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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의 주요 저서와 논문
평이한 역사 서술로서의 교회사
한국에서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면서부터 초대 선교사들은 본국에 선교 보고를 하고, 또 교회의 설립과 그 성장에 관한 것은 물론, 한국의 지리, 역사, 문화에 관한 글을 많이 쓰고 책도 발간하였다.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 1982, 1985-8),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 1900-1905), <코리아 미션필드>(The Korean Mission Field, 1905-1942) 등은 주로 이런 선교사들의 글이 실린 정기간행물로서 한국 교회사의 중요한 사료이다. 그런데 한국인으로는 선교가 시작된 지 30년이 되도록 이렇다 할 역사적 자료가 도리만한 기록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이광수는 1918년에 이미 이러한 교회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탄식하였다.
그런데 장로교회에서는 바로 그 해에 <장로교회사전휘집>(1865-1911)을 발간하였다. 이 책은 주로 선교공의회와 교회나 노회의 회의록을 발췌, 수록한 정도이지만 귀중한 한국 교회사 사료이다. 1916년에 장로회 총회는 14인으로 구성한 역사연구위원회를 두고 <장로교회사전휘집>과 다른 공인된 좀 더 역사서의 체재를 갖춘 교회사를 편찬하도록 위촉하였다. 그리하여 1928년에 <조선예수교 장로교사기> 상권이 출판되었다.
1930년에 이미 탈고한 하권은 그 서문에 기록한 바와 같이 한때 분실되어 우려가 많았지만 한국기독교사연구회의 관심과 노력으로 1968년에 비로소 출판되었다. 백락준과 김양선 등 여러 회원들이 그 책의 출판이 가장 급선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 결과이다. 한국기독교사연구회가 위에서 언급한 The Korean Ropository, The Korean Mission Field와 초기 선교사들이 쓴 책들(사료총서 1-10집)을 영인본으로 출간한 것 역시 고마운 업적이다.
백락준의 <한국개신교사>(The History of the Pros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는 한국 교회사 서술로는 제일 먼저 된 책으로 1927년 예일(Yale)대학교의 박사 학위 논문으로 제출되었던 것인데, 1929년에 영문으로 출판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백락준의 책은 훌륭한 논문일 뿐 아니라 한국 교회사 연구를 위한 고전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한국 선교 희년을 맞아 한국 교회에서는 교회사 편찬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장로교회에서는 선교 50주년을 기념하여 귀중한 자료 <역사화보>(A Pictorical History: illustrating the first fifty years of work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commenmorating the jubilee year 1934)를 한글, 영문으로 사진 설명을 달아 1935년에 출판하였다. 감리교회의 장정심은 같은 해에 <조선기독교 50년사화>를 출간하였고, 채필근은 <조선기독교발달사>를 1938년 8월부터 1939년 12월까지 기독신문에 연재하였다.
이 시기에 와서 좀 더 학적인 면모를 갖추어 교회사를 쓴 이들은 주로 선교사들이었다. 해리 로즈(Harry A. Rhodes)는 1935년에 History of Korean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 S. A. 1884-1934)를 썼다. 각 선교 지역의 자세한 사항까지 기록하고 있어서 장로교회사 연구의 좋은 자료로 평가할 만하다.
