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그 성취
비로해 채상희
간절한 마음으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합니다. 새해를 맞이한 것이 바로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봄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조금은 설레이고, 흥분되어 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불자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삼세가 구분되질 수 없으며 오로지 모든 존재는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되어질 것입니다. 이는 오고 감이 둘이 아니며 종국에는 하나로 귀결되어진다는 근본이치를 바르게 보는 것이 우리네 불자들의 마음가짐이 되었으면 합니다.
청화 큰스님의 원력에 힘입어 성륜사 서울 ,경기지역 포교원 광륜사의 개원을 축하드리며 그에 걸맞은 불교 통합 잡지로서 광륜지의 탄생을 거듭 축하드립니다.
아울러 제게 이러한 기회를 주신 부처님께 합장 삼배 올립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경전 등의 해석은 여러 큰스님들이나 학계의 교수님들의 영역이라 사료되어 감히 언급을 피하오며 오로지 부처님을 믿으며사랑하고기도 정진하는 불자로서 그 동안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입은 부처님의 무장무애한 가피력을 진솔하게 여러 불자님들에게 알리어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조금이나마 활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감히 몇 자 적어 봅니다. 혹여 제가 너무 무속적인 가피력 위주로 몰고 간다고 우려의 목소리도 있으리라 여깁니다만 모든 종교의 근본 목적은 인간의 행복이라 여기며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우리 인간이 편안하고 건강하게 살며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는 것을 그 기본으로 한다고 보겠습니다. 물론 이는 초보적인 단계의 종교생활이지만 대부분의 시작은 그 곳에서 전개되어질 것 입니다. 그 다음의 공부는 자신의 근기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무수히 많이 일어난 가피력이나 느낌을 어떻게 하나 하나 이야기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조금 힘이 들더라도 일어난 순서대로 자세히 이야기하려 합니다.
제가 청화 큰스님을 뵙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2001년 7월의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그 날은 일요일이었으며 전날 타 사찰에서 몇몇 도반들과 함께 3000배를 철야정진하고 새벽녘에 집에 돌아 왔습니다. 항시 많은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지내는 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를 켰으며 그 날은 조계사 대중에게 법문을 하신 동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컴퓨터를 보는 순간, 어쩌면 …이럴 수가…
전 속으로 밤새 잠을 못 잤더니 내가 헛깨비가 보이나…
내 눈이 잘못되었나(?)하며 눈을 비비고 세수를 하고 보아도 큰스님의 모습에서는 노오란 광채를 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의 몸에서 노오란 빛을 발할 수 있을까?
법문을 하시는 시간 내내 스님의 몸에서는 금빛 자금광이 반짝이시고 있었으며 전 무한한 환희심에 가슴이 울먹거렸습니다.
아! 스님께선 살아 계시는 부처님이시구나…
그 날, 그 일이 있은 후, 전 곧 조계사로 전화를 걸어 큰스님의 거처를 알 되었고 매달 서울에서 내려가는 버스에 몸을 실어 성륜사 정기법회를 다 게 되었습니다.
차후에 안 일이지만 큰스님의 수행정진의 힘은 가히 금빛 자금광을 발하실만큼 대단한 것이었으며 저 비로해는 그 법력에 머리 조아려 경배 드립니다.
