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病院)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틑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거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
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나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작품해설
이 시는 연희전문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40년에 쓴 작품으로, 어느 병원의
정경(情景)을 통하여 병원에 입원한 환자처럼 폐쇄된 공간 속에서 극한적인 삶을
살아가던 당시의 지식인들이 겪는 고뇌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서
‘병원’은 화자의 고독한 내면세계이자, 당시의 암울한 현실 상황을 상징하는 것으
로, 「또 다른 고향」의 ‘방’과 상통하는 공간이다. 한편 환자로 등장하고 있는 ‘젊
은 여자’는 화자와 동일시된 인물로, 그녀는 고통스런 현실 때문에 가슴앓이를 앓
고 있다.
3연의 산문시 형태로 이루어진 이 시는 대상의 이동에 따라 시상을 전개시키는
한편, 현장감을 주기 위해 현재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특히 묘사에 의한 시작적
이미지가 돋보인다.
1연은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병원을 제시하는 동시에 병원 뒤뜰에 누어 일
광욕을 하는 ‘가슴앓이’여자 환자를 보여 준다. 그녀가 앓고 있는 ‘가슴앓이’는
단순히 병명(病名)을 뜻한다기보다는 암담한 식민지 현실 상황에서 시대적 고뇌
를 겪는 마음의 병이라 할 수 있다. 면회객은커녕 나비 한 마리 찾아 주지 않는,
고독한 그녀가 누워 있는 살구나무 아래에는 바람조차 불어오지 않는다.
2연에서는 화자가 같은 병원을 찾는다. 현실 상황에 대한 괴로움으로 인해
오래도록 고통을 당하던 화자가 병원을 찾지만, 늙은 의사는 화자의 병명을
모를 뿐 아니라, 도리어 병이 없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현실적 ‘시련’과 ‘피로’로
말미암아 여전히 고통을 겪고 있는 화자로서는 ‘성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며
자신이 고통을 받고 있는지 모르는 의사의 말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3연에서는 화자가 자신과 여자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화단에서
금잔화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로 들어가는 여자의 모습은, 1연에서 일광욕을
하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절망적인 현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갖는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자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보는 화자의 행위도 동일한
의미로 볼 수 있다.
[작가소개]
윤동주(尹東柱)
1917년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출생
1925년 명동소학교 입학
1929년 송몽규(宋夢奎) 등과 문예지 『새 명동』발간
1932년 용정(龍井)의 은진중학교 입학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
1936년 숭실중학 폐교 후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전입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
1942년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과 입학, 가을에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전학
1943년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
1945년 2월 16일 큐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
시집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유고시집, 1948), 『별을 헤는 밤』(1977),
『윤동주 시집』(1984), 『윤동주자필시고전집』(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