감리교회사로는 1947년에 스토크(Charles Davies Stoke)가 쓴 미출판된 박사 학위 논문 “History of Methodist Mission in Korea, 1885-1930”이 있다. 한순남은 1970년 템플 대학교(Temple University)에서 스토크가 쓴 감리교회사에 대한 미출판된 논문 “History of Methodism in Korea, 1931-1965)”를 썼다. 브라운(George Thompson Brown) 선교사는 1962년 버지니아의 유니온(Union) 신학교에 “A History of the Korean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 from 1892 to 1962”란 제목으로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했으며, 이를 Mission to Korea란 제명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은 미국 남장로교회의 선교 지역인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서술한 교회사이다. 1975년에 기독교대한감리회 총리원 교육국에서 편찬한 <한국감리교회사>는 장로교회의 <조선예수교장로교회사기>와 비슷한 성격으로 된 한국 감리교회사 연구를 위한 좋은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이상에서 언급한 교회사들은 주로 선교 활동과 교회의 성장을 역사적으로 기술한 책이다. 우리나라 말로 충실하게 쓴 최초의 교회사는 김양선의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이다. 해방 이후 10년 동안 교회 분열 등 파란 많은 시대의 사건들을 다룬 문서들을 자세하게 소개하는 한편, 해방 이전의 역사도 소급해서 쓴 것이므로, 이 시기의 교회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사료이다. 1945년 이전의 한국 교회사는 김양선의 소천 후 그의 생질이며 한국 교회사 연구가인 김광수가 <한국기독교사연구>란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곽안전(Allen D. Clark)은 1961년에 The History of the Korean Church를 한국어로 번역한 <한국교회사>를 출판하였다. 그가 1971년에 다시 쓴 A History of the Church in Korea는 비록 각주는 없지만 충실한 한국 교회 역사서로 평가할 수 있다. 1970년에 출판된 이호운의 <한국기독교성장사>는 1884년부터 1919년 3.1 운동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일본 동경에서 오랫동안 목회하면서 교회사를 연구해 온 오윤태는 1978년 <한국기독교사> 제1권 “경교사 편”을 위시하여 1979년 제2권 “가톨릭 편” 등 방대한 분량의 충실한 ‘기독교사’를 내놓았다. 1984년에 한국 교회 백주년을 기념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의 한국 교회 백주년 준비위원회 사료분과 위원회는 민경배의 집필로 <대한예수교장로회백년사>를 출간하였다. 그리고 한국기독교사연구소에서 회원들이 공동집필한 <한국 기독교의 역사>I(1989), II(1990), III(2009)는 국내외의 많은 자료를 섭렵하여 쓴 책이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 속에서 성장해 온 기독교 역사를 뚜렷한 신학적 주관 없이 역사 연구가의 견지에서 기술했지만, 교회사 사료를 풍부하게 제공한 점에서 유익하다. 그 밖에 자료총서를 펴내고 있는 것은 한국교회사 연구를 위하여 정말 고마운 일이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김승태, 박혜진이 엮어 1994년에 펴낸 <내한 선교사 총람 1884-1984>(자료총서 18집)은 1984년까지 한국에 온 선교사 2,956 명에 대한 귀한 인명사전이다. 1994년 같은 해에 기독지혜사에서 전봉준과 주주석의 편집진이 편찬 발행한 <교회사 대사전>은 한국 교회사 연구 차원을 높여 주는 귀한 결실이다. 그 밖에 많은 교회사 학자들이 다양한 관점과 방법으로 한국기독교회사 연구서를 펴내어 풍성한 결실을 수확하게 된 것은 경하할 일이다. 2009년 7월에 개관한 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은 개교회사, 지역교회사, 한국교회사, 인물사, 역사화보 등 15,000권의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방대한 양의 귀한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여 전시함으로써 한국교회사 연구에 기여하는 관장 장역학의 역사를 보는 안목과 열정과 노고는 치하할 일이다.
선교학적 관점에서 본 교회사
위와 같은 사건을 중심으로 평이한 역사 서술 외에 교회사를 선교학적인 관점에서 기술한 교회사로는 먼저 곽안련(Charles A. Clark, 1878-1961) 선교사가 1930년에 출판한 The Korean Church and the Nevius Methods가 있다. 이 책은 교회의 성장을 특정한 선교 정책의 결실로 보고 검토하며 선교방법론을 재평가한다. 왓슨(Alfred W. Wasson) 선교사는 1934년에 출판한 Church Growth in Korea 에서 한국 교회의 성장이 정치적, 사회적 여건에 따라 10년 주기로 빨리 혹은 천천히 성장하는 것을 관찰한다. 성명원(Roy E. Shearer) 선교사는 Wild Fire: Church Growth in Korea(한국어판:한국기독교성장사)에서, 위에 든 왓슨의 견해를 지지하고, 교회 성장이 지역별로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이갑수가 미국 Fordham 대학교에 제출한 박사 학위 논문 “Sociology of Conversion Christianity in Korea”(1961, 미출판)는 교회 성장을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관찰한 것이다. 그는 ‘social anomie’ 즉 정상적인 규범을 벗어난 사회 상황에서 개종하는 사람이 더 증가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갑수는 여기서 선교 활동의 역할을 교회 성장의 요인에서 아주 배제하지는 않는다. 교회사 연구서라기보다는 교회사를 통해 보는 사회학적인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토착화와 신학적인 관점에서 본 교회사
1960년 초반부터 한국 신학계에 한국 교회의 주체성과 한국적 신학을 추구하는 기독교 토착화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팔머(Spencer J. Palmer)는 1967년에 출판한 Korea and Christianity에서 한국 선교의 초기 단계에 한국 선교가 한국 고유문화에 어떻게 적응했는지를 중국 선교와 비교하여 규명한다. 그는 전통적인 제례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토착화가 선교 성공의 중요한 요인이라고 본다.
