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비 여행14 - 이홍장 고가에서 조선의 운명을 죄지우지했던 원세개를 회상하다!
안휘성의 성도 허페이 (合肥 합비) 의 화이허루 淮河路(회하로) 에서 청나라 북양대신으로 조선의
운명을 손에 쥐었던 이홍장 생가 (李鸿章生家), 李部(이부) 를 구경하는데.... 이홍장은
이곳 허페이 (合肥 합비) 사람으로 청(清) 나라 말기에 개혁인 양무운동(洋務運動) 을 제창했습니다.
이홍장은 직례총독겸 북양통상대신 이었으니 중국의 첫 해군 을 창설하고 증국번,
장지동, 좌종당과 더불어 “중흥 사대명신” 으로 일컬어지는데..... 이토
히로부미와 시모노세키 조약 에 조인했고 그외에 베이징 조약 등에 관여했습니다.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한림원에 들어가고는 증국번 에게 유교와 학문 을 배우면서 제자가
되었으며 안휘성 순무 푸지를 지원하여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 중에 한산현과
차오현을 점령 하는 공을 세웠으며 증국번의 휘하에 들어가 군사전략에 대한 지식을 쌓았습니다.
1862년 장쑤순무 로 발탁되어 안휘성 합비등 회군(淮軍) 을 거느리고 태평천국군을 진압하는데
1863년 쑤저우성을 회복하고 1864년 난징 을 공략 하여 12년동안 이어졌던 태평천국의
난을 완전히 진압하는데 공훈을 세웠으며, 그후 염군의 반란을 진압하는데도 공적을 세웠습니다.
그는 회군(淮軍) 을 배경으로 영국과 러시아의 지지를 받으면서 군사공업 건설을 추진하는
양무운동 을 전개해 군사무기를 개발하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중국의 근대화를
앞당기고자 노력했으며 군사강국을 이루기 위해 북양해군 (北洋海軍) 을 창설하였습니다.
독일과 영국 장교들이 이홍장의 북양군 을 훈련시켰으며 서양에서 들어온 무기와 기술을 이용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손에 쥐고는 무기와 탄약을 만드는 군수공장 을 설립하고 회사와 공장을
세웠으며 서적을 번역하고 신식 학교 를 설립하였으며 미국과 유럽에 많은 유학생 을 보냈습니다.
양무파 관료 를 육성했으며 청말의 외교문제를 장악 하였는데 1882년 조선에 위안스카이 (袁世凱 원세개)
를 파견하여 일본의 진출을 견제 하고 묄렌도르프 등 외국인 고문을 보내어 조선의 내정과 외교 에
깊이 관여하였는데 양무운동은 청나라의 기존 정치제도를 유지한 탓에 근본적인 개혁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1894년 동학군 이 전주 를 점령하자..... 진압할 힘은 없고 동학당에 기득권을 양보하기는 죽기
보다 싫었던 조선은 종주국인 청나라에 원군 을 요청하니 일본군 도 조선에 출병 하는데
6월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 오시마 요시마사 4천명은 조선군 저항 없이 서울에 무혈입성 합니다.
일본군은 7월 23일 30분 전투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 임금을 포로 로 잡아 친일 내각 을 세웠으니
김홍집 친일내각은 근대식 개혁을 실시하는데.... 갑오개혁(갑오경장) 으로 문벌과 신분 계급
타파, 노비 제도의 폐지 와 천민도 성씨 사용, 과부의 재혼 허용, 개국기원 사용, 인재등용 등 입니다.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외고조부 오시마 는 4천명 병사를 인솔해 아산의 엽지초군 3,500명 을 공격하니
청군은 500명의 전사자와 300명의 포로 를 내고 평양으로 달아나는데 일본군 피해는 불과 80명
이라? 또 일본 함대는 7월 25일 풍도의 청나라 군함을 공격해 광을호를 격침시키는데 이때
전공을 세운 도고 헤이하찌로 는 1904년 러일 전쟁 대마도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를 전멸 시킵니다!
일본군은 서울에서 성대한 개선식 을 하고는 다시 평양 으로 진격해 9월 15일 이홍장
의 안휘성 합비 출신 회군 (淮軍) 15,000명을 공격하니 평양성은 쉽게
함락되고.... 청군은 2,000 명의 전사자와 600명의 포로 를 내고 다시 만주로 달아납니다.
일본 해군도 북상해 9월 17일 황해해전 이 일어나니 12척의 일본군함은 이홍장 이 양성한 14척
청나라 북양함대 를 속사포로 공격하니 북양함대는 5척이 침몰하고 6척이 파손 됩니다.
잔여 북양 함대는 여순 으로 달아나는데 일본 함대는 침몰은 없고 4척만 파손 되었을 뿐입니다.
야마가타가 지휘하는 1군은 압록강을 도하 하고 오오야마의 2군은 여순반도에 상륙해 금주를
점령하고는 여순으로 쇄도하여 공격을 시작한지 불과 단 하루만에 여순을 함락 했으며
일본 해군도 산둥반도의 위해위 를 점령해 북양함대를 전멸시키고 정여창의 항복 을 받습니다.
일본군이 천진과 북경을 위협 하고 복건성 팽호도를 점령 하니 중국 본토를 점령할 기세라...
청일전쟁 패배 는 곧 "이홍장의 패배" 이니 그는 1895년 전권대사로서 일본으로 건너가
이토 히로부미 와 협상을 벌여 군비 배상과 영토를 제공하는 시모노세키조약 에 조인합니다.
