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추억의 음악감상실 가요114 |
출처: 연어알 원문보기 글쓴이: 북극해
소속사 분쟁의 최종 승자는 빅타레코드. 이에 O.KHE레코드는 이미 녹음해 두었던 '왜 못 오시나요'를 '황금자'란 이름으로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음반 뒷면에 수록해 발매하며 분풀이를 했다. 이때가 1937년 말. O.KHE레코드 소속시절 착하고 예쁘게 생긴 황금심을 본 노총각 고복수는 한순간에 마음을 빼앗겼다. 남편에게 순종하는 구식 한국여성의 표본인 황금심이었지만 노총각 인기가수와의 사랑을 위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출을 하고 혼전 임신까지 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었다. 1939년 빅타레코드는 공연단체 '반도악극좌'를 구성했다. 황금심은 최고 스타였고 남편 고복수도 특별출연 형식으로 순회공연에 참가했다. 원로 가수 신카나리아씨는 "황금심 그이는 너무 고왔어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서면 아휴, 같은 여자들도 탄성을 질렀지요"라고 회고했다. 1940년대 태평양전쟁 때 고복수부부는 성전 완수를 부르짖는 일제의 강요에 의해 눈물의 여왕 전옥이 주관하는 남해위문대 무대에 올라 고복수는 장고를 치고 황금심은 꽹과리를 두들기며 일본어 노래를 불러야 했다. ‘타향살이’는 멜로디 자체가 짧고 쉬워 대중들도 한번만 들으면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다. 일제 강점 하에서 타향살이의 설움을 받던 사람들은 모두 ‘타향살이’를 듣고 부르면서 설움을 달랬다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만주 하얼빈 공연 때. 객석은 울음바다가 됐고, 무려 열 번이나 ‘타향살이’를 불러야 했다. 간도 공연 때는 부산이 고향인 중년여인이 찾아 와 “남편이 전쟁통에 죽고 생활고에 시달려 고향에도 한번 못 가보는 신세”라고 울먹였다. 이 여인은 감정이 격해져 끝내 자살을 해버렸을 만큼 타향살이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이처럼 고복수부부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말부터 '고복수와 그 악단'을 결성해 공연 활동을 펼치는 한편, 일본·만주·사할린으로 위문공연을 다니며 나라 잃은 동포들의 애환을 달래 주었다. 한국전쟁 때 고복수는 인민군에 붙잡혀 의용군으로 북으로 끌려갔다 북진하던 국군 낙하산 부대원들에 의해 포로수용소행 일보 직전에 구출한 사연도 있다. 이후 그는 육군 정훈공작대에 자원해 군 위문 연예대원으로 활동했다. 1.4후퇴 때 이들 부부는 피난지인 대구에서 '해피'라는 이름의 다방 경영과 쇼 공연을 기획했다. 전쟁이 끝난 1953년 황금심은 오랜만에 박시춘곡 '삼다도 소식'을 발표하면서 가히 가요계의 여왕으로 군림했다. 마이크보다 육성공연을 고집했던 황금심은 1950년대까지 무려 4,000여 곡을 발표하며 '꾀꼬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1960년 아시아 영화제에 초대가수로 무대에 올랐다. 1958년 가을 명동 시공관무대. 고복수는 후배가수들의 도움으로 가수생활 25주년을 기념하는 은퇴공연을 열었다. 은퇴 후 '동화예술학원'을 창설했다. '대전블루스'의 오리지널 가수 안정애와 '동백아가씨'의 이미자는 이곳을 거쳐간 대표적인 가수. 이후 택시사업에 이어 거금 3천 6백만 환을 투자해 '타향살이'의 영화를 제작해 빚더미에 앉았다. 고복수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서적외판원으로 나서기도 했다. 1972년 2월 10일 회갑을 맞은 그는 고혈압으로 연세대 의료원에서 세상을 등졌다. 극진한 내조로 유명한 황금심은 사업에 실패, 서적외판원을 하는 신세가 됐던 남편 고복수가 세상을 뜰 때까지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눈물겨운 간호를 했다. 수유리에서 민속주점 '타향살이'를 운영하던 82년 10월, 신인가수 전미경은 존경하는 선배가수 황금심의 일생을 '들국화'로 헌사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울산시는 1987년 12월 전통가요의 계승발전을 위해 <고복수 가요제>를 개최, 1회 최우수 남녀가수로 나훈아와 이미자를 선정했었다. 이후 MBC에서도 고복수 가요제를 열기도 했다. 1991년 6월, KBS의 주관으로 러시아 알마아타에서 열린 교포위문공연. 고복수의 아들인 트로트 가수 고영준이 무대에 올라 '타향살이' 불렀다. 놀랍게도 러시아 교포들 모두 노래를 따라 부르며 이내 공연장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고영준은 "아버지의 위대함을 새삼 느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들 부부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큰 아들 고영준과 둘째 며느리 손현희는 가수로 활동했고 셋째 아들 고병준씨는 SBS 인기사극으로 사랑 받았던 "여인천하"의 음악감독으로 활약하며 2대에 걸쳐 음악계보를 잇고 있다. 음악감독인 고병준은 MBC 특집 미니시리즈 ‘다모’의 음악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지난 91년 10월 울산시는 2천만 원의 시비를 들여 중구 북정동 북정공원에 ‘고복수 노래비??건립해 그의 업적을 기렸다. 황금심은 원로 연예인들의 모임인 상록회 최고위원을 지냈고, 대중문화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1992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93년엔 '삼다도소식'으로 한국가요창작인 공로대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1996년부터 파킨슨병을 앓다가 2001년 7월 30일 세상을 등지고 용인 카톨릭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작년 8월엔 울산시에서 울산시 병영2동에 '고복수 마을'과 '고복수 길'을 만든다고 발표했다. 대중가수의 이름을 딴 마을과 길이 만들어지는 것은 보기 드문 케이스다. 고복수.황금심 부부가 대중음악사에 남긴 공적은 단순히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요계의 1호 스타부부라는 사실을 뛰어넘는 큰 의미가 부여된다. |
부부가수 - 고복수 황금심
[민족의 설움 타향살이]
조국을 잃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한맺힌 설움을 달래주던 타향살이!