박봉배는 1970년 박사학위 논문에서 기독교와 한국의 재래 문화와 윤리가 어떻게 상호간에 영향을 미쳤나를 가려내려고 한다. 그의 의도는 기독교 복음의 능력을 거부하거나 적극적인 가능성이 있는 재래 문화의 요소를 이러한 연구에서 배제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박봉배는 헬무트 리차드 니버(Helmut Richard Niebuhr)의 ‘변혁설’(the theory of ‘transformation’)에 따라 윤리적인 관점에서 토착화 신학의 길을 모색한다.
박봉배는 우선적으로 윤리학적인 견지에서 기독교를 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다양성을 간과한다. 민경배와는 달리 그는 한국에 온 초대 선교사들이 어떤 유형의 신앙을 가졌는지 묻지 않고, 한국의 기독교 신앙을 교회 전통이나 기독교의 보편성(ecumenicity)에 비추어 보지 않고 단지 한국의 문화 윤리에 비추어 본다. 한국 기독교인의 신앙이 한국 재래 종교를 통하여 규정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리하여 박봉배는 한국의 기독교인을 두 유형으로 구별한다. 유교를 배경으로 한 신앙의 유형, 불교와 샤머니즘을 배경으로 한 신앙의 유형으로 구분한다. 전자는 말하자면 정치와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참여하는 반면에, 후자는 피안적 신앙을 가져 은둔이라고 한다.
그런데 교회사를 이와 같이 어떤 특정한 도식에 맞추어 보아서는 결코 그 온전한 양상을 볼 수 없다. 리처드 니버가 기독교 역사 혹은 서양 역사를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 혹은 그 관계에 대한 이해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 것부터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여하튼 박봉배의 논문은 본격적인 교회사는 아니고 한국 기독교의 성장을 문화 윤리 면에서 본 논문이다.
선교사 간하배(Harvie M. Conn)는 <신학지남>과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에 1966년에서 1968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1945년까지의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인 발전에 대해 서술하였다. 주로 보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논쟁과 대결을 다루고 있어서 선교적인 면, 즉 교회의 외면적인 성장이 아니라 교회의 내면적인 생활, 즉 신학을 충실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1972년에 출판된 민경배의 <한국기독교회사>는 ‘토착화 신학’에 부응하는 교회사 저서로서, 한국인이 쓴 최초의 한국 교회 통사란 점과 ‘민족교회’ 확립이란 사관에서 쓴 책이란 점에서 가치가 있다. 민경배는 종래의 교회사가 모두 선교적인 관점이라는 불만을 표시하면서 백락준의 저서도 역시 그런 범주에 속한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옳은 말이지만, 백락준이 취급한 1912년까지의 시대성을 감안하지 않은 것 같다. 다시 말하면, 한국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 교회가 서고, 노회와 총회가 조직되던 당시의 시대성을 감안할 때 누구든지 선교사적인 관점에서 쓸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간과한 것 같다.
민경배는 소위 외국의 ‘선교 팽창주의’의 관점을 탈피하고 민족의 주체성을 찾는 ‘민족교회’의 역사를 쓴다고 말한다. 민경배의 저서는 한국 내의 자료를 동원하여 한국어로 쓴 한국 교회사로서, 토착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교회사 분야에서 이룩한 하나의 기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흔히 말하듯이 너무 이러한 강한 주관성 때문에 신학적인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먼저 도대체 ‘민족교회’란 개념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정당화하며 평가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새로운 민족주의(Neo-nationalism)가 20세기 후반세기를 접어들면서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추세가 되었는데, 우리 국내에서도 유신정권에 의하여 민족주의가 고양됨과 동시에 민족문화의 진흥 정책이 수반되었으며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개념까지 도출되었다. ‘민족교회’란 말은 많은 한국의 교인들이 단순한 애국심에서 비판 없이 수납하는 말이지만 ‘민족교회’의 신학적인 타당성은 먼저 따져 보아야 할 일이다.
