직자'로 표현하고,
그 지위를 모세나 제사장과 동일하게 합니다.
많은 교회에서 목사에 대한 권고와 비판은 성직에 대한 도전이라고 하며,
목사의 잘못은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에 교인들이 언급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대적하면 천벌이 내린다는 저주를 서슴치 않고,
모세를 대적한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걸린 예화가 즐겨 인용됩니다.
한국 교회의 병폐 중 하나는 목사가 심각한 죄가 들어나도 갖은 변명을 일삼으며
교회 안에서 버티기 때문에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고, 교인들이 교회를 등지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를 기름 부은 자 또는 성직자로 표현하는 것은 루터나 칼빈과 같은
종교 개혁자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확실히 이단적인 주장입니다.
루터는 영적 계급을 나누는 것은 거짓과 위선이며, 모든 크리스천이 영적 계급에
속하며, 그들 간에는 직무적인 차이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제주의'는 교회 지도자를 '성직자'라고 부르고, 이들을 평신도와 구별된 신분으로
보고 특별히 대접하며, 이들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거나, 이들을 통해 계시와
축복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일삼는 교회권력 경향입니다.
예수님이 아닌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되면 로마 카톨릭처럼 반드시 타락하며,
비성경적인 교리와 관습이 생겨나 구원과 멀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의 자리를 빼앗는 사람을
개혁적 신조를 대변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6항은 다음과 같이 명시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교회의 다른 머리가 없다. 로마의 교황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그것의 머리가 될 수 없고,
그리스도를 대항하여 그리고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모든 것을 대항하여
교회 안에서 자신을 높이는 적그리스도요 죄의 사람과 멸망의 아들이다."
그렇다면 교회안에서 자신을 높이려 하는 목사들도 로마의 교황과 마찬가지로
적그리스도가 아니겠는가?
그런대도 한국 교회 목사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높히기 위해 고급차를 타고 다니고,
강대상을 2단 3단으로 높히고,
성직 복장(가운)을 하며, 화려한 교회시설과 음향장치에 거액을 들이고 있습니다.
결국 이런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방해가 되므로,
예수님을 교회 문 밖으로 밀어내고,
세상적인 교훈과 지식을 따르는 인본주의적인 왕국을 세우게 됩니다.
(7)목사의 가운 착용이 가져오는 결과
주의 자녀들 위에 군림하는 '주의 종'
한국 기독교 목사들은 자신을 '주의 종'이라 부르기를 좋아하며,
교인들에게 자신의 말에 절대 복종하고, 자신을 섬길 것을 강요합니다.
이는 비성경적인 발언이며, 구원 받은 성도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자
예수님의 지체로 은사적 차이는 있으나 계급적 차이는 없습니다.
고전 7/23 너희는 값을 치루고 산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또한 주의 자녀가 주의 종을 섬겨야 한다는 것부터 이치에 맞지 않으며,
자신들이 말 그대로 '주의 종'이라면 영광을 구치 않고 성도들을 섬겨야 합니다.
만일 종된 자의 신분으로 주의 귀한 자녀들위에 군림하며
오히려 섬기기를 강요하였다면, 후일 그 주인이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종된자의 목숨이 과연 살아 남을수있다고 보십니까?
만약 교회에서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고 섬김을 받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목회를 하지 말고 정치가나 사업가를 해야 합니다.
묵묵히 주인이 시키는 일을 아무 대가 없이 일을 하는 것이 종의 임무인데, 주의 종은
좋은 차를 타야 하고, 좋은 집에 살며,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하늘 일을 하는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어떤 보상도 바라면 안되고, 나의 모든 의는
하늘에 쌓이고 주님으로부터 보상 받는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을지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라.
그 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명성 없는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정말로 주의 종이 되고 싶다면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자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은 모든 영광을 뒤로하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종의 형제인 미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죄인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섬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셨고, 이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려
보좌 오른 편에 앉히셨고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진실한 주의 종은 주인을 두려워 해야 하고, 쉽 없이 일해야 하며,
어떤 보상이나 대가도 바라지 말아야 하고, 주의 자녀들을 섬겨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셔서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는 하늘에서 부요하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 낮아진 자는 하늘에서 높히시며, 이 세상에서 순종한 자에게 하늘나라에서
명예와 권세를 안겨다 줄 것입니다.