큰스님과의 만남은 이렇듯 특별한 것이었고 지금도 집에서 스님의 법문 과 책, 테이프를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전 지금부터 약 23년 전, 1979년 대학 1학년 때, 고 광덕 큰스님을 인연으로 대각사의 불광법회를 찾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불교에 입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전 결혼을 하였고 간간히 함께 부처님의 말씀도 나누고 하던 도반이자 선배가 스님이 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남몰래 마음에 두고 있던 후배가 결혼을 하자 생에 무상을 실감하고 산 속으로 들어갔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
항시 그분이 따스하게 대해 주시며 유난히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전 참으로 기가 막혔으며 심한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전 한동안 절에 다니는 것을 포기하였으며 그저 가정생활에 충실하며 큰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 큰 아이가 6개월 되는 어느 날 밤, 전 꿈에 영월 사자산 법흥사를 저의 남편과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평시에도 그 곳을 간간이 참배하였으며 수련회도 하였고 해서 그 곳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연히도 그날 밤 꿈에 그 곳을 다시 찿았으며 그 날 바로 그 곳 주지 스님께서 열반을 하셨다고 듣게 되었습니다. 또한 스님을 언덕 위의 동굴에다 안치하여 놓으셨다고 하시며 그 곳을 엄격히 통제 하셨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곳을 터벅터벅 내려 오다가 전 그 특유의 끼가 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니, 내가 평상시도 아니고 스님께서 열반을 하셨다고 하시는데 그냥 가면 되겠어? 인사라도 하고 스님을 한번 뵙고와야지.'하는 마음이 강하게 들어 남편에게 '나, 동굴에 다녀오려고 하는데 자기는 어떻게 할래요?' 하니 '못 들어가게 하는데 어떻게… 그냥 가지.'하더군요. 전 '나 혼자라도 다녀 올 테니 자기는 그냥 있어요.'하고 냅다 뛰어 갔습니다. 그 깊은 산 속에 젊디젊은 여자 하나가 뛰어 올라 가니 남편의 입장에서는 뒤따라 올 수 밖에요 동굴 속으로 몰래 잠입을 하여 들어가는데 열반하신 스님께서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나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어! 스님께서 돌아가셨다더니 …거짓말인가? ' 하고 보니 그는 다름 아닌, 6개 된 저의 아들이었습니다. '얘는 서울 집에 내가 두고 왔는데…너 왜 여기서 나오니? 하며 아이를 받는 순간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지는 듯 우뢰와 같은 '꽝' 소리가 귀에 들렸습니다.'전 순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기절하여 까무라칠 것 같았습니다 .
그 당시의 아이들은 엎드려 키우는 것이 상례이었는데 배밀이를 한창 하던 아이의 머리 옆, 벽에 걸어 놓은 전지 하나 짜리의 액자가 떨어져 시멘트에 박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귀 바로 옆에 액자가 닿아 있었다고 하면 정확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또한 유리 하나 깨지지 않았으며 아이는 그대로 편안한 상태로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이런 일이 일어 날수 있을까요? 만약 조금만 비켜서 떨어 졌더라면, 아이의 머리는… 아니 그냥 떨어져 유리라도 깨어졌다면…전 벌떡 일어나 정신을 차리고 곧 '관세음 보살'을 염했으며, 부처님, 잘못 했습니다. 제가 당신을 너무나 멀리 떠나 왔던가 봅니다. 이러한 기회에 당신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제게 주셨습니다. 너무나 많이 당신께 잘못을 하였습니다. 어리석어 옹졸하였던 저에게 이처럼 확연히 보여 주시니 , 제가 이 은혜를 어찌 잊을수 있으오리까?
사랑하는 우리 아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차후에 안일이지만 1986년 8월~9월 그 때의 주지 스님께선 그 당시에 열반 하셨다고 들었으며 전 더욱 새삼스럽게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 그 일이 있은 후 전 법흥사에 연등을 켜는 것은 물론 아이의 인등을 지금도 계속 켜고 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저의 신앙 세월은 계속 되었고 전 집에서 아이들 수학을 아르바이트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과외 금지 조치 내지는 경제의 혼란 등 여러 가지 사회 현상들이 많이 있었지만 전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고 저의 일을 원하는 그 이상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자만이 극에 달하였던지 큰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3월 2일!
