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돈이다. 요즘 정치권에서 한창 불붙고 있는 무상급식이나 반값 등록금 논쟁도 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로 귀결된다. 돈이 권력화하고 있는 셈이다.
돈을 버는 주체는 기업이고, 핵심에는 대주주가 있다. 대체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대주주는 막대한 권한과 부를 누린다.
그런데 사회에 대한 이들의 기여는 어떤가. 기업의 사회공헌은 있어도 기업인 개인의 기여는 찾아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선진국의 상류층이라 하면 우리와는 달리 ‘도덕적 상류층’을 뜻한다. 그들은 재산과 권력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수준 또한 일반 국민에 비해 월등히 높다.
우리 상류층은 돈과 힘과 지위는 있어도 존경받는 경우가 드물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상의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고장의 선조들 중에는 내 것을 아낌없이 내놓으며 국가와 사회와 이웃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도 있었다. 경주 최부자, 안동의 석주 이상룡, 의성의 만송 김대락 등이 대표적이다.
#동학농민전쟁 때 탐관오리와 부자들은 성난 농민들의 타도 대상이었다. 경주지역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만석꾼의 재산을 자랑하던 영남 제일 부자 최부자집은 안전했다.
#6`25전쟁 전후 빨치산들이 전국적으로 부자들을 습격할 당시 경주 최부잣집은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빨치산에 동조하던 사람들조차 최부자집을 성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가난한 사람이 원한을 품지 않는 것보다 부자가 겸손해지는 것이 더 쉽다”고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존경을 받기란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최부자 가계는 어떻게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도 인심을 잃지 않았을까.
◆베푸는 것이 쌓는 것
살림을 크게 일군 최국선에 얽힌 일화다. 임종 때 아들을 불러 서랍에 있던 빚문서를 가져오게 했다. “토지나 가옥 문서를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돈을 빌려준 차용증서는 불태워라. 돈을 갚을 사람이면 없어도 갚을 터이고,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담보가 있어도 갚지 못한다. 형편이 안되는데 문서를 뺏어 뭣하겠느냐”고 말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고 최부자의 가훈이 후손들에게 전승되면서 인심좋은 집안으로 평판나자 소작인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소작료도 다른 지주들이 70, 80%씩 가져가는 것과는 달리 절반 정도만 가져가니 생산성이 더욱 높아졌다.
◆욕심은 금물
최부자집 육훈에는 과욕을 경계한 것들이 여럿 있다. 흉년기에는 재산을 늘리지 말고,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라는 교훈을 대대로 지켰다. 내가 잘살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잘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흉년에는 곳간을 열어 주위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고, 관청이나 향교 등에서도 물품이 필요한 경우 아낌없는 지원을 해서 원성 사는 일을 하지 않았다.
◆아낌없는 기부
만석의 재산을 모두 소진한 사람은 마지막 최부자 최준(1884~1970)이었다. 통상 부자가 사업실패나 도박, 주색잡기로 망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독립운동과 문화예술 창달 및 대학설립에 모든 재산을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한일강제병탄 이후 본격적으로 재산관리를 맡았던 그는 광복을 위해 숱한 독립투사들과 교류하며 자금을 제공했다.
해방 이후에는 대구경북에 제대로 된 대학이 없는 것을 한탄하며 지인들과 함께 대구대(영남대전신)를 설립하는 데 집과 임야,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고서 등을 기부했다.(이 때문에 경주 교동에 있는 최부자집은 학교법인 영남학원 소유로 돼 있으며, 현재 영남대 중앙박물관에는 기증받은 책으로 최준의 호를 따서 만든 문파문고가 있다.)
남아 있던 일부 재산도 6`25전쟁 때 피란왔던 교수 학자들을 위해 세운 계림대학(이후 영남대 합병) 설립에 모두 쏟아부었다.
최씨 집안 6訓의 경제학…정경유착 경계, 동반성장 추구, 윤리경영 실천 |
▶정경유착 근절(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높은 벼슬에 오름으로써 당쟁에 휘말리는 것을 경계하는 한편, 학문수행에도 소홀하지 않도록 함이다. 가문을 번성시키려면 최소한의 사회적인 지위는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부를 기반으로 권력을 탐하고, 그 권력으로 부를 늘려가는 정경유착을 미연에 방지함이 목적이다. 생산성을 높이는 신기술을 도입하는 혁신경영도 공부를 통해 가능했다.
디딤돌에 놓여있는 고무신이 최씨 집안의 청빈한 삶을 보여준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동반성장(만 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상한선으로 정한 만 석을 초과할 경우 소작료를 낮췄고,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지역사회로 환원하여 더 이상의 부를 축적하지 않았다. 생산이 늘면 열심히 일한 소작인이나 하인에게도 이익이 돌아가는 ‘윈-윈’의 노사경영,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이었다. 보다 큰 이익을 올리는 독과점의 지위를 얻기 위한 몸집 불리기보다 적정한 규모, 건전한 경쟁에 기반한 상생경영에 힘썼다.
▶윤리경영(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기근이 들면 가난한 경작농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헐값에 땅을 내놓는 일이 빈번했다. 상대방의 어려움을 자신의 부 증식에 이용하지 않는 윤리경영의 정도를 지켰다. 적대적 M&A를 삼간 것. ‘좋은 기업, 착한 브랜드’ 이미지가 굳혀졌다.
▶지식정보경영(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찾아오는 손님을 대접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는데 그 비용이 연 1천 석에 달했다고 한다. 매출의 10%를 여기에 쏟아부은 셈. 교통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에 과객은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는 메신저였다. 새로운 정보 습득에 비용을 아끼지 않은 지식정보경영이 숨겨져 있다.
▶모범적인 사회적기업(100리 안에 굶어죽은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이 들면 1년 소작 수입 가운데 1천 석을 주변에 풀어 빈민구제에 사용했다. 단순한 이윤추구에서 벗어나 사회공헌을 경영이념으로 삼은 사회적기업의 모범 사례에 속한다.
▶지속가능한 성장(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최부자집 며느리들은 삼베옷을 입어야 했다. 최고경영자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근검절약과 솔선수범을 제시하고 실천함으로써 지속가능한 성장의 토대가 됐다.
최부자집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게 나온다. 300년을 지속했다는 설(說)부터 500년으로 봐야 한다는 설 등이 분분하다.
‘9대 진사, 12대 만석꾼’ ‘13대 부자, 9대 만석꾼’ 등이 그 사례다.
마지막 부자인 최준의 손자인 최염(79`경주 최씨 중앙종친회 명예회장) 씨는 “9대 진사, 12대 만석꾼 등은 주위 분들이 조상님들을 미화해서 붙인 것”이라며 “그동안 진사를 못한 분들도, 만석꾼 재산을 못 가지신 분들도 계신다”고 설명했다.
마지막 최준의 12대조 신보(1570년 생)로부터 최준이 별세한 1970년까지 계산하면 400년. 그 윗대 부자 가계 100년을 합치면 500년이 된다. 하지만 300년으로 보는 사람들은 본격적인 부가 형성되던 국선(1631~1682) 때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최부자처럼 한 가계가 부를 수백년 장기간 유지한 예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200년 정도 부를 누린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을 드는 사람도 있지만 양과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기간도 짧지만 그 가문은 정권의 실세로서 권력을 등에 업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했다. 반면 최부자집은 막대한 부를 가지면서도 백성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