1896년 청 · 러 밀약과 프랑스와 독일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 할양된 랴오둥 반도를 반환 받았으나 러시아
에게는 만주철도부설권 으로 만주 지배권을 내주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그후 이홍장 은 1896년
러시아를 방문하여 니콜라이 2세대관식 에 참석하였고 유럽과 미국을 순방하고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900년 의화단 궐기가 서양 및 일본등 8개국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 으로 진압되는데 일본군은 8개국
군대의 절반 을 차지했으며..... 베이징 조약 에서 이홍장은 외교 책임자로 노력했으나 다음해에
죽었는데 북양대신 이홍장의 유산은 회군과 북양군의 장교 원세개와 단기서, 서수쟁 등에게 계승됩니다.
그들은 청나라의 멸망후 군벌 을 형성하였으며 중국의 북방을 장악 하였는데..... 이홍장의
후계자 중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은 위안스카이(원세개) 로 그는 쑨원 과 함께
중화민국을 창설하지만..... 곧 배신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만 쫃겨나 죽습니다.
이홍장은 원세개에게 3천 군대를 주어 조선에 파견해 일본에 대항 하는 한편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김윤식에게 일본 견제를 위해 조미 통상조약 체결을 적극 권했으며 친일파 김옥균(金玉均) 을
암살한 홍종우(洪鍾宇) 의 행동을 칭찬하는 동시에 그를 적극 보호해 무사히 조선에 돌려보냈습니다.
그전인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 이 일어나자 이홍장은 원세개 를 조선에 파견 하니 임오군란
을 일으킨 조선군과 전투를 벌여 제압하고는 흥선대원군을 납치 하여 청나라로 압송합니다.
2년 후인 1884년 12월 4일에 조선에서 개화파 김옥균이 주도하는 갑신 정변 이
일어나는데 고종이 개화당에 납치 되자 원세개 는 1,500명을 인솔해
150명 일본군 및 조선 개화당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고종을 구출 하였습니다.
1884년 청국과 프랑스 사이에 베트남 을 둘러싸고 전쟁의 조짐이 보이자 청국은 5월에
서울에 주둔시켰던 3,000명의 청군중 1,500명을 베트남 전선 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그후 8월에 발발한 청불전쟁 에서 프랑스 함대가 청국의 푸젠함대를 격파 하자 김옥균과
박영효, 유길준등 개화파는 일본의 선각자 후쿠자와 유기치 에게서 조언을 받아
청국이 베트남과 조선 2개 전선 을 유지하기는 힘들다고 판단하고는 거사를 준비 합니다.
일설에는 일본의 후쿠자와 유기치 가 갑신정변의 막후 설계자라는 말도 있으니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유길준, 서관범, 서재필등 개화파 는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 을 계기로 불을 지르고 군사를 일으켜
창덕궁을 점거해 고종을 손에 넣고는..... 민왕비파인 온건 개화파 를 처단하고 새 정부 를 수립합니다.
12월 6일 원세개 는 1,500명의 병력으로 창덕궁 을 공격하자 외곽 방어를 맡은 조선군 친군영과 전후영
병사 들은 수십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자 모두 도망쳐 버립니다. 그러니까 사전에 저 병사
들의 마음까지 얻고 준비를 시킨게 아니라 영문도 모른채 동원된 병사들이었기에 사명감 이 없었다는...
제2선의 일본군 200명 은 8배인 청군 1,500명에 조선군 100명 과 대치한채 전투가 벌어지자 후퇴해
버리니 제3선 개화당의 장사와 서재필등 사관생도 합계 50명 으로 청군등 1,600명과 전투라....
개화파들이 실제로 준비한 병력은 저들과 함경도 병력등 150명 에 불과했으니 너무 준비가 없었습니다!
일본군 입장에서 보면 제1선의 조선군들이 이 사력을 다해 전투를 해서 청군의 병력이 다수
손상 되면 전투에 임할 생각이었겠으나, 전투 시작 반시간도 안되어 도망쳐 버리니
청군은 병력 손실이 없는지라.... 8배가 넘는 청군의 상승 기세 를 감당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개화파 는 전투가 불리해지자 일본군을 따라서 인천으로 달아나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도망치니
원세개 는 1882년 임오군란 에 이어 1884년 갑신정변에서도 민씨 정권 을 구해낸 것인데,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개화파가 자기 군대도 마련하지 못하고 일을 벌였으니 실패라?
원세개 는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1885년 석방된 흥선대원군 과 함께 조선으로 되돌아왔는데
이홍장의 명 을 받아 조선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 에 취임하여 서울에 주재하게 됩니다.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장악 하고 일본, 러시아와 경쟁 하였으나 1894년 청일전쟁 에 패퇴한뒤
천진에서 서양식 군대를 훈련시켜 단기서와 풍국장등 북양군벌 의 기초를 마련합니다.
이홍장 생가 가장 안쪽인 4번째 건물이 아마도 주인이 거처하던 내정(內底) 인
정방(正房) 인 모양인데 2층으로 올라가니 그림이며 장식과 가구들이 볼만합니다.
그런데 직원이 나와 갑자기 통제 를 하더니 관광객들이 모여들기로 잠시 기다리니
청나라 당시 복장을 한 사회자와 대인 그리고 딸이 나와 간단한 단막극 을 하네요?
그러고는 옆 건물로 나와서는 정원을 지나 다시 입구와는 다른 대문으로 해서 밖으로
나오는데 이제 여행계획서 상으로는 청황먀오 城隍庙 (성황묘) 로 가야 하는데...
그러고는 다시 “판관 包靑天(포청천)” 으로 유명한 포하공원 호숫가 에 자리한 바오궁츠
包公伺(포공사) 로 가야하는데 시간이 늦었으니 입장 마감시간이 어떻게 될러나?