전 또다시 커다란 시험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아이는 어려서부터 태권도를 배웠던지라 3품(단)이었는데 그 날 오후 사부님과 겨루기를 하다가 그만 다쳐서 빗장뼈가 산산조각이 나서 살을 뚫고 나오는 커다란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제게 태권도 도장에서 날라 온 기가 막힌 이야기, '민우 어머니, 민우가 많이 다쳤는데 데리고 가세요…'전 하던 일을 다 물리치고 태권도 도장에 닿으니 우리 아이는 오른쪽 어깨가 축 늘어져 있으며 아파서 팔팔 날뛰고 있지 않겠습니까? 오! 세상에 이럴 수가…아이는 곧바로 삼성병원으로 옮겨졌으며 뼈가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고 살을 뚫고 튀어 나와 형언할 수가 없었으며 6명의 정형외과 의사 선생님들은 아이를 보며 자기들이 본 이래 이런 환자는 처음이라면서 어떻게 이렇게 다칠 수 있느냐고 걱정을 하시는 소리를 듣고 전 털썩 주저앉아 울고 말았습니다. 아프다고 팔딱거리는 아이를 의사들은 꽁꽁 묶어 놓고 사진을 찍고는 수 차례 의논을 하더니 수술을 하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튀어나온 뼈 때문에 달리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대로 두면 살이 썩어 들어가기 때문에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고, 허지만 수술만이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후 전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뼈와 뼈들을 볼트, 넛트로 연결한 후 두 달 후에 다시 재수술을 하여 빼어 내는데 80%정도는 뼈가 붙지 않는다고 걱정을 하였으며 이 아이의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이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공할 수 없는 수술을 하여야 하며 하지 않으면 살이 썩어 들어간다니…세상에 이러한 날벼락이 어디에 또 있으랴…
나의 아이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사랑하는 아이를, 어쩌면 이럴 수가…
전 마구 울었으며 여기에서 안되면 미국이든 어디든 데리고 가서 우리 아이를 고쳐 달라고 저의 남편에게 소리를 질렸습니다. 이럴 수는 없어, 이럴수는없다고…
아빠는 병실에서 아이를 돌보았으며 전 끌려 나오다시피 병실을 나서며 어린 둘째 아이가 있는 집으로 하는 수 없이 돌아 올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딸아이는 오빠 어떠냐고 울고, 전 기가 막혀 울고 아수라장이었으며 그 순간부터 전 '부처님,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제 목숨과 도 같은 나의 아이를 위해 제가 대신 받겠습니다.' 울며 불며 전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밤새워 지송 하였으며 눈물에 콧물에 기진맥진하며 '나모라 다나 다라 야약 나막 알약 살려 주세요 부처님 도와 주세요 부처님,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도와주세요.' 엉엉 울어 가며 염불 아닌 염불을 하였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둘째 아이는 옆에서 뒹그러져 자고 있고 날은 훤히 밝아 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전 집에서, 아빠는 병실에서… 우리 두 사람은 오직 일념으로 큰 아이를 살려달라고 부처님께 매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후 4시가 수술 시간인지라 의사들은 아이에게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실로 데리고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오, 신이시여! 신이 계시다면 부처님도 예수님도 하느님도 그 어떠한 절대자도 좋습니다. 제발 도와 주세요. 제 몸에 살점이 덜어져 나가는 고통이요, 피가 타 들어가는 그 많은 시간들을, 어째서 제게 이러한 고통을 주시옵니까? 보호자 대기실에 우린 나란히 앉아 다라니 염송을 하였으며 그러던 중 비몽사몽간 부처님의 모습이 보이시며 너무나 불쌍하다는 듯 저를 쳐다보시고는 지나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전 속으로 '그래, 수술은 잘 되려는가 봐' 하며 남편을 바라보니 남편 역시 보았다 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8시경에 아이는 병실로 옮기어 졌으며 9시경 회진하시는 선생님께서 기가 막힌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를 전신마취를 시킨 후 수술실에 들어가 메스를 대려 하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다시 한번 맞추어 보지'하는 소리가 들렸답니다. 혹시나 해서 뒤를 보니 아무도 말한 사람이 없었으며 다시 또 대려 하니 똑같이 그 이야기가 들렸답니다. 원래 정형 외과 의사들은 뼈를 맞추고 주무르고 해서 치료를 하시기도 하지만 튀어나오고 산산조각이 난 뼈를 어찌 맞출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린 아이이고 후유증도 만만치 않으니 다시 한번 주무르고 땡기고 해서 뼈를 대충 맞추다보니 튀어 나온 뼈가 신기할 정도로 들어 가더랍니다. '오! 부처님이시여…, 관세음이시여..고맙고, 고맙습니다. 당신의 불가사의한 위신력으로 우리 아이를 살려 주셨습니다. 제가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퇴원 후 두 달 동안 아이는 꼼짝을 할 수 없었으며 학교 역시 다니지 못하고 있었지만 수술을 하지 않고 나을 수 있었던 기적에 대하여 전 항시 고마워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중간고사가 다가와 아이는 시험을 치르러 학교를 가게 되었고 마지막시험이 끝나는 날, 또다시 제게 커다란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이 범부 중생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시험을 보고 난 후, 교문 밖에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던 제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민우, 어머니…민우가 많이 다쳤는데 어서 오세요.' '이런 청천벽력이…어디를 다친거야'그 아이는 두손을 제대로 쓸 수가 없는데, 달려가 보니 운동장에 대자로 누어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 숨이 멈추어 버리는 듯 소스라치고 말았습니다.