교권주의란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을 일반 신자들과는 다른 성직임을 강조하면서
권력 집단화 해서 각종 혜택(부, 명예, 권세)을 누리고, 교인들을 권력적으로 지배하려는
경향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교회권력을 구축하는 일을 니골라당의 행위라 하여 아주 싫어 하셨으며,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중보자이고, 목사를 포함한 모든 교인은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오히려 성경적으로 본다면 목사는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 종 된자이다 *
[고린도후서 4장]
5절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개역개정)
5절 우리가 선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고 우리는 예수를 위해서
일하는 여러분의 종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읍니다. (공동 번역)
여기서 사도 바울이 (우리) 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은 사도들을 말함이며, 요즘으로 말하면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을 일?는다.
다만 유의할 것은 이 사도직이란 단회적인 소명으로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제자들인 당사자들에 한해서
주어진것이고 결코 계승되는 직분이 아니다.
어쨋든 말씀을 전하는 직분을 맡은 요즈음의 목사가 (우리)라고 자신을 지칭할때 (너희)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말할것도 없이 교회의 지체들인 성도들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말하는 뜻은 무엇이겠는가?
목사들은 성도들을 위해 종으로 세워진 자들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이 종인 목사를 섬기는것이 비성경적임을 잘 나타내주는 구절이다.
목사들을 잘 섬기면 복을 받는다는 말은 위 성경말씀으로 명백히 거짓임이 드러나게 된다.
(8) 목사의 가운을 용납하며 무관심한 어리석은 성도들이여 깨어나라!
예레미아 5/30~31 경이롭고 무서운 일이 그 땅에서 행해지는도다.
선지자들은 거짓되이 예언하고 제사장들은 그들의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하니 그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고후 11/19~20 너희는 현명하다고 하면서도 어리석은 자들을 기꺼이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삼키거나 착취하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얼굴을 쳐도
너희는 용납하는구나.
위의 말씀들은 현재 한국교회들의 실제의 모습들과 같다.
목사는 계급이 아니라 직분일 뿐인데도 과도한 권한이 부여되고, 목자, 장로, 하나님의 사자,
전도인, 감독, 하나님의 청지기 등 화려한 수식어를 교단에서는 붙히고 있다.
성도들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
신약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다(벧전 2:9).
성도들은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이를 부정할수 없다.
웨스트민스터 정치조례에서는 "목사는 계급을 가르킴이 아니요, 다만 각양 책임을 가르쳐 칭하는
것 뿐이다."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예장통합과 예장고신의 헌법에서는 삭제시켜버렸다.
왜 삭제를 했겠는가?
자신들이 성도들위에 군림하기에 불편하고 대접받기에 껄끄러운 조항들이니 삭제하지 않으면
불편해서 견디지 못했으리라.
보라! 이자들의 행태가 얼마나 악하고 이기적인가?
이토록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자신들만의 유익을 챙기려는 이들의 몰염치를 아는 성도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은 정면으로 거스르며 성경적인 내용으로 만들어진 교회정치
조례는 삭제를 시켜가면서 성경에서 전혀 언급이 없는 아니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도전하여 자신들이 대접받고자 하는 의도대로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서는 일치합심하는
저 모습을 생각해 보라.
또한 평소에는 교파별로 각 교단의 교리를 가지고 이단이니 뭐니 서로 갈라져서 분쟁하던 목사들
집단들이 일치 합심하여 예복이라 불리는 가운을 입자고 비성경적인 교회예복 권장법을 만들어내는
저들의 행태는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이 아니던가?
이 악하고 추한 일을 주도한 자들에게 화(禍)가 있으리라
마치 민생에 관한 산더미같은 현안들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당리당략에 따라 자신들의 입지와
정치생명 만을 위해 온갖 구실로 반대를 일삼고 멱살잡이까지 하며 싸우며 추태를 부리던
정치판의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의 세비를 올리자는 안건에 대해서는 일사천리로 한명의 반대하는 자
없이 땅땅 하고 의사봉을 두둘겨가며 가결시켜 버리는 모습과 어찌도 그리 흡사하게 닮았단 말인가?
그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 예복이라는 미명하에 가운을 착용함으로써 성직자 자신을
과시하거나 높이기 위해 예복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치 못하다.
(9) 가운을 입은 기독교의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벗어 버리고
부끄러움을 걸친자!