민경배는 역사 기록에서 민족적인 감정과 민족을 지나치게 앞세운 나머지 외국 선교회를 ‘민족교회’ 설립을 저해하는 요소로 보는 경향이 매우 짙다. 1974년에 출판된 그의 <민족교회형성사론>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욱 드러난다. 예를 들면, 그는 선교사들이 영적인 운동이나 부흥 운동을 통하여 민족교회로 형성되려는 한국 교회를 비정치화하고 비민족화하였다고 비판한다. 한국에 제일 먼저 온 선교사들이 경건주의적, 청교도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라고 규명하면서 이것이 ‘종교심이 강한’ 한국인의 심성에 맞았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경향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손명걸은 1974년에 쓴 박사학위 논문에서 역시 한국 교회의 정체성을 찾는다. 이 논문은 1930년부터 1970년까지의 한국 교회사를 기술하면서, 특히 신학자들과 그들의 사상을 자상하게 쓰고 있다. 손명걸은 민경배의 견해를 비판하면서도 한국 교회의 주체성을 교회사 이해의 규범으로 삼는다. 그래서 30년대에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에서 경고를 받았던 이단들의 활동들을 주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평가한다.
1978년의 이영헌의 <한국기독교사>는 민경배의 <한국끼독교회사> 이후에 출판된 또 하나의 우리말로 쓴 충실한 ‘한국 교회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의 역사를 비롯하여 이단적인 종파 운동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기술한 것은 책명대로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기술하려는 의도에 충실하려고 한 것인 줄 안다. 그러나 6.25당시의 군대 이동과 무기의 수 또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막후 외교 등 상세한 점까지 기록한 것을 보아서는 그의 교회사관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교회 역사의 주변 사건들을 자상하게 기록하면, 교회사 기술에서 정작 무엇을 중요시해야 하는지 독자들로 하여금 분별하기가 어렵게 만든다.
민중신학의 한국 교회사 이해
민중신학에 근거한 한국 교회사가 이렇다 할 단행본으로 나온 것은 없으나, 민중신학이 특이한 교회사 이해를 제시하기 때문에 교회사 방법론을 모색하는 데는 그 교회사관을 한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민족과 외세와의 관계에서 민족의 자주 정신을 찾고 한국 교회의 자주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선교사들의 활동을 식민주의와 혼동하고, 한국 기독교회사를 기독교 교회의 역사적인 전통에서 단절시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복음의 선교와 교회의 성장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신학과 선교 이해에 테두리에서 보는 것이 좋다.
그러나 민중신학의 교회사 이해는 ‘민족교회’ 사관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전통적인 신학과 교회관을 이탈하며 이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전통을 존중하는 신학적 입장에서는 민중신학이나 민중사관에 근거한 기독교사관을 두고는 대화할 수 있는 공통적인 근거를 찾을 수 없어서 난감하다.
민중신학은 기독교 복음이 역사적으로 사회에서 소외되고 권력층에 억눌리고 지배를 받아 온 민주으이 해방과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한국적인 상황에서 발전한 정치신학이다. 민중신하그이 발전을 위하여 70년대 말에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구약과 신약, 특히 마가복음서의 교회사뿐 아니라 일반 역사에서도 민중신학을 뒷받침할 수 있는 말이나 사건들을 인용하여 민중신학의 타당성을 논증하려고 한다.
민중신학에서 성경이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구원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밝히는 점에는 공감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가 민중에게 눈을 떠서 가난한 민중을 돌보아야 한다는 강한 신학적인 외침도 그러한 역할을 다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민중신학에서 성경의 진리를 민중의 정치적인 구원이라는 초점에만 맞추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앞으로는 민중신학의 조직신학적인 체계를 갖추도록 발전해야 한다고도 하는데, 전통적인 신학의 내용을 거부하면서 그러한 신학적 체계를 답습하는 것은 모순이다.
민중신학이 정치신학이라면, 그것은 심일섭이 지적한 바와 같이 어디까지나 상황신학으로서의 성격과 한계성이 있고, 민중신학이 그 한계성을 자인할 때만 조금이나마 신학으로서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눌리고 가난에 시달려 온 민중이 그러한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인 해방 운동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퇴폐적인 도덕생활에서의 해방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민중은 선각자의 지도나 선동에 따라 정치적인 해방운동의 주체는 될 수 있어도, 도덕이나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교화의 대상일 뿐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징표를 말씀 선포와 성례 집행이라고 말하며, 개혁교회에서는 거기에다 권징을 덧붙여 말한다. 백성을 깨우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결하게 살도록 하는 교회의 역할은 변함없이 수행되어야 한다.