이야기인 즉 시험이 끝나고 운동장으로 나오는데 축구공 하나가 '도르르' 굴러 오는 것을 보고 두 달이나 집에서 누워 좋아하던 운동도 못하던 그는 '이 때다' 싶어 오른 발을 들어 차는 순간, '뚝' 소리와 함께 꼬꾸라지고 말았다는 웃기지 못할 이야기…전 119의 도움으로 삼성의료원 응급실로 향하였으며 그 곳에 가니 의사 선생님이 '너, 또 왔어? ' 하시는 말씀이…기가 막혔습니다. 아이에게 손을 댈 수가 없었던지 헝겊을 집어넣고 네 명의 사람들이 운반을 하였습니다. 수없이 X-ray를 찍고는 오른쪽 허벅지 고관절이 부러진 것 같으며 CT촬영을 마치고 조금 기다리라고 하시고는 가 버리셨습니다. 마지막 시험인지라 그 전날밤을 꼴딱 새운 아이는 응급시트에 누워서 피곤하였는지 잠깐 잠이 들었던가 봅니다. 전 아이에게 '얘, 정신차려, 사진 찍으러 가자.'하며 아이를 깨웠으며 순간 제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였습니다.
제 진정으로 아이가 미웠으며 '어쩌면 이럴 수가…또 두 달이잖아…' 하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는 제게 아이는 '엄마,나 꿈에 영월 법흥사에 다녀 왔어.' 하지 않겠습니까? 전 시큰둥하게 '넌, 그 사이에 멀리도 갔다 왔구나.' 하며 대답을 하였고 아이는 계속 꿈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엄마,,아빠,동생 모두 없고 나 혼자 였으며 엄마가 걱정을 하실까 봐 전화를 찾았는데 공중전화박스가 없잖아 .그전에는 있었는데…그러던 중 어떤 스님이 나타나셔서 전화 있는데 가르쳐 달라고 하니 이곳은 시골이라 전화가 없어. 네가 걱정이 되면 저위에 부처님이 계시니 그곳에 가서 부처님 사타구니에 손을 대고 '엄마,나 여기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하면 너의 엄마가 아실꺼야.'하시더랍니다.
저의 아이가 그곳에는 부처님이 아니 계시는데 하며 반문을 하니 그 스님께서 손을 잡고 법당까지 가셔서 문을 활짝 여시더랍니다. 그러자 아이 말이 누우런 부처님이 빨간 방석 위에 앉아 계시는 모습이 보였으며 그는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 부처님 사타구니에 두 손을 얹고 마음속으로 '부처님, 저 잘 있으니까 우리 엄마에게 전해 주세요…'하는 찰나에 제가 깨웠다는 것입니다.
전 순간,'민우야, 너 일어나 봐.'하니 아이는 쩔쩔 매며 '엄마 ,나 못 일어나' 불과 5분,아니 3분전에 들것에 실려온 아이가 일어난다는 것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전 아이에게 일어 날 것을 종용하였습니다.
'너, 다 나았어. 일어나도 돼. 얼른 걸어 봐' 하는 이야기가 믿기지 않은 듯 망설였으나 급기야 아이는 일어나 제법 멀리에 있는 화장실까지 다녀오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놀란 의사들이 뛰어 왔으며 옆에 있는 환자들도 눈이 휘둥그레 졌으며 X-ray상 우리 아이는 고관절이 부러져 기부스를 하고 8주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실제 상황은 그와는 너무나 다르게 유유히 걸어서 집으로돌아 왔습니다.
불자 여러분, 이렇게 믿기지 않는 일들이 저의 집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저의 가족은 항상 부처님께 감사 드리며 함께 한다는 믿음으로 열심히 기도 정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시련의 끝은 아니었는지 믿음을 더욱 돈독히 하게 하심이셨는지 2000년 제게 커다란 시련이 다가 왔습니다.