소위 기독교의 목사라는 자들이 가운을 걸친 모습으로 설교 강단에 섰다면 양심을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이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라 불러야 할것이다.
예수님도 말씀을 전하실때 가운을 걸쳤다는 성경상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평상복을
입으셨음에 틀림없다.
예수님이 제사장 예복이나 좋은 세상 옷을 입고 권위를 자랑하며 사역하신 적이 결코 없다.
늘 평상복으로 설교하시고 치유하시고 섬기시는 일을 하셨다.
또한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 또 여러 예수님의 제자들도 가운을 걸치고 말씀을 전했다는
기록이 전무하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딤후 4:13)를 보면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를 보아도
다른 사도들 역시 그 당시 유대인의 평상복을 입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목사는 그토록 가운을 좋아할까?)
나는 너희(일반성도)와는 다르다는 내면의 숨겨진 의도를 겉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나(목사)는 너희(일반성도)와는 다르다는 내면에 숨겨진 무언의 과시이다.
권위 의식의 발로이다.
가운을 입는 이유가 성도들에게 자신을 드러나게하고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분명할찐대
그런 외식적인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것이다
그(예수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 3:30)외쳤던
세례요한의 말처럼 목사는 말씀 앞에 뒤로 숨어야하고 가리워져야 하는 존재지
그 말씀 앞에 돋보여지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 섬기려 이땅에 오셨다면 예수님을 본받아 그 말씀을 전하는 목사들이
섬김의 정신으로 봉사함이 마땅하지않겠는가?
그런데 그 가르침과는 반대로 섬기기는커녕 군림하려 첫발걸음 부터 잘못되어 있다면....
그렇다면 방법은 없는가?
교회 권력의 씨앗이며 목사 권위의 상징인 목회자 가운을 없애는 일은
교회개혁의 출발점이다
(10) 칼빈의 실수
루터와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모든 부패의 근원을 사제주의에서 찾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만인제사장주의를 주장하면서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얼마나 바람직한 모습인가?
여기까지 칼빈의 개혁 정신은 좋았다. 그리고 옳았다.
문제는 사제주의를 없앤다고 하면서도 그 잔재며 폐습인 사제복 에 대해 너무 관대했다는 점인데
자신들의 권위를 위해 차마 이것마져 버리지 않았던지 그 사제복으로 인해 장차 교회안에 생겨날
교회권력이라는 악영향과 폐단을 예상못했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쨋든 개혁한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카톨릭의 잔재물을 모양만 약간 변형시켜 그 가운을 걸쳐
입었다는 그의 발상과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었으며 모순된 것인지 오늘날 돌이켜 보면 참으로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네바 가운은 이렇게 기독교 교회안으로 들어와 목사가 입는 모범 예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더군다나 개혁 교회안에 이 저주스러운 제네바 가운(Geneva gown)이라는 것을 소개하고
권장함으로써 개혁의 정신에 역행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으니 이를 두고 칼빈을 기독교
가운의 시조(始祖)라 불러야 하지않을까 싶다.
반개혁적인 장본인이 되어버린자가 종교개혁을 주창하던 칼빈이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내 자신이 칼빈과 그의 신학을 그 어떤 다른 신학자들보다 월등히 여기며 가장 지지 선호하는
입장이기에 이런 경우에 어찌해야 할지 그 실망감으로 인해 곤혹스럽고도 사실 난감하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되지않겠는가?
탁월한 신학자라 해서 그가 행한 실수와 잘못까지 그 명성 때문에 감추어지고 덮어줘야 하는
일은 없어야 하리라.
그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신학교리들에서도 중대한 여러 문제점이 발견되기에
이미 그의 사상들에 대해 전폭지지와 공감 보다는 취사선택의 입장에 있기는 하다.
그에 대한 신뢰도가 이래저래 내 개인적으로 보면 많이 추락하고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이러한 역사를 통해 다시금 짚어 볼 것은, 초기 기독교의 400 여년 동안이나 예배를 집례할 때
목사가 평상복을 입는 것이 교회전통으로 내려왔건만 시대를 거치면서 성직자라 불렸던
소수의 권위를 위해 인간의 생각이 개입함에 따라 점차 변형되었고, 초기의 성경적인 평상복
모습은 사라지게 되면서 가운을 입는자가 교회 권력의 상징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Geneva Gown
(이 제네바 가운은 경건과 엄숙함을 강조했으며 그런 이유로 검정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