민중신학에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민중의 정치적인 구원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성경 말씀을 취사선택하게 되고, 또한 선택한 말씀에 대해서도 보편타당한 해석을 전적으로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민중을 강조하고 미화한 나머지 사회의 모든 계층을 포괄하는 백성이라는 개념을 기피한다. 그래서 ‘백성’(히브리어로 am, 헬라어로 laos)이란 말보다는 구약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anawim)과 마가복음의 ‘오클로스’를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군중’이라는 뜻 이상의 ‘민중’으로 이해한다. “마가는 민중이라는 개념 내용이 필요했는데 다른 말이 없어서 ‘오클로스’라는 단어를 빌려 썼다고 말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견강부회식의 신령주의적(spiriualistic)인 성경 이해를 시도한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오클로스’란 말의 어의학적인. 뜻을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민중신학의 민중사관은 사회, 경제사적인 관점에서 사회를 구성하는 계층을 지배하는 권력층과 가난한 피지배층인 민중으로 이분하고 역사를 양자의 대립관계에서 보는 점은 역사의 발전을 유산자와 무산자의 대립관계로 보는 유물사관과 비슷하다. 민중신학에서는 ‘민중’이 프롤레타리아 개념과는 다르고, 민중신학의 지향점이 역사의 지평을 초월하는 종말론적이라는 점에서 무산자의 독재를 전제로 하는 유물사관과는 구별된다고 하는데, 역사의 주체 파악은 별로 다르지 않다. 민중신학은 기독교를 민중에게 자유와 평등과 인권을 쟁취하는 힘과 희망을 안겨 준다는 점에서 가치를 부여하고 상대화한다. 말하자면 민중에게 힘과 희망을 주는 종교라면 어떤 종교에서든지 신학적인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서남동은 하나님 나라와 천년왕국을 두 개의 대치되는 개념으로 보고, 하나님 나라가 피안적인 면을 강조하는 반면에 천년왕국은 현세의 연장에 역점을 두는 것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천년왕국에 대한 신앙을 재평가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콘스탄틴의 기독교에서, 아니 그 이전에 이미 비정치화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민중은 역사의 피안을 상징하는 천국보다는 역사의 장래에 있을 역사 변혁적인 천년왕국이라는 상징을 불가피하게 내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역사적인 기독교는 천년왕국 신앙과 거기에 준한 미래에 대한 갈망의 여러 변형들을 이단으로 정죄함으로써 민중의 갈망을 눌러 버린 것이라고 하면서 기독교 역사에 있었던 천년왕국 신앙을 강조하던 신령주의적인 운동에 가치를 부여한다. 이러한 논의에 따르면 서양 교회가 전통적으로 이해한 복음은 비정치화된 복음이다.
주재용은 한국 기독교사를 민중사관의 견지에서 5개의 기간으로 나누어 본다. 제1기는 1876년에서 1896년까지로 기독교가 민중에게 수용된 시기, 제2기는 1896년에서 1919년까지로 반봉건 반식민지 투쟁에서 민중의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한 시기, 제3기는 1919년에서 1932년까지로 민중의 삶의 현장에서 멀어져 가면서 계몽에 힘쓴 시기, 제4시기는 1932년에서 1965년까지 반민주적인 치욕의 시기, 즉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했으며 전래된 신학의 노예가 되고 교권의 노예가 된 시기, 제5기는 1965년 이후 민중의 교회로서 자기 정체를 다시 찾고, 선교적 사명을 재인식하기 시작한 시기로 구분한다.
그는 한국에 전해진 기독교의 수용과 성장을 민중의 정치적인 의식과 활동을 위한 것이며, 그 의식의 발전으로 본다. 민중신학에서 교회의 주체를 민중으로 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학적인 개념을 민중이라는 정치, 사회학적인 개념으로 그냥 대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러한 관점에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부르심을 받고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새 이스라엘이라는 개념이나, 복음이 미미한 데서 시작하여 점점 크게 자란다는 복음서의 비유가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나 교회 성장의 개념,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즉 교회다운 교회로 지어져야 한다는 개념은 전제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민족교회’사관에서도 그렇지만 민중사관에서도 한국의 초대교회를 처음부터 의식화된 성장한 교회로 보려고 하거나 기대한다. 교회의 구성원을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젖먹이의 상태에서 새롭게 자라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지 않고, 복음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민중을 교회의 주체로 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민중신학에서는 교회의 주체를 민중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고 하다가 제사장들의 충동을 받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지르는 폭도로 돌변하는 ‘오클로스’가 교회의 주체일 수는 없다.
민중신학이 한국적인 상황에서 민중의 해방과 구원을 위한다는 정치신학을 위하여 기독교 교회 전통적인 복음 이해와 교회관을 철저하게 전도하고 거부하는 것은 너무 많은 값을 치르는 일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이해한 복음 전파로 교회가 서서히 자라 왔고, 기독교 인구가 증가해 왔으므로, 기독교를 민중의 것으로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를 있게 한 전통적인 복음 이해와 교회관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는 없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민중신학도 설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