그 해 봄, 전 삼성의료원에서 유방암 판정을 받았으며 양쪽에 종양이 4개씩 생겨서 절제하기도 그렇고 치료를 해 보아야 할 것 같다는 비극적인 통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두 아이에게 초유 한 번 먹이지 못한 저는 항시 유방암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드디어 이런 일이 벌어 졌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전 …당황 하지도 놀라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아프다는 이야기는 비밀로 하였으며 만일 저를 지극히 아끼는 남편이 안다면 그에게 너무나 가슴이 아픈 일이고, 부모님께 ,아이들은 …여러 가족에게 아픔과 걱정만을 끼칠 것 같다는 생각에서 저 홀로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전 치료에도 그렇게 커다란 의미를 두지 않았으며 '부처님, 삶에 커다란 애착은 없습니다. 사는 그 순간 그 날까지 저의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 후로 전 매일 절을 500 배씩 하였고 건강이 허락 하는 그 날까지 할 것이라 마음먹었습니다. 또한 의식이 있는 시간에는 다라니에, 관음정근에, 매사에 더 적극적이며 남을 위해 봉사하고 동분서주하며 다니는 것이 도량이요, 입에서 나오는 것이 염불이요, 눈으로 보는 것이 부처님 경전이며, 스님네 설법이었습니다. 전 이제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으며 다만 아이들과 부모님께 제가 하던 일을 더욱 열심히 하였습니다. '살아오면서 열심히 일했고 돈을 벌었지만 난 한푼의 세금도 내지 않았지. 나라에 내는 것도 세금이지만 어렵고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것도 세금이 될 수 있는 거야. 이제 남은 나의 삶은 그들을 위해서 내게 남은 물질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에너지를 나누는 것이야. 이것이 진정한 보살의 회향인 것이야.' 전 여러 사찰의 불사에남은 사랑을 나누기에 바빴습니다.
제 자신이 환자라는 것도 잊고 전 그저 오늘 눈을 감아도 내일 후회하지 않는다는 일일행의 철칙으로 그 날, 그 날을 최선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순간순간 문득 찾아오는 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으며 왜, 내게 이러한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에 대해 부처님께 반문하며 원망을 하였으며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좋은 세상에…아직 난 40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나의 아이들은, 나의 사랑하는 남편은… 어떻게 내가 죽을 수 있어' '이것은 말이 되지 않아' 하며 항거도 하여 보았지만 어떠한 거대한 절대자의 힘에 전 어쩔수 없이 끌려가야만 하는 처절한 상황이었습니다. 오로지 전 '그래, 난 나대로 살 거야 기도하다 죽으면 설마 왕생극락 하겠지', ' 만공 스님 좀 봐. 열반 하시는 날, 거울 앞에서 '나 이제 자네를 떠나려 하네. 자네와 꽤 오래 지냈지? ' 하시며 자신의 생사를 결정 하시잖아.난 불자인데 생과 사를 초월해야 하는 거야. 어느 큰스님 말씀이 죽음이란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이고, 렌트카를 버리고 새 것으로 바꾸는 일이랬어' 새 예쁜 드레스 ,새 차 좋은 것이야 하나도 걱정할 것 없다고…하며 더욱 저 자신을 탁마하여 갔습니다.
그러던 중 2001년 1월1일 새벽 두 시, 전 깜작 놀라서 잠에서 깨었으며 꿈인즉 너무나 해괴하고 망측해서 감히 입에 담을 수 없었습니다. 전 마음속으로 내가 이렇게 음탕한 마음을 품고 있었는가 하며 너무나 창피하였으며 못내 마음이 걸렸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에 제가 갈색의 가운을 입고 부처님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법당문이 열리고 스님 한 분이 가사 장삼을 수하시고 제 앞으로 다가오시더니 저의 두 가슴을 칼로 후벼파듯이 잡아 당기셨습니다.. 전 깜짝 놀랐으며 너무나 세게 잡아당기심으로 눈물이 번쩍 났습니다.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고 전 아이들을 깨워서 1월 1일 새벽 예불에 참석하고 부처님께 신년의 인사를 드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병원에서 사진과 초음파를 받고 의사 선생님과 저는 깜짝 놀랐으며 저의 가슴에 있던 종양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믿기지 못할 이야기, 의사 선생님은 이럴 수는 없습니다 하시며 재 검진을 의뢰하셨고, 제 삼,제 사 검사를 하였지만 저의 건강상태는 정상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6개월 후에 다시 검사를 하자고 하셨으며 전 작년 4월,7월에 다시 검사를 하였지만 정상이었던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께선 제게 다른 사람들과 같이 1년에 한번씩 검사를 하셔도 된다고 판명하셨으며 전 이제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라 죄의 자성 본래 없고, 병 또한 원래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마음이 죄도 병도 그 모든 것을 짓고 만든다고 하신 것이 어찌 하나의 그릇됨이 있으리오. 제법공도리諸法空道理에서 본다면 이 모든 것이 꿈 같이 존재하는 것이지 실상은 없는 것입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 본래 한물건도 없으며 다만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진여불성眞如彿性만이 상주불멸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으며 이루 나열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불,보살님들의 가피는 참으로 대단하신 것이었습니다. 전 남은 삶을 다시 태어 난 것과 같이 살 것이며 지금도 역시 부처님을 떠난 저의 삶은 없습니다.