"기차로 하룻밤 걸어서 또 오백리 만주라 그곳은 우리님 계신다오 빚에 팔려 시집간 우리 누님은 칠년전 동짓달에
찬눈물 흘렸다오 <1935년 조선문학사:여인> 고복수의 대표곡은 민족의 한과 울분, 설움이 그 특징이다.
1933년 부산에서 열린 콜럼비아 가수선발 경남예선에서 1등으로 입상한 고복수는 1934년 2월 서울 결승에서
2등으로 입상하였다.
경남 울산에서 큰 잡화상을 하던 여유있는 집 아들로 태어난 고복수는 어릴때부터 노래를 좋아하여 교회에서는 노래
잘하는 아이로 소문났고, 보통학교(초등학교)에서는 학예회 마다 언제나 뽑혀나가서 창가를 불렀다. 외삼촌이 사 준 유성기(축음기)로 노래를
배우면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부산에서 실업학교 재학 중에 부모 몰래 60원을 훔쳐서 서울에 오게 된 것이다.
1936년 연말에 나온 "짝사랑"이 계속 힛트하여 1937년의 고복수의 인기는
계속되었다. [부부 가수의 탄생]
1940년에는 가수 고복수의 활동이 극단에 몸을 담고 극장에서의 활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반도악극단에서 공연된
춘향전에는 이도령역으로 노래와 연기를 하고 춘향에는 빅터 전속가수 황금심이었다.
고복수와 3년간 열애에서도 고난의 계속이었다. 고복수와 손을 끊으라는 아버지의 호통과 몇 번의 가출까지하며 임신
8개월의 몸으로 결국 부모의 뜻이 굽혀져서 겨우 결혼을 하게 되었다. 구전민요라고 알려져 있는 "울산 큰애기"는 고마부 작사 이면상 작곡으로 황금심이 취입하였다. 고복수의 고향이
울산이란 것을 알고 이면상이 황금심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다.
1957년 명동에 있던 국립극장에는 "팬이여 안녕"이라는 타이틀로 고복수 은퇴공연이 있었다. 100여명의 연예계
인물이 총출동하여 2개월 전국 순회공연까지 하여 수입금전부를 고복수에게 전달하였다.
어질고 순한 고복수는 1972년 2월에 식도염과 고혈압으로 사망하였는데 연예협회의 주관으로 이봉조, 김세레나,
신카나리아, 신성일등 연예인들의 "타향살이" 노래속에서 장례식이 치루어 졌다. 고복수의 고향 경북 울산시 울산동에는 고복수노래비가 1991년에 건립되었는데 고복수 흉상과 "타향"의 가사가 새겨져
있다.
타향 (1934년 OK레코드 금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황금심 대표곡 ] 알뜰한 당신(1937년 빅터레코드 조명암 작사, 전수린 작곡)
[고 복 수 노래 ] 타향 (1934년 OK레코드 금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1. 타향살이 몇해련가 손꼽아 헤여보니 2. 부평같은 내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3.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렸만 4. 타향이라 정이들면 내고향 되는 것을 꿈길천리(1935년 OK레코드 남풍월 작사, 손목인 작곡) 1. 온길천리 갈길 천리 꿈길도 천리 2. 도라가리 말만하고 안간지 몇해 4. 옷소매를 여미면서 비는 마음은 짝사랑(1936년 OK레코드 박영호 작사, 손목인 작곡) 1. 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2. 아 뜸북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3. 아 단풍이 휘날리니 가을인가요
[황 금 심 노래] 여창에 기대어(1938년 빅터레코드 이부풍 작사, 조자룡 작곡) 1. 때묻은 소매자락 바람에 떤다 2. 흩어진 머리카락 달빛에 젖는다 3. 찢어진 치마폭에 눈물이 번진다 외로운 가로등(1939년 빅터레코드 이부풍 작사, 전수린 작곡) 1. 비오는 거리에서 외로운 거리에서 2. 가버린 옛생각이 야속한 옛생각이 3. 희미한 등불아래 처량한 등불아래 1. 야자수 그늘밑에서 둘이서 놀던 그때가 2. 흐르는 달빛 아래서 사랑을 풀던 꿈이여
이 근 태 (가요114 기획위원, 가요사 연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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