진정으로 삶 자체를 모두 놓아 버리고 자신의 갈 길을 찾았을 때 우리는 이미 부처님과 한 몸이 되어진다는 것을 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제가 돈을 버는 것도 저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애쓰기 위해서이며 저의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된다면 남은 시간들을 사회를 위해서 소외된 계층과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을 받으며 사시는 장애인이나 연로하신 노인들을 위해서 남은 에너지를 쓸 것이며 병들고 연로하신 스님네들을 위해 불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는 어쩌면 의무일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의 꽃이라고 하는 화엄경을 보면 불자들이 궁극에 가서는 보현행원을 함으로서 그 극점에 도달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올바른 행원만이 우리 불자들이 가야 할 참다운 길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경전의 공부, 염불, 참선, 그 모든 도리도 좋지만 어렵고 힘든 이웃에게 따스한 말 한마디 건넬 수 있으며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참 불자가 아닐까요? 구구절절히 나열한 이야기들이 혹 여러 불자들에게 어떻게 느껴졌는지 모르지만 제겐 커다란 의미가 있는 사건들이며 이는 부처님의 커다란 채찍질이라 여기며 만약 제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무 부족함 없이 살아온 저의 아상은 하늘을 찔렀을 것이며 오만과 자만에 빠져 남들을 경외시 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버금가는 경책으로 부처님께선 저를 담금질 하셨으며 가장 사랑하는 나의 아이를 급기야는 제 자신의 몸까지 담보로 저를 문책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어리석은 중생이 오만의 눈이 띄어 고개를 숙일 수있게 되었으며 한걸음 부처님 곁에 다가갈 수 있었으며 제가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확연히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부처님이시여. 대자대비 관세음이시여. 제가 이제 목숨 바쳐 부릅니다. 자비하신 관세음 이시여…
목숨바쳐 부릅니다
자비하신 관음이시여!
온 우주에 충만 하시고 원융무애 하신 나의 사랑하는 님, 관자재 보살이
시여…
우러러 사모하옵나니 님이시여,
어여삐 여겨 당신의 사랑으로 인도하소서…
당신으로 인해 제 생명 탄생하오며 찬란한 그대 광명, 어둠세계 밝히시며 육도 중생의 어버이이신 관음이시여!
당신의 그윽한 천안으로 우리 중생을 천파만파 고통의 바다에서 이끌어 주시며 당신의 자애로우신 천수로 우리를 살포시 보듬어 주소서.
당신의 상큼한 향내음으로 우리 중생의 본 면목이 확연히 밝아지오며 당신을 부르는 간절한 그 한 마디 '관세음 보살'로 다겁생래 지은 업장 모두 소멸되어지이다.
천겁, 만겁 떨어지는 낭떠러지에서도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 여의허공주라 순간 순간 꽃 피우게 하소서.
나의 본성 진실하여 그대 향한 나의 마음 한량 없으며 온 우주 법계에 가득 채운 그대 참 사랑…
…제가 이제 목숨 바쳐 부릅니다.
자비하신 관세음이시여!
그대 금빛 자비광명 온 누리에 비추이소서.
제가 부처님을 만난 것이 더 없는 행복입니다. 제가 불자라는 것이 최상의 기쁨입니다. 세세 생생 당신과 함께 하여지이다.
광륜사의 개원을, 광륜지가 불교 통합 잡지로서 그 몫을 다하게 되시길 부처님 전에 기원 드리오며, 모쪼록 큰 스님, 건강하시어 어리석은 우리들에게 지혜의 등불을 밝혀 주시옵소서.
여러 스님들과 사부 대중 모두모두에게 항상 부처님은혜가 함께 하시길두 손 모아빕니다.
광륜지의 탄생에 애써 주시는 불자님들, 거듭 감사 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서가모니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비로해 합장 드립니다.
글 제공 : 편안하게 책을 읽자 【 금수레 불교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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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관세음보살
저 가피를 반드시 모든 불자들에게, 모든 무주고혼 영가들에게, 모든 악업중생들에게,,,,,,,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부처님의 대자비심 정말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님의 글 감사히 잘 읽었읍니다..나무 감사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